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설교 제목 : 우리를 살게 하는 동력
성경 본문 : 요한복음 4장31절~34절
설교 자 : 박 한서 목사 <2020년 2월9일 주일오전>
사랑하는 행복 가족 여러분!
오늘 본문 <요한복음>4장31절-34절 말씀입니다.
31절 그 사이에 제자들이 청하여 이르되 <랍비>여 잡수소서.
32절 이르시되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
33절 제자들이 서로 말하되 누가 잡수실 것을 갖다 드렸는가 하니
34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하여
전 세계가 불안과 공포 속에 살고 있습니다.
교회 나오는 조차도 기피하고 있습니다.
오늘 아침식사는 하셨나요?
아직 먹지 못하고 나오신 분도 계실 것입니다.
그래도 없어서 못 먹은 분은 없을 것이고
있는데 귀찮아서, 또는 바빠서 못 먹었을 것입니다.
제가 어릴 때 동네 어른들을 만나면
인사를 어떻게 했느냐하면 “진지 잡수셨습니까?” 했습니다.
이것이 그 당시 보통 인사였습니다. 아침뿐만 아니라
점심도 저녁도 그게 인사였습니다. 하도 먹고 살기
힘든 시절이라 먹는 것이 인사였습니다.
제 어린 시절, 1940년대-1960년대는
우리나라는 정말 가난하고 살기 힘든 나라였습니다.
해방 당시 국민 1인당 GNP가 50달러였습니다.
1950년 전쟁 후에는 원조 덕에 65달러,
1960년대 초반에는 85달러에 불과했습니다.
그때 오히려 <북한>은 300달러이었습니다.
그러니 국민 대다수가 생존자체를
유지해 가기 어려운 실정이었습니다.
다행히 개발독재를 했던 <박정희>대통령의
강한 집념과 빈곤타파의 노력으로
70년대에 와서 200불, 300불 올라갔습니다.
그때 “100억불 수출 1.000불 소득”이
온 국민의 목표였고 표어였습니다.
그러던 우리가 지금은 2만 불이 넘는 시대를 삽니다.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땐 정말 어려웠습니다.
<일본>에게 36년간 수탈을 당했습니다.
독립 후 5년 만에 세계에서 가장 치열한 전쟁을 치룬 나라입니다.
그러기에 정치, 경제, 교육, 그 어느 하나 제대로 되어 있는 게
없던 시절입니다.
그때는 도시는 안 그렇겠지만 시골에는
초등학교도 돈이 없어 못 다닌 사람도 있습니다.
육성회비, 기성회비가 없어서 학교를 못 다닌 친구들이 있었습니다.
여자 아이들 중에 못간 아이들 많았지요. 그것도 못 내서 매월
분할해서 내야 하는데 못 내면 교실밖에 복도에서 두 손을 쳐들고
벌을 서야 하는 비참한 시절이었습니다.
그러니 먹는 것은 어떠했겠습니까?
그때 도시락 반찬의 대부분은 고추장과
마늘짱아치가 대부분이었습니다.
어쩌다 생일이 되면 <계란> 프라이 하나가 올려 지지만
그것은 정말 1년에 한 두 차례 밖에 없는 시절이었습니다.
공책을 사야 하는데 돈이 없어 달라하면 엄마가 달걀을 하나 주십니다.
그러면 그것을 가지고 문방구에 가면 공책 한권과 바꾸어 주었습니다.
어느 땐 그 달걀을 호주머니에 넣어 가다가 넘어져 호주머니가
깨진 계란으로 끈적끈적 했던 때도 있었습니다.
그때는 학교에서 점심때 나누어 주는 옥수수 빵은 그야말로
세계에서 제일 맛있는 꿀맛이었고 참 귀한 것이었습니다.
자존심 때문에 “무상원조”, “미국의 잉여 농산물” 이라 하고
배급을 했으나 실상은 서구 기독교단체에서 들어온 구제물품 이었습니다.
제가 아직도 잊지 못하는 것은
우리 반 친구 중에 어떤 여자 아이는 배급된 빵을
다 먹지 않고 조금만 먹고 가방에 싸갑니다.
왜 안 먹냐 물으면 그냥 씩 웃습니다.
나중에 다른 친구를 통해 알았습니다.
집에 있는 자기 동생 주려고 배가 고파도 참았다는 것입니다.
지금, 저 북녘 백성들이 굶어 죽는다는 소식을 들으면 자꾸
그때 우리의 처참했던 현실이 생각납니다.
그래서 가슴이 저려오고 마음이 아픕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서러운 것이 배고픈 서러움입니다.
겪어 보지 못한 사람은 이해가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모든 욕구 중에 가장 기본적인 욕구는
식욕이며 또한 가장 무서운 욕구도 식욕입니다.
이것은 모든 생명체의 본능입니다.
갓 태어난 어린 아이를 보세요.
태어나자마자 찾는 것은 엄마 젖입니다.
그리고 뭐든 손에 잡히는 것은
다 입으로 가져가는 것을 보게 됩니다.
사람이 먹고 싶은 욕구가 얼마나 대단합니까?
이 식욕 때문에 우리 <하와> 할머니가
<뱀>의 유혹에 넘어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일반적으로 양식은 먹는 음식 떡이라 불리는 음식입니다
이것은 왜 먹어야 할까요? 사람이 양식을 먹는 것은 생명을
유지시키고 사람이 살아갈 힘을 부여하는 역할을 합니다.
생존을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은 성경에서
우리 사람이 생존하기 위해서 있어야 할 음식이
밥만이 아니고 아주 중요한 몇 가지가 있다고 가르치십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성경 여러 곳에서 몇 가지를 찾아봅니다.
1. <하나님>의 말씀이 양식입니다.
차는 <휘발유>라는 기름을 넣어야 움직입니다.
기계는 <전기>라는 에너지를 넣어주어야 움직입니다.
마찬가지로 생명을 갖고 있는 짐승도, 식물도,
나름대로의 음식을 먹어야 생명을 유지하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사람은 좀 다릅니다. 우리 사람은 좀 특별합니다.
사람이 생명을 유지하려면 육신의 음식이 있어야 하지만
그것만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에게는 또 다른 양식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사단이 금식기도하신 <예수님>을 찾아와 시험합니다.
굶주린 <예수님>께 찾아와 제일먼저 하신 시험이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돌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지 않으면 너는 죽는다는 것입니다.
그때 주님에게는 얼마든지 그렇게 하실 능력이 있었습니다.
우주 만물을 말씀으로 창조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왜 그것을 못하겠습니까?
그런데 주님은 그때 단호히 말씀으로 물리치십니다.
<마태복음>4장4절 말씀을 보세요.
4절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무슨 말입니까?
사람이 사는 것 떡으로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떡도 필요하나 더 중요한 양식은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그 말씀이 ‘양식’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육신의 양식도 있어야 하지만 우리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이 양식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괜스레
“생명의 말씀” 라 칭하는 것이 아닙니다.
생명을 얻게 하고 생명을 유지시키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하루 밥 세끼 먹는 성도라면
<하나님>의 말씀도 양식으로 먹어야 하는 것입니다.
일주일에 한번 먹는 것으로 그치면 안 됩니다.
허기지고 기력이 떨어져서 헤롱. 헤롱.. 합니다.
무엇이요?? 여러분의 영이 말입니다
밥은 한 끼만 안 먹어도 눈이 쑥 들어간다고 난리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주신 하늘 양식은 어찌 그리도 금식을 잘하는지요?
그러니 믿음이 안자라고 신앙이 늘 어린 아이에 머물러 분별력도 없고
사단의 작은 시험에도 펑펑 넘어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집에 손자나 자식이 한 끼만 안 먹어도
비상사태가 벌어져 숟가락 들고 쫓아다니며 먹입니다.
그런데 자신은 생명의 양식인 말씀은 1주에 한번으로
만족하다고 여기니 기가 막힙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 양식임을 믿는다면 날마다 먹으시기 바랍니다.
아예 성경책을 식탁위에 올려놓고 식사 한 끼 할 때마다 한 줄이라도
한 단원이라도 읽으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래야 우리의 영육이
건강해 지는 것입니다.
2. <예수님> 자신이 양식입니다.
<요한복음>6장48절~51절 말씀을 보세요.
48절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라.
49절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50절 이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51절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하시니라”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자신을 생명의 떡, 곧 양식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먹는 자는 영생하리라 하셨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을 먹는다는 것이 뭔 말입니까?
<예수님>의 말씀을 먹는다는 것도 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믿는 것을
먹는다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영접하고 그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사람은 생명의 떡을 먹은 자입니다.
그러기에 죽지 않고 영원히 사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예수님>이 내속에 들어오십니다.
그러면 우리는 엄청난 분을 우리 속에 모셨기에 엄청난
능력을 갖게 됩니다.
<요한복음>1장12절 말씀에
12절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하나님>의 자녀라는 엄청난 신분이 주어집니다.
그냥 영접하면 됩니다.
내속에 모셔 들이면 되는 것입니다.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는 것입니다.
또 <요한복음>15장 5절 말씀을 보세요.
5절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그렇습니다.
주님이 우리 안에 모셔지면 우리는 많은 열매를 맺게 됩니다.
그러나 반대로 주님을 떠나면 우리는 아무런 능력이 없습니다.
그래서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예수님>이 우리 생명의 삶을 유지하는
절대적인 동력이란 말입니다.
우리에게 <예수님>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닌 존재입니다.
요즘 아이들 말로 바람 빠진 <타이어>요. <배터리> 나간
<핸드폰>이요, 전기나간 <텔레비전>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의 지금 상태는 어떤 상태입니까?
바라기는 재충전하시길 바랍니다.
<예수님>이 양식임을 잊지 마시고
늘 그 분의 은혜를 의지하시고
그분만 바라보며 나가시기를 축원합니다.
3. 우리의 사명이 양식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주님은 이 땅에 사시는 동안 어떤 음식을 먹고 사셨을까요?
육신으로 <유대인>의 혈통으로 이 땅에 오셨기에 <유대인>이 먹는
식사를 하셨을 것이 분명합니다.
어느 날 <예수님>이 <사마리아>로 지나가시다가
<수가성>의 우물가에 쉬고 계셨습니다.
제자들이 동네로 음식을 구하러 간 상태에서
한 여인이 물을 길어려고. 나왔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 여인에게
물을 달라 하시면서 대화가 시작되었습니다.
한참 전도하고 있었는데 제자들이 음식을 구해서 돌아왔습니다.
여인과 대화를 하는 주님을 이상히 여겨 보던 제자들이
주님께 식사를 하라고 음식을 권합니다.
그때 주님은 제자들에게 아주 중요한 말을 합니다.
오늘 본문 <요한복음>4장32절 말씀입니다.
32절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
너희가 알지 못하는 양식, 그것이 뭘까요?
오늘 본문 <요한복음>4장34절 말씀입니다.
34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제자들이 알지 못하는 주님의 양식이 두 가지입니다.
1)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
2) 그리고 그 일을 온전히 이루는 것이
주님의 양식이라 하십니다.
이것을 한마디로 간단히 말하자면
<하나님>이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신 사명, “Mission”
이것을 온전히 이루는 것이 양식이란 말입니다.
“사명이 양식”이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왜 사명이 양식일까요?
양식의 역할이 뭡니까?
음식은 사람의 몸에 에너지를 줍니다.
그래서 우리의 생명을 유지시켜 주고 건강을 유지시켜 줍니다.
양식을 먹지 못하면 생명도 건강도 잃게 됩니다. 그와 같이
사명도 우리에게 삶속에 에너지를 줍니다.
그리고 살아야 할 이유를 줍니다.
죄송합니다. 여러분은
왜 아직도 죽지 않고 살아 계십니까?
잘 먹어서 입니까? 그러면 암으로 질병으로,
사고로 죽는 사람은 잘못 먹어서 죽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그분들도 다 잘 먹었습니다.
그런데 왜 그들을 데려가셨고 여러분은 살아 있을까요?
그분의 뜻이라고요? 그렇습니다. 그분이 왜 살려 주셨을까요?
왜 수많은 죽음의 고비 고비를 넘기고 살려 주셨을까요?
이유는 하나입니다. 아직 사명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그 사명이 여러분의 생명을
유지시켜 주기에 사명이 양식인 것입니다.
왜 많은 사람이 세상을 떠난 것일까요?
그 이유도 간단합니다.
<하나님>이 그분들에게 맡겨주신 임무가 끝났습니다.
그러기에 인생 <드라마>에서 그 사람의 역할이
끝났기에 데려가신 것입니다.
재수가 없어서, 운이 나빠서 죽은 것이 아닙니다.
이번 코로나 바이러스로 많은 사람이 고통당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죽였습니다. 정말 이해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운이나 재수가 나빠서가 아닙니다.
그저 사명이 완수되었기에 데려가신 것입니다.
올해 000 목사님이 소천 하셨습니다.
그분은 아직 50대 중반입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빨리 가셨을까요?
그 또한 사명이 끝났기에 <하나님>이 부르신 것입니다.
그러기에 아직 우리가 죽지 않고 살아가는 것은
운동을 잘해서도 아니고, 남다른 노력을 해서
살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아야 할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뭡니까? 우리에게 부여된 거룩한 사명입니다.
그 사명, 그 일, 그것이
여러분의 생명을 유지시켜 주는 양식입니다.
그것이 사라지면 여러분도 사라집니다.
그 사명이 끝나면
그 누구도 예외 없이 세상에서는 불러 가십니다.
그러면 사명을 천천히 감당하면 오래 살까요?
사명이 있어야 살기에 천천히 뺀질뺀질 하면서
게으름 피우면 오래 살까요?
그런 얕은 머리 쓰는 자는 인생 드라마 무대의 감독이신
주님께서 배우를 얼른 교체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기에
그런데 머리 쓰지 마시고 그런 머리를 사명 감당하는데
쓰시기를 축원합니다.
어느 대학교에 신입생 면접에서
면접관이 응시자에게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네가 이 대학에, 이 학과에 들어와야 할 이유가 무었입니까?”
저는 이 질문을 통해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여러분이 아직도 죽지 않고 이 땅에 살아가야 할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리고 무엇으로 여러분의 생명을 유지하며 살아갈 것입니까?”
많은 사람은 먹을 것을 위해 살고 있습니다.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서 “캬~ 그래 이 맛에 산다”
제발 이런 말 하지 마세요.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왜 사십니까?
먹고 입고 쓰는 것을 위해 살고 있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살고 있습니까?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사시는
삶의 목적을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6장38절~40절 말씀을 보세요.
38절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39절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40절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그렇습니다. 말씀이 양식입니다.
<예수님>의 몸이 우리의 양식입니다.
더 나아가서 사명이 우리의 양식입니다.
우리에게 삶의 동력이기도 하고
살아야 할 이유이기도 한 이 양식,
이 사명 어떻게 감당해야 할까요?
1) 사명을 위해 철저히 순종해야 합니다.
우리 주님이 그리 하셨습니다.
우리 주님의 삶을 보세요.
그것은 온전한 순종의 삶입니다.
<하나님> 말씀에 철저히 순종하므로 온전히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 무서운 십자가의 죽음 앞에서도
“아버지여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시옵소서.”라고
기도하시면서 철저하게 순종하는 삶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래서 죽기까지 복종하시므로 부활의 영광을 누리셨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는 승리의 삶을 누리신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도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마태복음>16장24절 말씀에
24절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하신 것입니다.
2) 다른 사람에게도 사명이 있음을 알려야 합니다.
<예수님>을 보세요. 최후의 만찬에서도
알아듣지도 못하는 제자들에게 당신의 죽으심을 예고합니다.
그리고 그 죽음을 기념하고 그 죽음의 뜻을 전달합니다.
알아듣지도 못합니다. 심지어
<예수님>이 죽는다는 것을 믿으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그 죽으심이 무엇인지, 그 죽으심이
어떤 능력이 있는지를 계속해서 알리고 계십니다.
그 결과 그들은
성령을 받은 후에 다 깨달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주님처럼 살다가 순교하였습니다.
오늘 우리도 주님의 십자가를 전해야 합니다.
듣는 사람이 알아듣든 못 알아듣든 전해야 합니다.
그분의 죽으심 때문에 우리가 영생을 얻었고
그분의 부활 때문에 우리가 다시 살게 되었다고 전해야 합니다.
그러기에 “우리 <예수님>은
당신을 위해 죽으셨고 당신을 위해 살아나셨습니다.”
“그러기에 당신에게도 <하나님> 주신 사명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당신을 부르십니다.”하면서 열심히 전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사명이요. 양식입니다.
3) 우리가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베드로전서>1장16절 말씀에
16절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니라.”하셨습니다.
우리는 구별된 사람들입니다. 왜요? 먹은 것이 다릅니다.
다른 사람은 육의 양식만 먹었으나 우리는 말씀의 양식을 먹었고
<예수님>을 먹었습니다. 더욱이 사명의 양식을 먹었습니다.
그러니 이 멸망할 세상에서
영원한 하늘나라의 백성으로 신분이 바뀐 존재들입니다.
그런데 그런 우리가 거룩을 놓치면 함께 망하는 것입니다.
왜 <소돔><고모라>가 망했나요? 거룩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타락했습니다. 다행히도 <하나님>의 사자를 알아본
<롯>은 조금이나마 거룩이 있었기에 살아났습니다.
우리 주님이 <하나님>의 양식으로 사셨듯이
오늘 우리도 주님의 양식으로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밥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가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 시길 축원합니다.
더 나아가 <예수님>이 양식이고
사명이 양식인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사랑하는 행복 가족 여러분 !
우리는 차원이 다른 구별된 사람들입니다.
삶의 목적도 이유도 다른 사람입니다.
그러기에 주님과 온전히 동행하는
삶을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사명은 우리를 살게 하는 동력입니다.<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