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둔주(遁走)
서 기 원
R는 어느 경제 관청의 하급 공무원이었다. 하급 공무원이라고 하면 아마도 주사급부터 그 이하의 관리를 총칭할 것이다. R는 촉탁이었다. 신통한 기술이라도 있어서 긴한 위지의 촉탁으로 대우를 받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정식 정원 축에 끼어들지 못했을 뿐이고 군더더기 임시직원에 불과하였다. 공무원 감원 선풍이 일어날 때마다 으례 첫째 대상으로 규정되는 것이 촉탁 그리고 임시직원들인만큼 그간 자리를 부지한 것만 해도 여간 다행스런 일이 아니었다. 관리 노릇을 하려면 고등고시 합격자라야지, R는 하루에도 열 번은 입속으로 중얼댄다. 하기야 R도 버젓이 공무원 임용 시험을 치른 다음, 수습(修習)을 마치는 대로 주사(主事)를 준다기에 서슴지 않고 관청에 들어온 터이었다. 수습 기간이 가령 몇 개월이라고 약속을 받은 셈은 아니었다 하더라도 벌써 3년째 줄곧 수습이라고 해서야 말도 안 되는 사기요, 위반일 것이었다. 그러나 이젠 누굴 원망하기에 앞서 이른바 ‘빽’이 없는 처지를 한탄하게 마련이었다. 같은 대학을 나보다도 3년이나 뒤늦게 나왔건만 김 사무관은 곧 서기관으로 승진하리라는 소문이 자자하다. 관리를 해먹으려면 천상 고등고시를 합격해 놓고 볼 일이야, 아니라면 든든한 ‘빽’이라도 걸머지고 있어야지. R는 과장 책상 쪽을 곁눈질로 넌지시 살핀 다음 선하품을 되삼켰다. 그러자니 가슴만 답답하게 죄어들 뿐이었다. 현기증마지 일어났다. 군대가 좋았어, R는 백양을 한대 피워물었다. 사흘째나 갈아입지 못한 와이샤쓰 소매를 걷고 손목시계를 들여다보았다. 네시 반, 그리고 초침이 30초를 막 지난 참이다. 겨우 그것밖에 안 됐나, 역시 벽에 걸린 전기시계도 네시 반이었다. 계장이 수화기를 책상머리에 내다버리고 R씨, 면회요, 한다. 면회? 불길한 예감부티 들었다. 직장으로까지 R를 찾아오는 손님도 드물었지반 도시 면회라고 해서 반가왔던 일이라곤 한 번도 기억에 없다. 설마 순길이 녀석이 버스에 치인 것은 아니겠지. 아래층 수위실에 들어서니까 군대에서 1년 남짓 부하로 데리고 있던 G가 아닌가.
이거 웬일이야,
G의 손바닥은 식은땀이 배어 있었다. G는 검붉은 입념을 불결하게 드러내고 웃었다. 그것은 웃음이라기보다 내부의 고통을 애써 참아 뵈는 인상이었다. 내게 이로운 방문객은 아닌 모양이군. 그렇다고 옛친구를 만난 반가움과, 먼 손님을 대접하는 성의가 모자랐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R는 G를 지하실 식당으로 청해서 차를 시켰다.
그래, 어떻게 지내고 있소.
R는 G가 다섯인가 나이가 많았다고 여기면서 이젠 서로 같은 ‘사회인’인만지 상관과 부하의 관계를 떠났다고 스스로 다짐했다.
R중위님의 소식은 제대하기 전부터 많이 들었읍니다.
그 말은 R로서 걸코 듣기 싫은 것은 아니었으나 그에 대한 어떤 기대를 은연중에 풍기고 있는 느낌이어서 다소 불안스런 부담을 안 받을 수가 없었다. 나를 찾아온 동기를 아직도. 눈치 채지 못한 듯 시지미를 뗀 채, 무난한 세태 얘기나 지껄여대는 것은 너무 잔인한 짓이다.
헌데 그동안은 어떻게 해서 지내 왔나.
네, 덕분에 그럭지럭 밥은 먹었지요.
G는 여유있게 대답했다. R는 행여 남을 도와줄 수 있기는커녕 먼저 자기 자신이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인 의미에서나 남의 원조를 필요로 해야 할 딱한 실정인 줄 깨닫지 못하는 바는 아니었다. 그렇지만 대개의 경우, 일정한 직업이 없는 옛 친우가 좀체 어울리지 않는 양복을 입고, 너무도 가쁘게 졸라맨 넥타이를 거북살스러워하면서 필경 끄집어내고야 마는 화제의 성격쯤 미리 짐작 못할 R도 아니었다.
지난 봄까지만 해도 재미를 봤어요. 그러다가 그만 그 자식한테 호되게 걸렸지 뭡니까. 나 참, 믿지 못할 것이 똑바루 말이지 사람입니다. 사람 잘 만나는 것두 큰 복인데 글쎄 제 얘기좀 들어 보십시오.
그는 함께 군문을 나온 최모 상사와 영등포 쪽 어느 변두리 시장에서 포목점을 차렸다는 것이다. 서너 달 동안 꾸준히 재미를 본데다가 음력 대목을 치르고 나니 제법 중앙에서 한판 벌일 만큼 한밑천 잡았었다는 것이다. 헌데 뜻밖의 변이 생겼으니 동업인 최 상사란 놈이 G가 시골을 다니러 간 사이에 현금과 물건은 물론, 점포의 권리금마저 모조리 빼먹고 도망쳐버렸다는 것이다.
그래서 시방은 와이샤쓰 주문받는 외교원입니다.
실상 R는 외교관이건 외교원이건간에 G가 직업을 가졌다는 말에 적이 마음이 놓이는 것이었다.
내 저녁이나 대접할까.
퇴근시간이 넘었다고 해서 사무실에 들르지도 않은 채 퇴청이라니, 하급 공무원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그렇지만 R도 오랜만에 만난 옛 부하 때문에, 명령 한 마디로 백여 명의 장정들이 기계처럼 움직이던 과거의 자신과 용기가 잠시 되솟은 탓일는지도 모른다. 와이샤쓰 주문을 받는 외교원이라, 얼마나 힘들고 고생스러울까, 내가 도울 수 있는 한도에서 도와 주어야지.
제 아버님 돌아가셨을 때 R중위님 은혜는 잊혀지지 않습니다.
눈 가장자리가 불그레 상기된 G의 얼굴은 한결 젊어 보였다.
한잔 더 해, 뭘 그것쯤 가지구.
그들은 분명히 관리와 외교원이 아니고, 중위요 상사였다. 내가 경어를 섞 어 쓰는 것이 몹시 섭섭하다니 참 인간적인 친구군.
R중위님은 다 뭔가, R형 그래 !
아니올시 다, 천만에요.
자네도 알다시피 내 무슨 힘이 있나. 허지만 내 힘자라는 데까진 노력을 애끼지 않겠네.
그제야 G는 R가 근무하는 부내서 × ×샤쓰 주문을 받고 다닐 수 있도록 총무과장이나 비서관 같은 사람에게 소개를 시켜달라고 당부하는 것이었다. R는 당황했다. R가 만일 과장급만 되었어도 그리 난처해할 일거리는 아니었을 것 이다. 근무시간 중에 녹용주인지 양생주인지 하는 약명을 월부로 팔고다니는 판이라 G의 청도 능히 있음직한 얘기였다.
이봐 G형, 나는 일개 촉탁이야 촉탁. 그러면서 은근히 거절의 뜻을 암시해 주었다.
네, 그건 저도 압니다. 그러니까 총무과장한테만 한마디 소개해 주시면. 군에 있을 적부티 G의 성격엔 추근추근한 끈기가 있었다고 생각하면서, 반쯤 울상으로 G의 집요한 공세를 지탱하고 있었다. 민일 내가 G를 총무과장에게 소개를 했다가는 나와 G가 동업자로 간주되어 샤쓰 한 장에 몇 십환의 커미션을 먹는다거니 이익을 반분한다거니 해서, 감원 제일차 대상인 촉탁 따위 신분으로서는 치명적인 타격을 받기 꼭 알맞다, 그런 사정을 G로 하여금 충분히 납득되도록 설명하기엔 G가 너무도 관공서의 분위기나 내먹 같은 것에 어두웠을 뿐더러 같은 직에 있으면서 상대가 장관이나 차관도 아닌 일개 과장에게 사람 하나를 소개할 능력도 없는 옹졸한 의인으로 인정 받기엔 R의 허영심이 용서하지 않았다.
그렇게 힘이 들고도 먹기가 어려워져야, 차라리 어디 월급장이로 들어가지 그래.
취직요? 누가 모르나요. 학벌이 있나, 돈이 있나, 대체 건덕지가 있어야죠. 자네 경리를 해본 경험이 있다면서.
정식 코스도 아닌 걸 누가 실력으로 인정한답니까.
글쎄, 아무 힘이 없는 나지만 친구들한테 알아보면 혹시 취직자리 하나 나서지 말란 법도 없을 것 아닌가.
결국 R는 G의 취직을 도맡아 버린 셈이 된 것이었다. G는 R에게 취직을 부탁하기 위해서 찾아간 것은 아니리라. 마찬가지로 R도 자진해서 G의 곤경을 타개하여 준다거나 제대군인 하나를 버젓한 사회인으로 재출발시켜 주겠다는 눈물겨운 정리로 하여 마땅히 과용이라고 해야 할 저녁을 산 것은 아니었다.
R는 G의 취직을 맡게 된 자신을 한쪽으로는 비웃고 한쪽으론 신기하게도 여겄다. 하긴 R는 수입이 확실치 못한 월부 판매원보다 차라리 관청이나 회사의 수위 같은 자리가 최저생활이 보장된다고 말한 순간 앞으로 어쩔 수 없이 G의 취직을 걱정하게 되리라는 예감이 들었던 것이다.
저는 오로지 R중위님만 믿습니다.
G는 그 이튿날로 이력서 세 통에 사진을 얹어서 가져왔다. R는 그 이력서 봉투를 받아들자, 새삼 무거운 의무감 같은 것으로 긴장되면서 한편 까닭모를 서러움이 불쑥 지밀었다. 이 사람에게 일자리를 주시오, 이 제대군인을 데려다가 한 달에 3만 환만 줄 사람은 빨리 나서시오. R는 그렇게 네거리에서 외치고 싶은 충동을 억눌렀다. 여보시오. 이 제대군인 좀 보시오. 어떻습니까. 쓸만하지 않습니까. 제 부하로 있던 청년인데 쌀가마를 지구 10리는 문제없는 장사란 말입니다.
R는 그렇게 행인을 붙잡고 애원하고 싶은 절박한 느낌이었다.
하하하하하,
대신 R는 하늘을 향해 허탈하게 웃고 말았다.
비관하지 말아, 무슨 수가 나겠지, 어쨌든 되도록 자주 연락을 취하면서 차분히 기다려 보게.
R는 G의 축축하고 차가운 손을 잡아 힘을 주고 한 주먹으로 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 주었다. G는 신뢰에 가득찬 눈으로 감사를 표시했다. R의 태도는 믿음직스러웠다. 비굴한 억지 웃음과 겁먹은 눈초리가 판에 찍힌 R의 얼굴 속에 설마 그와 같은 대장부의 면모가 감추어져 있었으리라고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그런 R의 표정도 금시 무질서하게 와해되어 버렸다.
R는 깨달았다. G에 대한 허황한 격려는 실상 내가 나 자신에게 보낸 것이 아니었던가.
R는 손이 닿는 범위 안에서 착실히 G의 취직자리를 구해본 셈이었다. 학교, 은행, 회사 두루 따져보아야 그가 취직을 부탁할 만한 친구란 고작해서 다섯을 넘지 못했다. 좀처럼 친구 왕래가 없는 터에 격에 맞지도 않는 취직 알선의 쑥스러움을 무릅쓰고 부지련히 돌아다녔다. G의 독촉 아닌 독촉을 네 차례나 받은 한 달이 넘도록 통 소식이 없었다. 하기야 R가 그린 청을 넣을 만한 친구들이라면 R와 대동소이한 신세일 이치여서, 국회의원 명함 한 장쯤 얻어댈 주변도 없는데야 당연한 결과라고 할 수밖에 없었다. 관리를 해먹으려면 우선 고등고시부터 합격해 놓고 볼 일이야. 내가 사무관만 되어도 G의 일터 하나는 해결될 텐데. 때기름이 흐르는 샤쓰 소매를 지켜올리고 손목시계를 본다. 네시 5분. R씨 면회요, 계장이 수화기를 난폭하게 내던져 준다. 찾아올 사람이라곤 G밖에 없을 것이다.
야단났읍니다. 외교원도 때려 치웠지요. 그 자식들이 글쎄, 월말이 지나도 수당을 주어야죠. 이 핑계 저 핑계로 날짜만 끌고 피하니, 화가 나서 튀어나왔읍니다.
G의 얼굴은 이번에도 광대뼈와 아래턱만 앙상하게 R의 눈을 자극했다. 옷차림도 처음엔 넥타이를 끌렀다가 다음은 웃도리 대신 허술한 잠바를 걸쳤고 이번엔 꾀죄죄한 내의가 들여다뵈는 와이샤쓰 바람으로 나타난 것이다.
우와기는 하숙집에 잽혔읍니다.
G는 다갈색의 입념을 통해 노출시키고, 히히히 교활하게 웃었다.
아아니, 그토록 다급하게 됐나.
R는 G를 경멸했다. 그때처럼 G를 업신여기는 심사로 한가닥 동정심을 무참히 짓밟아버린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것 봐, 나만 믿고 자빠져 기다리고 있다간 양복바지까지 벗겨 팔아먹게 될 테니까.
R는 요새 세상에 취직이란 장기전의 태세로 견디고 있어야지, 물건 사고파는 식으로 안다면 큰 오산이라고 구차스런 설명을 위로 겸 늘어놓았다. R는 G의 위기가 고비라고 여겨졌다. 나중 취직보다도 이 고비를 배겨낼 용기와 희망이 당장 G에게 긴요하다고 느껴졌다.
모 은행 본점에 수위 하나가 정년으로 퇴직을 하게 돼서, 후임자를 찾고 있다기에 거길 적극 추진하고 있는 중일세.
반드시 거짓말이라고만은 할 수가 없었다. R는 모 은행에 근무하는 친구로부터 수위 자리 하나가 비게 되었다는 얘기를 듣고 단단히 당부한 일이 있었다. 계리부의 평행원인 그는 차라리 R가 딱하다는 눈으로 빙그레 웃었다. 급사애 하나 쓰는 데에도 중역진까지 통해 놔아 한다는 것 이었다. 더군다나 수위 면 아마 모르긴 몰라도 은행장의 도장이 찍혀야 될 것이라는 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R는 그 친구에게 G의 이력서를 떠맡겼고, G한테는 ‘적극 추진’하고 있다니 한심스런 농간이 아닐 수 없었다.
G, 용서해 주게. 내가 지금 자네에게 할 수 있는 말이 그것밖엔 없는 걸 어떻게 하나. 벌건 물은 들었을망정 영 섀빨간 거짓말은 아니야.
R는 지난번과 꼭 같은 시늉으로 G의 어깨를 두드려주고 천환짜리 한 장을 쥐여 주었다.
이 신세를 꼭 갚을 날이 있겠지요. R의 수입으론 천환이 적은 돈이 아니었다. 웃도리를 천 8백환엔가 잡혀먹었다는 G의 막다른 처지로서야 짐짓 대금이라고 할 만했을 것이다. G의 얼굴엔 새하얀 희열의 빛이 스쳤.다. G는 오늘 찾아온 목적이 그 지페 한 장을 얻어쥐는 것 전부와 같은 흡족한 낯으로 이제 볼일 다 봤으니 더 노닥거릴 필요가 없다는 듯 총총히 멀어져가는 것이었다.
돈 천환으로 생색을 내거나, 공치사를 받고 싶은 욕심은 아니었다. R는 너무도 깡마른 G의 태도가 불쾌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그 돈으로 해서 G와 대면해 있어야 할 시간이 30분으로 단축되었다고 한다면 R에겐 픽 다행한 구원인 것이었다. 나를 죽이든 살리든 마음대로 하시오. 몸뚱어리를 송두리째 내던지는 G와의 대면은 R를 질식 상태로 몰아넣곤 하였다. 말하자면 몇 푼의 돈으로 G와의 고통스런 시간을 상쇄하자는 셈이었다. 침울한 얼굴로 만나, 음침한 분위기 속에 잠겨서 턍진한 목청으로 지껄이다가도 R가 지폐 몇 장을 끄집어내어 G의 손에 넘겨주면, 제법 익숙해진 솜씨로 바지주머니 속에 집어넣는 순간부티 숨을 돌릴 수 있는 것이다.
기맥힌 세상이야. 아무쪼록 낙심하지 말고 참아보게˛
그럼요, 저도 왕년의 G상사 아닙니까, 이 정도로 고꾸라지지 않습니다. R가 G에게 돈을 주는 일은 미구에 습성이 되고 말았다. G도 그러한 R의 심리를 헤아리고도 남음이 있었으리라. 돈을 주기까지 번번이 끈덕지게 늘어붙게 되었
고 해서 악질적인 협박이라고는 단정할 수 없는 일이었다.
여름 한땐 별장 생활이나 다름없읍니다.
G는 햇빛에 탄 피부라기보다는 숯불에 그을은 얼굴로 말했다. 하룻밤에 백환 짜리 숙박비도 밀려서 하는 수 없이 밤중에 도망쳐나와 정릉 산속에서 며칠을 지냈다는 것이었다. 오래 천부터 G는 R가 자기집으로 와 있으라는 권고를 내심으로 갈망했을 것이다. 단간 셋방에 세 식구가 사는 집으로 차마 쑤시고 들어가겠다고는 못하겠지만 R는 G가 알거지로 전락해 버린 눈앞의 충격 이나 측은함보다도 염치 불고 먹이고 재워 주어야겠다고 별안간 들이닥치지나 않을까 지레 겁부터 집어먹었다.
R중위님, 평생 소원이 하나 있읍니다. 베루기도 낯짝이 있다고 이번 소원만 풀어 주시면 다시는 폐를 안 끼치겠읍니다.
갑자기 G가 정색을 하면서 고개를 세웠다. 우리 집에 오겠다는 소원이군. R는 등허리에 소름이 끼쳤다. 숨도 내쉬지 못한 채 다음 말을 기다렸다. 천만다행히도 G의 평생 소원이란 돈 만환을 돌려달라는 것이었다. 정릉 놀이터에서 빈들거리는 동안 얼음물 장수를 사귀었다고 했다. 자기도 얼음물 장수를 시작한다면 가을까지 자립할 수 있는 길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는 것이었다. 얼음물 장수를 시작하자면 구루마, 유리 그릇, 컵 등속 물건을 장만하는 데 만환이 든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불쌍한 인생 하나를 만환으로 구제할 수가 있다고 덧붙였다. R도 귀가 솔깃해지는 얘기였다. 첫째는 G의 소원이 동거생활의 강요가 아니어서 다행이었고, 둘째는 G에게도 상기 자기의 앞길을 개척해 보려는 자립의 정신이 남아있는 것이 반가왔으며 또 하나는 결과적으르. G와의 야릇한 관계가 해결될 수 있다는 것. R는 당장 돈을 주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거 참 좋은 사업이군, 허긴 남의 도움을 기다리기 전에 자기자신이 무얼 만들어 보겠다고 나서야지, 참 좋은 일이오.
한 사나흘만 기다려 주게. 다음 토요일까지엔 어떻게 마련해 볼 테니.
R는 그렇게 의젓이 늘어놓은 다음, 하마터면 취직자리도 계속해서 기다려 보라고 군더더기까지 붙일 뻔했다. G는 요즈음에 와선 별로 취직 운동의 동정에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R의 힘으로는 취직이란 어림도 없다고 절로 깨닫게 된 까닭일 것이다.
허지만 R중위님, 제 취직 얘기도 포기하지 마시고 유의해 주십시오.
그것은 R의 노력에 대한 인사지레 같은 느낌을 주는 말이었다.
암, 암.
R는 고개를 크게 끄덕이면서 되풀이 중얼댔다. 결국 R는 약속한 금액을 가불로 조달해서 주었다. 월급날이면 가불 반환의 행방을 추궁할 아내와 아귀다툼을 면지 못할 R였으나, 그날 오후처럼 월급장이의 토요일을 엔조이한 적은 없었다. 다만 한 가지 마음 한구석에 걸린 것이 있었다.
잘 되든 못 되든간에 걸과를 보고해 주게.
G의 성공을 진정으로 빌면서 헤어질 때 튀어나왔던 말이 차츰 심상치 않은 의미를 지니기 시작하는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가부간의 걸과를 알려달라는 말은 오활하게도 사업의 성공을 전제하여 극히 낙관적인 기분으로 지껄인 것이었다. 만일에 G의 장사가 실패로 돌아갔을 경우를 상상해 보자. 또다시 R를 찾아올 것밖에 다른 도리가 G에게 가능할 것인가. 그때에는 결사적인 각오로 G를 거절하든지 혹은 G를 식객으로 맞아들여야 할 양자 택일의 방도뿐일 것이다. 필경은 G의 침입을 막아내지 못할 자신을 흰히 넘겨다 볼 수가 있었다. 그리하여 애를 업고 친정으로 돌아가겠다고 입술을 떠는 아내의 모습도 선명하게 그릴 수 있는 것이었다. 사서 고생할 이지가 어디 있나. 설사 R가 꼬리를 잡힐 말을 덤으로 주지 않았다손 치더라도, 일이 낭돼된 후, G가 어디로 되돌아오게 될 것인지 너무도 뻔한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이었다.
어쨌든 R의 생활은 G를 만나기 전으로 차츰 회복해 가고 있었다. 과원 한두 명의 이동발령만 나도 덩달아 좌천당하거나 해임 당하지나 않을까, 오금을 펴지 못하는 하급 공무원의 따분한 일과로 복귀하는 것이었다. 공무원 노릇을 해먹으려면 고등고시를 치르고 나야지, 새로 부임해 온 계장은 행정 수습원 2년에 사무관을 따고 처음으로 보직을 맡은 애송이였다. 아직도 학생 티가 그대로 남은 이를 테면 신진 기예의 소장 관리인 것이다. 계장 자리에 누가 오건 내 알 바가 못된다.
R는 오랜반에 입은 새 와이샤쓰 소매 안으로 손목시게를 들여다보았다. 네시 50분, 퇴근시간이 다 되었군. 풋나기 계장이라 다소 나이 지긋한 직원들을 어려워 하고 또 비위를 맞추려고 애쓰는 듯하다. R는 퇴근 벨이 그치기가 무섭게 책상 위를 지우고 일어섰다. 예기지 못한 그날의 방문객은 수위실에서 전화를 걸지 않고 현관 문밖에서 R의 퇴청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아이구, G군 아닌가,
그들은 다정하게 악수했다.
그래, 장사 잘 됐소?
R는 묻지 않아도 잘 되었거니 싶은 낯으로 말했다. 그러나 G는 입을 굳게 다문 채 대꾸가 없었다. 눈을 아래로 깔고 고개를 들지 못했다.
R중위님, 죽고만 싶습니다. 이루 말로는 다 못하겠어요. 바쁘신 중에 죄송하
지만 이 편지를 좀 읽어 주십시오.
그리고는 G는 퇴색한 코르덴 잠바의 궁상맞은 등허리반 보이면서 도망쳐 버리는 것이었다. R는 그 편지를 펴기가 무서웠다. 개운하게 씻을 수 없었던 뒤숭숭한 예측이 그대로 들어맞은 것이다. R는 어느 다방을 찾아들어 편지 봉투를 뜯어보았다. 노트장 앞뒤가 자디잔 연필 글씨로 꽉 차 있었다.
R중위님 전상서, 그간 옥체 만강하시고 댁내 안녕하시나이까. 이 부탁한 고아가 생의 희망을 잃고 있을 때에 R중위님의 존재는 바다를 비춰 주시는 등대의 광명이었읍니다.
여기까지 읽고 R는 고개를 천정으로 쳐들어 음, 하고 신음소리를 토했다. 읽 어 내려갈수록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 없는 문맥에 서투른 낱말을 철물전처럼 벌여놓고 게다가 오자투성이의 한문 수사로 엮어진 G의 편지는 이제 겨우 본론으로 들어가는가 보았다.
이 불쌍한 소제(小弟)를 다시 한번만 살려 주시옵소서. 산보다 높고 바다보다도 깊은 은혜는 백골난망이옵나이다. 하늘이 소제를 버리사 만일 R중위님 마저 소제를 버리신다면 소제는 저승의 길밖엔 보이지 않겠나이다.
그리고는 얼음 장수도 경험이 없는 탓으로 결국은 본전마저 잘라먹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그래 염치없는 소원이지만 이번에는 시장에서 채소 나까마를 시작할 계획 이니 밑천을 대어달라고 맺어 있었다. 날짜를 적은 다음 추신, 하고 괄호를 치고는 ‘―金―萬五千園整’이라고 좁쌀만한 글자로 적어놓은 것이었다. R는 편지를 봉투째 뭉쳐 버리고 테이블 밑으로 내던졌다. 죽어라 죽어라! 네 마음대로 죽어. 네가 죽거나 말거나 내게 무슨 상관이냐 말아. R는 아래턱을 부들부들 떨면서 숨을 할딱이고 있었다. 죽어라 ! 자동차에 치여 죽든지, 폐병으로 피를 쏟고 죽든지 마음대로 죽어, 죽어라, 죽어라, 죽어라. 간신히 분노를 가라앉힌 R는 다시는 G와 수작하지 않을 결심을 굳게 다짐했다. G는 나를 공갈하고 있는 것이다. 공갈할 약점이 없는데도 나를 공갈하고 있는 것이다. R는 어처구니없이도 군대에서 G와 같이 지낸 기간 중 무슨 부정 사건이라도 걸린 게 없었던가, 조심스레 더듬어 보는 것이었다. 그런 약점은 없었다. R의 기억력은 G의 공갈을 일소에 붙일 수 있었지만, 그의 분신(分身)은 짙은 안개 속을 허우적 거리는 초조한 불안을 어찌할 수가 없었다. 그 짙은 안개 속을 기억력을 상실한 사내가 제자리를 빙글빙글 맴돌고 있는 것이다. G는 R자신도 기억에 없는 무서운 범죄를 샅샅이 파악하고 있으며 증거 하나하나를 그 남루한 바지 호주머니 속에 소중히 간직하고 있을 것만 같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처럼 떳떳하게 마치 당연한 권리를 주장하듯 R를 강압할 수는 없는 것이다. 하급 관리보다는 군대가 좋았어.
신임계장이 R선생, 면횝니다, 하고 싹싹한 어조로 전해 주었다. R는 변소에 들렀을 뿐 사무실로 되돌아갔다. 퇴근시간이다. R는 오늘따라 잔무 처리를 핑 계로 책상 위를 치우지 않은 채 멀거니 앉아 있었다.
그럼, 수고하세요.
계장이 나가자 방안은 적막에 싸였다. 창밖은 어둠이 짙어갔다. 한 시간만 견디고 있으면 아예 단념해 비리고 가든지 이미 퇴근한 후인 줄 앝 데지. 여섯시 반. 현관을 나서서 두어 걸음도 채 걷지 못한 순간이었다. 오른쪽 전신주에 상체를 비스듬히 기대인 그림자를 발견했다. G는 희미한 전등불 속에서 두툼한 입술을 헤벌리고 빙그레 웃었다. R는 인력(引力)에 붙잡힌 듯 G쪽으로 꼴리어 들어갔다.
이거 미안하게 됐네. 오늘따라 일이 밀려서 땀을 뺐어. 자넨 줄 알았으면 빨리 치울 걸 그랬군.
R는 무슨 굉장한 약속이나 어긴 꼬락서니로 구구한 변명을 자꾸만 되뇌는 것이었다. 확실히 그들 두 사람의 위치는 거꾸로 바뀌어져 있었다.
R는 죄를 진 사기한으로 비쳤고, 또 사기한의 이름이 턱 들어맞도록 타락되어 있었다.
R중위님, 오늘은 구걸하러 오지 않았읍니다. 오늘일랑 한잔 대접하려고 모시
러 온 것입니다. 저의 집은 매우 누추하지만 꼭 왕림해 주셔야겠읍니다. 자 차를 한 대 잠읍시다.
G의 말은 여늬 때보다도 도리어 공손한 편이었으나 그 밑바닥에 가라앉은 어감은 차갑게 조작된 것이었다.
아아니, 그럴 것 없이 내가 한잔 사지, 무슨 돈이 있다구 공연한 짓 말구, 자, R는 G의 소매를 움켜줘고 불빛이 환한 방향을 가리컸다. G는 침묵을 지킨 채 손을 들어 차를 세우고 R를 먼저 올라타게 했다.
자네 편지 잘 읽었어.
R는 G의 표정 속에 어떤 미묘한 변화를 기대했다. 그러나 창밖을 내다보고 있는 G는 들은 척을 하지 않는다. 원 이렇게 변할 수가 있나.
그러지 않아도 자네의 부탁을 염려하고 있는 중이었네.
취직말입니까.
아니 이번엔 야채 장사를 해보겠다면서˚
돈 주실 필요는 없읍니다.
G는 차를 탄 후, 처음 고개를 돌려 차 안으로 쏟아져들어온 불빛 속에서 싸늘하게,
돈 주실 필요는 없읍니다.
같은 말을 반복하였다. R는 위험을 직감했다. 자살 직전의 혹은 살인의 긴박한 살의를 의식했다.
스톱! 스톱!
R는 차가 멈추기도 전에 도어를 열어젖히고 튀어나갔다.
사람 살려 ! 사람 살려 !
행인들은 괴상한 쇳소리를 지르면서 내닫는 그 사내를 미친 사람의 발작이거나 술주정으로 짐작했을 것이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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