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youtu.be/YFd7MI5A7ls
<사무엘하 6:1-15> 1 다윗이 이스라엘에서 뽑은 무리 삼만 명을 다시 모으고 2 다윗이 일어나 자기와 함께 있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바알레유다로 가서 거기서 하나님의 궤를 메어 오려 하니 그 궤는 그룹들 사이에 좌정하신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불리는 것이라. 3 그들이 하나님의 궤를 새 수레에 싣고 산에 있는 아비나답의 집에서 나오는데 아비나답의 아들 웃사와 아효가 그 새 수레를 모니라. 4 그들이 산에 있는 아비나답의 집에서 하나님의 궤를 싣고 나올 때에 아효는 궤 앞에서 가고 5 다윗과 이스라엘 온 족속은 잣나무로 만든 여러 가지 악기와 수금과 비파와 소고와 양금과 제금으로 여호와 앞에서 연주하더라. 6 그들이 나곤의 타작 마당에 이르러서는 소들이 뛰므로 웃사가 손을 들어 하나님의 궤를 붙들었더니 7 여호와 하나님이 웃사가 잘못함으로 말미암아 진노하사 그를 그 곳에서 치시니 그가 거기 하나님의 궤 곁에서 죽으니라. 8 여호와께서 웃사를 치시므로 다윗이 분하여 그 곳을 베레스웃사라 부르니 그 이름이 오늘까지 이르니라. 9 다윗이 그 날에 여호와를 두려워하여 이르되 여호와의 궤가 어찌 내게로 오리요 하고 10 다윗이 여호와의 궤를 옮겨 다윗 성 자기에게로 메어 가기를 즐겨하지 아니하고 가드 사람 오벧에돔의 집으로 메어 간지라. 11 여호와의 궤가 가드 사람 오벧에돔의 집에 석 달을 있었는데 여호와께서 오벧에돔과 그의 온 집에 복을 주시니라. 12 어떤 사람이 다윗 왕에게 아뢰어 이르되 여호와께서 하나님의 궤로 말미암아 오벧에돔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에 복을 주셨다 한지라. 다윗이 가서 하나님의 궤를 기쁨으로 메고 오벧에돔의 집에서 다윗 성으로 올라갈새 13 여호와의 궤를 멘 사람들이 여섯 걸음을 가매 다윗이 소와 살진 송아지로 제사를 드리고 14 다윗이 여호와 앞에서 힘을 다하여 춤을 추는데 그 때에 다윗이 베 에봇을 입었더라. 15 다윗과 온 이스라엘 족속이 즐거이 환호하며 나팔을 불고 여호와의 궤를 메어오니라.
‘타인을 결코 수단으로만 대하지 말고 오직 목적으로 대하라.’ 18세기 독일의 위대한 철학자인 임마누엘 칸트가 한 말이라고 하지요. 예를 들어 자식을 양육하면서 나중에 자식 덕을 볼 생각이 앞선다면 자식은 목적이 아니라 부모를 위한 수단에 불과한 겁니다. 물론 자식을 양육하면서 자식 덕을 전혀 기대하지 않을 수는 없겠지요.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자식이 살아가고 싶어하는 삶을 부모는 존중해 주어야 하는 겁니다. 자식을 부모의 뜻대로 과도하게 통제해서 자식이 원하는 삶을 전혀 무시하고 부모의 의도와 욕심만 앞세운다면 아무리 자식사랑이라는 명분으로 포장해 봐도 자식은 부모의 뜻을 위한 수단이나 도구일 뿐인 거죠.
우리는 예수 믿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수단인가요? 아니면 목적인가요? 여러 성도님들에게 예수님은 여러분들의 소원과 희망과 내가 가진 뜻을 이루기 위해 필요한 수단이나 도구입니까? 아니면 예수님과 함께 살고, 예수님을 향해 살고, 예수님을 위해 살고, 예수님의 말씀과 뜻을 따라 살아가는, 그래서 예수님 그 자체가 여러분의 인생의 목적입니까? 물론 자식 양육이 100% 자식의 인생 그 자체만을 목적으로 삼기는 어려울 수 있겠고, 그래서 어느 정도는 자식을 통해 내가 덕을 보는 기대를 할 수 밖에 없는 것처럼 우리의 믿음도 100% 순수하고 완벽한 믿음이 아니라면 어느 정도는 예수님을 통해 내 소원과 뜻을 이루려는 의도는 있을 수 밖에 없겠지요.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의 믿음은 예수님을 수단으로 여기는 것에서 벗어나 목적이 되는 것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아직은 나를 위한 예수님, 그래서 예수님이 나를 위한 수단인 경우가 많겠지만, 이제 점차 예수님을 위한 나, 그래서 예수님이 목적이 되는 것으로 전환되어 가야 한다는 것이지요. 이런 믿음의 인식이 없이 그저 나를 위한 도구나 방법이나 수단으로만 예수님을 생각하고 있다면 아무리 오랜 세월 교회를 다녀도 예수님의 본질에는 한걸음도 나아갈 수 없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다윗이 아비나답이라는 레위인의 집에 임시로 보관되어 있던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하나님의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겨오는 내용이지요. 다윗이 예루살렘 남쪽 먼 곳에 있는 헤브론이라는 곳에서 이스라엘 왕으로 등극한 후에 여부스 사람들이 지배하고 있던 예루살렘을 공격해서 그들을 쫓아내고 예루살렘을 새로운 수도로 삼았습니다. 정치적으로는 이렇게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해서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완전히 다스리는 통일 왕국을 세웠지요. 이제 그 다음 과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정신적으로 또 신앙적으로도 통일해야 했기 때문에 아비나답의 집에 약 70년 가까이 임시로 보관되어 있던 하나님의 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겨오려 했던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궤를 옮겨 오는 것은 정치적인 목적을 위한 수단이어야 할까요? 아니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는 목적이어야 할까요? 정치적 목적을 위한 수단이라면 다윗은 다윗의 정치적인 계산대로 실행하면 되겠지요. 하지만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는 목적이라면 당연히 하나님께 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의 궤를 옮기는 것을 과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지, 그리고 옮긴다면 어떤 방법과 절차로 옮겨야 하는지 물어야 했지요. 기도와 제사를 통해서도 물어야 하지만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의 말씀을 살펴보면서 하나님의 뜻을 찾아야 했던 겁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1~5절까지 처음으로 옮기는 과정 속에 하나님께 물었다는 내용이 없지요. 물론 1절에서 자그만치 삼만 명의 군중을 모아서 대규모 행사가 되게 했고, 5절에 의하면 온갖 악기를 동원해서 화려하게 연주하는 열정도 있습니다. 이렇게 사람과 사람의 열정은 있는데 하나님은 없는 거죠. 우리가 모이기만 하면 하나님께서는 의무적으로 우리에게 오셔야 합니까? 우리가 함께 모여 찬양하면 하나님은 의무적으로 영광 받으셔야 하나요? 지금 다윗에게 하나님은 목적이 아닙니다. 다윗의 정치적인 계산을 위한 수단에 불과했던 거죠.
무엇보다 결정적인 실수는 3절에 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궤를 새 수레에 싣고’ 새 수레에 실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궤를 나름대로 잘 모시기 위해 금방 제작된 완전 새로운 수레를 준비했다는 얘기지요. 하지만 출애굽기 25:14절에 의하면 하나님의 궤를 옮길 때에 하나님의 궤 네 모퉁이에 금고리를 설치하고, 그 고리에 폴대 같은 막대기를 끼워서 사람이 메고 옮기도록 규정하셨습니다. 그런데 비록 임시이기는 하지만 레위인 아비나답은 약 70년 정도나 자기 집에 보관하고 있었으면서도 하나님의 궤를 어떻게 옮겨야 할지 몰랐고, 그러다보니 새 수레에 싣고 가는 실수를 저지른 거죠. 역시 똑같이 몰랐던 아비나답의 두 아들이 이 새 수레를 몰고 가다가 6절 말씀처럼 소들이 뛰는 일이 발생했고, 이로 인해 수레가 흔들려서 하나님의 궤가 땅에 떨어질 것 같으니까 두 아들 중 웃사라는 자가 하나님의 궤를 손으로 붙잡다가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그 자리에서 즉사하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하나님의 궤는 어떤 경우에도 지정된 사람만 손을 댈 수 있지 아무나 손을 대서는 안되었기 때문에 수레에 싣고 가는 것도 불법인데 손까지 대 버렸으니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는 건 어찌보면 당연한 거죠.
이 어처구니는 없는 사건이 벌어지고 나서야 다윗은 자신이 잘못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9절 말씀을 보면 ‘다윗이 그 날에 여호와를 두려워하여 이르되 여호와의 궤가 어찌 내게로 오리요 하고’ 이제야 여호와 하나님을 본격적으로 인식한 거죠. 하나님이 내 뜻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하나님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야 한다는 걸 깨달은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궤 옮기기를 중단하고, 11절에 의하면 오벧에돔이라는 사람의 집에 임시로 보관했지요. 석 달이라는 시간이 흘러서 이제 여호와 하나님의 진노가 가라앉았다고 여겨졌을 때 다윗은 다시 옮기기를 시작합니다.
12절 후반부에 보면 ‘다윗이 가서 하나님의 궤를 기쁨으로 메고’ 메었다는 말이 있지요. 처음에는 자기 생각대로 새 수레로 옮겼는데 이제는 율법의 말씀대로 궤를 멘 겁니다. 그리고 13절에 보면 ‘여호와의 궤를 멘 사람들이 여섯 걸음을 가매 다윗이 소와 살진 송아지로 제사를 드리고’ 궤를 메고 겨우 여섯 걸음을 갔다고 하는데 여섯 걸음이면 한 4미터 정도 갔겠지요. 거기에서 멈추고 소와 살진 송아지로 제사를 드립니다. 하나님의 뜻을 물었다는 거죠. 지금 이렇게 옮겨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지를 겸손하게 물은 겁니다. 이제 궤를 옮기는 것은 더 이상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 된 거죠.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하나님 원하시는대로 되어지는 목적이 된 겁니다.
그리고 14절에서는 이렇게 말하지요. ‘다윗이 여호와 앞에서 힘을 다하여 춤을 추는데’ 이제 다윗은 왕이라는 껍질을 벗어버린 겁니다.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예배자가 되었다는 거죠. 백성들 앞에서야 당연히 최고의 권력자인 왕이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다른 백성과 동일한 하나님의 백성이고, 하나님께 영광 돌려야 할 예배자 아닙니까? 다윗은 이제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하나님을 그 어떤 도구나 수단으로 여기지 않고 오로지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뜻 그 자체를 목적으로 삼게 되었음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을 수단으로 삼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 그 자체가 우리 믿음의 목적이어야 하는 거죠. 예수 믿어서 내가 잘되고 복받고 형통하고 소원을 이루고 천국에 가게 되는 것은 믿음으로 인해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의 일부분들일 뿐입니다. 이런 것들이 목적이 되고 예수님은 이런 목적들을 위한 수단으로 전락해 버린다면 우리는 예수 믿는 게 아니라 복받는 것을 믿고, 형통해지는 것을 믿고, 소원을 이루고 천국가는 것을 믿는 것일 뿐이지요. 겉으로는 열심도 열정도 있어보이면서 잘 믿는 것 같아 보이지만 그 믿음의 중심에 예수께서 계신 게 아니라 내 자신의 욕망과 자기중심적인 것만 있는 겁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이 세상에 계실 때 오직 하나님의 뜻 그 자체가 예수님의 모든 생애의 목적이셨지요. 예수님 자신을 위해서 하나님을 수단으로 이용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동정녀 탄생이라는 위험도, 마굿간에서의 탄생이라는 비천한 현실도 받아드리셨고, 귀족 집안이 아니라 갈릴리 나사렛이라는 후미진 동네에서 당시에는 미천한 직업이었던 목수가 되시는 것도 전혀 개의치 않으셨지요. 공생애 마지막에 십자가에서 처참하게 죽으셔야 하는 현실을 앞두셨을 때 겟세마네 동산에서 밤이 새도록 핏방울 같은 땀을 흘리시며 기도하셨지 않습니까? ‘나의 원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시옵소서.’ 예수님은 끝까지 하나님을 예수님 자신을 위한 도구와 수단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직 하나님 자체를 목적으로 삼으셨습니다.
우리가 예수 믿어서 예수님을 따른다면 예수님의 무엇을, 어떤 모습을 따라야 하겠습니까? 많은 것들이 당연히 있지만 그 가운데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것은 이처럼 하나님을 나를 위한 수단으로가 아니라 인생의 근본적이고 궁극적인 목적으로 삼으신 것이지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받는다고 우리는 알고 있지 않습니까? 이 때의 믿음은 어떤 믿음일까요? 예수님을 수단으로 삼는 믿음입니까? 아니면 예수님 그 자체가 목적인 믿음일까요? 예수님은 목적이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생애의 모든 삶, 예수께서 하신 모든 말씀, 예수께서 나타내신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의 권능, 그리고 세상 끝날 다시 오신다는 약속에 이르기까지 예수님은 우리가 함께 살아야 하고 따라야 하고 본받아야 하고 순종해야 할 우리 모든 인생의 궁극적인 그리고 최고의 목적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