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입사원 합격 통지서부터 취임 선물까지…. 상당수 최고경영자(CEO)는 자신만의 ‘일깨움’을 지니고 있다. 매일 바쁜 일정을 소화하면서도 늘 자신의 좌표를 점검하도록 해 주는 일종의 나침반이다. 남들에겐 하찮은 물건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당사자에겐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는 ‘보물 1호’다. 어느새 설날이 지났다. 시나브로 새해 다짐이 흐트러질 때다. CEO의 초심(初心) 다잡기 노하우를 벤치마킹해 나만의 ‘다짐 지킴이’를 하나쯤 간직해 보면 어떨까.
“좋을 때 헬렐레하지 말자.” 얼마 전까지만 해도 미래에셋의 박현주 회장과 최현만 부회장의 사무실 전화기 옆에 붙어 있던 문구다. ‘헬렐레’는 얼이 빠져 몸을 가누지 못하는 상태를 뜻하는 우리말. 다소 엉뚱해 보이는 이 표현을 두 사람이 상당 기간 간직하게 된 사연은 이렇다.
공병호 공병호경영연구소장은 가끔 1979년 부친이 쓴 금전출납부(사진)를 보면서 ‘1인 기업가’로 창업할 당시를 회고한다.
미래에셋을 창업한 지 5년째 되던 2002년 박 회장이 당시 미래에셋증권 사장이던 최 부회장에게 이런 말을 꺼냈다. “자네와 내가 마음속 깊이 품어야 할 말이 있어. (회사 사정이) 좋을 때 헬렐레하지 말자고. 우리부터 이 말을 실천한다면 미래에셋은 ‘백 년 기업’이 될 수 있을 거야.”
두 사람은 이 문구를 프린터로 출력해 전화기 근처에 놓아 두고 매일 수십 차례 전화 통화를 할 때마다 ‘샴페인을 일찍 터뜨리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겠다’는 결심을 다졌다고 한다. 당시 미래에셋은 ‘닷컴 버블’ 충격에서 벗어나면서 실적이 가파르게 상승하던 시절. 박 회장은 이럴 때 회사 경영진이 현실에 안주하는 것을 가장 두려워했다고 한다. 최 부회장은 “아무리 좋은 기업이라도 수뇌부가 방심하면 순식간에 내리막길로 치닫는다”며 “잘나갈 때 더욱 긴장하자는 의미에서 그 문구를 눈에 잘 보이는 곳에 붙여 뒀었다”고 전했다. 이런 ‘초심 잡기’가 미래에셋 급성장의 저력이 됐음은 물론이다.
박 회장과 최 부회장뿐이 아니다. 유명 CEO 중 상당수가 마음 자세를 다스리는 상징물을 한두 개씩 가지고 있다. 김효준 BMW코리아 사장은 서울 청암동 자신의 집 서재에서 아침·저녁으로 서재에 걸려 있는 액자를 보면서 ‘특별한 대화’를 한다. 철농(鐵農) 이기우(1991~93) 선생이 쓴 ‘척벽비보 촌음시경(尺璧非寶 寸陰是競)’이란 글귀다. ‘한 자 되는 구슬을 보배로 알지 말고, 오직 촌음(아주 짧은 시간)을 귀중히 여겨야 한다’는 뜻이다. 김 사장은 “2000년 9월 CEO에 오르자 장인 어른께서 선물해 주신 것”이라며 “한 사람, 한 사람 고객의 마음을 헤아리고 소통의 장을 넓혀 나가는 데 매진해야 한다는 내 소신과 일맥상통해 늘 마음에 새겨두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사람들이 ‘초심으로 돌아가자’고 입버릇처럼 말하는데 말에 그치지 않으려면 초심을 다잡는 습관을 가지거나 애장품을 곁에 두는 게 좋을 것”이라고 조언했다.
자신의 초심과 동고동락(?)하는 CEO도 있다. 신헌철 SK에너지 부회장은 늘 양복 안주머니에 ‘특별한 보물’을 지니고 다닌다. 72년 유공(현 SK에너지)에 들어갈 때 받았던 입사 통지서와 신입사원 임명장이다. 사회인으로 첫 출발할 당시의 벅찬 감정을 간직하기 위해서라는 것. 36년 전 입사 통지서를 보면서 스스로에게 젊은 패기를 주문한다는 얘기다.
최병인 노틸러스효성 사장의 서류 가방엔 색 바랜 편지 한 통이 들어 있다. 경영 컨설턴트로 일하다 2000년 5월 서른아홉 나이에 효성그룹에서 CEO 제의를 받은 그가 자신에게 쓴 편지다. ‘기업 경영을 조언하는 자리에서 경영을 책임지는 위치로 바뀌는 순간이다. 경영자로서 목표가 무엇인가.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가’라는 내용이다. 최 사장은 기운이 빠지거나 작은 성공에 취했을 때 색 바랜 편지를 꺼내 보면서 새내기 CEO 시절로 돌아가곤 한다.
대전의 소주업체인 (주)선양의 조웅래 회장은 걷기를 통해 초심을 다잡는다. 대전에 사는 조 회장은 새벽 5시30분이면 어김없이 계족산을 오르는 걷기 매니어다. 2년 전 우연한 기회에 맨발로 계족산을 올랐던 게 계기가 돼 이젠 산행을 하지 않으면 밤에 편안하게 잠을 못 이룰 정도가 됐다고 한다. 조 회장은 “어둠을 뚫고 새벽길을 걷는 느낌이 처음 사업 시작할 때와 비슷하다”며 “새벽길을 걸으면 저절로 자세를 곧추세 우게 되고 마음가짐도 새로워진다”고 말했다.
방일석 올림푸스한국 사장도 산행으로 초심을 되새긴다. 요즘엔 산에 오르면서 사진을 찍고 간단한 메모도 한다. 나중에 내용을 정리해 임직원에게 e-메일을 보내기 위해서다. 지난 연말엔 회사 워크숍에 앞서 홀로 산에 다녀온 다음 ‘한계의 벽을 넘는 환희를 느껴 보자’는 프레젠테이션 자료를 만들기도 했다. 방 사장은 “2000년 삼성의 일본 주재원으로 근무하다 올림푸스한국 CEO로 발탁됐을 때나 본사 마케팅본부장으로 첫발을 내디딜 때나 모두 산행을 시작하는 심정이었다”며 “그때마다 ‘한계의 벽’을 넘어 보자는 목표를 세웠는데, 이런 마음을 임직원과 나누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1세대 벤처기업인의 대표주자로 꼽히는 조현정 비트컴퓨터 회장의 초심 다지기 도우미는 태극기다. 그는 외환위기 당시 ‘젊은 기업가가 먼저 할 일이 무엇인가’라는 고민을 하다 태극기를 샀다. 그는 출근할 때마다 태극기를 매만지면서 ‘좋은 제품으로 사회에 공헌하겠다’는 초심을 되새긴다.
어떤 CEO에겐 부친의 가르침이 초심 잡기 방편이 된다.
서울 을지로에 있는 최신원 SKC 회장의 집무실. 이곳은 선친인 고(故) 최종건 회장의 방을 절반쯤 옮겨놓은 듯하다. 최종건 회장의 초상화와 사진·명패 등이 가지런히 정리돼 있다. 특히 최 회장 책상 뒤에 놓인 초상화가 눈길을 끈다. 최 회장은 “아버님이 등 뒤에서 지켜보고 있다는 마음 자세를 갖기 위해 (초상화를) 거기에 두었다. 어떨 때는 아버님께서 응원하기도 하고, 또 어떨 때는 꾸짖기도 하는 것 같다”며 부친에 대한 각별한 그리움을 표현했다.
장병우 오티스엘리베이터 사장은 “아버님의 아호였던 ‘우보(又步)’를 마음속 등불로 여기고 있다”고 말했다. 장 사장의 부친은 고(故) 장왕록 서울대 영문과 교수. 이런 영향으로 6남매 중 유일한 아들인 장 사장은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장래 직업을 묻는 물음에 주저 없이 교수나 학자라고 말하곤 했단다. 물론 부친의 기대이기도 했다. 럭키(현 LG화학)에서 수출부 사원을 뽑는다는 소식을 듣고 호기심에 지원했다가 ‘덜컥’ 합격한 것이 72년 말. 두 달가량 시험 삼아 직장생활을 해 보겠다는 생각이었는 데 다이내믹한 일에 끌렸다.
장 사장은 “아버님께서 의외로 (기업인 인생을) 허락해주셨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부친의 기대를 저버린 죄송스러운 마음을 성공으로 씻겠다고 다짐한 그는 요즘도 새 일을 시작하거나 안일주의에 빠질 때는 집안에 걸린 ‘걷고 또 걷는다’는 액자를 보면서 초심을 되새긴다.
2001년 9월 ‘1인 기업가’로 제2의 인생에 도전한 공병호 공병호경영연구소장. 그는 독립을 선언하면서 가장 먼저 부친의 유품인 금전출납부를 책꽂이 위에 올려놓았단다. 부친이 79년에 쓴 것이다.
“아버님이 오랫동안 사업을 했는데 79년 부도가 나 집안이 무척 어려워졌다. 개인 사업을 시작하면서 불현듯 그때 생각이 떠올라 아버님의 금전출납부를 열어 보니 회사 경영 현황은 물론이고, ‘병호 유학’ ‘처 정기검진’ 같은 가족사가 깨알같이 적혀 있었다. 가끔씩 아버지의 애정 어린 금전출납부를 넘기면서 사업하는 어려움을 극복한다.”
사회에 첫발을 내디딜 당시의 초심을 마음 깊이 간직하고 되새기는 CEO도 많다.
손욱 농심 회장은 “한국비료 신입사원 시절 실험실에 근무하면서 리더(LEADER)는 ‘잘 듣고(Listen) 잘 알려주고(Educate) 참된 도움을 주는(Assist) 사람’의 준말이라는 것을 체득하게 됐다”며 “먼저 현장의 얘기를 듣는 것이 CEO의 기본 자세라는 초심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구학서 신세계 부회장은 “CEO로서 ‘평상심’이라는 화두를 마음에 두고 있다”고 전했다. 구 부회장은 20여 년 전 삼성 근무 시절 원불교 신자인 한 임원으로부터 ‘평상심이 곧 도(平常心是道)’라는 말을 들었다. 기독교 신자인 그에겐 생소한 말이었지만 외부의 충격에도 흔들림 없이 평온한 상태라는 뜻이 마음에 와 닿았다. 이후 전략을 구사해야 하는 CEO 자리에 있으면서 혹시 전투나 전술에 관여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평상심의 자세로 자신에게 묻곤 한다는 것.
이승한 삼성테스코 사장은 “처음 CEO가 됐을 때 겸손·신뢰·자신감이라는 세 가지 키워드를 가슴에 새겼다”고 말했다. 남중수 KT 사장은 ‘맹자’에 나오는 ‘역지즉개연(易地則皆然)’이라는 가르침을 마음에 새기고 있다. 남 사장은 “상대방 입장을 먼저 생각해 보자는 뜻”이라며 “CEO의 주임무가 고객 얼굴에 웃음꽃을 피우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단기 실적에 집착하는 유혹에서 벗어나게 된다”며 환하게 웃었다.
첫댓글 그들에겐 뭔가 다른, 올곧은 마음이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의 몫을 해내는 사람들은 마음의 길잡이가 확실해야 함을 다시 한 번 알게 됩니다. 평범으로 무장한 제 삶을 돌아 보는 기회가 됨에 감사 드립니다. 좋은 소식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