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꾀보
이 임 영
나는 꾀보입니다.
원래 이름이 꾀보가 아니고 주인아줌마가 붙여준 별명이 꾀보입니다.
어느 날, 내가 지하실에서 나오는 것을 보던 주인아줌마가 빙그레 웃더니 마침내 '꾀보'라는 별명을 붙여준 것입니다.
나의 원래 이름은 ‘딸기’라는 예쁜 이름입니다.
주인아줌마가 나를 데리고 길을 나가면 지나치는 사람마다 ‘아이, 귀여워!’라는 말을 자주 하기 때문에. 나는 처음에는 내 이름이 ‘귀여워’ 인 줄 알았습니다.
나의 이름을 ‘귀여워’라는 이름으로 착각할 정도로 사람들이 귀엽다고 하는 예쁜 강아지랍니다.
나는 우리 엄마 개가 낳은 다섯 마리의 강아지 중 한 마리였습니다.
내가 몇 번째로 태어났는지 주인도 기억을 못 하고, 숫자에는 개념이 없는 우리 엄마 개도 물론 기억을 못 합니다.
태어난지 한 달 후 우리 강아지들은 한 마리씩 엄마의 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때 엄마는 우리 강아지들에게 배불리 먹일만한 젖이 점점 모자라기 시작하는 시기였는데, 그건 젖 뗄 무렵 우리 강아지들에겐 운명과도 같이 겪어야 하는 일이었습니다.
“아이구, 귀여운 강아지들 많이 컸네.”
“작년 12월 25일 크리스마스 날 태어났으니 이제 한 달이 되었네.”
내가 태어난 지 한 달쯤 되었을 때, 주인집에 놀러 온 주인 할아버지의 친구가 우리 강아지들을 보더니 한 마리 달라고 하면서 유심히 살펴보더니 나를 안았습니다.
그 할아버지가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며 나를 껴안아 주었기 때문에 나는 영문도 모르고 할아버지의 팔에 안겨서 집을 나섰습니다.
대문을 나와서 할아버지의 차에 오를 때야 비로소 나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묘한 느낌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할아버지의 차가 집을 떠나서 엄마의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을 때까지 엄마는 나를 부르며 애타게 짖고 있었습니다.
엄마 품에 있을 때 우리는 아무런 걱정이 없었습니다.
엄마는 우리에게 달콤한 젖을 주고 언제나 우리를 따스하게 품어주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누구라도 우리를 해칠 낌새가 보이면 우리를 대할 때와는 달리 아무 무서운 태세로 대들며 쫓아내었습니다.
길고양이가 가끔 우리 집을 기웃거리기도 했지만, 감히 마당에는 발을 들여놓지 못하고 담 위를 빙빙 돌아보다 사라지곤 했습니다.
우리 엄마 개는 집을 찾아오는 사람들도 주인에게 이익이 되는 사람인지 피해를 주는 사람인지 잘 구별했는데 우리 주인 할아버지의 친구도 자주 찾아오는 사람이기 때문에 나를 안아줘도 처음엔 의심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나는 할아버지 차를 타고 오는 내내 무서워서 덜덜 떨었습니다.
주위 둘러볼 생각도 나지 않고 계속 엄마만 찾았습니다. 엄마는 지금 어디에 있는 걸까요?
내가 이런 위험한 상황에 놓인 걸 알기나 할까요?
어떻든 나는 한참 후에야 할아버지 차에 내려서 할아버지가 사는 아파트로 갔습니다.
그런데 아파트 문을 들어서는 순간 할머니가 인상을 찌푸리며 버럭 소리를 지르는 것이었습니다.
나를 제대로 볼 생각도 않고
“개는 또 왜 갖고 왔어요!"
“이 강아지 좀 봐 귀엽지 않어?"
“나는 개털 날리는 것도 싫고 냄새나는 것도 싫어요. 당장 가져다주세요!"
하며 나를 내려놓지도 못하게 했습니다.
할아버지는 난처해 하더니
"개밥 내가 챙겨주고 목욕도 내가 다 시켜줄게. 당신은 신경 안 써도 돼."
"그래도 싫어요. 당장 갖다 주세요!"
할머니는 막무가내였습니다.
내가 사람이었다면 앞에 대놓고 이런 봉변을 당하게 하지는 않았겠지요.
나는 분위기가 심상찮다는 것만 알았습니다.
"알았어, 내일 갖다 줄게."
할머니의 성화에 할아버지가 나를 주인에게 데려다준다고 하자, 할머니는 그때야 주방 쪽으로 가버렸습니다.
할아버지는 나를 작은 방으로 데리고 가더니 큰 종이 상자에다 넣어주었습니다.
나는 엄마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할아버지라도 나를 지켜주리라 생각했지만, 할아버지는 나를 두고 거실로 가버렸습니다.
거실에는 웅웅거리는 소리가 나고 나는 두려움에 떨면서 엄마를 부르며 울며 긴 하룻밤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다음날 날이 밝자 할아버지는 나를 데리고 아파트 밖으로 나왔습니다.
"아유 귀여워라. 웬 강아지예요?"
그때 지나가던 아는 아줌마인 지금의 주인아줌마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강아지 예뻐서 한 마리 얻어왔더니 집사람이 싫다고 갖다 주라고 하는군요."
할아버지의 말에 아줌마는 대뜸 말했습니다.
"그럼 저 주세요. 아유, 귀여워."
"잘 되었네요. 안 그래도 어떻게 주인에게 되돌려주나 걱정이 되었는데 데리고 가서 잘 키우세요."
우리 주인아줌마가 사는 집은 넓은 정원이 있는 주택입니다.
내가 오자 주인아줌마는 나를 따라다니며 카메라에 담기에 바빴습니다.
나는 호기심이 많고 장난치는 것을 아주 좋아합니다.
나는 정원 이곳저곳을 다니면서 나뭇가지며 대문 구석에 세워진 압축기를 물고 놀았습니다.
나는 집에 뭔가 신기한 것이 없나 새로운 놀거리가 없나 그것만 찾아다닙니다.
나는 주인이 밖에 둔 비닐봉지를 터뜨릴 때가 가장 재미있습니다.
입으로 물어뜯으면 어느 순간 봉지가 터지면서 봉지 속에 든 물건들이 와르르 땅바닥으로 쏟아져 나옵니다.
벽돌쌓기에서 격파게임을 할 때 느끼는 통쾌함, 그 느낌이라고 할까요?
나의 중요한 공격 대상은 주인아줌마가 버리려고 내놓은 쓰레기봉투와 과일 따위와 물건을 사서 들고 가다 둔 것들입니다.
가끔 현관문이 열려있으면 재빨리 현관에 있는 신발들을 물고 와서 물어뜯으며 놀다가 혼나기도 합니다.
어느 날 주인아줌마가 급하게 어딘가를 간다고 거실문을 제대로 안 닫고 나가버렸습니다.
내가 모처럼의 기회를 놓칠 리 없겠지요.
거실로 들어가서 실내화를 물어 뜯어놓고 세탁물 바구니 안에 빨래를 다 물어다가 흩트려놓고 욕실의 운동화 솔과 수세미와 실내화를 거실에 물어다 놓고 난장판을 만들어놓으니 정말 신나고 재미있었습니다.
이 집에 오고 나서 얼마 후, 주인아줌마가 가까운 가게에 가면서 나를 데리고 가려고 했습니다. 집에만 있는 나에게 동네 구경을 시켜주고 싶었나 봐요.
나는 그때만 해도 대문을 나가는 것이 두려워서 따라가지 않으려고 대문 앞에 납작 엎드려서 용을 썼습니다.
밖에 나가니 큰 차가 코끼리처럼 달려오고, 오토바이가 무서운 기세로 달리면서 나를 향해 덮칠 것 같았습니다.
나는 그때까지만 해도 여기저기 몇 집을 거쳐 오다 보니 우리 주인이 누구인지 정확히 몰랐습니다.
그래서 지나가는 사람만 보면 다 나를 보호해줄 주인인 것 같아 가까이 가서 구해달라고 뛰어올랐습니다.
한 번은 주인아줌마가 집에서 떨어진 연못에 산책하러 가면서 나를 데리고 갔습니다. 아줌마가 나를 차 뒷좌석에 태웠는데 나는 살금살금 앞 좌석으로 기어가서 운전하는 아줌마의 품까지 기어 들어갔습니다.
아줌마가 간 산책길은 커다란 연못가에 있었는데 그 주위에는 높은 산들이 있었습니다.
아줌마가 나를 내려놓고 따라오라고 했습니다. 달리기 실력으로라면 내가 주인아줌마에게 질 리도 없지만 어쨌든 열심히 아줌마를 따라갔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맞은편에서 사람이 걸어올 때마다 나는 그 사람이 주인인 줄 알고 가던 방향을 돌려서 그 사람을 따라갔습니다.
그러면 주인아줌마가 뛰어와서 나를 데리고 갔습니다.
연못을 도는 두 시간 동안 계속 이런 일이 반복되다 보니 집에 올 때는 지쳐서 운전하는 주인아줌마에게 안겨서 축 늘어져 잠에 빠져버렸습니다.
그날 이후, 나는 집 안에 있는 것보다 밖에 나가는 것을 더 좋아해서 기회만 있으면 밖에 나가려고 했습니다.
주인아줌마가 외출하려고 대문을 열 때면 따라 나가려고 별렀습니다.
나의 이런 생각을 알고는 주인아줌마는 빨리 문을 빠져나가고 대문을 닫아버리는 것이었습니다.
아줌마를 따라가기 위해서는 나는 뒤에 있다가 순식간에 뛰어나갔습니다. 배구에 시간 차 공격과 같다고 할까요. 그럴 때마다 매번 나는 붙잡혀서 집으로 들어와야 했습니다.
어떤 때는 같이 가고 싶다는 의사표시로 먼저 골목 밖으로 뛰어갔지만
그래도 주인아줌마는 끝까지 따라와서 나를 안고 집안으로 데려놓고 혼자 외출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내가 안쓰러웠는지 한 번씩 가까운 시장에 나갈 때나 세탁소에 갈 때는 나를 데리고 갑니다.
길에 가면 가끔 고양이도 만나고 꼬마들도 만납니다.
귀여운 꼬마들은 누구보다 나를 보면 먼저 반기며 달려왔습니다.
내가 꾀보라는 별명을 갖게 된 이유를 이야기 안 한 것 같네요.
주인집 딸은 참 착합니다.
멀리서 직장에 다니는 딸은 내가 이 집에 들어왔다는 걸 알고 개집을 사서 가져왔습니다.
하나는 튼튼한 개집이고, 또 하나는 개집 안에 넣는 천으로 만든 폭신한 개집이었는데 개집 입구에 바람을 막을 수 있게 비닐 커튼까지 직접 달아주었습니다.
집 안에 들어가면 날씨가 아무리 추워도 추위를 못 느낄 만큼 포근했습니다.
그런데 봄이 되어 날씨가 따뜻해지자 왠지 집 앞에 달린 비닐이 답답하게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입으로 조금씩 물어뜯다가 마침내 비닐을 깨끗하게 다 뜯어버리고 말았는데 이 모습을 지켜보더니 주인아줌마는 이웃집 아줌마에게
“글쎄 우리 딸기가 날씨가 덥다고 집 앞에 달린 비닐을 다 뜯어냈지 뭐여요. 비닐 때문에 덥다는 것을 어떻게 알았을까요?”
하면서 자랑했답니다.
멀리서 직장에 다니는 주인집 딸은 간식도 잔뜩 사서 보내주었습니다.
치즈가 발린 껌이랑 쇠고기 말린 것. 양고기 말린 것
내가 평소에 먹던 사료와는 달리 아주 맛있는 것들이었습니다.
아무리 맛있는 간식이라도 내가 금방 밥을 먹고 배가 부를 때는 먹을 수 없어서 나는 간식을 화단에 흙을 파서 몰래 숨겨둡니다.
그것도 한곳에 두면 들킬 수 있으므로 여기저기 나누어서 숨겨두었습니다.
귀한 간식을 한꺼번에 많이 줄 리 없지만, 그날은 주인아줌마가 내가 어떻게 하나 보려고 계속 준 것 같았습니다.
그때 내가 하는 행동을 보더니 참 영리하다고 말했습니다.
날씨가 점점 더워지자 나의 집안에 천으로 만든 겨울에 따뜻하던 집이 거추장스러웠습니다. 그래서 천으로 만든 집을 밖으로 물어내어 마당으로 옮겨놓았습니다.
그걸 보더니 주인아줌마는
“쿠션 집이 없으면 시원해진다는 것을 어떻게 알았을까?”
하면서 신통해 했습니다.
그런데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오고 날씨가 쌀쌀해지자 씻어서 구석에 가져다 놓은 쿠션 집을 지하실로 옮겼습니다.
지하실은 마당보다는 많이 훈훈했는데 집을 가져다 놓으면 따뜻하게 지낼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이 모습을 보고 주인이 마침내 나에게 ‘꾀보’라는 별명을 붙여주었습니다.
나는 잠에서 깨어나면 언제나 무엇을 하고 놀까?
이 생각만 머리에 가득 차 있습니다.
그리고 내가 온갖 일을 저질러 놓아도 우리 주인은 크게 혼내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주인이 외출할 때나 집에 있을 때나 나를 묶어놓지도 않으니 나의 호기심과 장난기는 변함없이 이어질 것입니다.
<약력>
이임영<시인, 아동문학가>
월간『소년문학』편집위원, 한국아동문학회 운영위원장
2014년 1월 〜 현재 월간 소년문학 지혜가 있는 그림동시연재 중
한국아동문학회 <오늘의 작가상> 수상
동시집 『참새와 귀뚜라미』 외 5권 출간
동화집 『밀루의 여행기』 외 2권 출간
시집 『시선은 멀리 행복은 가까이서』 외 2권 출간
첫댓글 아이고~ 이쌤, 너무 재미있어요.
재주가 너무많은 이쌤, 오늘도 홧팅~^*^
선생님 읽어보셨나요?..ㅎㅎ
어제 오늘 단비가 내려서 대구는 축복을 받았어요
과연李쌤이 못하는 것이 있을까싶네요.
골고루 자주 들리지 못하다 오늘은 잠시 재미있는 *동화를 보게 됩니다.
선생님 다 읽어보셨나요?
자전적 동화입니다 호호
딸기를 부르니 창틀에 올라오려고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