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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의 모습 (2) (요17:20-26절)
‘슈퍼스타’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장면이 성경에서는 간단하게 기록되어 있는데 이 영화에서 작가는 여러 가지 상상을 하여 예수님의 기도를 소개하는데 좀 인상적입니다.
예수님의 기도 중에 첫 번째 기도에서‘하나님 내가 진정 죽어야 합니까. 내일 아침에 반드시 죽어야 합니까.’라고 자신의 죽음의 부당성을 항변하며 아버지께 대들며 부르짖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기도는‘하나님 나의 죽음에 대한 보상은 무엇입니까.’라며 하나님의 진노의 잔을 받는 보상을 당당하게 요구하시고 계십니다. 그 보상을 알아야 살든지 죽든지 하겠다는 자신의 의지를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가서는‘All right, I will die’‘좋습니다. 제가 죽겠습니다. 당신의 뜻이 그러하시다면 제가 죽겠습니다.’라고 하면서 아버지의 뜻이 정녕히 그러하시다면 억지로라도 따르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순종은 잠시 뿐 다시 다음과 같은 말을 이어가고 있습니다.‘Take me, Kill me now before I change my mind.’‘나를 지금 죽여주십시오, 내 마음이 변하기 전에.’ 순종은 하되 억지가 섞인 약간 불평의 순종입니다. 자신의 마음이 변하면 도망치거나 거절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내 마음이 변하기 전에 죽이려면 죽이고, 아버지 마음대로 하시라는 것입니다. 만약에 이 시간을 놓치면 그것은 아버지의 책임이지 자기의 책임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예수님의 인격과 겸손, 그리고 사랑과 순종하심을 모르는 작가의 인간적인 상상입니다. 아마도 이 작가는 불신자로서 보통 사람 예수를 표현한 것 같습니다. 우리 주님은 이런 분이 아니지 않습니까.
어느 해 미국 설교자 한 분이 사경회에 와서 이런 재미있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가 사경회에서 로마 카톨릭 신부 한 사람을 만났답니다.
처음에는 날씨에 관해 이야기 하다가 점차 영적인 문제를 다루게 되었는데. 목사님이 이렇게 신부님께 질문을 했습니다.
‘카톨릭 교회에 대해서 내가 한 가지 늘 마음에 부담스러운 것이 있는데 당신들은 예수님의 어머니인 마리아에게 왜 그렇게 높은 지위를 줍니까.’
‘우리 개신교도 마리아에게 충분히 존경을 표하고 있지만 그렇지는 않습니다. 천주교에서는 왜 그렇게 마리아가 큰 비중을 차지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 신부가 잠깐 생각을 하더니 이렇게 말을 하더랍니다.
‘내가 이 나라의 임금님을 만나러 간다면 먼저 할 일이 있지요. 즉 나를 왕에게 소개할 사람을 사귀는 일입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이렇게 다시 물었습니다.
‘만약에 왕이 당신의 아버지라면 당신을 소개할 사람이 필요 없지 않나요.’목사님의 말에 신부는 아무 말도 못했다고 합니다.
창조주 하나님이 내 아버지라는 것. 구원의 하나님이 나의 주님이라는 것, 이 사실을 깨달을 때에 기도의 단순성, 기도의 직접성을 이해하게 됩니다.
주님은 아버지께 무릎을 꿇고 기도하셨습니다. 누구를 통해 기도하신 것이 아니라 직접적으로 아버지께 간구하시고 소원하셨던 것입니다.
로리 베스 존스(Laurie Beth Jones)가 쓴 『JESUS CEO』란 책이 있습니다. 국내에서는 『예수의 오메가 리더십』이란 제목으로 출간되었던 책입니다.
머리말에 있는 내용을 간략하게 소개하면,
남성적이며 권위적인 힘의 사용에 기초한 기업경영을 알파 경영(Alpha management)이라고 하고, 여성적이며 상호 협조적인 힘의 사용에 기초한 기업경영을 베타 경영(Beta management)이라고 합니다.
이들 두 경영 스타일을 상호 연계시키고 고양시키는 경영을 오메가 경영(Omega management)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경영이 바로 오메가 경영이라는 것입니다. 남성적 경영과 여성적 경영을 조화시켜 완벽한 합리적 경영을 만들어 내신 것입니다.
‘예수의 오메가 리더십’은 다음의 세 가지 전제에 기초를 두고 있습니다.
첫째, 한 사람이 열두 명을 훈련시켰습니다.
훈련받은 열두 명은 세상에 나가서 엄청난 영향을 미쳤습니다. 현재 우리가 알고 있듯이 그 한 사람의 삶에 따라 역사의 시대를 구분하여 기록하고 있습니다. 즉 그 한 사람이 태어나기 이전은 B.C.(Before Christ)로, 죽은 이후는 A.D.(Anno Domini : in the year of our Lord)로 구분하여 역사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둘째, 그 한 사람은 열두 스태프들과 함께 일하였습니다. 그 스태프들은 비록 무식하고 형편없는 배경을 가졌고, 성깔도 있고, 때로는 비겁쟁이였지만 자신이 수행하도록 훈련받은 과업을 달성하기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어 놓았습니다.
그들은 오로지 그 한 사람과 함께 하기 위한 이유 하나만을 위하여 그들의 과업을 성실히 수행하였습니다.
셋째, 그 한 사람의 리더십 스타일은 우리 모두가 누구든지, 어떤 환경에 처하여 있든지, 실천할 수 있는 행동기법(behavioral technique)에 기초를 두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예수의 경영 리더십이 현대 기업에 적응되고 있다는 사실은 상당히 고무적인 일입니다.
정말로 예수님의 제자 훈련이나 교회를 향한 그의 기도는 그 영향력이 막강하여서 2,000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그대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예수를 믿는 모든 사람들이 그의 제자가 되어서 그 분과 함께 하기 위하여 목숨을 던지고 충성하는 것입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주님 생애의 마지막 기도를 생각하면서 그 기도 속에 숨어있는 교회의 모습, 우리들의 모습 일곱 가지를 깨닫는 시간입니다. 지난주에 이어서 주님께서 바라시는 교회의 모습을 통하여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5. 교회의 다섯 번째 모습은 연합입니다.
*요17:20-21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그들의 말로 말미암아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기도는 목전의 제자들을 위하는 것에서 믿는 모든 사람들을 위하는 기도로 발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과 하나님이 하나인 것처럼 믿는 모든 이들이 하나가 되어 아버지와 아들 안에 있게 하시기를 원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을 떠나심에 있어 남아있게 될 제자들, 그리고 오고 오는 세대에 연합될 하나의 교회를 위해서 기도하신 것입니다.
당신의 피로 사신 교회가 이 세상에서 어떻게 존재해 가며 어떻게 활동해 갈 것인가를 주님은 이 기도 속에서 밝히고 계신 것입니다.
그것은 주님의 교회가 하나의 거대한 영적 유기체로 연합되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연합의 원리를 말씀하실 때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라고 하셨습니다.
하나의 진리, 하나의 신앙, 하나의 영광을 통하여 연합될 이 영적 유기체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총으로 인한 연합에 그 기초를 두고 있습니다.
인간과 그리스도의 연합은 주의 대속적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보여주신 영원한 생명을 믿음으로 수용할 때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성도와 그리스도와의 기본적 연합이 성취된 다음 성도와 하나님과의 연합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하나의 거대한 영적 유기체로서의 교회는 우주적인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아버지, 그것이 교회의 실체입니다. 아들 안에 계신 아버지는 그 이름의 능력과 영광의 빛으로 존재하고, 아들은 아버지의 본질과 희생적 사랑으로 그 안에 존재합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이 연합은 교회와 아들과의 연합의 모범이 됩니다.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생명의 신적 본질로서 그를 표현하고, 마음과 정신은 도덕적 품성으로 그를 나타내며, 계시에 대한 의지적 응답으로 성결 된 하나님의 형상을 이 세상에 계시함으로 그리스도를 증거 합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이 세상에 그 실체를 표현하고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그 실체를 거룩하게 드러내 보여야 하는 것입니다.
역사상 기독교가 일시적으로 유행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약 2세기 경 심한 핍박과 압제 속에서 살아남은 기독교가 갑자기 로마 정부에 의해 공인된 것입니다. 이로서 기독교는 로마의 국가 종교가 되었고 모든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희망하였습니다.
그러나 박해로 기독교가 위험에 처한 만큼이나 공인된 결과로 얻은 인기는 기독교를 위험에 빠트렸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스스로 자신을 그리스도인이라 부르기 때문에 아무도 그리스도인의 삶이 무엇인지, 기독교가 세상과 어떻게 구별되어야 하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기독교는 제도화 되고 의식화 되어 이상한 종교가 되어버렸습니다. 사단은 기독교 속에 들어와 있었고 예배는 의식이 되고 경건은 세속화 되어갔습니다. 이로써 천주교가 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으로부터 비난과 고통을 받고 미움과 증오를 받으며 신앙을 지켰던 초대교회의 기쁨은 사라져 버렸던 것입니다.
오히려 서로 경쟁하면서 자신의 명예와 이익을 추구하고 이기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오늘날과 별로 다를 바가 없을 것입니다.
아직도 거듭나지 못한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랐을 때 그들은 자리다툼을 하고 서로에 대해 우열을 정하며 경쟁을 일삼았습니다. 이런 제자들을 위하여 주님은 그들이 하나 되기를 기도하셨습니다.
수리남 지방의 어떤 총독이 그의 흑인 노예들에게 물었습니다. ‘집에서 편히 쉴 수 있는 날이 되면 왜 항상 교회로 가서 함께 노래하고 기도하는가.’ 라며 그 이유를 물었던 것입니다.
마침 그때 석탄 덩어리들을 모아 놓고 불을 피우던 한 여자가 대답했습니다. ‘주인 나리 이 석탄 덩어리들을 보십시오. 만약 이것들이 하나하나 떼어놓게 된다면 그 불은 곧 꺼져버릴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들을 모두 한 곳에 모아서 함께 태우기 때문에 매우 귀중한 불을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이지요.’
예수님의 하나 되게 하신 기도는 세 가지 내용이 있습니다.
첫째는, 성도 공동체의 연합을 성부와 성자의 일체성에 근거하여 간구하시고 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십니다.
*요14:10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또 아들은 아버지 안에 있으므로 두 분은 하나로 존재하고 일하십니다.
*요10:30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하신대..
그러므로 주님은 제자들이 하나가 되도록 기도하시고 제자의 증거를 통해 얻게 될 사람들, 즉 교회가 하나가 되도록 기도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하나 됨의 의미가 제도적이거나 조직적인 차원의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더구나 교회의 구성원 모두가 주체성을 상실한 채 기계적으로 통합되는 것을 의미하지도 않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존재 양식에 있어서 각각 독립적이나 그 본질에 있어서는 완전한 일체를 이루듯이 교회 내의 각 지체들도 나름대로 다양한 특성을 지닌 가운데 통일을 하는 것입니다.
*고전12:12-13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는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그러나 성도들이 하나님 안에 있는 것은 아들이 아버지 안에 있는 것과는 질적인 측면에서 엄연히 구별되는 것입니다.
둘째는, 주님은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인 것을 전제하고 아버지와 아들을 하나로 묶어 ‘우리 안에’ 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이나 믿는 사람들이 아버지와 아들 안에 동시에 거하게 된다는 것을 말씀하셨는데 이것은 역으로 아버지와 아들도 동시에 우리들 안에 거처를 삼으신다는 것입니다.
*요14:2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
‘에안 티스 아가페 메’ 이 말을 직역하면 ‘사람이 쉬지 않고 지속적으로 나를 사랑한다면’ 이라는 말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일회적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이라야 한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나의 일상에 나타나심을 계속적으로 경험하고 싶다면 우리가 지속적으로 사랑해야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종교는 신이 인간과 신비한 연합을 한다는 점을 역사성이 결여된 채 신비한 것만 강조하지만 하나님의 임마누엘은 성육신하신 그리스도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내주하심에 대한 전제 조건은 주님에 대한 도덕적 복종과 사랑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성도 공동체가 하나님과 그리스도 안에서 일체를 이룸으로서 세상이 이를 통해 믿음을 갖게 되기를 간구하셨습니다.
물론 주님의 이 기도가 세상 사람들 모두가 믿음을 갖게 해 달라는 것은 아닙니다.
*요15:20 내가 너희에게 종이 주인보다 크지 못하다 한 말을 기억하라 사람들이 나를 박해하였은즉 너희도 박해할 것이요 내 말을 지켰은즉 너희 말도 지킬 것이라.
*요15:22 내가 와서 그들에게 말하지 아니하였더라면 죄가 없었으려니와 지금은 그 죄를 핑계할 수 없느니라.
*요15:24 내가 아무도 못한 일을 그들 중에서 하지 아니하였더라면 그들에게 죄가 없었으려니와 지금은 그들이 나와 내 아버지를 보았고 또 미워하였도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 중에는 지금은 비록 불신 가운데 있지만 장차 믿음과 구원에 이르게 될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이로 볼 때 세상을 감동시키는 성도들의 하나 됨은 배후에서 하나가 되도록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불가항력적인 능력과 은혜에 의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예수님의 풍성한 은혜로서 연합의 증거를 드러내어 세상을 믿음으로 인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창조주와 구속주의 결합, 이보다 더 큰 은혜는 없을 것입니다. 그 결합으로 인해 성도들의 하나 됨과 온전함이 가능해진 것입니다.
6. 교회의 여섯 번째 모습은 영광입니다.
*요17:22-24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곧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그들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그들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
성도의 온전함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될 때 가능합니다. 하나가 된다는 말은 협력, 단합, 일치라는 말로 표현될 수 있습니다. 서로 협력하기 위해서는 서로에 대한 신뢰와 사랑이 우선해야 합니다. 믿음과 사랑이 없는 협력은 지탱하기 어렵습니다.
천국이라는 하나의 목표 아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결합된 성도들만큼 강한 군대는 없습니다. 성도들이 추구하는 나라의 속성은 완전한 결합, 즉 하나 됨입니다. 성도의 하나 됨 없이는 하늘나라의 영광도 특권도 모두 무효가 됩니다.
성도들은 아버지와 아들의 하나 됨을 바라보며 하늘나라 영광을 위해 하나를 이루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배반하여 세상에 속한 자가 되었으며 하늘 영광과는 멀어져 있었으나 그리스도의 중재로 하나님과 연결되는 은혜를 입었습니다.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룸으로 이제 하늘 영광을 되찾을 수 있는 자리에 들게 된 것입니다.
어느 추운 겨울 소련의 군인들이 열두 명의 기독교인들을 잡아다가 며칠 동안을 굶긴 후 각자 얼음구멍을 파게 했습니다.그리고 그들을 벌거벗긴 후 한 사람씩 구멍에 들어가게 하고 그 옆에는 따뜻한 불과 음식을 차려 놓았습니다.
군인들은 ‘지금이라도 예수를 부인하면 따뜻한 불을 쬐며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 있다.’고 유혹했습니다.한참을 지난 후 한 사람이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얼음 구멍에서 올라 왔습니다. 그 때 이들을 지키던 한 군인이 하늘에서 면류관을 가지고 내려오던 열두 천사 중 한 천사가 눈물을 흘리며 올라가는 것을 환상으로 보았습니다.
그러자 그는 재빨리 군복을 벗고 얼음구멍에 들어가며 ‘이 사람이 버린 예수를 내가 믿겠다.’고 말하면서 순교를 당했다고 합니다.
신앙생활을 잘 하려는 사람에게는 여러 가지 핍박이 찾아옵니다.경제적인 어려움으로 고통을 받기도 하고, 사랑하는 사람이 뜻하지 않은 질병으로 고생하고 세상을 떠나기도 하고, 때로는 친했던 교회 동료가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합니다.
그러나 순교도 주저하지 않았던 믿음의 선배들처럼 우리도 천국의 소망을 바라보며 어려움을 극복해야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질문을 합니다. ‘하나님께서 스데반 집사를 왜 그렇게 일찍 데리고 가셨을까. 하나님은 공평하시지 않아.’그런데 우리가 육신으로 생각하면 젊고 신앙심이 좋은 스데반이 일찍 죽은 것이 좀 억울하다는 생각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에게 엄청난 명예를 주셨습니다. 열두 사도들보다 먼저 순교하는 기독교 최초의 순교자라는 명예를 집사에게 주신 것입니다. 또 이 땅에서 수고를 그치고 하늘나라의 영원한 생명을 주셔서 주님의 환영을 받게 해 주셨습니다.
이러한 복을 어찌 적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어느 교회의 집사님이 어린이날 행사를 하기 위해 풍선에 가스를 넣다가 가스통이 폭발하여 화상을 입고 급히 병원에 실려 갔습니다. 연락을 받은 목사님이 병원을 찾아가 집사님에게 기도를 하기 전에 먼저 화를 냈다고 합니다.
‘좀 조심하지 그랬어요.’‘이를 어떻게 하나’그런데 이 집사님은 싱글벙글 웃으면서 ‘목사님 그래도 감사하지요. 내가 안 다치고 믿음이 부족한 평신도가 다쳤으면 어찌할 뻔 했나요. 교회가 큰 시험에 들 뻔 했어요. 하나님 감사합니다.’목사님이 어이가 없어 웃으면서 속으로 자신의 경솔함을 회개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6개월 진단이 났는데 2개월 만에 상처가 깨끗이 나았고 흉터도 거의 없을 정도로 말끔히 나았다는 것입니다.
서울에서 목회를 크게 하시던 목사님이 충청도 아산군 봉제면에서 작은 목회를 하시는 농촌 교회 목사님을 찾아갔습니다. 어렵게 목회를 하고 계시니 근황이 어떠한지 궁금해서 찾아갔는데 마침 외출을 하고 집에 계시지 않았습니다. 한참을 기다리다 목사님을 만나서 ‘어딜 그렇게 다녀오십니까.’하고 물었습니다.
농촌 목사님이 대답을 망설이고 우물쭈물하자 더욱 궁금해진 목사님이 빨리 말해 보라고 다그쳤습니다. 그랬더니 목사님이 하시는 말씀이 ‘내가 이 교회를 개척한 날로부터 사역비에서 조금씩 떼어 푼푼히 모은 돈이 2,000만원이 되었는데 마침 어려운 이웃이 있어서 그 돈을 전해주고 왔다.’고 하였습니다.
시골 교회 목사님의 사역비라야 고작 얼마 되지 않는 돈인데 그 돈에서 푼푼히 저축한 돈을 아무도 모르게 가난한 이웃을 위해서 사용했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처지도 변변치 못하고 생활은 극히 가난한데 그 상황에서 평생을 모은 돈을 아낌없이 주었다는 말을 듣고 부끄러워 얼굴을 들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목사님은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이렇게 생각했다고 합니다. ‘아! 요즈음도 이런 목사님이 계시는구나. 그래도 한국교회는 미래가 있어.’
어떤 예수 믿는 신혼부부가 아기가 없어 주님께 간절히 매달렸습니다. 시험관도 해 보고, 별의별 방법을 다 해 보았지만 아기는 수태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병원에서 기쁜 소식을 들었습니다. 천신만고 끝에 아기가 잉태되었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좋았든지 주님께 감사하고, 교회에 잘 다니고, 목사님에게 축복기도도 받고, 태중 관리도 잘 하였습니다. 출산할 날이 가까워 오자 병원에 가서 검진을 받는데 의사가 경천동지할 말을 합니다. ‘미안합니다. 어떻게 합니까. 아기가 뇌가 없어서 출산한다고 해도 하루 밖에 살지 못합니다. 유산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집으로 돌아온 부부는 기가 막혀서 말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한 참 후에 남편이 아내를 달랩니다. ‘여보, 우리 그만 포기하자. 유산시키고 당신 건강이나 돌보자.’아내는 눈물을 흘리며 아무 말이 없습니다.
다음 날 아내가 남편에게 자기의 의견을 말합니다. ‘여보 나 좀 도와줘. 우리가 아기를 달라고 하였지, 어떤 아기를 달라고 한 적은 없잖아. 하루를 살더라도 이 아이는 우리 아이야. 나는 아기를 낳고 싶어. 그리고 아기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자.’
남편도 아내의 말에 동의를 합니다. ‘그래 당신 말이 옳아, 이 아이는 우리 자식이야. 하루만 살면 어때.’그날부터 부부는 아기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출산을 기다립니다. 드디어 아기가 태어나자 남편은 아기의 이름을 짓고 동사무소에 달려가 출생신고를 하고 병원으로 달려옵니다. 아들과 상면하기 위해서 설레는 마음으로 달려옵니다.
단 하루의 아버지, 단 하루뿐인 어머니지만 그들은 진심으로 아기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여러분은 영광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예수님의 영광은 창세전에 아버지와 함께 했던 영광과 지상의 모든 사역을 다 마친 후에 아버지와 함께 누릴 영광들을 모두 포함하는 것입니다. 특히 예수님은 그의 마지막 설교와 기도에서 십자가와 영광을 분명하게 연결시켰습니다.
*요16:14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겠음이라.
성령의 역할은 세상을 책망하며 제자들을 진리로 인도하는 것이지만 또 하나 예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주님의 공생애와 십자가의 죽음은 모든 사람들의 눈에 수치와 무기력으로 보였지만 오순절에 강림하신 성령의 증거를 통하여 예수의 위엄과 영광이 확연히 드러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영광은 수난과 자기 비하에서 나타났습니다. 하나님의 독생자가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심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셨습니다. 그가 지상에 계실 동안에 수없는 영광을 드러내셨고 결정적으로는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부활과 승천을 통해 나타났습니다.
‘내게 주신 영광을 저희에게 주었사오며’
이제 제자들 역시 아들의 영광을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에게 주어진 영광이란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리스도와 함께 세세토록 왕 노릇하는 영광이요, 영원히 사랑 가운데 거하는 축복입니다.
*딤후2:11-12 미쁘다 이 말이여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도한 함께 살 것이요 참으면 또한 함께 왕 노릇 할 것이요 우리가 주를 부인하면 주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이라.
예수 그리스도의 삶이 수난의 삶인 동시에 그 길은 영광의 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진정한 영광은 십자가의 길을 걸음으로써만 획득되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들의 영광이 아버지의 모든 뜻에 순종하는 것에서 나타났듯이 제자들의 영광도 십자가의 길에 동참하는 가운데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각기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자신을 부인하고 예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성도들의 십자가는 믿음 안에서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 연합함으로 순종과 겸손과 수난을 통하여 영광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따라서 믿는 자들에게 있어서 십자가는 형벌이 아니라 제자 됨의 사명과 하나님의 자녀 됨의 존귀함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미국의 저명한 신학자 윌리엄 바클레이는 고난이 영광이라는 사실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지는 십자가를 형벌로 생각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오히려 십자가는 그리스도인의 영광입니다.
학생이 공부하는 것이 힘들고 기술자나 의사들이 하는 일이 어려울수록 그들이 더 많은 영광과 명예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삶이 힘이 들수록 우리는 그것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영광이요 명예로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제자들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힘으로 획득한 영광을 세상 가운데서 실제적으로 나타낼 때에 아버지와 아들이 있는 곳 즉 영원한 천국에서 영원한 영광을 보게 될 것입니다.
7. 교회의 일곱 번째 모습은 사랑입니다.
*요17:25 의로우신 아버지여 세상이 아버지를 알지 못하여도 나는 아버지를 알았사옵고 그들도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 알았사옵나이다.
하나님의 사랑 없이 성도의 영광은 불가능합니다. 당신의 사랑하는 아들을 우리에게 보내실 만큼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우리에게도 하늘 영광에 동참할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입니다.
우리는 사실 하나님을 배반한 자들로서 영광을 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그러나 사랑의 하나님은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고 그리스도를 보내심으로 우리가 다시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는 특권을 주셨습니다.
오직 사랑의 하나님만이 취하실 수 있는 은혜의 역사인 것입니다.
죄인들을 구속하기 위한 하나님의 사랑으로 그리스도는 보내심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독생자인 그리스도를 사랑하십니다. 그러므로 그의 아들 안에 있는 자들도 아울러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란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요일4:14-15 아버지가 아들을 세상의 구주로 보내신 것을 우리가 보았고 또 증언하노니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 하나님이 그의 안에 거하시고 그도 하나님 안에 거하느니라.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사랑하는 자들을 사랑하시므로 아들이 그들을 위해 기도할 때 기꺼이 들어 주십니다.
세상의 무지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아버지에 대한 무지이며 다른 하나는 아버지께서 아들을 보내셨다는 사실에 대한 무지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으로 하여금 아버지께서 아들을 보내신 것을 믿게 하기 위하여 기도하셨고 또 세상의 믿음을 위하여 제자들이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하나 되기를 기도하신 것입니다.
사랑 없는 기쁨은 향락주의가 됩니다. 그리스도 없는 거룩은 스스로 의인이 됩니다. 사랑이 없는 진리는 쓰디 쓴 전통 보수가 됩니다. 사랑이 없는 전도는 사람을 내 식민지로 만듭니다. 제일 큰 교회의 모습은 사랑입니다.
이 사랑이 어디서 옵니까.
*요17:26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그들에게 알게 하였고 또 알게 하리니 이는 나를 사랑하신 사랑이 그들 안에 있고 나도 그들 안에 있게 하려 함이니이다.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이름을 제자들에게 알게 하였다는 것은 과거형입니다. 그러나 또 알게 하리니 라고 한 것은 미래형입니다.
골고다에 올라가셔서, 십자가에 달리셔서 아버지의 사랑을 나타내실 것을 말씀하십니다. 이 미래에 알게 하신다는 십자가를 확신하시기 바랍니다. 진실한 사랑은 십자가입니다. 그러니 사랑이 모자랄 때에, 사랑이 식을 때에 갈 곳이 하나 있습니다.
사랑이 부족하면 갈보리 그 십자가에 가면 사랑을 마실 수 있습니다. 사랑을 내 가슴에 담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랑을 남에게 나누어 줄 수도 있습니다.
어떤 목사님이 신학교 강의 차 사이판에 간 적이 있었습니다.
밤에는 강의를 했고 낮에는 바다에서 수영을 했습니다. 많은 물고기가 손에 잡힐 듯 목사님 가까이에서 노닐었습니다. 그래서 그 다음 날 낚시 가게로 달려가서 작살과 물안경을 사서 곧장 바다로 들어갔습니다. 아무 생각 없이 수영을 할 때는 그렇게 가까이 있던 고기가 막상 잡고자 하는 마음으로 물에 들어갔더니 물고기들이 목사님 주위에서 멀리 떠나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작살을 두고 빈 몸으로 물에 들어갔더니 고기들이 다시 곁으로 오는 것이었습니다. 영혼 없는 물고기도 자기를 잡겠다는 것을 알고 미리 피한다는 이치를 목사님은 깊이 깨달았습니다.
사람도 목적을 가지고 사람들에게 다가가면 멀어집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심장 즉 사랑하는 마음으로 사람 속으로 다가가면 주위에 사람들이 몰려듭니다. 그래서 성도는 새 마음으로, 조건 없는 사랑을 품고 더불어 사는 지혜를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요13: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한 달에 월급을 4,315원 받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한 시간 일하여 받는 시급이 아니라 한 달 30일 일해서 받는 월급이 4,315원이었습니다. 이 사람이 12년을 한 푼도 쓰지 않고 모았는데 시간 외 수당과 보너스, 그동안 월급 인상, 은행 이자를 합하니 934,000원이 되었습니다.
이 돈을 며칠 전에 극동방송 건축 헌금으로 전액을 바쳤습니다. 이 사람은 강릉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는 사람인데 12년 전에 예수를 영접하고 새 사람이 되어 그 동안 열심히 복역하여 모범 죄수가 되었으며 지금도 복역 중이라고 합니다.
곧 출감할 예정인데 감옥에서 나오면 돈이 한 푼도 없어서 막연한 사정이지만 그래도 자기와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이 방송을 듣고 예수를 믿게 해 달라고 모은 돈 전액을 헌금으로 드렸다는 것입니다.
이 사람도 비록 죄인이지만 예수의 십자가 사랑을 아는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든든한 인생을 세워가려면 두 가지를 잘 지켜야 합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잘 듣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고집쟁이는 학자는 될 수 있을지 몰라도 지혜자는 되지 못합니다. 오늘날은 말씀이 없는 기갈이 아니라 말씀을 듣지 아니하는 기갈의 시대입니다. 주님의 대 제사장적 기도에 귀가 열린 사람이 복이 있습니다. 기쁨, 거룩, 진리, 전도, 연합, 영광, 사랑을 소유한 자가 복이 있는 것입니다.
둘째는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지혜자와 우매자의 차이는 지식의 유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지식을 실천하느냐, 아니하느냐 하는 차이입니다. 어떤 분이 말하기를 우리가 알아야 할 지식은 유치원에서 이미 다 배웠다고 하였습니다. 유치원에서 배운 것을 그대로 실천하기만 하면 이 세상은 아름다운 세상이 된다는 것입니다.
대학까지 공부하고 지식이 많으니 더 지능적인 사기꾼이 많은 시대가 되었다고 합니다.
정직해라, 부지런해라, 열심히 공부해라, 말씀을 잘 들어라, 착하게 살아라. 이렇듯이 인생의 길목에서 필요한 공부는 유치원에서 이미 다 배웠다는 말이 실감이 납니다. 문제는 그것을 실천하지 않는데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말씀을 듣고 실천하라는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마7:24-25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되 무너지지 아니 하나니 이는 주추를 반석 위에 놓은 까닭이요..
주님의 피땀 흘린 기도가 헛되지 않도록 오늘 받은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삶에 적용하고 실천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럴 때 내 인생은 든든한 반석 위에 세운 인생이 될 것입니다.
반석 위에 세운 집, 반석 위에 세운 교회가 되어 땅 끝까지 하나님 나라를 세워나가는 우리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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