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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자강회의 회장단과 평의원 명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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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표중의 ①②③은 자강회 조직의 제1기, 제2기, 제3기를 의미하며, 밑줄친 인명은 독립협회의 주도회원을 의미함. 대판총무원(代辦總務員)을 역임한 심의성과 홍필주는 이 표에서는 제외되었음. |
위의 표에서 알 수 있듯이, 자강회조직의 제1기에서 제3기에 걸쳐 자강회의 지도부인 회장단과 평의원을 역임한 인물은 모두 43명이었는 데, 그중 과거 독립협회의 주도회원이 21명으로 전체의 1/2에 육박하고 있다. 그리고 같은 기간에 자강회의 최고지도부인 회장·부회장·총무원·평의장을 역임한 인물은 6명인데, 이들 중 현은(玄櫽)을 제외한 윤치호(尹致昊)·윤효정(尹孝定)·임병항(林炳恒)·장지연(張志淵)·지석영(池錫永) 등 5명은 모두 과거 독립협회의 주도회원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자강회가 독립협회의 맥락을 이은 단체임을 보여주고 있다.
대한자강회는 서울의 본회와 더불어 지방에 지회를 설치했다. 1906년 5월부터 1907년 7월까지 본회에 지회 설립을 신청한 지역은 국내에는 동래(東萊)·고령(高靈)·남양(南陽)·인천(仁川)·평양(平壤)·의주(義州)·삼화(三和)·강서(江西)·여산(礪山)·원산(元山)·영흥(永興)·강화(江華)·단천(端川)·북청(北靑)·철산(鐵山)·증산(甑山)·해주(海州)·직산(稷山)·운산(雲山)·성진(城津)·창성(昌城)·영변(寧邊)·김해(金海)·청도(淸道)·재령(載寧)·영유(永柔)·정주(定州)·제주(濟州) 등 28개소였고, 국외에는 하와이 1개소로 도합 29개소였다. 이중에서 인가가 확인된 지역은 국내 24개소, 해외 1개소로 도합 25개소이다. 국내의 24개 지회의 분포를 보면, 경기도 3개소. 경상도 4개소·충청도 1개소·전라도 1개소 등 남한지역이 9개소이고, 평안도 9개소·함경도 5개소·황해도 1개소 등 북한지역이 15개소이다. 이러한 사실은 자강회의 조직활동에 있어 본회가 있는 서울과 경기도·경상도 그리고 평안도와 함경도가 강세를 나타냈고, 특히 서북지방의 세력이 두드러졌음을 보여 준다.
대한자강회의 회원 구성은 개화자강계열의 인사들이 주류를 이루었다. 그러나 강서군(江西郡) 유림소(儒林所)의 유림들이 제일착으로 자강회의 지회설립을 청원했던 사실과, 고령지회의 입회 청원인은 거의가 유림과 군료(郡僚)들이었던 사실, 그리고 동래지회의 입회 청원인 중에는 그 지방 최고의 명망있는 유학자들이 포함되었던 사실 등으로 미루어 보아 개화에 공명하는 다수의 유림들이 자강회에 입회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자강회의 회원수는 『대한자강회월보(大韓自强會月報)』에 의하면, 서울 본회의 회원이 358명, 17개 지회의 회원이 808명, 도합 1,166명으로 집계된다. 그런데 월보 제7호와 제9호의 회원명단이 누락되어 있으며, 자강회 지회수를 25개로 볼 때 누락된 8개 지회의 회원수를 합산하면, 자강회의 총 회원수는 대략 1천 5백여 명으로 추산된다.
요컨대 자강회는 서울의 본회와 25개의 지회, 그리고 개화자강계열의 인사들과 개신유학적 인사들로 구성된 1천 5백여 명의 회원을 가진 전국적인 규모의 단체였던 것이다.
(2) 대한자강회의 구국운동논리
대한자강회는 한말의 시대 상황을 기본적으로 사회진화론적인 시각에서 파악하여, 약육강식·열국경쟁의 국제사회에서 일본에 의한 한국의 보호국체제를 비판하면서도 불가항력적인 현실로 받아들였다. 즉 한국의 국권상실의 근본적인 책임은 문호개방 이래로 국가자강을 도모하지 못한 한국 자체에 있다는 자가반성론적인 관점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자강회는 약육강식의 국제사회에서 실력의 부족으로 상실된 국권의 회복은 실력의 양성만으로 가능하다고 믿고, 국권회복을 전제로 한 실력양성론 곧 사회진화론에 기초한 자강독립론(自强獨立論)을 폈다.
자강회의 자강독립론은 일본과 동일한 침략국가인 열강의 대일압력을 통하여 국권을 회복하고자 하는 외세의존적 외교독립론을 배격하고, 자력에 의한 실력양성을 강조하는 자주적 자강독립론이었으며, 의병(義兵)처럼 아무런 실력의 준비도 없이 무모하게 무력행사를 통하여 국권을 회복코자 하는 급진적인 무력투쟁론을 비판하고, 비폭력에 의한 실력 양성을 강조하는 점진적 자강독립론이었다. 따라서 자강회는 일본의 보호국체제에 대하여 내면적으로는 반발하면서도 표면적으로는 과격한 반일행동을 자제하고, 한국의 자강독립에 의한 동양의 정족평화(鼎足平和)의 논리를 주장하였다. 이같은 동양평화론(東洋平和論)은 ‘한일합방론’에 대한 대응논리였고 자강독립론의 외연논리(外延論理)였다고 하겠다.
한편 대한자강회는 천부인권론(天賦人權論)과 사회계약론 등 서구의 근대시민사상에 기초한 국민평등권·국민자유권·국민주권·국민참정권 의식을 가졌다. 그리고 국가란 이러한 국민의 기본적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인민과 통치자간의 계약에 의하여 성립된 것이며, 따라서 국가란 국민을 위한 국민에 의한 국민의 국가여야 한다는 국민국가관을 가지고, 근대 국민국가수립을 궁극적인 정치적 이상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자강회는 국민국가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정치체제로서 공화정체(共和政體)가 가장 진보적이고 우월한 정체라고 인식했으나 현실적으로 실현가능성이 없다고 보았고, 전제정치하에서는 민권의 보장도 교육의 진흥도 식산의 발달도 기대할 수 없어 자강독립의 실현이 불가능하다고 하여 전제정체(專制政體)를 비판 배격했다. 나아가 자강회는 민권보장과 국민참정권의 허용, 민선의회(民選議會)와 지방자치제의 실시, 그리고 군주(君主)의 정치적 책임의 제거를 골자로 하는 입헌대의정체(立憲代議政體) 곧 영국형의 입헌군주제가 현실적으로 국민국가의 이상에 부합되는 정체라고 인식했다. 자강회는 입헌대의제에 기초한 국민국가가 수립되어야 국가의 자강독립과 국민의 권리보장이 실현될 수 있다고 보아, 자강독립(自强獨立)의 전제로서 그리고 그 목표로서 국민국가 수립의 논리를 폈던 것이다.
요컨대 자강회는 실력양성에 의한 국가독립의 회복과 국민국가의 수립을 추구했다. 따라서 자강회의 당면의 목표는 실력양성 곧 자강실현이었고, 궁극의 목표는 국민국가(國民國家)로서의 국권회복이었다고 하겠다. 자주적이고 점진적인 자강독립론을 폈던 대한자강회는 교육자강(敎育自强)·식산자강(殖產自强)·정신자강(精神自强) 등 자강실현의 3개 방법론을 주장했다.
첫째, 자강회는 약육강식·적자생존의 국제사회에서 교육을 통한 국민의 개명(開明)과 문명의 고도화가 약자를 강자화하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서구 근대문명국가의 교육에 준하는 문명교육(文明敎育)·실업교육(實業敎育)·애국교육(愛國敎育)을 통하여 근대적 문명지식과 경제적 자립능력 그리고 강건한 애국심을 가진 패기있는 국민을 육성해야 한다는 교육자강론을 폈다. 따라서 자강회는 근대화에 역행하는 현상적인 유교를 신랄하게 비판하고 신교육에 의한 신학문·사상의 보급 확대를 강조했다. 그러나 자강회는 유교의 근본은 변통의식(變通意識)·부강지술(富强之術)·민권의식(民權意識)을 내포하고 있어 근대문명사상에 부합될 수 있고, 국가존망의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 전통적인 유교의 배척은 국민적인 단합을 해친다는 인식에서, 유교를 개신하여 신학문·신사상과 상호 보완하게 해야 한다는 신구학 절충보완의 논리를 펴기도 했다.
둘째, 자강회는 생존경쟁·우승열패의 국제사회에서 식산(殖產)을 통한 국가부강의 실현이 국권회복의 길이라 생각했다. 그리하여 관존민비사상·직업존비의식의 타파와 국민의 자유·평등의 권리보장을 통하여 국민의 근로의식과 생산의욕을 고취시키고, 각종 산업의 생산기술을 개발하여 생산능력을 향상시킴으로써, 국민의 경제적 자립과 국가의 부강을 실현해야 한다는 식산자강론(殖產自强論)을 폈다. 자강회는 식산진흥이 현실적으로는 일본의 경제적 식민지화를 막고 교육진흥의 경제적 토대를 마련하며, 궁극적으로는 자강독립의 기초가 된다고 믿었던 것이다.
세째, 자강회는 조국정신(祖國精神)이 있어야 교육과 식산을 통한 국가의 자강을 제대로 실현할 수 있으며, 실현된 자강을 독립으로 연결시킬 수 있다고 믿었다. 그리하여 국사교육과 국어교육을 강화하여 국민으로 하여금 조국의 연원을 알게 하며, 입헌대의제도를 실시하여 국민으로 하여금 국가와 일체감을 갖게 함으로써 조국정신을 배양해야 한다는 정신자강론(精神自强論)을 폈다. 자강회는 조국정신을 교육과 식산을 통한 자강실현(실력양성)의 원동력으로, 그리고 실현된 자강을 독립회복(국권회복)으로 이어주는 연결고리라고 간주했던 것이다.
요컨대 자강회는 교육진흥과 식산흥업 및 조국정신을 삼강(三綱)으로 하는 점진적이고 자주적인 자강독립의 논리를 폈던 것이다.
3) 대한자강회의 구국운동전개
대한자강회는 자강독립 논리를 가지고 국민계몽·교육구국·경제구국·정치구국 등 자강구국(自强救國)운동을 전개했는데, 이러한 구국운동은 ① 월보와 강연에 의한 계몽활동, ② 정부에 대한 건의활동, ③ 각종 애국단체에 대한 지원활동, ④ 일제와 정부에 대한 시위활동 등을 통하여 추진되었다.
첫째, 대한자강회는 구국운동의 일환으로 국민계몽운동을 전개했다. 먼저 자강회는 기관잡지로서 『대한자강회월보』를 간행하여 국민계몽운동을 추진했다. 자강회월보는 1906년 7월부터 1907년 7월까지 13호가 간행되었는데, 월보에는 교육관계·식산관계·정치관계·법률관계·역사지리관계 등 140편의 논설과 시사문답·국내외 뉴스 등이 실려 있다. 자강회월보의 초기 발행부수는 알 수 없으나 제6호부터는 2천여 부씩 간행되었고, 독자들의 요구에 의하여 제1호부터 제4호까지는 추가 인쇄되기도 했다. 한편 자강회는 연설회를 개최하여 국민계몽운동을 추진했다. 자강회는 그 존속기간이 17개월 동안에 16회에 걸친 정기연설회를 개최했으며, 여기에서 42명의 연사들이 계몽강연을 했다. 이외에도 수시로 열린 연설회와 지회(支會) 시찰시에 열린 연설회, 그리고 지회 자체에서 열린 연설회를 고려하면 자강회가 행한 계몽강연의 회수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을 것이다.
대한자강회는 이와 같은 월보와 강연을 통하여 ① 조국의 현실을 분석하여 국민의 분발을 촉구했고, ② 국권회복을 위한 실력양성의 필요성을 계몽했으며, ③ 민권·국권사상과 국민국가의식을 고취했고, ④ 교육진흥·산업개발·정치개혁의 방안을 제시하기도 했다. 이같은 자강회의 월보와 강연을 통한 국민계몽운동은 당시 사회의 각계각층에서 일고 있던 애국계몽운동을 본궤도에 올려 놓는데 크게 기여했으며, 자강회월보는 한말의 선구적이고 내실을 갖춘 회지로서 다수 애국계몽단체들의 회지간행을 선도했던 것이다.
둘째, 대한자강회는 교육구국운동을 전개했다. 먼저 자강회는 사회 일반에 대한 교육계몽을 통하여 교육구국운동을 추진했다. 자강회는 국민교육이 자강독립의 기초이고 바로 구국의 길임을 밝혀 교육진흥의 중요성을 계몽했다. 또한 서양문명국가의 근대적 교육이념·교육내용 교육제도·교육방법 등을 소개하고 신교육에 의한 신학문·신사상의 보급 확대의 필요성을 일깨웠다. 그리고 자강회는 학교교육에 있어 문명교육(文明敎育)·실업교육(實業敎育)·애국교육(愛國敎育)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학교교육과 더불어 가정교육과 사회교육 및 여성교육과 의무교육의 중요성을 계몽했다. 이같은 자강회의 교육계몽운동은 한말에 있어 사회일반의 교육열을 고조시켜 근대적 민족교육의 발흥에 기여하게 되었다.
다음으로 대한자강회는 의무교육 실시와 일문(日文) 교과서 편집반대 등 교육문제에 관한 대(對)정부 건의활동을 통하여 교육구국운동을 추진했다.
자강회는 초등교육에 대한 의무교육의 실시가 교육진흥의 관건이라고 간주하고, 전국에 학구(學區)를 설정하여 구립소학교(區立小學校)를 설립하되 구내주민이 경비를 부담토록 하는 내용의 의무교육실시안을 마련했으며, 1906년 10월부터 자강회가 해체되기 직전까지 정부에 총대위원을 파견하여 의무교육의 실시를 지속적으로 건의했다. 자강회의 건의에 대하여 참정대신과 학부대신은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고, 중추원(中樞院)은 의무교육 실시안을 가결하여 정부에 그 실시를 촉구하기도 했으며, 서우학회(西友學會)는 독자적으로 평양군(平壤郡)내에 의무교육실시를 시도하기도 했다. 그러나 일제의 대한 우민화(對韓愚民化) 정책에 배치되는 자강회의 의무교육 실시운동이 성사될 수는 없었다.
한편 『대한매일신보』에 일인 학부참여관 폐원탄(幣原坦:시데하라 히로시)의 주도 아래 초·중등교과서를 일문으로 편집하려 한다는 논설이 게재되자, 대한자강회는 “차라리 국민의 교육을 전폐함은 가하나 자국의 정신을 전실(全失)함은 불가하다”고 주장하고, 총대위원을 파견하여 학부대신에게 강력히 항의한 결과, 사회여론에 힘입어 일제의 일문 교과서(日文敎科書) 편집기도를 좌절시켰다.
나아가 대한자강회는 학교와 학회에 대한 지도와 후원을 통하여, 교육구국운동을 추진했다. 자강회는 학교교육의 정상적인 발전을 기하기 위하여 전국 각지에서 설립되고 있는 사립학교의 교육정도를 균일케 하려는 목표를 세우고, 우선적으로 서울시내의 각 사립학교에 시찰위원을 파견하여 그 학무(學務)발전을 지도했다. 이에 호응하여 광주(廣州)의 광명학교(廣明學校)처럼 자진하여 자강회의 학무지도를 청원하는 사례도 있었다.
그리고 자강회는 서울 본회가 직접 학교를 설립하여 운영하지는 않았지만, 고령지회는 영신학교(靈新學校)를, 남양지회는 보흥학교(普興學校)를, 의주지회는 자신학교(自新學校)를, 인천지회는 인명의숙(仁明義塾)을, 그리고 삼화지회는 교명미상의 학교를 설립 운영했다. 자강회 본회는 남양지회·의주지회·삼화지회가 학교관계로 지방관아와 문제가 발생했을 때 이의 해결을 위해 적극 노력하였고, 인천지회의 학교설립시에는 본회 간사원을 총교사(總敎師)로 파견하는 등 지방지회의 학교설립과 운영을 후원 장려했다.
한편 자강회 간부들은 한말의 선구적인 지방학회였던 서우학회의 설립에 적극 참여하여, 그 회장과 부회장은 물론 월보의 주필과 편집인 등 요직을 맡아 그 운영을 주도했다. 자강회가 해체된 뒤에도 자강회 회원들이 기호흥학회(畿湖興學會)의 설립과 운영에 대거 참여하는 등 자강회는 지방학회의 설립과 운영에 크게 기여했다. 이같은 자강회와 학교와 학회의 설립과 운영에 대한 지도와 후원을 통한 교육구국운동은 한말의 교육진흥에 공헌한 바 크다고 하겠다.
세째, 대한자강회는 경제구국운동을 전개했다. 먼저 자강회는 사회일반에 대한 경제계몽을 통하여 경제구국운동을 추진했다. 자강회는 식산흥업은 국부증진의 근원이며 바로 국권회복의 길임을 주장하여 식산진흥의 중요성을 계몽했고, 한국의 각종 산업분야에 대한 일인들의 경제적 침탈의 실태를 밝혀 국민들의 경각심을 일깨웠다. 그리고 자강회는 한국의 식산(殖產) 부진과 국가 빈약의 요인을 분석하고, 국민와 근로의식과 생산의욕을 고무할 수 있는 식산진흥방안을 제시하기도 했다. 또한 직접 식산활동을 벌이지는 못했으나 각종 산업에 대한 문명국가의 연구성과를 소개하여 식산활동을 장려했다. 이처럼 자강회는 경제계몽운동을 전개하여 한말에 있어 사회일반에 제국주의 일본의 경제 침탈에 대한 경각심과 근대적인 경제의식을 일깨워 민족산업의 발흥에 기여했다.
다음으로 대한자강회는 부동산매매 증명법령(不動產賣貢證明法令)의 제정에 관한 대정부 건의활동을 통하여 경제구국운동을 추진했다.
자강회는 한말에 급증하는 내한(來韓) 일인 이주자들이 잠매(潛賣)를 통하여 막대한 토지를 점유해가는 현상을 직시하고, 토지잠매(土地潛賣)의 금지가 일본의 경제적 식민지화를 막는 긴급한 과제라고 인식했다. 그리고 당시에 부모 형제 몰래 토지 가옥을 잠매하는 풍조의 만연은 지계제도(地契制度)에 문제가 있다고 파악했다. 따라서 자강회는 토지제도를 확정하여 외국인의 부동산소유를 규제함으로써 일본의 경제적 침탈을 저지할 목적으로, 부동산매매시에 관청의 증명서를 첨부케 하는 부동산증명법령의 제정을 정부에 건의했다. 1906년 5월 이후 수개월간에 걸친 자강회의 집요한 건의활동은 정부로 하여금 토지가옥증명규칙(土地家屋證明規則)을 제정하여 시행토록 만들었다. 그러나 그 규칙은 자강회의 의도와는 달리 오히려 외국인에게 부동산매매를 공인하는 결과가 되고 말았다. 이처럼 자강회는 부동산관계의 대정부 건의 활동을 통하여 경제구국운동을 추진했으나, 일제의 대한(對韓) 농업이민정책에 저촉과는 건의가 실질적인 효과를 거둘 수는 없었다.
나아가 대한자강회는 국채보상운동(國債報償運動)의 협찬을 통하여 경제구국운동을 전개했다. 일본은 을사조약을 전후하여 식민지 기초공작의 일환으로 소위 ‘시정개선(施政改善)’ 등의 명목으로 한국에 고리(高利)의 차관을 대규모로 들여와, 1907년에 이르러 한국은 1년 예산에 맞먹는 1,300만원의 외채를 일본에 지게 되었다. 이에 국민의 힘으로 국채를 갚고 국가를 지키자는 취지 아래 국채보상운동이 일어나 거족적인 운동으로 확산되었다. 자강회는 국채보상운동에 적극 참여할 것을 결의하고, 월보(月報)를 통하여 국채보상운동은 국채보상 자체보다도 국민의 ‘애국진성(愛國眞誠)’의 표상으로서 의미가 크며, 따라서 이 운동은 ‘대한국민(大韓國民)의 신 인구조사(新人口調査)’이며 국권회복운동이라고 홍보하는 등 이 운동을 적극 후원하였다, 그리하여 자강회 회원들도 개별적으로 국채보상단체를 만들거나 이 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그러나 일제는 국채보상운동이 국권회복을 위한 배일운동임을 간파하고 교활한 방해공작을 펴서, 국채보상운동도 그 목적을 달성할 수는 없었다.
네째, 대한자강회는 정치구국운동을 전개했다. 먼저 자강회는 사회 일반에 대한 정치계몽을 통하여 정치구국운동을 추진했다. 일제의 보호국체제하에서 한국인의 정치활동은 극도로 제약을 받게 되었는데, 자강회는 일제에 의한 보호국체제의 현실을 개탄하고 자강독립(自强獨立)이라는 사실상의 정치적 목표를 내세우고 활동했다. 자강회는 약육강식의 국제사회에서 정치의 우열이 국가의 강약을 좌우한다고 하여 정치발전의 중요성을 계몽했고, 전제국가에서는 민권의 보장도 실력의 양성도 국권의 회복도 불가능하다고 하여 국민국가의식을 고취했다. 나아가 자강회는 국민국가의 수립을 위해 입헌대의제의 실시를 주장했고, 입헌대의제 실시의 전단계로서 국민의 자치능력과 참정능력의 배양을 위해 우선적으로 지방자치제의 실시를 계몽하고 주장했다.
자강회의 지방자치제 실시의 주장은 중추원에 반영되어 중추원은 ‘인민(人民)의 자치제도(自治制度)’를 서울에서부터 실시할 것을 결의하고 그 실시를 정부에 촉구하기도 했다 그러나 일제의 보호국체제하에서 일제가 한국의 병합을 획책했던 상황에서, 한국민의 자치능력을 배양시킬 지방자치제의 실시가 실현될 수는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강회의 국민에 대한 정치의식의 계몽과 정치개혁의 주장은 한말의 민족운동의 목표설정에 많은 영향을 끼쳤으리라고 본다.
한편 대한자강회는 고종양위 반대시위를 통하여 정치구국운동을 추진했다. 일제는 1907년 7월에 헤이그밀사사건을 계기로 한국내정에 관한 전권의 장악을 목표로 세워, 고종의 양위와 통감(統監)의 행정권 강화 등을 이등박문(伊藤博文)에게 훈령했고, 이등 통감은 한국의 내각대신들을 위협하여 고종의 양위를 강요했다. 이에 대한자강회·동우회(同友會)·기독교청년회·대한구락부·국민교육회의 회원들은 서울 도처에서 고종양위에 반대하는 민중대회를 열어 내각대신들을 성토하고, 격렬한 시위를 주도하여 경찰과 유혈충돌을 벌였다. 성난 민중들은 일진회(一進會)의 기관지인 국민신보사를 습격 파괴하고, 총리대신 이완용의 집을 방화 파괴했으며, 경찰서와 파출소를 습격 파괴하기도 했다.
이에 대해 일제는 무력으로 민중시위를 진압하고, 고종을 퇴위시킨 뒤에 보안법을 만들어 자강회를 강제 해체시켰다. 이처럼 일제의 보호국체제라는 한계 상황 속에서 자강회의 정치운동이 언론을 통한 계몽활동에서 국권수호를 위한 대중시위로 전환되었을 때, 자강회의 존립자체가 불가능했던 것이다.
대한자강회는 17개월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일제의 보호국체제라는 제한된 상황 속에서, 그리고 ‘국법범위(國法範圍)’라는 제한된 방법으로 민족운동을 전개하여 소기의 성과를 거둘 수는 없었다. 그러나 대한자강회는 한말의 선구적이고 대표적인 애국계몽단체로서, 첫째로 당시 국가멸망의 시기를 민족각성의 시기가 될 수 있도록 민족운동을 선도하여 애국계몽운동을 정착시키는데 기여했던 점과, 둘째로 국권회복을 위한 실력양성운동을 민족운동의 한 방법으로 정착시켜 그후 장기적인 민족운동의 역량을 공급할 수 있게 했던 점, 그리고 세째로 국권회복과 동시에 국민국가 수립을 그 목표로 설정하여 민족운동의 올바른 이념을 제시했던 점에서 그 존재의미가 있다고 하겠다.
4) 신민회의 조직과 구국운동논리
(1) 신민회의 조직
신민회(新民會)는 대한자강회·대한협회와 더불어 한말의 대표적인 전국규모의 애국계몽단체였으나, 위의 두 단체가 합법단체였던 것과는 달리 비밀결사였다.
신민회의 창립은 재미 애국지사들의 구국단체 결성의 의지에서 발원했다. 안창호(安昌浩)·이강(李剛)·임준기(林俊基) 등 재미 애국지사들은 1906년 말 1907년 초 연말연시에 미국 캘리포니아주에서, 을사조약을 통하여 일제의 보호국체제하에 있는 조국의 국권회복을 목적으로 하는 대한신민회의 창립을 발의하고, 이 단체를 본국에도 조직하기 위하여 안창호를 본국에 파견했다.
안창호는 재미동지들과 함께 초안한 「대한신민회취지서(大韓新民會趣旨書)」와 「대한신민회통용장정(大韓新民會通用章程)」을 휴대하고 귀국하여, 당시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고 있던 양기탁(梁起鐸)·전덕기(全德基)·이동휘(李東輝)·이동녕(李東寧)·이갑(李甲)·유동열(柳東說) 등과 함께 1907년 4월에 신민회를 창립하고, 양기탁이 총감독(總監督)을, 이동녕이 총서기(總書記)를, 전덕기가 재무원(財務員)을 그리고 안창호가 집행원(執行員;組織責)을 담당했다.
신민회의 창립과 활동을 주도한 중심인물은 사회 각계각층의 애국계몽세력을 망라했다.
첫째, 양기탁·신채호·박은식·장지연·임치정(林蚩正)·옥관빈(玉觀彬)·장도빈(張道斌) 등 『대한매일신보』와 『황성신문』 등에 종사했던 언론계인사들이 신민회의 중심인물을 이루었다. 둘째, 윤치호·전덕기(全德基)·이상재·이동녕·이준(李儁)·조성환(曺成煥)·최병헌(崔炳憲)·김정식(金貞植)·김구 등 기독교청년회(基督敎靑年會)와 상동교회(尙洞敎會)·상동청년학원(尙洞靑年學院) 등에 관계했던 기독교계 인사들이다. 세째, 안창호·윤치호·이종호(李鍾浩)·이승훈·김구·최광옥(崔光玉)·이동녕·안태국(安泰國)·전덕기 등 학교설립자와 교장·교사 등 교육계인사들이다. 네째, 이승훈·안태국·이종호·최응두·양준명(梁濬明) 등 주로 서북지방에서 상공업에 종사했던 실업계인사들이다. 다섯째, 이동휘(李東輝)·이갑·유동열·노백린(盧伯麟)·조성환·김희선(金義善) 등 무관 출신자들이 신민회의 중심인물을 이루었다.
한편 민족운동단체와 연관시켜 보면, 신민회는 과거의 독립협회 그리고 당시의 대한자강회나 서우학회(西友學會)와 긴밀한 관계가 있다. 과거 독립협회의 회원 30여 명이 신민회의 창립과 활동에 참여하여 신민회의 창립위원 거의 전부와 지도급인물 대다수가 독립협회 회원으로 구성되었다. 또한 독립협회의 맥락을 이은 대한자강회의 회원 20여 명과 대한자강회의 영향하에 창립된 서우학회(뒤의 西北學會)의 회원 20여 명이 신민회의 창립과 활동에 참여하여, 신민회의 창립위원과 지도급인물은 거의다 대한자강회나 서우학회의 회원이었다. 곧 민족운동의 맥락에서 보면, 신민회는 독립협회운동을 계승한 개화자강계열의 단체로서 대한자강회와 서우학회 등에 소속된 애국계몽운동의 정예분자들이 집결한 구국운동단체였다고 하겠다.
신민회는 비밀결사였기 때문에 그 조직을 정확히 파악할 수는 없으나 대체로 다음과 같은 조직체계를 가진 것으로 추정된다.
중앙조직으로는 서울 본부에 회장과 부회장, 그리고 회무를 총괄하는 총감독(總監督), 회의 재정을 관장하는 재무원(財務員), 회의 조직을 관리하는 집행원(執行員), 회원의 기강을 관장하는 감찰원(監察員)이 있었다. 이들이 신민회의 최고지도부를 이루었으며, 각도에서 선정된 의사원(議事員) 이 모여 본회의 의결기관을 이루었다. 지방조직으로는 각도에 총책임자로서 도총감(道總監)을 두고 의결기관으로 평의원(平議員)을 두었다. 각군에는 총책임자로 군감(郡監)을 두고 의결기관으로서 평의원을 두었으며, 군감 밑에는 반(班)을 편성하여 회원 60명마다 도반장(都班長)을 두고 회원 20명마다 부반장(副班長)을 두었으며 회원 5명마다 반장(班長)을 두었다.
신민회는 비밀결사였던 관계로 조직을 철저히 관리하여 일반회원들은 종적으로만 연결시켜 횡적으로는 동지가 누구인지 전혀 알 수 없게 하였다. 회원의 입회를 엄중히 하여 일정한 기간 동안 엄격한 심사를 거쳐 애국사상이 투철하고 국권회복에 헌신하려는 의지가 확고한 인물만을 엄선하여 입회시켰다. 신민회의 회원수도 비밀결사였기 때문에 정확히 파악할 수는 없으나 안창호의 300여 명설, 김구의 400여 명설, 박은식의 800여 명설이 있는데, 신민회 회원수는 대체로 800여 명으로 보고 있다.
요컨대 신민회는 언론계·기독교계·교육계·실업계·무관 출신 등 사회 각계각층의 인사들을 망라하고, 과거의 독립협회와 당시의 대한자강회·서우학회 등 애국계몽단체의 정예분자들을 주축으로 하여 조직되어, 서울과 각도 각군에 지하조직을 통하여 800여 명의 회원을 확보한 전국 규모의 비밀 결사였던 것이다.
(2) 신민회의 구국운동논리
신민회는 일제의 보호국 체제하에서 한인(韓人)의 통일연합에 의한 ‘독립자주’ 국가의 건설을 목적으로 하고, 비밀결사로 조직되어 독립전쟁전략을 수립했던 점에서 신민회의 궁극적인 목표는 무엇보다도 조국의 국권회복이었다고 하겠다.
신민회는 수백년 이래로 세계는 새로운 정치·새로운 법률·새로운 교육·새로운 공예·새로운 기술에 바탕을 둔 새로운 세계로 진보해 왔는데, 한국사회는 모든 분야에서 퇴보하여 ‘진화의 천연공례(天演公例)’에 역행하여 왔다고 하여 한말의 시대상황을 사회진화론적인 시각에서 파악했다. 따라서 신민회는 약육강식·열국경쟁의 국제사회에 있어서 일제에 의한 한국의 보호국화도 근본적으로는 한국이 ‘자신(自新)’치 못한 때문이라고 인식했다. 그리고 ‘위국(爲國)’의 길은 오직 ‘자신(自新)’하는 것 뿐이며, 자신(自新)이란 신사상·신교육·신윤리·신학술·신산업·신정치 등에 의하여 ‘인민을 유신(維新)’케 하고 ‘나라를 유신’케 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신민회는 그 통용장정(通用章程)에서, “부패한 사상과 습관을 혁신하여 국민(國民)을 유신(維新)케 하며, 퇴폐한 교육과 산업을 개량하여 사업(事業)을 유신케 하며, 유신한 국민이 통일연합하여 유신(維新)한 자유문명국(自由文明國)을 성립케 함”을 목적으로 규정했다. 그리고 그 취지서에서는 내외의 한인이 통일 연합하여 ‘독립자유’로서 목적을 세우고, “신정신(新精神)을 환성(喚醒)하여 신단체(新團體)를 조직한 후 신국(新國)을 건설할 뿐이다”라고 하여, 신민의 육성에 의한 신국(新國)·자유문명국을 건설한다는 ‘신민신국론(新民新國論)’을 폈다.
한편 신민회는 신국·자유문명국의 정치체제로서 ‘공화정체(共和政體)’를 구상했다. 과거의 독립협회는 공화제를 잘 알고 있었으나, 전제 군주제를 입헌대의군주제로 전환시키려 했다. 당시의 합법단체였던 대한자강회도 공화제가 가장 진보적인 정치체제라고 인식하였으나, 현실적으로는 입헌대의군주제의 실시를 목표로 세웠다. 그런데 신민회가 공화제의 실시를 공식목표로 설정한 것은 비밀결사였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며, 당시 합법단체들이 지닌 정치체제론의 한계성을 한 단계 극복한 것이었다. 어떻든 신민회가 구상한 ‘신민신국(新民新國)’은 공화정체에 기초한 자유문명국이었으며, 이것은 곧 근대 국민국가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요컨대 신민회는 독립자유의 신민신국의 건설 곧 국가독립의 회복과 국민국가의 수립을 추구했으며, 따라서 신민회의 궁극적인 목표는 대한자강회와 마찬가지로 국민국가로서의 국권회복이었다고 하겠다.
신민회는 국권회복운동에 있어 실력 양성과 기회 포착을 중요시했다. 그런대 신민회의 대변지 역할을 했던 『대한매일신보』가 그 논설에서, 국권회복운동에 있어 “아무리 기회가 있더라도 실력이 없으면 성공치 못할 것이므로 기회보다 실력(實力)이 위선(爲先)이다”고 주장했듯이, 신민회의 국권회복론은 먼저 실력을 양성하여 장차 독립의 기회에 대비해야 한다는 ‘선실력 후기회론(先實力後機會論)’이었다. 이러한 ‘선실력 후기회론’은 대한자강회의 ‘선자강 후독립론(先自强後獨立論)’과 궤를 같이하는 것으로 실력양성에 의한 독립준비론이라 하겠다. 신민회도 당시의 합법적인 애국계몽단체와 마찬가지로, 약육강식의 국제사회에서 실적의 부족으로 상실된 국권의 회복은 실력의 양성만으로 가능하다는 인식에서 국권회복을 위한 당면의 목표로서 실력양성론을 폈던 것이다.
신민회가 구상한 실력양성의 방법은 첫째, 각처에 권유문(勸諭文)을 전파하여 인민의 정신을 각성케 하고 신문·잡지·서적을 간행하여 인민의 지식을 계발하는 것으로 국민계몽에 의한 실력양성론이었으며, 둘째 학교를 설립하여 인재를 양성하고 각처 학교의 교육방침을 지도하는 것으로 교육진흥에 의한 실력양성론이었으며, 세째 실업가에 권고하여 영업 방침을 지도하고, 신민회 회원의 합자로 실업장(實業場)을 열어 실업계의 모범을 보이는 것으로 식산흥업(殖產與業)에 의한 실력양성론이었다 이같은 국민계몽·교육진흥·식산흥업에 의한 실력양성의 방법은 당시 대한자강회 등 합법 단체들의 방법과 다를 것이 없다.
그런데 신민회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국권회복을 위한 실력양성의 방법으로 국외에 독립군기지를 만들고 무관학교(武官學校)를 세워 독립군을 양성하려는 군사기지건설에 의한 실력양성론을 구상했다. 신민회의 독립군기지건설의 구상은 제국주의 일본으로부터 한국민족의 독립을 회복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독립군양성을 통하여 적절한 시기에 일본과 독립전쟁을 벌여 독립을 쟁취하는 것이라는 ‘독립전쟁론’에 의거한 것이다. 다시 말해 장차 일제가 팽창하여 러시아나 청국 또는 미국과 전쟁을 벌이게 될 때와 같은 독립전쟁의 기회에 대비하여, 일체의 통치력이 미치지 않는 서북간도에 독립군기지를 건설하여 독립군을 양성하려는 것이었다. 그런데 신민회의 독립전쟁론은 항일의병의 준비없는 즉각결전론과는 달리, 미래의 독립전쟁의 기회에 대비하여 일제와의 근대전(近代戰) 수행의 능력을 갖추려는 일종의 독립전쟁 준비론이었다고 하겠다. 이처럼 신민회가 국권회복을 위한 실력양성의 방법으로 국민의 지적·경제적·실력의 양성뿐만 아니라, 민족의 군사적 실력의 양성을 구상한 것은 당시의 합법단체들이 지닌 국권회복론의 한계성을 한 단계 극복한 것이었다.
요컨대 신민회의 구국운동의 기본전략은 국내에서는 교육과 식산활동을 통하여 신민을 육성하고 국외에서는 독립군기지를 건설하여 독립군을 양성함으로써, 국내외에서 축적된 민족의 역량을 집결하여 적절한 기회에 일제와 무력대결을 벌여 국권을 회복하고, 신국(新國) 곧 공화 정체의 국민국가를 수립하려는 것이었다.
5) 신민회의 구국운동전개
신민회는 비밀결사였으나 지적·경제적 실력양성에 의한 구국운동은 합법적인 표면단체를 통하여 추진했으며, 독립군 기지건설과 같은 군사적 실력양성에 의한 구국운동은 비합법적인 지하운동을 통하여 추진했다. 이러한 신민회의 구국운동을 국민계몽운동·교육구국운동·경제구국운동·독립군 기지건설운동으로 나누어 살펴보기로 한다.
첫째, 신민회는 구국운동의 일환으로 국민계몽운동을 전개했다. 신민회는 국민계몽을 위하여 양기탁(梁起鐸) 등이 경영하던 『대한매일신보』를 신민회의 기관지로 활용했고, 최남선의 주도하에 『소년(少年)』지를 신민회의 기관잡지로 창간했다. 또한 이승훈·안태국 등이 중심이 되어 서적의 출판과 공급을 목적으로 평양과 서울·대구에 태극서관(太極書館)을 설립운영했고, 안창호·윤치호·이동휘(李東輝)·최광옥(崔光玉) 등 다수의 신민회 간부들은 각종 강연회에서 계몽강연활동을 했다. 신민회 회원들은 이같은 신문·잡지·강연 등을 통하여 사회일반에 애국주의·국권회복·민권사상을 고취하고, 신사상·신지식·신산업의 필요성을 계몽했으며, 교육구국·학교설립·학회활동을 고무시켰다.
예컨대 『대한매일신보』와 『소년』 등은 우리 역사상 외적의 침략을 물리친 전쟁 영웅의 전기와 외국의 건국영웅이나 독립운동의 역사를 소개하여, 국민들의 애국심과 독립의지를 고취시켰다. 안창호의 계몽강연에 감화를 받은 거상(巨商) 이승훈은 신민회의 회원이 되어 교육과 식산을 통한 구국운동에 헌신하게 되었고, 안중근(安重根)과 여운형(呂運亨)도 안창호의 강연에 감동하여 학교설립을 통한 민족교육에 진력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동휘(李東輝)가 순회강연을 다녀간 함경도·강원도지방에서는 일시에 100여 개의 학교가 설립되었다는 일화도 있다.
이처럼 신민회의 국민계몽운동은 사회일반에 널리 애국심과 독립의지를 심어주었고, 다수의 실업가와 지식인들을 감화시켜 국권회복운동에 헌신케 했으며, 각 지역의 유지와 민중들의 교육열을 자극하여 무수한 학교가 설립되는데 크게 기여했다.
한편 신민회는 국민 중에서도 내일의 주인공인 청년층의 계몽에 각별한 관심을 가지고 청년단체를 조직하여 청년운동을 전개했다. 예컨대 1909년 8월에 윤치호·박중화(朴重華)·최남선 등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청년학우회는 무실(務實)·역행(力行)·충의(忠義)·용감(勇敢) 등을 강령으로 하여 표면적으로는 수양단체임을 표방했으나, 내면적으로는 국권회복을 목적으로 하는 구국청년단체였다. 이는 신민회의 외곽단체로서 서울을 중심으로 평양·의주·안주(安州) 등지에 조직을 확대하면서 청년 학생들의 인격수양과 민족의식의 배양에 노력했다.
둘째, 신민회는 교육구국운동을 전개했다. 신민회가 국권회복을 위한 실력양성운동으로서 가장 역점을 둔 교육구국운동은 ① 국민들에게 국권회복을 위한 신교육의 필요성을 계몽하여 학교설립을 유도하고, ② 각지에 설립된 학교의 교육방침을 국권회복에 부합토록 지도하며, ③ 신민회가 스스로 시범학교를 설립하고 민족교육을 실시하여 사회일반의 신교육운동을 선도하는 방향으로 추진되었다.
신민회 회원들은 평양의 대성학교(大成學校)와 정주(定州)의 오산학교(五山學校)를 비롯하여 강화의 보창학교(普昌學校)·안악(安岳)의 양산학교(楊山學校)·의주의 양실학교(養實學校)·서울의 오성학교(五星學校) 등 무수히 많은 학교를 설립했다. 이들 중에서 안창호·윤치호·이종호(李鍾浩) 등이 중심이 되어 서울과 평안도의 실업가·지식인·민중의 기부금으로 세워진 대성학교와, 이승훈 등이 중심이 되어 세운 오산학교는 신민회계통의 대표적인 학교였다.
신민회가 일종의 시범학교로 설립한 대성학교는 중학교급의 학교였으나, 그 교과과정은 오늘날의 고등학교와 전문학교의 과정까지를 포괄하고 있었다. 그리고 대성학교는 그 건학목표를 민족운동의 간부양성과 국민교육의 사범양성에 두었던 만큼, 지식의 계발뿐만 아니라 애국정신과 상무정신을 고양시키고자 했다. 그리하여 매일 조회 시간에 애국가의 제창과 애국적 훈화를 행하였고, 역사교육과 병식(兵式) 체조를 특별히 중요시했다.
대체로 신민회계통의 학교는 신민회세력이 강했던 경기이북지방에 많이 세워졌고, 신민회 회원과 지방유지들의 협력으로 세워지는 경우가 많았다. 신민회는 이러한 학교교육을 통하여 근대적 문명지식과 투철한 애국심을 지닌 민족운동자들을 양성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한편 신민회는 학회의 설립과 지도를 통하여 교육구국운동을 추진했다. 신민회 회원들은 전국 각지에 학회의 설립을 권장하기도 하고, 안악군면학회(安岳郡勉學會)·해서교육총회(海西敎育總會)·평양청년권장회(平壤靑年勸獎會)같은 학회를 조직하여 학교설립과 계몽활동을 촉진시켰으며, 기존의 서우학회(西友學會)와 한북흥학회(漢北興學會)를 배후에서 지도하여 서북학회(西北學會)로 통합 재조직케 함으로써 교육구국운동을 효과적으로 수행케 하는데 기여했다
세째, 신민회는 경제구국운동을 전개했다. 신민회는 일제의 경제적 침략에 의한 조국의 경제적 파탄을 심각하게 인식했으며, 신민회 구성원의 대다수가 서북지방의 상공인층이었으므로, 일인들의 경제적 침탈은 신민회 회원들의 생존권에 직접적인 위협이 되기도 했다.
따라서 신민회는 일제의 경제적 침략에 대한 국민적 각성을 촉구하고 전통적 상공업 천대사상을 공박하여 상공업의 중요성을 일깨웠으며, 산업진흥이 애국이고 곧 구국임을 강조하는 경제계몽운동을 폈다. 그리고 평양에서 안창호·안태국 등이 상업회의소(商業會議所)·협동회(協同會) 등의 상인단체를 조직하여 일본상품 불매운동을 일으킨 것처럼 신민회 회원들은 한국상인의 상권보호운동도 전개했다.
나아가 신민회 회원들은 공동출자로 시범적인 공장과 회사를 설립하여, 실업계에 본보기를 보여 민족산업을 진흥시키려는 운동도 전개하였다.
이승훈(李昇薰)이 지방유지들과 합자하여 설립한 평양의 마산동(馬山洞) 자기회사(磁器會社)는 신민회 회원들이 민족산업진흥의 시범사업으로 추진한 대표적인 회사였다. 마산동 자기회사는 일본자기와 진출을 막고 고려자기의 전통을 되살리려는 민족의식에서, 그리고 도자기업이 기업면에서 수익성이 있다는 판단에서 착수되었다. 이 자기회사가 주식회사로 설립된 것은 관서·관북·호남·영남 등 각지의 상공업자들이 지역별로 소자본을 통합하여 대자본화함으로써, 민족자본의 경쟁력을 높여 외국자본의 침투에 대항해야한다는 이승훈의 ‘관서자문론(關西資門論)’이라는 경제이론에 근거한 것으로 보인다. 마산동 자기회사는 한 때 운영에 흑자를 내어 오산학교 등 신민회의 교육사업을 뒷받침하기도 했으나, 결국은 일제의 비호를 받은 일인의 상품과 자본에 눌려 일인회사에 넘어가고 말았다.
신민회 회원들은 마산동 자기회사 외에도 평안북도의 납청정(納淸亭)에 협성동사(協成同事), 용천(龍川)에 상무동사(商務同事)와 같은 상회사(商會社)와, 황해도의 안악에 소방직공장(小紡織工場)과 소연초공장(小煙草工場) 등을 세웠고, 사리원(沙里院)에 모범농촌을 건설하려는 계획도 세웠다. 그러나 이같은 민족산업운동은 민족자본이 취약한 상태에서 일제의 독점적인 대자본과 경쟁하여 소기의 성과를 거둘 수는 없었다.
네째, 신민회는 국권회복을 위한 독립군 기지건설운동을 전개했다. 신민회는 국내에서 국민의 지적·경제적 실력양성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국외에 독립군기지를 만들어 독립군을 양성했다가 러일전쟁 또는 미일전쟁 같은 적절한 기회에 일제와 독립전쟁을 벌여 독립을 쟁취하는 것이 국권회복의 가장 확실한 방법이라는 독립전쟁론에 의거하여 민족의 군사적 실력양성운동을 전개했다.
신민회의 독립전쟁론에 의한 독립군 기지건설의 구상은 1907년 7월 이후 합법적 애국계몽단체들의 구국운동에 대한 일제의 탄압이 가중된 상황에서 이루어졌을 것으로 생각된다. 일제는 1907년 7월 21일에 헤이그밀사사건을 구실로 고종을 퇴위시키고, 신문지법(7월 24일)과 보안법(7월 27일)을 만들어 한국인의 언론·출판과 집회·결사의 활동을 질식케 했으며, 정미 7조약(7월 24일)과 군대해산(8월 1일)을 강요하여 한국에 대한 실질적인 지배권을 확립하고 한민족의 합법적인 민족운동의 폭을 더욱 좁혀갔던 것이다.
그리고 신민회의 독립전쟁론에 의한 독립군 기지건설의 구상은 1910년 ‘합방’을 전후하여 구체화되어 실현을 보게 되었다.
신민회는 1909년 봄에 양기탁의 집에서 전국간부회의를 열고 국외의 적당한 지역을 물색하여 독립군기지를 만들고 무관학교를 설립하여 독립군사관을 양성하는 문제를 협의했다. 1910년 3월에는 긴급간부회의를 열어 독립전쟁을 국권회복의 최고전략으로 채택하고, 국외에 독립군기지와 그 핵심체로서 무관학교를 설립하기로 하고 국내에서는 애국계몽운동을 계속하기로 결정했다. 1910년 4월에는 중국으로 망명한 안창호·이갑(李甲)·유동열(柳東說)·신채호·김희선(金羲善)·이종호 등 신민회 간부들이 ‘청도회의(靑島會議)’를 열고 독립군 기지건설에 대한 구체적 실행책을 협의했으나, 급진론과 점진론이 갈려 뚜렷한 성과를 얻지 못했다. ‘합방’ 후인1910년 12월에는 국내에 잔류한 양기탁·주진수(朱鎭洙)·이승훈·김구·이동녕 등이 양기탁의 집에서 전국간부회의를 열어 서간도에 독립군기지를 건설하기로 결정하고, 서간도에 한인집단이주계획을 구체적으로 수립했다.
신민회의 국내조직은 일제의 날조에 의한 1911년의 105인사건을 통하여 사실상 와해되었으나, 신민회의 독립군 기지건설운동은 열매를 맺어 신민회 회원들에 의하여 서북간도에 독립군기지가 건설되고 무관학교가 설립되었다.
신민회 간부 이동녕·이화영(李會榮) 등은 1911년에 만주 봉천성 유하현(柳河縣) 삼원보(三源堡)에 신한민촌(新韓民村)을 건설하고, 사관양성기관으로 신흥강습소(新興講習所;뒤의 新興武官學校)를 설립하여 최초로 신민회계통의 독립군기지를 만들었다. 신민회 간부 이동휘(李東輝)·이종호(李鍾浩) 등도 1913년에 왕청현(旺淸縣) 나자구(羅子溝)에 사관학교인 동림학교(東林學校)를 설립했으며, 신민회 간부 이갑(李甲) 등도 밀산현(密山縣) 봉밀산자(蜂蜜山子)에 밀산무관학교(密山武官學校)를 설립하여 독립군을 양성했다.
요컨대 신민회의 독립군 기지건설에 의한 독립전쟁 전략은 애국계몽운동과 항일 의병운동을 발전적으로 종합한 전략으로서, 1910년 ‘합방’ 이후 여러 민족운동세력의 기본적인 독립운동 전략이 되었다. 또한 신민회 회원들의 독립군 기지건설과 무관학교 설립에 의한 독립군의 양성은 3·1운동 이후 대규모의 독립군부대에 의한 항일 무장투쟁의 기초가 되었던 것이다.
6) 애국계몽운동의 독립운동사적 의의
애국계몽운동은 1905년 을사조약으로부터 1910년 ‘한일합방’에 이르는 시기에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와 신민회(新民會) 등 개화자강계열의 애국단체들이 구국적인 정치활동 및 언론·출판·집회·결사의 활동을 통하여 근대의식과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민족교육의 보급과 민족문화의 향상, 그리고 민족자본의 육성과 민족군대의 양성을 통하여 민족역량을 배양함으로써 국권회복을 도모하려는 광범위한 구국민족운동이었다.
첫째, 애국계몽운동은 민족독립운동의 올바른 이념을 제시했다. 대한자강회와 신민회 등 애국계몽단체들은 일제의 보호국체제에서 벗어나 국가주권을 회복하려는 국권회복을 궁극적인 목표로 삼았으며, 전근대적인 전제국가 체제에서 벗어나 국민주권을 확립하려는 국민국가 수립을 또다른 궁극적인 목표로 삼았다. 민족운동을 거시적이고 장기적인 안목에서 볼 때, 자유민권(自由民權)이 향유되는 국민국가의 수립을 도외시하고 민권부재(民權不在)의 전제왕권을 존속시킨 채로의 단순한 국가독립운동은 진정한 의미의 근대적 민족운동이라고 볼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근대민족운동이란 외형적인 국가독립운동에 그치지 않고, 내면적인 국민국가수립운동을 포괄해야 한다고 본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국민국가 수립을 전제로 하여 국권회복을 목표로 내세웠던 애국계몽운동은 당시의 민족적 과제에 충실하고 근대사의 발전방향에 합치되는 민족운동의 올바른 이념을 제시했다고 할 것이다. 이러한 애국계몽운동의 이념은 ‘합방’ 후 민족독립운동의 주류가 복벽주의(復辟主義)로 흐르지 않고, 근대국가건설을 전제로 한 근대적 독립운동으로 전개될 수 있게 했다는 점에서 민족독립운동사에 있어 의의가 크다고 하겠다.
둘째, 애국계몽운동은 민족독립운동의 올바른 전략을 제시했다. 한말 애국계몽단체들의 국권회복의 전략은 실력양성론(實力養成論)과 독립전쟁론(獨立戰爭論)으로 집약되어진다. 대한자강회 등 합법단체들은 막강한 일제에 대항하여 즉각결전에 의한 국권회복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고, 준비없는 무력항쟁은 실력의 파괴만을 초래한다는 판단하에, 국권회복을 위해 국민계몽·교육진흥·산업개발·정치개혁 등을 통한 국민의 지적·경제적 실력양성을 당면의 목표로 설정했다. 뿐만 아니라 비밀결사인 신민회(新民會)는 국내에서의 실력 양성과 더불어, 국외에 독립군기지를 건설하고 무관학교를 설립하여 독립군을 양성하려는 민족의 군사력 양성을 또다른 당면의 목표로 설정했다. 이것은 적절한 시기에 일제와 독립전쟁을 벌여 독립을 쟁취하는 것이 국권회복의 가장 확실한 방법이라는 독립전쟁론에 의거한 것이다.
국가대 국가, 민족대 민족의 투쟁에 있어 본능적·감성적 대응만으로는 소기의 성과를 거둘 수 없으며, 최후의 승리를 위해서는 민족역량의 배양이 필수불가결하다는 점에서, 액국계몽단체들의 실력양성론은 민족독립운동사에 있어 충분히 긍정적인 의미를 가진다고 하겠다. 더우기 국민의 지적·경제적 실력양성과 일제와의 근대전(近代戰)을 전제로 한 민족의 군사력 양성을 배합시킨 신민회의 국권회복전략은, 합법적 계몽단체들의 무력투쟁을 배제한 독립쟁취 의지의 취약성을 보강하고 항일의병의 준비없는 즉각결전의 무모성을 보완한 것으로 민족독립운동의 올바른 전략을 제시한 것이다. 또한 신민회의 독립전쟁 전략은 애국계몽운동과 항일의병운동의 투쟁방법을 발전적으로 종합하여 ‘합방’ 후 독립운동전략의 골격을 형성했다는 점에서 민족독립운동사에 있어 커다란 의미를 가진다고 하겠다.
세째, 에국계몽운동은 실제로 민족역량의 축적을 통하여 장기적인 민족독립운동의 기반을 구축했다. 대한자강회와 신민회를 중심으로 한 애국계몽단체들의 국민계몽운동은 다수의 지식인·실업가·민중들을 근대의식과 민중의식으로 개명시켜 국권회복운동의 대열에 서게 했으며, 1907년에서1909년 사이에 3천여 개의 사립학교가 설립될 정도로 사회 일반에 놀라운 교육열을 불러 일으켰다. 애국계몽단체들의 교육구국운동은 이처럼 무수히 설립된 사립학교를 통하여 근대교육과 민족교육을 보급시켜 한국의 교육체계와 지식체계를 근본적으로 변혁시켰을 뿐만 아니라, 사립학교령(私立學校令)·학회령(學會令) 같은 일제의 교육탄압을 무릅쓰고 근대적 민족교육을 발흥시켜 민족독립운동의 인재를 양성하는 기반을 마련했다. 그리고 애국계몽단체들의 경제구국운동은 사회일반에 일제의 경제침략에 대한 경각심과 근대적 경제의식을 일깨워, 전국 각계각층의 국민들로 하여금 국채보상운동과 같은 경제적 구국운동에 참여하게 했다. 그리고 다수의 애국적인 실업인들로 하여금 근대적인 상회사(商會社)와 공장들을 건설, 일제의 독점적인 대자본과 대항하여 근대적 민족산업을 발흥시켜 민족자본을 육성토록 하여, 이러한 민족자본이 민족독립운동의 경제적 토대가 되도록 했다.
나아가 신민회의 독립전쟁론에 의거한 민족의 군사력 양성운동은 결실을 맺어 1910년대에 서북간도와 노령(露領)에서 애국계몽세력과 항일 의병세력의 제휴하에 독립군기지가 설치되고 근대적인 독립군이 양성되었다. 이와같은 근대적 독립군의 양성은 3·1운동 이후 무수한 독립군부대의 출현과 근대적 항일 무장투쟁의 기초를 형성하게 되었다.
이처럼 애국계몽운동은 실제로 민족의 일대 각성과 지적·경제적 군사적인 민족역량의 증강을 통하여 항일독립운동의 기반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민족독립운동사에 있어 커다란 의미를 가진다고 하겠다. 그러나 애국계몽운동은 민족운동으로서 일정한 한계성을 지니고 있었다.
첫째, 애국계몽운동은 각계각층의 진보적인 정치세력·사회세력이 그 이전 단계보다 한층 더 확대된 근대적 민중운동을 전개했으나, 농촌사회까지 침투하여 대중 속에 뿌리를 내리지 못했고, 서울과 지방도시의 지식층과 개화유생층의 운동에 국한된 감이 있어, 대중성(大衆性)의 부족이 그 한계성으로 지적되고 있다. 둘째, 애국계몽운동은 국권회복을 궁극적인 목표로 삼았으나, 합법단체인 대한자강회와 대한협회는 일인고문(顧問)을 두었고, 대한협회는 한때 친일단체인 일진회(一進會)와 유착관계를 가졌으며, 비밀결사인 신민회의 독립전쟁론도 즉각결전이 아닌 독립전쟁 준비론의 성격이 짙어, 전투성(戰鬪性)의 부족이 그 한계성으로 지적되기도 한다. 세째, 애국계몽운동은 국민국가 수립을 또 하나의 궁극적인 목표로 삼고 신민회는 공화정체(共和政體)의 확립을 공식목표로 세운 것처럼, 그 이전 단계에 비하여 국민주권주의적 성격을 더욱 강하게 보여주었지만, 애국계몽운동의 주류는 ‘합방’ 때까지 주로 정치의식의 계몽에 그쳤을 뿐 국민국가수립을 위한 국민혁명으로 발전시키지 못하여, 혁명성(革命性)의 결여가 그 한계성으로 지적되기도 한다.
이러한 한계성에도 불구하고 애국계몽운동은 일제에 의한 보호국체제의 정치적·경제적·군사적 예속하에서, 국민들을 일대 각성시켜 당시 사회를 근대적 민족적 측면으로 한 단계 발전시키고, 민족역량을 증강하여 일제식민통치하 독립운동의 기반을 조성했으며, 또한 ‘합방’ 이후 모든 민족운동세력의 주류가 민족의 독립과 근대국가의 건설이라는 근대적 민족운동이념에 귀일하여, 독립군의 양성과 항일 근대전(近代戰)의 수행이라는 근대적 독립투쟁전략을 기본노선으로 가지게 했다는 점에서 민족독립운동사에 있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