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선사시대로의 여행 (2) ~ 고인돌과 선돌 콜렉션 - 양구 고인돌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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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의 북쪽 뜰은 고인돌공원으로 조성되어 있는데, 고대리와 공수리를 비롯한 양구 전역에서 옮겨온 고인돌과 선돌 20여기가 전시되어 있다. 그중 대부분을 이루는 고대리, 공수리 출신 고 인돌은 지방문화재자료이며, 고대리 출신 중에서 큰 고인돌은 따로 지방기념물로 지정되었다. 공원만 둘러볼 경우에는 박물관 입장료를 낼 필요가 없으며, 일광욕을 즐기는 고인돌 사이로 벤 치와 원두막 등의 편의시설이 자리해 있어 소풍 장소로도 손색이 없다. 공원을 가득 메운 고인 돌을 둘러보면 마치 우리나라 전역에 있는 고인돌을 모두 만난 기분이다.
공원 서쪽에는 복원된 신석기시대 움집이 길게 늘어서 있으며, 고인돌 운반과 석기제작, 수렵체 험, 움집생활 등을 체험할 수 있는 선사체험장이 자리해 있다. 체험관련 문의는 033-480-2677 |
 ▲ 뚜껑돌만 있는 고인돌 얼핏보면 평평한 바위처럼 보인다. 이 고인돌은 청동기시대 부족장(部族長)의 무덤으로 돌 밑에 그의 시신과 기타 유물을 묻고 그 위에 돌을 얹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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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앉은뱅이가 되버린 고인돌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결국 저렇게 주저 앉은 고인돌, 세상만물 중에 감히 세월을 이길 수 있는 것은 아무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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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너희들 고인돌 맞아? 저 돌덩어리도 자신의 정체성을 상실한 채 뜰 장식용의 일부가 되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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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월의 때가 가득 낀 고인돌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하얀 피부를 자랑했던 돌은 새카맣게 익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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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너희들도 고인돌이냐? 돌이 고여 있으니 고인돌로 쳐 줘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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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수리, 고대리에서 옮겨온 고인돌 무리 (사진 2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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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구에서 고인돌이 제일 많이 발견된 곳은 바로 파로호의 상류인 고대리와 공수리 지역으로 지 금은 거의 대부분 박물관으로 옮겨졌다. 양구 고인돌의 대표격인 고대리 고인돌은 약 10기 정도 남아있는데, 고대리는 북한강(北漢江)의 최상류로 예로부터 사람들이 많이 살던 곳이다.
청동기시대에 고대리 지역에 상당한 규모의 부족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 부족은 점차 주변 으로 영향력을 확대하여 양구 지역을 지배하는 세력으로 성장했을 것이다. 험한 산악지형에 의 지하여 별다른 외침 없이 오랫동안 독자적인 세력을 누리다가 점차적으로 고조선에게 복속(服屬 )되었을 것이고 그 이후로는 고구려(高句麗)의 지배를 받았다.
강원도 지방기념물 9호인 고대리 고인돌은 양구의 다른 고인돌보다 더 웅장하고 위엄이 있어 보 인다. 청동기 사람들의 건축물인 고인돌은 부족장의 무덤 역할 외에도 하늘에 제를 지내는 제단 (祭壇)의 역할도 하였다고 한다. 공수리와 고대리에서 옮겨온 고인돌 무리는 강원도 지방문화재 자료 109호~110호이다. |

 ▲ 뚜껑돌만 있는 고인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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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 있는 고인돌은 크게 2가지로 뚜껑돌과 기둥이 있는 이른바 탁자식 고인돌과 뚜껑돌 만 있는 고인돌로 나눌 수 있다. 예전에는 탁자식 고인돌은 남방식 그렇지 않은 것은 북방식으 로 쓸데없이 구분했으나 남쪽에서도 북방식이 많이 발견되고, 북쪽에서도 남방식이 많이 발견되 면서 이제는 그런 식의 구분은 의미가 없어졌다. |
 ▲ 청동기 사람들의 삶과 애환이 담긴 고인돌의 뚜껑돌 아랫도리로 석실(石室) 부분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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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원에 덩그러니 놓여진 원두막 앞쪽에 누워있는 돌덩어리 역시 고인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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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겨울잠에 잠긴 선사체험장 (고인돌 운반 체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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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돌을 만들 때 바닥에 나무를 깔고 돌에 줄을 묶어 여러 사람들이 등에 들쳐메 줄을 끄는 형 식으로 돌을 운반했다고 한다. 선사체험장은 그들의 그런 수고로움과 그들의 생활을 직접 몸으 로 때우는 체험의 장으로 만든 것인데, 그냥 돌덩어리 하나와 나무, 단단한 줄만 아무렇게나 처 박혀 있을 뿐, 안내문이나 안내도우미는 하나도 없다. 아마도 체험을 신청한 단체 손님에게만 해주는 모양이다. |

 ▲▼ 신석기 사람들이 살던 움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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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명 해안펀치볼이라 불리는 해안면 지역에서 발견된 신석기시대 움집을 복원한 것이다. 신석기 사람들은 강가나 바닷가에 움집을 짓고 씨족단위로 살았는데 밖에서는 작아 보이던 움집이 내부 로 들어서면 상당히 넓게 다가온다. 적어도 10명 정도는 거뜬히 살았을 것이다.
집터 가운데에는 불을 피우던 화로자리가 있어 고기 등을 굽거나 추운 날씨 난방을 위한 용도로 사용되었는데, 짚풀로 엉성하게 만들어 추울 것만 같은 움집은 밖과 달리 어느 정도 따뜻함이 깃들여져 있다. 지금은 주거지가 아닌 움집생활 체험장소로 쓰이며, 집으로 들어가는 문은 사람 키의 절반 정도 크기로 몸을 크게 숙이고 들어가야 된다. 마치 동굴을 들어가듯 말이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무더운 여름이나 따스한 봄, 가을에 선사시대 생활 체험으로 하루 정도 지내봤으면 좋겠다. 움집에서의 하룻밤은 어떨까? 물론 옷은 중요한 데만 걸치고 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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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선사박물관 우측에 근래에 만든 이상한 물체가 놓여져 있다. 나무 장작 위에는 황금알의 모형으로 보이는 커다란 물체가 알처럼 놓여져 있다. 알 위에는 하얀 꽃이 수줍은 듯 매달려 있는데, 무엇을 상징하고 무슨 연유로 저곳에 만들었는지는 모르겠음, 궁금하면 박물관에 문의 요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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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내가 좋아하는 돌덩어리, 보면 볼수록 정이 드는 가오작리 선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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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 앞뜰에는 미소가 아름다운 선돌 1기가 서 있다. 박물관 안내자료나 홈페이지에 메인으로 자리할 만큼 박물관의 상징물로 자리매김한 선돌로 원래는 광치령 부근 가오작리에 있었다.
선돌은 말그대로 서 있는 돌로 유식한 말로는 입석(立石)이라고 부른다. 선사시대 사람들이 기 복(祈福) 행위를 위해 만든 것으로 태양숭배를 상징하기도 하고 혹은 성기신앙(性器信仰)의 대 상물로 만들었다고도 한다. 허나 시간이 지나면서 이정표나 마을의 위치를 알려주는 역할로 변 화되었다고 한다. 선돌은 이렇게 옛 선사인들의 소박한 건축물로 잘생긴 돌을 일으켜 세워 약간 손질을 가하여 신앙의 대상물로 삼았다.
가오작리 선돌은 바닥에 누운 평퍼짐한 돌 위에 일으켜 세운 3m의 돌로 아랫부분은 다소 볼록하 여 풍만해 보인다. 중간에서 폭이 다소 넓어졌다가 위로 갈수록 일정하게 줄어들면서 머리부분 에서는 세모로 마무리를 지었다. 몸매도 선돌치고는 괜찮지만, 그만의 특징은 머리에 눈과 입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눈은 어린이처럼 해맑고 동그라며, 입은 살짝 구부러진 것이 은연중 미 소를 띄운다. 돌덩어리도 저렇게 웃을 수가 있을까? 저 미소는 혹 선사인의 미소는 아닐까? 정 말로 어여뻐 보이는 돌의 미소는 나의 시선을 오랫동안 붙잡아 놓아주려하질 않는다. 마음같아 서는 집뜰로 몰래 가져와 두고두고 보고 싶지만 그도 엄연한 무거운 돌덩이라 차마 그러지를 못 한다. 선돌의 눈과 입은 그가 광치령 부근에 살던 시절, 주민들이나 군인들이 심심풀이로 새겼 다고 하는데 확실한 것은 모르겠다.
이렇게 하여 양구 선사박물관을 통한 선사시대로의 여행은 이것으로 마무리 짓는다. |
첫댓글 근데, 최초라는 표현은 좀...
그럼 어떤 단어가 좋을까요?
전곡리 선사박물관, 수양개 선사박물관 등 먼저 생긴 게 많거든요.
전곡선사는 올해 생겼는데요. 수양개선사도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양구 선사박물관은 언제 개관했는지 안 나와 있네요.. 수양개는 2006.7.25일 개관했습니다..
양구선사는 2004년에 개관했습니다. 지금보니 본글에 관련내용을 기재안했네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