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사에서
2012년 중국 4개국 초청대회 이후 15개월 만에 치러진 남북 여자축구 대결은 개성공단 중단 등으로 경색된 정치상황과는 별개로 스포츠정신이 돋보이는 한판 승부였다. 후반전 도중 북한 김남희 선수가 쥐가 난 한국 지소연 선수의 근육을 풀어 주고 있다.
===>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말처럼 남북선수도 서로를 배려하는데.요즘 국가기록원에 가서 보물찾기하며 기싸움하는 의원들을 보며 한심한 생각이 든다.
방재박사 김랑일님의 글을 보고 사람들에 대한 느낌을 적습니다.
정치하는 사람들이 지역감정을 조장하고
남북한간에도 철천지 원수처럼 대하는것이지
북한에서 귀순한 분들과 대화해보면 선하고 착하더군요,
언론에서 보면 북한사람들은 아주 강하고 격렬해보이지만 순수함이 묻어나는 우리민족입니다.
오히려 영,호남사람들간에 으르렁거리는 경향이 더 심화된것같아요,
나는 1973년 고등학교를 마치고 대학은 갈 형편이 안되어 마침 신문에 직업훈련소(통신기능사 과정)학생 모집 광고를 보고 서울(삼양동)에 올라갔다.
학생중에 부산사는 학생이 있어 같이 자취를 하는데 하루는 시골의 친구한명이 학교를 중퇴하고
우리 사는 곳에 와서(부산 친구에게 양해를 구함) 같이 기거를 하게되었다.
며칠이 지나도 갈 생각을 하지 않아 어떡할거냐 물으니 어디서 구두라도 닦으며 지냈으면 하길래 마침 다니는 태권도 도장에 구두닦는 사람이 있어 '구두닦는 터' 하나 소개해달라고 하니 마침 자기가 조금 있으면 군에 가니 자기 터를 사라고 하며 삼양극장 앞인데 가격은 3만원이라고 하였다.
자취방이 보증금 3만원이라 부산사는 애에게 이야기(수입금의 30%를 주기로)하였더니 흔쾌히 수락하였다. (나는 태권도 도장으로 옮기고 부산 친구는 누나 집으로 옮겼는데 40년이 지난 지금 그 친구에게 너무 미안한 마음임) 내 친구는 며칠 간 구두닦는 연습을 하고 나와 함께 일터로 갔는데 다른 사람이 구두를 닦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그 사람보고 "이 장소를 우리가 샀다" 고 하니 우리를 쳐다보며 이것은 자기터이니 다른 데 가서 알아보라고 쏘아붙였다.
우리는 우리 관원(그 사람 이름도 나와 같은 김상우 임)에게 샀다고 하며 일전을 불사할려고 하는데 마침 방법대원이 지나가다 끼어들었다. 자초지종을 들은 그는 이 터는 이 사람 터가 맞다. 잠시 어디 갔다왔는데 다른 사람이 사기친 것 같다는 말을 듣고 아연 질색(啞然失色; 뜻밖의 일에 얼굴빛이 변할 정도로 놀람)하였다. 아마도 그는 짧은 머리에 모자를 쓴 것으로 보아 어디 영창갔다온 사람같았다. ( 잠시 자리를 비운사이 그가 주인행세를 한 것이다)
우리는 맑게 갠 하늘에서 갑자기 떨어지는 벼락이라는 청천벽력(靑天霹靂) 이라는 표현처럼 멍하니 있다가 태권도 도장으로 달려가 그의 주소를 보고 집으로 찾아갔더니 벌써 짐싸서 종적을 감춘 뒤였다. 그의 본적을 보니 전라남도 담양- 사회에 나와 첫 사기를 당한 것이다. 그때부터 그렇게 남을 등친 그 사람의 나쁜 인상을 어린 마음에 지을 수 없었다.
이렇게 되어 나는 태권도 교사를 하며 직업훈련소를 다니는데 도장에 광운대학교 학군후보생들이 태권도를 배우러 나와 그들과 이야기를 하다 통신기능사 과정이 대학교나 전문대학에도 있다는 것을 알았으며 그래도 우리나라는 학벌이 중요하다고 권유하여 모든 것을 접고 시골로 내려갔다. 그리고 다음 해 예비고사를 보려는데 '94년부터는 예년에 없던 체력장이 생겨 후배들 보기도 그렇고 해서 그냥 전문대학에 진학하였고 재학 중 장교시험에 응시 소정의 과정을 거쳐 육군 소위가 되었다. 임관 후 첫 근무지가 전라북도였다. 35사단에 가서 신고하고 첫 근무지가 남원이었다.
1. 전라북도 이야기
어느 날 동원예비군 훈련하는데 남자들이 모이기만 하면 특유의 말안듣는 것이 관례처럼
통신대장(대위)이 빨리 취침하라고 지시를 해도 안되어 사정 사정을 하는데도 안되어 참다 참다 나중에 " 야 이 개새끼들아, 잠 좀 자라!" 고 소리를 질렀다. 우리 같이 경기도 사람같으면 "어디다 대고 욕해?" 하고 덤벼들줄 알았는데 텐트 안에서 누가 개 짖는 소리" 월 월" 하니 텐트안에서 덩달아 개짖는 소리를 하였다. 그러더니 또 누군가가 "야 ! 들어와봐 물어버릴테니까!" 하는 것이 아닌가? 통신대장과 나는 그 이야기를 듣고 웃음을 참으며 그 자리를 떠날 수 밖에 없었다.
지금도 그 살같은 유머스러움이 잊혀지지 않는다.
진급을 하고 사단으로 전출을 갔는데 퇴근하다 버스에서 임실대대에서 전역한 방위병을 만났다.
"대장님 오랫만인데 막걸리 한 잔 하시지오" 해서 막걸리 집에 가서 막걸리를 마시는데 한 참 마시다 화장실을 가는데 (나는 눈치가 무지 빠름) 시계를 풀어 주인에게 주는 것이 아닌가? 나는 모르는체 하고 더 마시다 나중 "아줌마, 여기 얼마예요?" 하니 저 분이 계산했어요 하여 재차 또 얼마냐고 물으니 방위병 출신이 "대장님, 제가 계산하였습니다" 한다. 그래서 "아줌마 얘 시계주세요" 하니 깜짝 놀라는 것이었다. 나는 대대에서 태권도를 가르치며 못하면 무지하게 혼을 냈었다. 어디 가면 그들이 탐탁하지 않은 간부들에게 제대하면서 "시내에 안 나옵니까?" 라고 은근히 협박성 겁도 주었는데 호랑이 교관같은 나에게 다른 감정없이 나를 대접하는 것이 무척 고맙게 여겨졌다.
나는 그 후 다른 곳에 가서 근무하며 이런 이야기를 자주 써먹었다.
부산 69사단 통신대대장 할 적에 또 동원훈련할 때 남원의 동원 훈련 이야기를 하였다.
그러면서 내가 알고 있는 경상도 사람 특히 부산사람들은 화통하고 멋있어서 이번 훈련 정말 잘할것으로 기대한다고 한마디하니 자기들끼리 "야 빨리 집합해, 줄 잘서" 하며 적극적으로 훈련에 임한 것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2. 경기도 이야기
훈련을 하며 경기도 양평 용문산에 오를 때 병사들에게 간식을 사주려 어느 가게에 들어가 빵을 먹는데 주인 아줌마 왈 " 먼저 계산하고 먹어라"고 하여 조금은 실망을 한 적이 있다.
이 아줌마 고향이 경기도 사람인지 다른 곳에서 시집온 사람인지 몰라도 우리가 빵을 먹고 돈 안내고 도망갈 사람으로 여긴다고 생각하니 불쾌하기까지 하였다.
3. 강원도 이야기
'05년 원주 상지영서대학 초빙교수 모집을 하여 전역하며 고향 경기도 평택으로 가지않고 마지막 근무지인 강원도 인제의 육군과학훈련단 부근 마을에 정착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시골에 귀농.귀향하며 동네사람들과 잘 적응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는데 나에게도 여러번 그러한 일이 있었다.
하루는 마을 상가 집에 갔는데 젊은 사람이 술을 거나하게 마시고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형님은 왜 이 동네에 와서 사십니까?” 마을 내의 군 아파트에 살면서 동네사람들도 내가 군출신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막상 마을에 살게되니 소위 말하는 텃세가 시작된 것이다.
무슨 말인가 알고 보니 부대의 훈련장 부지를 활용하고 싶은데 왜 마을에 협조를 하지 않느냐 하는 것이었다.
언젠가 군수님과 성당 사목위원들이 식사를 하게되었는데
옆에 계신 분이 친절하게 " 군수님, 이 분이 전역하고 이곳에 정착하였습니다. 많이 도와주십시오" 하니 옆에 있던 어떤 사람 왈 "오는 사람보다 여기 사람이나 나가지 않도록 신경쓰십시오" 하는 것이었다.
군민 늘린답시고 외지인에게 그러지말고 토박이부터나 잘 챙기라는 뜻인데 이 말을 들으며 낯선 타향에 사는 것이 만만치 않다는 것을 느끼는 자리였다.
한마디로 아뭏튼 이러한 모든 것을 내 하기 나름이라고 생각하며 또 동네사람들과의 “소통의 부재”와 “참여 부족”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어 그 후 마을 일에 적극 나서서 일하며 상록회 (‘97년 창설한 4-H 같은 청년 봉사단체)에 가입하여 후에 회장까지 하게 되었고 동네 어르신 컴퓨터 교육, 초등학교 생태교육 참여 등을 하고 얼마 후에는 동네 이장에도 추천이 되고 지금은 동네 결혼식 주례까지 설 정도가 되었다.( 그 무엇보다 기쁘게 생각함)
특히 2013년 5월 강원행복추진단(강원도지사 정책 모니터요원, 강원 18개 시군 250명)에서 이러한 주제로 강의를 하여 많은 호응을 받았다.
한가지 강원도 사람들의 특징(나의 주관적인 생각)은 좋게 이야기하면 순박한데
또 어느때는 표현을 잘 안하여 오해를 받는 경우가 종종 있다고 본다.
예를 들면 무엇을 사러가도 먼저 인사를 안하여 뭐 기분나쁜 일이 있나 하고
혼자 생각해본다.
인제군 안호열 과장님이 인터넷 신문에 공무원에 대한 인터뷰 기사가 있어 소개해본다.
* 결론은 지역이 문제가 아니라 사람나름이고 또 모든 것은 나하기 나름 이라는 것입니다.
방학을 맞이하여 좀 한가한데 연일 비오는 날 이런 저런 생각을 해본 글입니다.
첫댓글 비 오는 날, 제가 살아온 삶의 이야기를 적어봅니다
그야말로 사람사는 이야기군요...
귀농 귀촌에서 가장 어렵다는 텃세를 잘 극복하셨네요.
자연과 더불어 함께하는 건강한 삶이 언제까지라도 지속되시길 바랍니다..........
자주 찾아주셔 감사합니다. 요즘 여유가 있으니 삶의 궤적을 한번 생각하게 됩니다. 감사합니다.
바뻐서 절반만 읽구 가네유.. 멋쪄요.. 교수님... 짝짝...
귀감이 가는 사는이야기를 멋지게 크립해서 잘보고 웃다갑니다.
군이라는 특수한 조직생활에 몸에 익숙한 교수님의 꾸준한
노력과 봉사 이웃과 지역을 위한 봉사가 그 보람과 그 결실이
모든 주민들로 부터 존경받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