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찍이 부지런을 떨며 가끔 뜻하지 않은 대접(?)을 받나보다.
거금(3천원)을 내지 않고도 거뜬히 선운사를 둘러볼 수 있으니 하는 말이다.
새벽 산책을 나오는 동네 분을 위한 작은 배려(?)겠지만
출입구를 지키고 선 경비아저씨는 대단한 생색(?)을 내며 선심을 베푼다.
아무려면 어떤가? 마음 편히 그냥 공짜로 들어갈 수 있으니 좋을 뿐이다.
선운산(禪雲山-335m)은 그다지 높지는 않으나
호남의 내금강이라 불릴 만큼 계곡미가 빼어나고 숲이 울창하여
계절이 바뀔 때마다 옷장을 정리하듯
봄에는 벚꽃과 동백, 여름에는 시원한 계곡, 가을에는 단풍으로 겨울에는 설경으로 유명하다.
또한, 선운산은 도솔산으로도 불리는데,
선운이란 구름 속에서 참선한다는 뜻이고 도솔이란 미륵불이 있는 도솔천궁을 가리키니
결국 선운산이건 도솔산(兜率山)이건 모두 불도를 닦는 산이라는 의미일 테고
깊고 아름다운 산이라면 이름난 절 하나쯤 품고 있는 것이 예사라
어찌 선운사란 사찰을 빼놓을 수 있겠는가?
한때는 여든 아홉 개의 암자가 골짜기마다 들어섰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지만
지금은 도솔암, 석상암, 동운암과 함께 참당암만이 겨우 골짜기를 채우고 있다.
오늘은 그냥 선운사만 둘러보며 동백 숲만을 챙기기로 한다.
아름다운 동백 숲으로 유명한 선운사는 백제시대에 창건된 천 년 고찰로
우람한 느티나무와 아름드리 단풍나무가 호위하는 숲길을 지나니
대웅전을 병풍처럼 감싸며 군락을 이룬 동백나무 숲이 나타나는데
500년 수령에 높이 6m의 3000여 그루 동백나무숲은 천연기념물로도 지정되어 있다.
도솔천의 자갈이나 바위가 검게 보이는 것은 오염의 흔적이 아니라
참나무과의 잎과 열매에 많이 함유된 타닌성분 때문이라나
도토리의 떫은맛을 우려내기 위해
밤잠을 잊고 물갈이을 하던 어린 시절 어머니의 손길이 아련히 떠오른다.
이 선운사에서 가까운 소요산 자락 질마재 아래 선운리에서 태어난 미당 서정주는
고향인 고창에 내려올 때마다 동백장여관 201호에 머물렀고
선운산 동백꽃에 대한 시 한 편 선운사 洞口를 남겼는데
시비에 새긴 글씨는 미당이 직접 쓴 육필 원고를 확대해서 돌에 붙이고
글씨 모양대로 새겨 넣었다고 한다.
역시, 선운사 동구는 미당의 시가 있어 비로소 선운사 동구가 되고
미당이 그리워했을지도 모를 막걸리집 주모는 한국전쟁 때 죽었다는 소문이라
지금 막걸리집이 있던 자리에는 풍천장어와 복분자집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는데
미당은 선운사를 들릴 적마다 그 주모의 생각이 더 울컥했을지도 모른다.
부안면 선운리 미당의 생가 바로 아래에
3칸 황토집을 짓고 혼자서 살고 있는 8살 손아래 동생은
아흔 두 살의 나이에도 아직 정정하게 又下亭을 지키며
정말 더 바랄 게 없을 지경에 이르러 그야말로 행복하게 살고 있다고 한다.
미당의 생전에는 그의 아우라는 멍에를 지고 詩에서도 삶에서도 바로 아래(又下)로 살았지만
미당이 간 지금 그는 이제사 자기 자리를 찾았는지도 모르겠다.
하긴, 섬진강의 시인 김 용택도 선운사를 다녀가며 엉엉 울고 있는 흔적을 남겼는데
아직도 때가 잔뜩 끼인 거울을 제대로 닦지도 못하고 있는 길손은
슬그머니 새벽길을 끝내며 빗속의 안개를 바라만 보다
거뭇거뭇 이끼가 끼며 세월을 속삭이는 미당의 詩碑를 돌아 숙소로 향한다.

<도솔산 선운사 일주문>

<봄이 지난지가 오래라 동백꽃은 보이지 않고>

<선운사 산책로를 따라>

<미당 서정주 시비 - 선운사 동구>

<이틀밤을 머문 고창 선운산 수련원>
<선운사 동구> 미당 서 정주
선운사 골째기로
선운사 동백꽃을 보러 갔더니
동백꽃은 아직 일러 피지 않았고
막걸리집 여자의 육자배기 가락에 작년 것만 상기도 남었읍니다.
그것도 목이 쉬어 남었읍니다.
<남은 일> 又下 서 정태
걸친 것 다 벗어버리고
다 그만두고
초가삼간 고향집에 돌아오니
알몸이어서 좋다.
아직은 춘분이 멀어서
바람끝 차가웁지만
방안이 아늑해서 좋다.
이제 남은 일이라고는
바깥세상에 한바탕
꽃피는 걸 바라다볼 일일뿐
<자족> 우하 서 정태
보리 섞인 밥 한 공기와
무국과
김치 한 접시
김 두 장
아침상 차려먹고 나니
천하는 내 것이다.
고샅길에 나가면
어린아이들
저희들끼리 놀다가도 할아버지 달려오고
젊은 아낙도 머리 숙여 인사한다.
하늘이여
고운 하늘이여
티 없는 하루가 되게 하라.
<선운사 동백꽃> 김 용택
여자에게 버림받고
살얼음 낀 선운사 도랑물을
맨발로 건너며
발이 아리는 시린 물에
이 악물고
그까짓 사랑 때문에
그까짓 여자 때문에
다시는 울지 말자
다시는 울지 말자
눈물을 감추다가
동백꽃 붉게 터지는
선운사 뒤안에 가서
엉엉 울었다.
가벼운 마음으로 숙소를 떠나 네 바퀴로 어제 멈추었던 공주보를 향한다.
백제보를 거쳐 금강하굿둑에서 만나기로 하고 각자의 길을 서두른다.
오늘 두 바퀴는 정말 열심히 페달을 밟아야 할 터인데
더운 날씨가 방해가 되지 않을까 걱정도 되지만 점심은 각자가 알아서 해결하고
금강하굿둑 도착까지 90Km구간을 연락을 않기로 한다. 무소식이 희소식이길 빌면서~~~
비단내로 불리는 금강은 지역에 따라 그 이름을 달리한다.
즉, 상류에서는 적등강, 중류에서는 옹진강으로 불리다
백제보가 있는 부여에서는 백마강 또는 백강으로 불리는데
부소산성을 반달처럼 휘돌아 흐르는 이른바 백제애서 제일 큰 강이라는 뜻이란다.
백제보는 말을 티고 백마강을 바라보는 계백장군을 형상화 한 모습이고
부소산성 서쪽 기슭의 백마강가에 있는 나루터 일대를 구드래라 부르는데
그 유래를 구들돌에서 찾고 있고, 일본서기에 나오는 구다라는 바로 백제를 일컫는 말로
그 뜻이 섬기는 나라, 대국이라고 안내문은 전하고 있다.
아무튼, 이곳을 다시 찾은 것은
메밀막국수로 유명한 부여 맛집의 진상을 챙겨보자는 의도였는데
찌는 날씨에도 불구하고 장원막국수(041-835-6561)에 늘어선 줄이 장난이 아니다.
다행이도 혼자라는 잇점을 살려 새치기가 아닌 슬쩍 끼워 넣어주는 주인의 융통성으로
쉽게 자리를 차지하고 후다닥 채 5분도 걸리지 않는 끼니를 해결한다.
<공주보에서 다시 출발을 준비하고>
<말을 티고 백마강을 바라보는 계백장군을 형상화 한 백제보>
<백제보 전망탑>
<구드래 나루터>
<집은 허름해도 장원막국수라오: 영업시간 1100 ~ 1700>
충남 장항과 전북 군산을 잇는 금강하굿둑은
어느새 비단내가 흐린내로 바뀌어 채만식의 탁류로 흐르고
일제강점기 수탈의 현장인 군산항이
한 여인네의 고단한 삶처럼 더 누렇게 변색이 되어가지나 않을까 괜한 걱정을 앞세우며
텅텅 비어있는 채만식문학관을 미안스레 둘러본다.

<비단내는 어느새 흐린내가 되어 탁류로>

<채만식문학관>
푹푹 찌는 날씨라 두 바퀴가 걱정이 되기도 하지만
가벼운 문자를 날리고는 금강철새조망대를 먼발치로 지나치고
금강습지생태공원도 대충대충 건너 띄어 새만금 방조제의 신시도로 향한다.
두 바퀴가 하굿둑에 도착하기 전에 신시도길을 둘러보자는 심산으로 ~~~

<금강철새조망대>

<금강하굿둑 원경>
진포는 군산의 옛 이름이다.
고려 말 왜구의 노략질이 극심한 시대에도 어김없이 선각자는 있었고
그가 바로 초등학교시절 들은 듯한 희미한 기억의 최무선이다.
끈질기고 꿋꿋한 주장으로 마침내 화포를 만들어내었기에
함선에서 화포를 사용한 세계 최초의 해상전투로 기록되는 진포대첩이
이곳 진포에서 왜선 500여척을 불사르는 전공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이고
그 명맥은 이순신 장군의 명량대첩에서도 여지없이 진가를 발휘하게 되는 것이다.
요즘 한창 人口에 회자되고 있는 명량이라는 영화 한편이 자못 기대가 된다.
2010년 총길이 33.9Km의 세계에서 가장 긴 방조제로 기네스가 인증한 새만금방조제는
첫 돌을 부리던 1991년에는 농지개발 위주로 진척되었으나
최종 물막이가 끝나던 2003년에는 밀도 많고 탈도 많다가
다목적 복합 용지 개발 위주로 전환되었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행정구역 설정문제로 군산, 김제, 부안 간에는 갈등을 빚고 있는 모양새다.
하긴, 자고나니 어느 날 아침에
방조제를 빼고는 해안선이 사라지고 바닷길이 막혀 내륙도시가 되어버린 김제의 입장에서는
기존의 해양경계선을 위주로 행정구역을 나누는 것에 불만이 터질만도 하겠다는 생각도 든다.
또한, 새만금이라는 단어의 어원은 새로운 만금에서 나왔다고 한다.
만금이란 단어는
통일신라와 고려, 조선에 설치된 행정구역인 만경현(현 전북 김제)에서 출발했다는데
김제지역은 김만경평야, 만경평야, 금만평야 등 여러 이름으로 불려
그 중 금만평야의 앞 글자를 따 순서를 뒤바꾼 것이 만금이 되었단다.
본래 만금은 많은 재물과 부를 뜻하는 말이기도 해
새로운 만금의 땅을 새로이 일구겠다는 의미와 일맥상통 하는지도 모르겠다.

<해넘이휴게소에서 바라본 새만금방조제-비응항 방면>
고군산군도 중에서 육지에서 가장 가까운 섬으로
신시도, 가력도와 함께 방조제 완공으로 이미 육속화 되어버린 야미도(夜味島)는
원래 밤나무가 많아 밤섬이라 불렸으며
계속 밤섬으로 불러오는 동안 차츰 밤이 뱀으로 변하여 뱀섬이라고 불려오다가
밤의 첫 자를 따라 夜라 하고 밤이 맛있다하여 味를 붙여 야미도로 불리고 있단다.

<새만금 준공탑에서 바라본 야미도 원경>
신시도 마을을 둘러보려던 계획과
월영재를 넘어 신시도 몽돌해수욕장을 다녀오려던 신시도길을 접기로 하고
대신 자동차로 가력도까지 둘러보는 새만금길로 방향을 바꾸기로 한다.
아무래도 두 바퀴가 해지기전에 신시도까지 오는 것은 무리라는 생각이 들어
방조제만을 둘러보고 금강하굿둑까지 다시 거슬러 가기로 한 것이다.

<신시도에 자리한 새만금 준공탑>

<신시배수갑문 & 한국농어촌공사 원경>

<신시도길로 이어지는 월영재 & 월영봉-198m 원경>

<가력대교>

<가력 친환경생태공원>
비안도(飛鴈島)는 섬 모양이 기러기가 날아가는 형상에서 그 유래를 찾고 있는데
섬 북쪽의 최고점인 노비봉(191m)과 함께 170m 높이로 남쪽에 솟아 있는 모습이
가력도에서 바라보니 흐릿하게 가까이 다가오며 천생 기러기 나는 모습이다.
금강호휴게소에서 두 바퀴를 만나 네 바퀴로 고창 선운산으로 향하는 출발이 한참 늦어
아무래도 오늘도 늦은 저녁이 되려나 보다.
아무려면 또 어떤가? 오늘 하루도 이만하면 족하지.
내일은 늦은 아침을 챙기고 정오 무렵에 퇴실을 하기로 하며 자리에 든다.

<가력도에서 바라본 비안도 원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