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저를 도와주십시오.”(마태 15,25)
오늘 복음 말씀은 예수님께서 티로와 시돈지방으로 가신 도중에 그 곳에서 만난 이방인 사람 가나안 부인과의 만남을 전합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의 말씀 가운데 눈길을 끄는 것은 바로 이 가나안 부인의 모습입니다. 이스라엘인들이 부정한 사람들이라 하여 사람으로 취급하지도 않던 이방인이었던 가나안 사람, 가나안 사람 역시 자신들이 이스라엘인들로부터 그와 같은 대우를 받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 역시 이스라엘인들과의 만남을 피하였던 당시의 상황을 고려해 보았을 때, 이방인인 가나안 여인이 이스라엘인들의 무리로 다가와 그 가운데 계신 예수님께 다가가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다는 것 자체가 굉장히 놀라울 뿐입니다. 그녀는 예수님께 이렇게 말합니다.
“다윗의 자손이신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제 딸이 호되게 마귀가 들렸습니다.”(마태 15,22)
이 외침의 말 속에서도 잘 드러나듯 그녀가 모든 위험을 무릅쓰고 이스라엘인들의 무리에 다가가 그들의 중심으로 계신 예수님께 다가선 이유는 오직 하나, 곧 자신의 딸이 고통 중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같은 청을 올리는 그녀의 모습을 한번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을 전하는 마태오 복음사가는 예수님께 청을 올리는 다른 대부분의 사람들과 같이 그녀가 예수님께 가까이 다가와 예수님의 앞에 엎드려 자신의 청을 올렸다고 전하지 않고 그저 단순히 그 여인이 무리 중에서 나와 외치듯 자신의 청을 말했다고 전합니다. 이방인이었던 이유로 그녀는 예수님 곁은커녕 그 분 가까이에도 가지 못한 채, 저 멀리 먼 발치에서 소리 높여 외쳤던 것입니다. 자신의 외침의 소리를 예수님이 들으시고 예수님께서 자비를 베풀어주시기를 바라면서 말입니다. 그런 그녀의 바람과는 전혀 달리 그녀의 외치는 소리를 들은 제자들은 예수님께 이렇게 말합니다.
“저 여자를 돌려보내십시오.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고 있습니다.”(마태 15,23ㄴ)
제자들의 이 모습이 인상적입니다. 제자들은 그저 그녀의 외침을 시끄러운 소음정도로 치부합니다. 시끄러우니 저 여자를 쫓아버리자고 말하는 제자들의 마음이 참으로 차갑고 냉정하게 느껴집니다. 마귀에 들려 아파하는 딸을 위해 무엇이든 하려는 엄마의 간절한 마음을 제자들은 그저 시끄러운 그래서 귀찮은 것으로 치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제자들을 꾸짖고 그녀를 불러 그녀의 간절한 청을 들어주실 예수님의 모습을 예상하고 있는 우리들을 오늘 복음의 말씀은 우리의 예상을 뒤집고 예상외의 예수님의 행동으로 우리를 당황스럽게 만듭니다.
여인의 간절한 바람, 곧 모든 위험과 곤경을 무릅쓰고 딸의 병을 낫게 하기 위해 용기를 내어 예수님께 다가섰건만 예수님은 그녀에게 냉랭하기 이를 데 없기 때문입니다. 그녀의 청에 예수님은 처음에는 당신에게 맡겨진 사명, 곧 자신은 오직 이스라엘 민족들을 위해서 파견된 메시아임을 확인시키지만 이 대답에도 굴하지 않고 다시금 도와 달라 청을 올리는 그녀의 부탁을 예수님은 이제는 단순히 거절하는 것을 넘어 그녀의 청을 식탁 옆에서 빵을 청하는 강아지에 비유하기에 이르시기 때문입니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좋지 않다.”(마태 15,26)
평소 가난한 이들과 소외받는 이들에게 따뜻하고 사랑어린 마음으로 그들의 아픔을 헤아려 주시던 예수님의 모습과는 사뭇 다른, 자칫 받아들이기 힘들고 이해하기 힘든, 아니 오해의 여지마저도 있어 보이는 예수님의 이 말씀도 놀랍기 이를 데 없는데, 예수님의 이 반응에 보인 가나안 여인의 모습은 더욱 놀라우며 믿기 힘들 정도입니다. 그녀는 예수님께 이렇게 대답합니다.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마태 15,27)
여인의 이 모습을 우리는 과연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 모든 위험과 곤경을 무릅쓰고 용기를 내어 이스라엘인들에게 다가섰건만 도움을 청한 이스라엘인 예수님은 그녀를 하찮은 동물로, 그것도 강아지로 자신을 취급하는 이 믿을 수 없는 그리고 모욕적이기 그지없는 이 상황 속에서도 그녀는 그 모든 것을 감수하고 자신의 하나 뿐인 청, 곧 아픈 그녀의 딸의 병을 낫게 해달라고 예수님께 청을 올리는 이 모습은 그녀가 얼마나 간절히 그녀의 딸을 사랑하는지, 그래서 그 모든 모욕과 멸시를 괘념치 않고 자신은 어찌되어도 좋으니 오직 자신의 딸이 낫기를 바라는 어머니의 모습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자식을 사랑하는 어머니로서 사랑하는 자녀의 고통을 그저 바라볼 수만은 없어서 자신을 사람으로도 취급하지 않는, 그래서 위험하기 그지없는 이스라엘인들의 무리 속으로 겁 없이 다가가 그들의 갖은 멸시와 구박에도 굴하지 않고 오직 자신의 사랑스런 딸의 병을 낫게 하기 위해 모든 것을 감수하는 한 어머니의 간절하고도 고귀한 사랑, 예수님은 바로 가나안 여인의 어머니로서의 간절한 믿음을 보시고 그녀의 청을 끝내 들어주십니다.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마태 15,28)
오늘 복음이 전하는 이 가나안 여인의 놀라운 믿음의 모습은 오늘 독서의 예레미야 예언서의 말씀 안에서도 다시금 확인됩니다. 하느님을 저버리고 이방의 신을 섬기는 지울 수 없는 죄를 지은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의 진노를 불러일으키고 그로 인해 이스라엘 역사상 있을 수 없는 치욕의 역사, 굴욕과 비참의 극한이라 할 수 있는 유배를 겪게 된 그들은 마침내 예언자를 통해 전해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통해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부서지고 낮추인 마음으로 하느님 앞으로 돌아와 그들의 죄를 진심으로 뉘우칩니다. 이에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이스라엘 백성을 어떻게 사랑해왔는지를 다음과 같이 전하십니다. 하느님은 예언자를 통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를 영원한 사랑으로 사랑하였다. 그리하여 너에게 한결같이 자애를 베풀었다. 처녀 이스라엘아, 내가 너를 다시 세우면 네가 일어서리라. 네가 다시 손북을 들고 흥겹게 춤을 추며 나오리라.”(예레 31,3-4)
이처럼 오늘 독서와 복음의 말씀은 한 목소리로 하느님께 바라고 희망하는 우리의 믿음의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잘 알려줍니다. 하느님 그 분께 대한 간절한 믿음으로, 그래서 오늘 복음의 가나안 여인이 보여준 그 모습처럼 그 모든 모욕과 멸시마저도 감수할 수 있는 간절한 믿음을 지닐 때,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넘치도록 사랑을 베풀어 주신다는 사실, 오늘 말씀은 바로 이 진리를 우리에게 이야기합니다. 오늘 화답송의 시편의 말씀을 기억하고 마음에 새기십시오. 하느님은 목자가 양떼를 돌보듯 우리를 지켜주시고 보호해 주십니다. 우리가 무엇을 하였든, 그리고 우리가 어떠한 사람인지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고 오직 우리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호의를 베풀어 주시는 분, 그래서 그 분의 우리를 향한 사랑으로 우리가 매일의 삶을 기쁘게 살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마음에 새기며 오늘 하루 하느님과 함께 기쁨 속에 살아가시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기도하겠습니다.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마태 15,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