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의 증인 신도에 대한 유감 1
‘하나님 나라는 과연 어디에 있는가?’
성탄절을 앞두고 전화 한통을 받았다. 자신을 ‘여호와의 증인’ 신도라고 밝힌 사람의 전화다. 나는 성탄절 메시지를 준비하다가 그와 잠깐 통화를 하게 되었다. 그의 말은, 이렇게 힘든 시절에 이 세상이 지상낙원이 된다는 사실을 믿는다면 다소나마 위안이 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나는 목사라고 나의 신분을 밝혔는데, 그는 잠깐 멈칫 하더니 가끔 전화통화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누면 어떤가 하고 제안을 했다. 나는 나의 전화번호를 알려주었고 그는 곧 여호와의 증인에 대한 정보를 보내왔다. 그리고 그들의 잡지인 ‘파수대’도 함께. 나는 마침 준비하고 있던 성탄절 메시지를 그에게 보내주었다.
‘여호와의 증인들’은 이 세상이 지상낙원이 될 것이라고 믿는다. 하늘에 있는 여호와의 왕국이 이 땅으로 내려오면 이 세상의 정부들은 모두 심판을 받고 무너질 것이며 마침내 이 세상에 하나님의 정부가 들어서게 된다고 그들은 믿고 있다. 여호와의 증인들은 자신들의 교회를 왕국회관이라고 부른다. 어쩌면 그들은 예수님의 기도문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으로 오게 하소서!’라는 대목을 문자 그대로 믿는 것 같다. 하지만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한다는 말은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이 땅에서도 이루어진다’는 의미다.
여호와의 증인들은 이 세상 나라와 정부들에 대하여 부정적이고 적대적이다. 그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요한일서 5장 19절 말씀,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고 온 세상은 악한 자 안에 처한 것’이라는 말씀 때문이다. 즉 여호와의 증인들의 교리에 의하면, 세상 나라들이 악한 자의 통치를 받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에 대하여 적대적이므로 그들은 사실상 하나님의 원수가 된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증인들은 여호와의 ‘정부’가 이 땅에 임하기를 기도하고 소망한다. 그때에 비로소 이 세상은 눈물이나 아픈 것이나 죽는 것이 없는 지상낙원이 될 것이라고 믿는다.
이것은 여호와의 증인들이 성경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이는 특징을 잘 보여준다. 그들이 수혈을 거부하고 병역의 의무를 회피하는 것도 성경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는 잘못에서 기인한 것이다. 육체의 생명이 피에 있음(레 17:11)과 살인금지의 명령을 문자 그대로 지키기 위해서 그런 것 아닐까 생각해 본다. 신앙인들이 이런 종류의 잘못을 저지르는 이유는 그들의 성경해석이 초보적이기 때문이다(히 6:1). 초보 신앙인이 범하기 쉬운 잘못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이렇게 가르쳐 준다: ‘문자는 사람을 죽이고 성령은 사람을 살립니다’(고후 3:6-공동번역성경).
나는 여호와의 증인들이 믿는 지상낙원에 대하여 좀더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예언자들의 글에는 ‘사막이 낙원처럼 변화될 것’을 보여주는 설명이 있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상징언어로 표현된다:
사자와 어린 양이 함께 뒹구는 세상,
독사굴에 어린 아이가 손을 넣어도 물지 않는 세상,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인정하는 것이 온 세상에 충만하게 되는 세상
(이사야 11장).
이전 세상이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멋지게 다시 지음을 받을
새 하늘과 새 땅, 즉 새로운 세상
(이사야 65장, 계시록 21장).
만인이 여호와의 예언자들처럼
하나님의 성령으로 충만하고
하나님의 뜻에 정통하여,
아이들은 예언을 하며,
청년들은 환상을 보고,
아비들은 꿈을 꾸는 세상
(요엘 2:28~29).
새 예루살렘 성이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와
온 세상이 마치 지성소처럼 거룩한 곳이 되며
만인이 하나님을 경배하는 세상,
그리고 에덴동산처럼 생명수가 흐르고
생명나무가 사시사철 그 열매를 맺는 세상
(계시록 21장).
성경을 읽으면서 이런 구절들을 본다면, 우리는 ‘이런 곳이야말로 천국이며 지상낙원이겠구나!’ 하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렇게 질문할 수 있을 것이다:
‘언제 이런 일이 일어날까?’
‘이런 세상은 어디에 있을까?’
신학자 톰 라이트는 주장하기를, 이런 낙원이 천상에 있을 것이라고 믿는 생각은 플라톤 철학에 물든 종말론에서 온 것이라고 한다. 성경은 언제나 이 세상을 통치하시고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이야기하지만, 헬라의 어떤 철학자들은 물질 세계는 영적인 세계의 그림자일 뿐이라고 이해했다. 기독교의 복음이 헬라인들에게 전달되면서 헬라인들은 자신들의 언어와 철학으로 기독교의 신앙을 이해하고 표현하려고 노력했다. 그 결과 그들은 삼위일체론을 개발하여 하나님의 속성을 설명하려고 시도했다.
헬라 철학의 옷을 입은 기독교 신앙은 사람들에게 물질을 초월하여 더 높고 거룩한 곳에 계시는 하나님을 추구하는 것을 미덕으로 여겼다. 하지만 물질세계와 이 세상은 열등하고 심지어 추한 곳으로 여기는 오해도 낳았다. 그 결과 하나님의 나라는 이 세상이 아닌 천상의 세계에 있을 것이며, 우리는 결국 이 세상을 떠나 천상에 있는 하늘나라로 들어가게 될 것이라고 굳게 믿기 시작했다. 그것이야말로 영혼의 구원이었고, 영원한 낙원에 들어가는 것이라는 믿음이 신자들의 마음에 굳게 자리잡았다.
한번 이렇게 그 궤도가 정해지자 세상 가운데서 하나님의 대리인으로 부름받아 세상을 관리하고 세상 가운데서 하나님의 뜻이 실현되게 하는 성경의 본래 이상은 점점 사라졌다. 즉, 신앙인들은 점차 육체보다는 영혼을 귀하게 여기고, 물질세계보다는 천상의 세계가 진짜라고 여기며, 현실문제보다는 내면의 문제에 집착하게 되었다. 그 결과 세상을 변화시키는 역동성을 가진 기독교 신앙은 점차 그 힘을 잃고 거대한 예배당 안에서만 울리는 소리가 되었고, 끊임없이 내면의 도덕성을 점검하는 ‘자학적’ 종교가 되고 말았다. 이것은 천년이 넘도록 거대한 파도를 이루어 종교개혁자들도 그 물결을 어찌하지 못하고 오늘에까지 우리 기독교인들의 마음과 생각을 지배하고 있다.
톰 라이트는 기독교인의 인간론이 하나님의 세계를 맡아서 관리하는 대리인적 존재에서 끊임없이 자신을 점검하는 도덕적인 존재로 전락하고 말았다고 탄식한다. 신도들의 기도에서 자신을 반성하는 내용이 주류를 이루는 이유가 이것이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의 현안과 문제에 대하여 깊은 관심과 책임감을 가지고 세심하고 적극적인 태도로 임하는 모습은 매우 낯설게 느껴진다. 어떤 경우에는 그런 신앙을 정통복음주의에서 ‘벗어난’ 것으로 간주하기도 한다.
기독교 신앙이 2천년의 세월을 지나는 동안에 여러 지역과 문화를 거치면서 그 본래의 특징을 잃어버린 점들이 있다. 톰 라이트는 그것을 세 가지로 정리하여 설명했다:
(1)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어그러지고 왜곡된 현실을 바로잡기 위해서 주님이 다시 오실 것이라 믿는 신앙이 변질되어 우리를 이 세상으로부터 건져내어 저 세상으로 데려가시려고 주님이 다시 오실 것을 기대하게 되었다. 그것이 바로 플라톤 철학의 영향에 물든 종말론이다(Platonized eschatology).
(2) 그리고 인간은 본래 하나님의 세계를 맡아 관리하는 청지기로서 하나님의 동역자로 부름을 받아 하나님을 경배하고 세상을 다스리는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믿는 신앙이 변질되어 인간이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도록 늘 자신을 도덕적으로 점검하는 존재로 여기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도덕주의에 물든 인간론이다(Moralized anthropology).
(3)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 세상에 오셔서 그 백성을 불러 모으시고 다시 세상을 새롭게 하시려고 통치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신앙이 변질되어 오로지 하나님의 진노를 달래기 위하여 희생제물이 되어야 하는 분으로만 믿게 되었다. 그것은 순전히 이교도의 신앙에 물든 기독론이다(Paganized soteriology).
이렇게 변질된 신앙이 자리잡은 공동체 안에서는 언제나 시한부종말론자들이 일어날 수 있다. 1992년에 우리나라에서 일어난 휴거 광풍이 지나간 후에도 신천지 집단이 144,000명만이 들어가는 천국에 들어갈 수 있게 해주겠다고 수많은 백성을 세뇌하여도 속수무책인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기존 교회가 신천지 교리의 문제를 아무리 지적하여도 스스로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그들과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어떻게 근본적인 대책을 세울 수 있겠는가? 어떤 교회들은 대문에 신천지 무리의 출입을 금한다고 글을 써서 붙이지만, 사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 신앙의 물길이 어디로 흐르는지 되돌아보아야 하지 않을까 하고 나는 생각한다.
여호와의 증인들도 이런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들이 말하는 지상낙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뜻을 이 세상 가운데 실현할 수 있는 용기와 희망의 원천이 아니다. 그들이 말하는 지상낙원은 문자 그대로 하늘의 왕국이 이 땅에 내려올 때 완성되는 세상이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증인들은 이 세상 정부나 단체와 손을 잡고 함께 더 나은 세상을 이루어 나가는 일을 헛된 일로 여길 수 있다.
문제는 여호와의 증인들만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나도 그리스도인으로서 이 세상 나라와 정부, 그리고 이 세상의 일에 대하여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살아왔다. 그것은 이 세상이 아닌 저 세상에 우리의 본향이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런 신앙은 도피주의적 복음(gospel escapism)일뿐이다. 신앙이 자신과 현실을 개선할 의지와 목적을 상실한다면 그런 신앙이 어떻게 세상을 새롭게 할 수 있으며 우리 공동체에 유익이 될 수 있겠는가!
나는 대학시절에 골로새서 3장에 나오는 바울의 권면을 암송했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골로새서 3:1~2)
그때 나는 이 구절을 암송하면서 이 세상의 일을 땅의 것이라고 생각했다. 위의 것, 즉 하늘을 생각하라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 뒤를 읽어보면 알 수 있는데도 당시에는 오로지 천국을 생각하고 신앙생활 그 자체를 열심히 하라는 권면으로 이해했다. 그런데 이제 보니 이 권면은 하늘의 정신을 추구하여 이 세상에서 거룩하고 자비롭고 겸손하게 살라는 말이었다. 우리가 추구하지 말아야 할 땅의 것이란 악한 욕심과 음란한 짓이었다.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이 만들어가는 세상이야말로 살기 좋은 세상이 될 것이다. 그들은 하늘의 뜻을 이 땅에서 실현하기 위해 기도하고 행동할 것이다. 그들은 결코 어서 이 세상을 떠나 천국으로 들려 올라갈 것을 기다리며 소극적으로 기다리고 앉아 있지는 않을 것이다.
인간이 성숙한다는 것은 편견과 오해로 인한 두려움을 극복한다는 뜻일 것이다. 문화가 발전하는 것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러나 그런 성숙과 발전은 아집과 전통이라는 딱딱한 껍질이 깨어지는 고통을 겪어야 한다.
<끝>.
참고 자료:
2021년도 마지막 주일예배 설교
제목: 하나님의 꿈
https://cafe.daum.net/Wellspring/6zBK/525
톰 라이트의 강연:
기독교의 세 가지 오해: 종말론, 인간론, 구원론에서
https://cafe.daum.net/Wellspring/8SB1/4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