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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18일 현재 추신수의 성적은 2할9푼9리에 9홈런 40타점, 39득점, 11도루입니다. 41개의 볼넷을 얻어 출루율은 4할1푼1리에 달합니다. 2루타 10개와 3루타 1개를 포함해 장타율이 4할6푼6리, OPS는 .867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중 출루율은 AL 전체에서 4위, 볼넷은 5위, 그리고 도루도 11위에 올라 있습니다. 삼진이 59개로 좀 많지만 경험과 경력이 쌓이면 확실하게 개선될 수 있는 부분입니다.
현재의 성적을 바탕으로 올 시즌 성적을 미리 환산해보면 22홈런, 97타점, 95득점, 99볼넷 그리고 27도루를 기록할 수 있다는 계산이 나옵니다. 야구에서 꿈의 기록 중의 하나인 20홈런-20도루-100타점-100득점도 노려볼만한 기세입니다.
추신수에겐 야구가 숙명과도 같아 보입니다.
다시 태어나도 당연히 야구를 하겠다는 그는 야구와 그리고 가족에 모든 것을 걸고 있습니다. 시애틀 시절 애환도 많았고, 클리블랜드로 가서는 팔꿈치 수술을 받는 고난을 겪었지만 그의 쉼 없는 노력과 훈련과 투지는 결국 그를 메이저리그 팀의 4번 타자로까지 올려놓았습니다.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변함없이 항상 가장 먼저 나와 경기를 준비하는 추신수. 인디언스에서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선수로 성장한 그를 클리블랜드의 프로그레시브 필드에서 만났습니다. 그의 야구 생애와 그간의 애환, 앞으로 추구해갈 꿈 등을 들어봤습니다.
가족 소개 좀 해주세요.
아버님은 추자 소자 민자, 어머님은 박자 유자 정자를 쓰십니다. 그리고 동생 추신영이 있어요.
동생이 배우라고 들었는데.
백제예술대학을 나와 뮤지컬과 연극을 계속 했어요. 3년 전인가 명성황후에도 출연해 보러 간 적이 있어요. 그런데 우연히 친한 형이 곽경택 감독님을 소개해준 적이 있습니다. 곽감독님은 제 고등학교 선배시기도 한데, 저녁 약속을 했는데 마침 그때 동생이 부산에 내려와 있었어요. 그날 동생이 서울에 올라가기 직전이라 같이 저녁 먹고 가자 해서 남포동에서 함께 만났습니다. 그런데 곽경택 감독님과 이야기를 하던 중에 동생은 무슨 일하느냐고 말이 나오다가, '친구'를 드라마로 만들려고 준비 중인데 오디션을 한번 보라고 하셨어요. 그게 잘 돼서 뽑혀 주인공의 남동생 배역을 맡게 됐습니다.
동생도 잘 생겼나 보네요.
동생이 훨씬 잘 생겼죠. 저는 그저 씩씩하게 생겼지만 동생은 연예인 같이 생겼죠. 지금은 예명인 추민기를 써요, 이번 기회로 잘 됐으면 좋겠어요.
아버님인 어떤 일을 하셨는지. 어렸을 때 생활은 어땠어요.
제 기억으로는 아버님은 건축업을 오래 하셨어요. 야구 선수 중에 부유하게 야구한 선수 있습니까. 저희도 그렇게 어렵지는 않았지만, 건축업이라는 것이 좋을 때는 좋고 또 어려울 때는 몹시 어렵기도 하고 그렇죠. 야구를 하면서 회비라든지 들어가는 돈이 많았어요. 그런데 저희 부모님은 아무리 어려워도 용품도 늘 최고로 사주시고 보약 같은 것도 자주 해주시고 정말 최고로 지원을 해 주셨어요.
당시 부모님의 마음을 알았었나요.
그때 당시는 제가 안다고 생각했었는데 돌이켜보면 별로 안 것 같지가 않아요. 지금 생각하면 정말 너무 감사하죠.
작년인가 아버님이 건강이 안 좋으셨다고 했었는데.
건강은 이제 괜찮으세요. 걱정이 많았는데 다행이에요.
늘 우상이던 삼촌
처음에 야구는 어떻게 접하게 됐어요. (부산 야구의 상징이라고도 할 수 있는 박정태 2군 코치가 추신수의 삼촌이니 바보 같은 질문이기도 합니다.)
삼촌이 야구를 하고 있었으니까 저는 아주 어려서부터, 유치원 가기 전부터 방망이를 잡고 놀았지요. 유치원에 가서는 늘 애들과 야구를 하고 옆 동네 애들과 시합도 했어요. 초등학교 가서는 형들과 많이 했어요. 처음엔 테니스공으로 하고 나중에는 연식 공으로 하고 그랬죠. 제 기억으로는 학교에서 돌아오면 곧바로 방망이에 글러브 탁 끼어가지고 동네 고등학교로 가서 종일 야구를 했어요. 깜깜해질 때까지 야구를 했죠.
아무래도 삼촌의 영향이 컸겠어요.
야구 선수가 되겠다는 꿈은 언제부터였나요.
사실 초등학교 때는 그냥 야구만 좋아서 했죠. 뭐가 되겠다, 그런 꿈같은 것은 없었던 것 같아요. 그땐 부산중학교나 경남중학교 같은 야구 명문 학교에 가는 것이 꿈이었죠.
그럼 언제 프로 야구 선수가 되겠다고 마음을 먹은 건가요.
수영 초등학교 졸업하면 원래는 대천중학교로 가는 것인데 저는 부산 중학교로 스카우트됐죠. 그리고 부산고등학교 2학년 때 쯤 이었던 것 같아요. 그때 진짜로 프로 야구 선수가 되겠다는 생각을 했죠. 그런데 제가 1학년 때 (백)차승이 형이 미국을 갔어요. 그래서 미국 야구라는 꿈을 더 키우게 됐죠.
그럼 국내 프로는 전혀 생각이 없었나요.
그건 아니고, 반반이었던 것 같아요. 사실 고등학교 1,2학년 때는 제가 별로 잘 하지 않았던 것 같아요. 그냥 고만고만했던 것 같아요.
그건 본인 생각일 테고 대통령배인가 MVP도 받았던데.
고2 때와 고 3때 연속으로 MVP를 받기는 했죠. 그러나 저는 제가 아주 잘하는 야구 선수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었어요.
세계 청소년 대회 우승은 언제였나요. 당시 멤버가 화려하던데.
고3 때였어요. (이)대호, (김)태균이, (정)근우, 저, (이)정호, (이)동현이, (조)형식이, (조)영훈이, 송산, (김)동건이, (정)상호. 아무튼 그때 멤버가 아주 괜찮았어요. 캐나다에서 열린 대회였는데 호주, 캐나다, 미국 등을 꺾고 우승했어요.
당시도 타격과 투수를 겸했나요.
당시 제가 타격이 너무 슬럼프였어요. 그래서 조성옥 감독님이 많이 도와주시다가 결국 투수만 하라고 하셨어요. 투수로서는 아주 괜찮았어요. 캐나다전에서만 점수를 줬던 것 같아요. 아, 그 때 비디오 좀 구할 수 없는지 아쉬워요. 꼭 보고 싶은데, 국내 중계도 하지 않아서요.
시애틀, 비하인드 스토리
그리고 시애틀인데, 그 팀으로 결정한 이유가 있었나요.
그 당시 텍사스, 볼티모어 등 몇몇 팀에서 제안이 있었는데 그쪽(시애틀)에 이재우 감독님이 계셨고 그전에 시애틀과 말이 오가고 하다 보니까 그 팀으로 가게 됐어요. 액수로 따지면 더 좋은 팀으로 갈 수 있었지만 아버님이 의리를 중시하시고 해서 그렇게 결정을 했어요.
당시 시애틀에서도 상당히 많은 계약금을 준 것으로 기억하는데.
137만 달러를 받았죠. 그런데 볼티모어에서는 200만 달러를 주겠다고 했어요. 그러나 아버님이 약속이 중요하다고 해서 그렇게 결정을 했죠.
당시 국내 프로에서 뛰고 싶은 생각은 없었나요.
저는 롯데에서 뛰고 싶은 생각도 있었어요. 그런데 협상 과정에서 아버님이 좀 섭섭하셨던 것이 있었나 봐요. 이젠 다 지난 얘기죠.
시애틀에서 자리를 못 잡은 것은 이해하기 힘든데, 후회한 적은 없는지요.
후회해요. 거기선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으니까요. 저는 마이너부터 매년 3할을 쳤었거든요. 도루도 20~30개씩 하고. 팀에서 원하는 만큼 안 올라와서 그랬는지 모르지만 도대체 기회를 주지 않았어요. 홈런도 10개, 15개씩 치고 장타도 많고 했어요. 그런데 기회가 없었어요. 같은 마이너리그에서 뛰는 상대 팀 선수가 별로인데도 메이저로 가는 것을 보면 정말 짜증이 났지요.
생활고, 귀국 갈등
미국에 온 후에도 귀국할 생각을 한 적이 있다고 했었죠.
2년 전 수술을 받았을 때였죠. 당시 마이너리그 연봉을 받았고 경제적으로 정말 힘들었거든요.(한숨을 쉬고) 저는 책임감이 강한 것 같아요. 남자는 가족을 위해서는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남자한테는 무릎 꿇는 것이 정말 비참한 일이잖아요. 그러나 부인과 아들을 위해서는 그럴 수 있을 것 같아요. 사실 저 혼자 몸으로 수술을 받고 했으면 서른, 서른다섯이 되더라도, 돈을 못 벌더라도 메이저에 도전하고 해도 괜찮을 것 같아요. 제가 혼자라면.
옛날에는 남자, 여자가 사랑만으로 살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현실은 그게 아니잖아요. 사랑이 분명히 중요하지만 결혼이라는 것이 하루 이틀 사는 것도 아니고 10년, 20년, 50년을 함께 살아야 하는데 어떻게 사랑만으로 되겠어요. 물질적으로 쪼들리다보면 뭐 괜찮은 것도 서로 티격태격하게 되고 그렇겠죠. 뭐 저희가 싸웠다는 뜻은 아니고요.(웃음) 진짜로 저희는 한 번도 싸운 적이 없어요.
그래서 귀국을 결심했었나요.
한국을 가게 되면 제 메이저의 꿈은 접지만 경제적으로는 조금 나아질 수 있다고 생각했죠. 당시 재활을 하면서 마이너 봉급을 받고 많이 힘들었기에 하루는 집사람을 불렀죠. "우리 한국 갈까?" 그랬더니 왜 그러냐고 해서 쭉 이야기를 했어요. 그랬더니 무빈이(아들)랑 자기 때문에 그러냐고 묻데요. 그래서 나 혼자 있으면 괜찮은데 가족이 있는데 더 잘해주고 싶고, 사주고 싶은 것도 많고 한데 못 해주니까 그렇다고 했죠.
그랬더니 대번 화를 내면서 그럼 자기랑 무빈이가 한국에 가면 편하게 야구만 하겠느냐고 물어요. 그건 아니라고 했죠. 그랬더니 얼마든지 고생은 할 수 있으니 후회 없이 해보자고 하더군요. 그때 정말 둘이 많이 울었습니다. 그래서 그 생각은 완전히 접었죠. 실제로 에이전트에게 한국행에 대해 이야기도 했었어요. 만약 그때 갔으면 SK로 갔겠죠, 저를 지명한 팀이니까요.
마이너에서 고생할 때 이대호나 김태균, 정근우 등 친구들이 한국 프로에서 잘하는 소식들을 접했을텐데.
그때는 모든 기사들을 다 봤죠. 대호가 트리플 크라운하고 태균이도 홈런왕하고. 어차피 잘할 친구들이라는 것은 알았죠, 어려서도 보통 애들과는 기량이 틀렸으니까요. 사실 제가 위로받을 수 있는 것은 미국에서 뛰고 있다는 것, 그것 하나밖에 없었어요. 내가 한국 갔으면 나도 이 친구들과 함께하고 있겠지 그런 생각. 부럽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죠. 물론 그 친구들도 여기 왔으면 적응만 잘하면 충분히 할 수 있었겠지만요.
친구들과는 자주 연락하나요.
근우는 자주 전화하고 다른 친구들과도 가끔씩 통화하죠. 한국 야구 기사들은 봅니다. 제목을 쭉 보다가 눈길을 끌면 읽어보고, 롯데 기사를 많이 읽고요.
만약 나중에라도 돌아가면 롯데에서 뛰고 싶은가요.
아무래도 그렇죠. 고향 팀이고 롯데 팬들도 좋잖아요. 일단 여기에서 후회 없이 하고 나서 상황이 허락되면 마지막은 국내에서 뛰고 싶어요.
길고 험했던 미국 생활
미국 와서 마이너리그는 도대체 몇 팀을 거친 건가요.
루키, 싱글A, 하이싱글A, 한 여덟 팀은 거친 것 같아요. 이사는 15번쯤, 아니 움직인 것을 다하면 스무 번쯤 되죠. 이제 이사는 신물이 났죠. 집사람은 이사 박사가 됐어요.(웃음)
지난 겨울 애리조나에 집을 구입했다죠.
미국에 온지 9년 만이죠. 늘 월세 아파트를 살다가 집이 있으니 참 좋더라고요. 지금은 비어 있지만요. 전에 살던 사람들이 집을 잘 꾸며놓았어요. 언제 한번 놀러오세요.
클리블랜드와 시애틀팀은 분명히 차이가 있죠?
분위기가 많이 달라요. 시애틀에서는 선수들 간에 대화가 별로 없었던 것 같아요. 클리블랜드는 선수들의 인간성이나 됨됨이를 많이 봐요. 그리고 열심히 하는 선수들에게는 꼭 기회를 주려고 해요. 제가 수술을 받을 때도 단장이 "네가 한 만큼 꼭 기회를 줄 테니 재활만 열심히 해라. 반드시 노력한 만큼 돌려줄 것이다."라고 하더라고요. 큰 힘이 됐죠.
요즘도 양귀 헬멧을 쓰던데.
팀에서 계속 쓰라고 하데요. 이젠 제 트레이드마크처럼 된 것 같아요.(웃음)
요즘도 방망이랑 얘기하나요.
메이저리그에서 주전으로 자리를 잡는다는 목표를 이젠 어느 정도 이룬 셈이죠.
아직까지는 모르겠어요. 올해 끝나고 내년 돼봐야 알 수 있겠어요. 야구란 것이 변동성이 항상 있으니까. 클리블랜드에서 야구 인생을 끝내고 싶지만 어떤 일이 또 생길지 모르죠. 그러나 지금은 어느 팀에 가나 주전으로 뛸 수 있다는 자신감은 있어요.
야구, 꿈, 행운, 행복
앞으로 또 다른 목표와 꿈이 있나요.
지금요? 일단 뭐, 예전에는 자신을 위해서 야구를 했지만 지금은 가족이 있고, 또 한 명 더 나아야 하거든요.(현재 부인이 둘째를 임신 중이고 셋째도 낳을 예정이랍니다.)
야구는 그런 것 같아요. 제가 홈런 500개, 안타 3000개를 칠 수 있는 선수는 아니거든요. 그러나 메이저리그 생활 오래하면서 많은 팬들에게 기억에 남는 선수가 되면서 후회 없이 야구 생활을 끝내고 싶어요. 다시 태어나도 야구를 할 것이지만 야구를 그만뒀을 때는 미련이 안 남았으면 좋겠어요. '한 번 더 해보고 싶다, 그 때 조금 더할걸,' 그런 생각이 안 들었으면 좋겠어요.
은퇴 후에도 야구 관련 일을 하고 싶은지요.
그때 돼서 봐야겠지만 제 생각은 저 때문에 고생한 가족들과 지내고 싶어요. 저 때문에 이국땅에서 이곳저곳 힘들게 돌아다니면서 고생이 정말 많거든요. 야구 끝나면 애들이랑 집사람이랑 여행도 다니고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고 싶어요. 주위에서 어떨지 모르겠지만 제 목표는 일단 그래요.
언제까지 야구를 하고 싶은가요.
제 목표는 마흔 살까지. 물론 마흔이 되도록 주전으로 뛰기는 어렵겠죠. 아마 서른 일곱, 여덟까지 정도는 주전으로 뛸 수 있을까요. 그 이후가 되면 팀도 옮겨다니고 하겠죠. 그러나 뛸 수 있을 때까지, 후회 없이 뛰고 은퇴하고 싶어요.
여전히 낮 경기면 새벽에 일찍 나오고, 경기 시간 7시간 전이면 벌써 야구장에 와 있고. 야구가 그렇게 좋은가요.
좋기도 좋지만 그런 것 같아요. 그게 후회 없이 하는 것 같아요. 제 성격이 워낙 완벽하려고 하고, 남보다 하나 더 해야 마음이 편하고 자신감이 생기고 하니까. 그렇게 하지 않으면 마음이 불편해요. 남들보다 조금 더 훈련해야 마음이 편하고 스스로에게 자신감이 생기고 경기를 할 때도 자신이 있고 편하고 그래요.
야구를 한다는 것이 행복한가.
그럼요, 행복하죠. 경기를 뛰고 운동을 하다 보면 힘들 때도 많아요. 그럴 때마다 생각하는 것이 '야, 내가 이 꿈의 무대에서, 이 큰 운동장에서 수많은 관중들 앞에서 매일 유니폼을 입고 주목을 받으면서 뛸 수 있다는 자체가 얼마나 행복한 일이냐?'라는 것이죠. 많은 사람들이 하고 싶어도 못 하잖아요.
며칠 전에, 3일 전인가 생각을 해봤어요. 제가 루키 리그부터 싱글A 쭉 거치면서 함께 뛰었던 수많은 팀메이트 애들을 따져봤어요. 지금 과연 메이저리그에 몇 명 있을까 꼽아봤더니 저 말고 딱 두 명 있더라고요. 필리스의 그렉 돕스와 메츠의 J.J 풋츠 그렇게 둘 뿐이더라고요. 마이너리그 톱 유망주고 1등, 2등 해도 메이저 간 애들이 없어요. 그러니 정말 축복받은 일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즐겁게 야구할 수 있어요.
주위에서 도움을 주시는 분들도 많고요. 꿈을 꾸고 미래를 그리면 언젠가는 그 자리에 와 있다는 말씀을 해주신 분도 있었는데 정말 그런 것 같아요.
올 시즌, 그리고 앞으로 계속 부상 없이 좋은 모습 보여주길 바랍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늘 기운을 주시는 팬들께도 정말 감사드립니다. 아직까지 저는 많이 부족합니다. 메이저리그 외야수 중에 중간 정도라고 생각하는데 더 좋은 선수가 될 수 있도록 계속 노력하겠습니다.
최근 갈매기를 맞춘 연장 결승안타로 미국 야구계에서 화제가 됐고, 연일 맹타를 터뜨리며 본격적으로 메이저 무대에서 이름을 떨치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강인한 인상을 주면서 팀의 주전 강타자라 점이 각인되기 시작하면 추신수의 빅리그 생활은 갈수록 편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똑같은 애매한 공이라도 존재가 미미한 루키라면 심판의 손이 올라가지만, 인정을 받은 타자에게는 볼이 선언되는 것이 프로 야구입니다. 인정을 받는다는 것은 그만큼 큰 변화가 생긴다는 뜻입니다.
물론 이제 진정한 시작입니다. 그러나 힘겹게 걸어온 길에 대한 보답의 길이 이제야 조금씩 열리는 것으로 보입니다. 메이저리그 중심 타자로서 추신수의 도약은 이제 막 시작됐습니다.
첫댓글 야구라는 스포츠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 추 신 수 그의 보이지 않는 곳에서의 노력은 많은 운동을 하는 후배들의 좋은 귀감이 될것이라 생각합니다...^^추추추추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