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22:1-14
모리아산의 하나님
창세기 21장은 아브라함에게 예상치 못한 사람들의 방문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랄 땅을 지배하고 있던 아비멜렉과 비골이 평화조약을 맺기 위해 찾아 온 것입니다. 이들이 먼저 찾아와 화친을 제시하자, 그때서야 비로소 아브라함은 자기 하인들이 판 우물을 아비멜렉의 부하들에게 빼앗긴 일을 제기합니다. 그때까지는 그런 부당한 일을 당했어도 감히 항의하지도 못했던 처지였습니다. 그리고 아비멜렉이 그 우물을 아브라함의 소유로 인정하자 오히려 아브라함 측에서 일곱 암양 새끼를 그 소유권을 증표로 아비멜렉에게 바칩니다. 그동안 당하였던 피해를 보상받기는커녕 오히려 자신의 합당한 소유를 되찾는데도 아브라함은 약자의 입장에 서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그 땅의 토착세력은 유목민이었던 아브라함의 깊은 걱정거리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아베멜렉과 비골이 먼저 아브라함을 찾아 화친을 청합니다. 이 예기치 못한 기쁜 일을 경험한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감사의 제사를 드립니다. 이 예배에서 아브라함은 자신이 섬기는 하나님을 “야웨 영원하신 하나님”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이 이름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영원하신 하나님’이란 표현입니다. <영원하다>는 단아는 ‘여러 세대들’이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아브라함은 자신이 섬기는 하나님께서, 여러 세대들의 하나님, 곧 자신의 평생을 지키시고 인도해주신 분일 뿐 아니라 다음 세대 곧 자신의 독자 이삭의 평생도 신실하게 지켜주실 하나님이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이제 나그네로서 이 땅에서의 삶을 거진 다 살았습니다. 그러나 노년에 얻은 아들 이삭을 바라볼 때 마다, 아버지로서 마음은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 험악한 나그네 생활을 저 어린 이삭이 앞으로 어떻게 헤쳐 나갈까!’ 이것이 아마 그 즈음의 아브라함의 가장 큰 근심거리며 기도의 제목이었을 것입니다. 아비멜렉과 맺은 평화조약이 아브라함에게 정말로 감사할 만한 사건이었던 까닭은 그것이 자신과 아비멜렉 당대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손들에게까지 미치는 평화의 언약이라는 사실 때문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 사건을 통해서 여러 세대에 걸쳐 인쳐 주신 하나님의 언약을 한결 더 확고하게 믿고 의지할 수 있게 된 강렬한 신앙의 체험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런 계시의 체험을 주신 다음에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가장 어려운 신앙의 테스트를 겪게 하십니다.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시험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온갖 종류의 시험을 치루면서 살아갑니다. 하다못해 운전면허 시험까지 치루고 합격해야 비로소 차를 몰 수 있습니다. 저도 면허시험 중 실기시험을 몇 번이나 떨어졌는지 모릅니다. 다리가 짧아서 운전석 뒤에다 큰 가방을 받쳐두고 온 힘으로 다해 다리를 뻗어 클러치를 밟고 악세레다를 밟았습니다. L자,S자,T자 코스와 실내주행까지 겨우 합격을 했습니다. 운전시험을 앞두고 비 오는 날 학원에서 연습하다 바닥의 선을 못보고 넘어서 다른 차 문을 긁어서 배상을 해 주기도 했습니다. 가난한 집 자식이 학원비에 배상금에 참 요란스러운 면허 시험이었습니다.
창22장에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시험 문제는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산으로 가서 번제로 드리라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아들을 제물로 바치는 풍습은 가나안땅에 있었던 우상숭배의 방식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깊이 따져보고 생각했었다면 분명 내가 들은 음성이 100% 잘못 들었을 것이라 생각했을 겁니다. 아니면 ‘내가 믿는 하나님이 조금 잘못되셨나?, 아 쫌 변하셨네~’ 라고 이렇게 생각했었을 겁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그것이 맞고 안 맞고를 떠나 내가 들은 하나님의 음성에 대해 100% 확신을 했기에 그대로 순종해버립니다. 그 말은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음성을 의심하지 않을 만큼 그 음성이 너무 친숙했고 확신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만큼 그분과 자주 교제를 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는 지금 그분의 음성을 듣는 것이 어색합니까? 아니면 익숙합니까?
사실 그래서 우리도 하나님의 음성 듣는 훈련을 반드시 해야 합니다. 이것이 내 음성 내가 원하는 내 자아의 소리인지, 사탄의 속삭임인지 아니면 하나님의 음성인지 분간하고 구별해낼 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본문을 통해 이런 설교를 많이 들었을 것입니다. <우리도 아브라함처럼 해야 합니다. 아들이라도 드려야 합니다. 목숨을 내 걸고 충성해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칭찬을 받아야 합니다.> 이런 설교를 들으면 무슨 생각이 드십니까?
<아멘, 그렇게 하겠습니다. 저도 오늘 집에 돌아가서 아들이라도 드리겠습니다.> 이렇게 하십니까? 저는 아직 그런 반응을 보이는 사람을 보지 못했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이렇게 반응합니다. <이런 게 신앙이라면 나는 자신 없어! 난 못해. 난 이 테스트를 통과할 자신이 없어. 제발 저에게는 그런 요구는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 이게 우리들의 반응입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을 새로운 눈으로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고자 하는 핵심 메시지가 무엇일까요?
<아들을 내 놓으라. 난 너희의 슬픔 따위엔 관심 없다. 시키는 대로 하라>는 것일까요? 그래서 마치 계엄령을 선포해서 꼼짝도 못하게 억압하는 폭군처럼 하나님 당신을 무섭게 보이고자 하시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그렇게 이해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크게 오해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의 핵심적 메시지는 <아들을 바치라>는 데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정반대로 <아들에게 손을 대지 말라>는 데 있습니다.
12절을 보십시오. <사자가 이르시되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하는 기본적인 신 인식 문제를 생각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아들을 죽이게 하는 분입니까? 그래서 그 아버지까지도 슬픔 중에 죽게 하는 분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살리는 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들을 살리시고, 그 아버지까지도 기쁨으로 웃게 하시는 분입니다.
13절을 보십시오.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본즉 한 숫양이 뒤에 있는데 뿔이 수풀에 걸려 있는지라 아브라함이 가서 그 숫양을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더라>
그는 아들을 드리지 않았습니다. 대신하여 양을 드렸는데, 그 양도 아브라함의 양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양이었습니다. 이게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만을 위해 양을 준비하신 게 아닙니다. 그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도 양을 준비하셨습니다. 그 분은 다름 아닌 주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대신하여 죽도록 미리 준비된 양이 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아브라함을 다시 한 번 존경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브라함이 아들을 드리러 가면서 조금도 고민이 없는 사람처럼 행동한 것은 그가 정말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도 인간적으로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하나님을 신뢰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무서운 하나님으로, 아들을 드리지 않으면 벌을 주실 하나님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하나님은 다 계획이 있으실 거야. 단지 내가 그 계획을 모를 뿐이지. 백 살에 기적적으로 아들을 낳게 하신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죽이실 리가 있나? 죽인다 해도 다시 살리실 거야! 난 하나님의 사랑을 믿어! 그리고 지금까지 내게 베푸신 은혜가 얼마나 큰가? 내가 그 분의 요구를 거절한다면 말이 안 되지. 하나님 당신을 사랑합니다!> 이게 아브라함의 믿음이었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1장 17절 이하에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이렇게 칭찬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그는 약속들을 받은 자로되 그 외아들을 드렸느니라 그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모리아 산으로 가는 아브라함의 발걸음은 공포와 슬픔의 발걸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믿는 신뢰와 기쁨의 발걸음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그 모리아산에서 일어날 일을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묵묵히 믿음으로 그 길을 아들과 함께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하나님을 더 깊이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 모리아산은 회개의 장소가 되었습니다. 또한 하나님을 예배하는 성전의 터기 되었고, 우리 주님이 오르신 골고다의 언덕이 되었습니다. 우리의 삶에도 우리를 부르시는 주님의 음성도 있습니다. 따라가야 할 우리의 길이 있습니다. 올라가야 할 모리아의 언덕도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도 그곳에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가 모리아산의 하나님을 새롭게 만나는 믿음의 한 주간이 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