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온의 봄-1
얼굴이 웃음으로 가득하다. 아니 아지랑이가 달아오른 봄날처럼, 차 한대기 진월 톨게이트를 서서히 빠져나오고 있다. 며칠 전부터 기다려왔던 그녀가 톨게이트 계산대만 빠져나가면 갓길에 서있는 저 차 안에 다소곳하게 있을 것이다. 고속도로를 달려오면서 속도를 나타내는 메타기를 자꾸 읽어보았지만 조급한 마음과는 전혀 다르게 차의 속도가 너무 느리게 느껴진다. 그러길 한 이십 여분을 더 달려서야 도착한 것이다.
온통 생명을 품은 땅들이 부풀어오른 4월의 봄날.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 생명들을 움켜쥔 땅속처럼 우리의 가슴에도 둘만의 사랑이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매일 같이 하루가 그렇게 기다림으로 시작해서 만남으로 또 하루가 아울어지는 것이다. 그 낮 동안의 애타도록 그리운 시간들과 그녀의 모습을 수없이 지웠다 다시 떠올리는 일상이지만 어느때부턴지 나에게는 습관처럼 의례적으로 그렇게 해야만 되고 그런 것이 너무도 당연한 것처럼 되어버린 것이다.
벌써 이런 일상들이 11년의 세월을 쩍 넘겨버린 것이다. 그저 한 순간 바람이려니 했지만 그것은 결코 그리 되지 않았다. 하여간 묘한 것이 인생이다. 어떤 사람들은 오가며 쉽게 만나 아무렇지않게 헤어지고 만다. 반대로 그러지 못한 사람들도 있겠지만 주위를 보아도 흔치는 않다. 특히 나이 오십을 넘어선 사람들에게는 결코 가질 수 없는 질긴 사랑임에 나는 더더욱 시간이 흐를수록 그녀에 대한 나의 사랑을 확신하게 된다. 시간이 더해지고 해가 바뀌면서 둘만의 관계는 불처럼 타올라 이제는 스스로 타오르는 활화산이 되어버린 것이다.
언젠가 일본 후지산 아래 뿌연 유황 연기를 뿜어내는 계곡을 가로지른 케이블카를 타고 오른 적이 있었다. 끊임없이 솟구치는 유황 연기를 보며 후지산의 과거와 현재가 참으로 질기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다. 후지산과 그 아래 심저의 지층 어딘가에 존재하는 마그마와의 관계. 자연과 자연 현상이 만나는 것도 인연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연기설이 아닐까? 후지산을 여행 하며 유황천에 삶은 계란을 맛본 기억이 있다. 약간 골아터진듯한 구린 맛의 독특함, 하지만 지금도 가끔 그런 맛을 쉽게 잊을 수는 없다. 활화산 속의 유황천 같은. 이 세상에서 흔하게 접할 수 없는 신비로움처럼 그녀의 눈빛과 그녀만의 살가운 목소리가 주는 울림이 좋았다. 나에게 어울리고 딱 들어맞는 그 무엇인가가 그녀에게 있다.
아마 사랑도 그런 것일까?
잊을만하면 기억나는 것들과 그 기억의 미로를 찾아 헤매는 나에게 오늘이라는 시간도 그럴 것이다. 그녀가 다가온다. 아지랭이 피어나는 봄 땅을 헤집고 햇살에 막 피어나는 꽃처럼 내 마음속으로 걸어 들어오고 있다. 나에게 어느 순간부터 그녀는 꽃이되었다. 3000년을 지나야 한번 피고 진다는 우담바라가 아니어도 좋다. 산과 들에 흔히 피고지는 쏙부쟁이어도 좋고 길가에 듬성듬성 피어있는 개망초라도 좋다. 아니 잔뜩 온몸을 독한 가시로 세상을 잔뜩 경계하고있는 흑장미꽃이어도 나는 그녀에게 달려갈 것이다. 생각해보면 참 인연이란 묘하다. 그녀와의 만남과 흘러간 날들을 되돌아보면 그렇다. 내 나이 사십을 막 넘어선 때에 그녀는 마흔살의 아줌마였다.
2001년 한 여름의 칠월경. 오래 전부터 점숙 누나로부터 그녀에 대해 종종 소식을 듣다보니 자신도 모르게 그녀에게 관심을 갖게 되버렸다. 그날따라 그녀의 사무실로 한번 보러가자는 것이다. 그러기에 별다른 생각 없이 따라 나섰다. 태인도 사무실에 들어서며 나눈 인사도 일상적이었고 그녀가 나를 대하는 모습도 별반 특별하지 않았다. 안녕하세요? 네에? 어설프게 나눈 인사도 그랬고 인사말 끝에 차 한잔 드릴까요? 아니요. 차 말고 시원한 물 한 컵만 주시지요. 사실 갈증도 났고 커피란게 마시고 나면 프림 성분 때문에 입안이 영 개운치 않다는 느낌이 들곤 했으니까. 지금은 많이 나아졌지만 당시는 나에게 커피에 대한 약간의 결벽증이 있었다. 그래서 습관적으로 커피나 사탕류 또는 과자를 먹고 나면 꼭 양치질을 해야만 개운했다. 언젠가부터 항상 주머니에는 칫솔을 넣고 다니는 습관이 생겼고 혹시라도 칫솔이 없으면 불안하기까지 했다. 그녀가 가져다 준 유리잔의 찬 물을 마시며 점숙이 누나를 사이에 두고 어색한 대화르 나눈 정도였고, 그녀도 평소와 다름없이 사무실을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대하는 사무적인 행동뿐이었다. 사람이란게 뒷 일을 알 수 없는 것은 분명하다. 평범한 남녀가 만났지만 연인이 되어버렸다.
진월 톨게이트를 빠져나가면서 차 창문을 열고 아가씨에게 요금을 계산했다. 이미 마음이 들떠서일까? 그 아가씨가 건네는 인삿말도 건성으로 하였지만 마음은 솜털처럼 들뜨기 시작했다. 모든게 이 순간 만큼은 세상이 참으로 아름답다는 것이다. 스윽 차를 밀고 나가자 저만치서 환하게 그녀가 차문을 열면서 웃고있다. 그 엷은 미소가 커다란 풍선처럼 내 얼굴을 덮쳐왔다. 오직 나만을 위한 그녀의 미소이기에…
매사가 우리들은 그랬다. 만나면 물론 말은 나누지만 맨 먼저 하는 것은 둘만의 소통을 위한 표정언어로도 충분했다. 그녀가 빗어낸 나만을 위한 얼핏 띄우는 웃음이었다. 웃음이 우리에게는 말이 되었다. 그녀의 얼굴에서 번져 나오는 엷은 웃음은 우리 둘에게는 그냥 웃음이 아니었다. 둘만의 가장 소중한 관계를 이어가는 말이 되었다. 수 많은 의미가 담긴 말들을 나누며 그녀의 차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비로소 소망하던 소망이 이루어진 것이다. 우리에게 매일 되풀이되는 꿈! 긴 낮 동안의 기다림을 마무리하고 비로소 하나가 되려는 순간이 온 것이다.
톨게이트를 빠져나온 그녀와 진상쪽으로 차 방향을 틀었다. 한적한 2차선 도롯가를 따라 늘어선 집들과 그 사람들의 삶의 터전인 들판이 도로를 사이에 두고 마주하고 있다. 들판에 드문드문 하얀 비닐 하우스가 보인다. 그래 저 사람들의 삶은 비닐하우스를 통해 이루어지고 있을 것이다. 그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의 방식이 흙에 있음을 말하고 있다. 우린 들 가운데를 가로지른 2차선을 따라 마냥 달려나갔다. 한참을 가다가 길가에 차를 세우고는 군데군데 피기 시작한 꽃들을 바라보며 마냥 즐겁기만 한 우리. 2차선 도로는 우리들의 기분을 알아챘는지 더 이상 지나는 차들을 허락치 않았다. 둘만의 오붓한 드라이브. 차선을 따라 가다 한적한 길가에 차를 세웠다.
첫댓글 두사람의 사랑, 시작이 되는 싯점이네요. 저도 이제 나이들어 마음도 삭막한데... 이럴때는 애정 소설을 한편 읽어 보는것도 작가로서 작품 창작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기대하며... 지금은 아련한 나의 옛사랑도 떠 올려 봅니다.
지루하지 않게 읽어 볼 것 같네요 봄이라 그런지 아름다운 애정소설 한권 읽어 보고 싶었는데 좋은 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