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백산 산행기
새해 첫 달, 겨울이 깊은 잠에 빠진 듯 침잠한 시절이다. 어릴 적 농촌에서 겨울을 날 때는 맨 낯의 날 선 추위를 온몸으로 느끼며 딴 세상에 들어와 있듯이 엄동설한을 지나게 되었다. 그렇지 않아도 세월의 흐름이 빠르게 느껴지는 차에 작년말 서울 도서관에서 있었던 전시를 끝내고 같은 제목의 책 '북한산과 한양도성' 을 펴내다 보니 얼떨결에 새해를 맞이한 느낌이다.
소백산은 한 겨울에 맨 먼저 떠오르는 산이다. 몇 해 전 이번처럼 서울건축사 등산동호회에서 같은 코스로 정상을 다녀온 적이 있다. 가는 길과 정상의 풍광이 눈에 선하고 거기서 바라보이는 풍경도 다 기억하고 있지만, 그 정상부에서 느꼈던 감각은 점차 희미해져서 정상의 깨끗하고 시린 공기를 쏘이며 대자연의 기운을 대하고 싶어 찾아 나섰다. 일상의 소소한 일들에 시달리며 피곤해진 마음이 소백산의 시린 공기를 쏘이면 좀 시원해질 것 같았다. 근래 이번 같은 원거리 산행은 뜸한 편이다. 낙동정맥 단독 종주 후에는 시간을 내기 어려워 서울지역 산들을 주로 다녔다.
일행을 태운 버스가 7시 교대역을 출발하여 영동고속도로로 접어들어 있었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겨울 풍경이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안개가 낮게 깔려서인지 평소시각보다 더 어둑하게 느껴졌다. 조금 가다보니 해가 먼 산자락 위로 막 솟아오르고 있었다. 마치 불덩어리로 만든 공처럼 둥글고 팽팽한 해가 솟아나듯 서서히 떠오르는 모습은 늘 신비로움을 느끼게 한다. 잠시 후 해가 허공으로 나오자 안개 자욱한 낮은 들녘 위로 넓게 퍼져가는 햇살이 명주실처럼 보였다.
고속도로가 심하게 정체되었다. 주말 연휴를 이용해 스키장을 가거나 우리처럼 산을 가는 사람이 많을 듯 했다. 기사분이 여주휴게소를 지나고 문막휴게소에 들르겠다고 했는데 차량이 도심 러시아워 때처럼 정체되어 휴게소를 들러 나오자면 시간이 많이 지체될 것 같아서 조금 후 중앙고속도로로 접어들어 쉬자고 했다. 다행히 중앙고속도로 분기점에 들어서기 2-3km 전부터 도로가 뚫려서 제 속도로 달렸다.
버스가 치악휴게소에 들러 잠시 쉬었다. 휴게소 건물은 크지만 마치 맑은 산세를 배경으로 서 있어서 마치 전원에 지은 집처럼 보였다. 산 위에는 달이 실루엣처럼 걸려 보였다. 주차장이 가득했다. 일행이 대부분 소백산 가는 사람들일 것 같다고 했다. 겨울철에 들어 산행 행선지를 생각하며 이심전심 이 곳으로 발길을 돌린 사람들이 많은 듯 했다. 소백산은 겨울산행의 대명사처럼 인식되고 있다.
다시 출발해 소백산을 향해 갔다. 점차 너르고 깊은 자연의 품이 바라보였다. 백두대간을 걸을 때 걸었던 곳들과 멀지 않은 거리였다. 아침 햇살이 산천을 낮게 비추고 있었다. 그윽한 안개도 아직 그대로였다. 겨울 바깥의 시린 공기가 사물을 더 깊게 느껴지게 했다.
단양 톨게이트로 들어서서 그곳에서 기다리던 오긍균, 박성인, 최동철, 김성진 회장 등 충북회원 4명을 태우고 갔다. 외곽으로 돌아 소백산을 향해 가는 사이 명승지인 도담삼봉 안내판이 보였다.
죽령 터널을 지나 풍기 읍내로 나가 들머리인 삼가리로 가는 동안 멀리 소백산 능선이 보였다. 알프스 산맥처럼 정상부만 하얗게 설산(雪山)이 되어 있었다. 그 눈이 사철 녹지 않고 그대로 있다면 한국의 알프스로 불릴 것 같았다. 겨울철에 느낄 수 있는 특별한 풍경이다. 우리나라에 사계절이 있다는 것도 행운이라 할 수 있다. 들어가는 길에서 우측으로 삼가리 저수지가 보였다.
10시 20분 삼가리 탐방지원센타에 도착해 산행을 시작했다. 싸늘한 공기에 수목들이 잔득 웅크린 듯 보였다. 오르는 길에서 바라보이는 저 위로 흰 눈에 덮인 정상부가 보였다.
길가에 세워진 산행 안내판을 보니 비로봉(1439.5m)까지 거리가 6.1 km 정도 되었다. 그래도 이쪽이 정상까지 오르는데 가장 가까운 코스이다. 그만큼 산세가 크다는 것을 의미한다.
11시 비로사 앞에 도착했다. 그곳까지 길이 비교적 완만했다. 좌측으로 오름 계단 위로 일주문이 보였다. 비로봉을 주산으로 삼아 세운 절이어서 절 이름도 비로사라 했을 것 같다. 비로사는 비로자나불을 모신 사찰일 것 같았다. 법신불을 뜻하는 그 부처는 불가에서 가장 존귀하게 모시는 부처이다.
소백산의 품에는 여러 사찰이 있다. 깊고 장엄한 소백산을 구원의 품으로 여기며 자리 잡게 되었을 것이다. 소백산은 비로봉, 연화봉 등 소백산 주능선을 이루는 주요 봉우리들마다 불교의 세계관이 담겨 있어서 마치 불교 성지 같은 인식으로 다가온다. 국망봉 아래에는 호암사, 연화봉 아래에는 희방사가 있고 동쪽 태백산 가까이에는 부석사가 있다. 또한 소백산 품에 있는 구인사는 1945년 개창된 절로 천태종의 본산이다.
비로사에서 우측으로 오름길을 올랐다. 거기서부터 경사기 심하고 길에 눈이 얼어서 조금 가다 아이젠을 착용했다. 비로봉에서 뻗어 내린 우측 산자락이 마치 높은 둔덕처럼 가로 막고 있었다. 그 위로 올라가면 정상부 산세가 훤칠하게 바라보일 것 같았다. 그 풍경과 마주하기를 고대하면서 묵묵히 걸어갔다. 정상에서는 스스로 모습을 다 바라볼 수 없기에 소백산의 기세는 거기서 가장 잘 느낄 수 있을 것 같았다.
바람이 심하기로 유명한 소백산이지만 아직은 둔덕 같은 산세가 가로막아 바람이 불지 않았다. 하지만 가끔 능선을 넘은 바람이 골까지 휘몰아치기도 했다. 능선 너머로 짙푸른 하늘이 보였다.
잠시 후 능선에 도착했다. 예상한대로 소백산의 주능선이 옆으로 길게 펼쳐보였다. 좌측 비로봉 정상부는 보이니 않았지만 그로부터 이어지는 국망봉 능선이 선명하게 다가왔다. 걸음을 멈추고 능선에 서서 스케치 했다. 정면에 설산이 된 국망봉이 마치 거대한 수정이 박힌 듯 고귀한 체취로 바라보였다. 차가운 공기가 더 투명한 느낌으로 다가왔다. 날씨가 맑아서 더 선명해 보이기도 했다.
다시 정상부를 향해 걸었다. 좀 더 가자 설산을 이루고 있는 비로봉 정상부가 보였다. 완만하게 등근 장상부가 원만하면서도 위용 있게 보였다. 걸음을 멈추고 다시 스케치 했다.
뒤에 오던 사람들이 내가 멈춰 있는 사이 다시 앞으로 지나갔다. 다른 일행 중에 내 얼굴을 알게 된 사람이 인사를 하면서 지나가기도 했다. 바람이 거세게 불고 기온이 낮아서 서 있기 어려울 만큼 추위가 느껴져서 오를 때 벗어두었던 겉옷을 다시 입었다.
조금 오르자 일행이 멈춰서 식사를 하러 간다고 했다. 겨울 풍경에 취해서인지 시장기가 크게 느껴지지 않아서 조금 위로 올라 비로봉을 바라보며 다시 스케치 하고 정상을 향했다. 정상까지 오르막길이 이어졌다. 정상부에 다가갈수록 경사가 가파라졌다.
높은 지대로 오를수록 쌓인 눈이 많아서 겨울 풍광을 만끽했다. 앙상한 나무가 눈밭에 서 있었다. 바람이 깊게 쌓인 흰 눈에 바람결을 남기며 불어댔다. 그루터기는 웅덩이처럼 패여 있었다. 나무 그림자가 마치 휜 종이에 그림을 그리듯 빛 그림을 그려놓았다. 이따금 세찬 바람이 지날 때는 제트엔진 같은 소리가 들렸다.
이윽고 정상에 도착했다. 백두대간 능선은 신라와 고구려의 국경이다. 그 능선 지점인 비로봉에 서니 사방이 바라보인다. 삼국시대 이곳에 오르면 서로 다른 나라를 바라보게 되었을 것이다. 옛 신라 영토에는 백두대간에 의지해 상주, 문경, 풍기, 영주, 봉화가 안겨 있고 고구려 영토였던 곳에는 단양, 제천 등이 있다. 모두 백두대간을 따라 산지의 기운을 간직한 곳들이다. 국방봉을 지나 태백산과는 거리가 그리 멀지 않다. 그리고 태백에서 설악산까지 이제 완연한 심해의 산군을 이룬다. 이처럼 높게 가로막은 대간 능선은 죽령을 통해 단양과 풍기, 영주로 이어진다. 험지지만 땅을 의지해 살아가는 삶 내음이 있고 가난 속에서도 지켜온 미풍양속과 살가움이 있다.
정상에 서니 칼바람이 불었다. 비로봉 정상석에서 시진을 찍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바람이 천동 쪽은 바람이 세서 바로 서 있기 어려웠다. 주변은 산군과 능선이 퍼져 나간다. 백두대간의 기운이 태백산에서 매듭을 짓고 다시 지리산까지 달려가기 위해 기세를 돋운 것처럼 주변 지세의 기운을 함껏 끌어 올려서 이루어진 듯 영산의 기운을 간직하고 있다. 부석사나 소수서원 등은 그러한 소백산의 기운과 연관이 있다. 북쪽 방향은 칼바람이 심해 스케치를 할 수 없었다. 정상석에 많은 사람이 몰려 바람막이가 된 때문인지 올라온 방향으로 이동하니 바람이 좀 덜해서 국망봉을 보며 스케치했다.
잠시 후 천동으로 하산을 시작했다. 주능선을 지나는 동안 거센 바람을 맞았다. 잠시 후 숲길로 접어들자 안온해 졌다. 앙상한 나뭇가지에 눈꽃이 만발해 있었다. 내려가다 등이 활짝 굽은 나무에서 등산객들이 신기해 보이는 듯 기념사진을 찍었다. 그 주위의 큰 나무 한 구루는 주변에 발자국 없어 발길이 닿지 않은 태초의 느낌을 풍기며 서 있었다.
그 아래로 좀 더 내려가니 고사목이 보였다. 전에 지나며 스케치 했던 곳이다. 거기서도 사람들이 기념사진을 찍었다. 그 아래쪽으로는 계곡길이 이어졌다. 비로봉에서 천동까지 6,8km 정도 되었다. 단조롭게 계속 완만한 길이 이어지는 구간이다. 전에는 눈보라가 쳐서 어둑했는데 오늘은 날씨가 맑아 상쾌한 기분이었다.
하산 지점에 거의 당도할 쯤 길 옆 표지판에 참 갈겨니라는 어종이 소개되어 있었다. 잉어과에 속하는 한국의 고유종으로 몸길이는 보통 10~15cm, 지느러미는 노란색인데 붉은 색을 띤 것은 그냥 갈겨니로 부른다고 했다. 이 곳 소백산 국립공원의 남천계곡과 천동계곡에서 주로 서식한다.
천동으로 내려와 뒤풀이 식당에 들어섰다. 충북 회원들이 양조장에서 직접 가져온 막걸리를 돌려 건배를 했다. 막걸리 고유의 맛이 느껴졌다. 맛이 참 좋았다. 충북 회원들과는 월악산, 북한산 등, 서로가 생활하는 지역의 산들에 초청 산행 등을 함께 하여 친분을 쌓아왔는데 오늘도 충북 일원에 소재한 소백산 산행 소식을 듣고 동참해주었다.
5시 30분 서울을 향해 출발했다. 단양 톨게이트에서 충북회원들과 작별하고 문막휴게소를 들러 담시 쉰 다음 8시 10분 양재역에 도착해 귀가했다.
(20150110)
첫댓글 소백산정상의 칼바람으로 정신이 버쩍났습니다! 실감나는 산행기 감사합니다! ♧♧♧
좋은 산을 함께 산행해서 즐거웠습니다. 역시 명산의 기운이 느껴졌습니다. 감사합니다.
복습 잘했슴다 ㅎ
행사 주관하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오늘 잠시 짬이나 산행기를 읽었습니다. 흘러간 시간의 간격을 좁혀주는듯 했습니다. 미소......
좋은 사진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늘 안전하고 즐거운 산행 되시기 바랍니다.
멋지고 휼륭한 산행후기 잘 봤습니다.
앞으로도 현장감 넘치며 뛰어난문장의 멋진후기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