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출했다가 집에 들어오니 거실 한쪽에 못 보던 쌀자루가 눈에 띄었다. 겉 포장이 여주 쌀 브랜드인 ‘대왕XX’가 아니기에 아내에게 물었다.
“무슨 쌀이야?”
“00 아빠가 구미에서 농사지은 거래.”
“고맙네. 회사 다니면서 틈틈이 농사지은 쌀을 나누어주니…”
“여기 가져오기 전에 방앗간에 직접 가서 도정도 했다네요.”
“바로 찧은 쌀이면 밥맛도 좋겠다. 나중에 만나면 맛있게 먹었다고 인사해야겠네.”
00 아빠는 막내 처제의 남편이니 동서지간이다. 장인, 장모가 모두 돌아가셔서 함께 만날 기회가 많이 줄어들었는데, 술 한잔해야 할 핑곗거리가 생겼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셋째 형과 함께 서울로 전학을 왔다. 당시 셋째 형은 중학교 2학년이었으며, 우리는 서울에 먼저 와서 자리를 잡은 둘째 형과 합류했다. 사는 곳은 제기동이었다. 처음에는 경동시장의 맞은편에 있던 한옥촌 기와집의 방 하나를 얻어서 살았다. 얼마 후에 아버지가 근처에 있는 허름한 집을 사서 그곳으로 이사했다. 3형제가 본격적인 자취생활을 시작한 것이다.
자취하면서 먹을거리는 대부분 고향에서 가져왔다. 쌀이며 고추장, 된장, 그리고 제철 채소 등등. 그때 부모님은 농사를 짓느라 바쁘셔서 서울에 거의 올라오지 못했으며 우리 형제가 시골에 가서 먹거리 재료들을 가져왔다. 왜 그랬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으나 그 역할은 주로 나이가 가장 어린 내가 맡았다.
제철 채소 등 가벼운 먹거리의 운반에는 어려움이 없었으나 문제는 주식인 쌀이다. 보통 쌀 한 자루는 반 가마 정도 되었다. 내 몸무게보다 무거워 전혀 들 수 없었던 그것을 시골에서 서울 사는 집까지 운반했다는 게 지금 생각해도 신기하다. 하긴 직접 쌀자루를 들 필요가 없었으니 가능했겠지만.
여주에서는 친척들이 버스에 쌀자루를 실어준다. 그 당시 버스는 요즘 버스와 달리 운전대 뒤편 중앙에 불룩 튀어나온 공간이 있었다. 엔진을 감추려고 보기 좋게 덮개로 씌어 놓은 것이다. 타는 사람이 많을 때는 보조 의자처럼 쓰이기도 하지만 여느 때는 짐을 올려놓기에 안성맞춤이다. 쌀자루도 한 귀퉁이를 차지하는 공간이다.
서울에 도착하면 운전기사 아저씨가 쌀자루를 들어서 버스에서 내려놓아 주었다. 요즘에는 상상도 못 할 일이지만 그때는 그랬다. 날씨가 몹시 더웠던 여름철 어느 날도 마찬가지였다. 아마도 초등학교 6학년 여름방학 때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운전기사 아저씨가 쌀자루를 포함한 내 짐을 버스에서 내려놓자마자 젊은 짐꾼들이 앞다투어 몰려들었다. 대개는 쌀자루가 땅에 내려지는 순간 제일 먼저 찜하는 사람이 임자다. 그러니 짐을 나르는 일은 대부분 젊은 사람들의 몫이 된다. 그런데 그날은 그들 뒤쪽에서 달려들지는 못하고 멀뚱히 쳐다보기만 하는 60대 중반의 할아버지가 눈에 띄었다. 나는 내 짐 가까이 있는 젊은 사람들을 제쳐두고 그 할아버지를 불렀다.
그러자 젊은 짐꾼들은 나에게 불평을 쏟아냈다.
“야 이놈아! 우리가 먼저 차지했는데, 왜 저 영감에게 짐을 나르게 하려고 하느냐?”
그들의 궁시렁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랑곳하지 않고 당당하게 할아버지 손수레에 짐을 실으라고 했다. 의외의 상황에 눈이 휘둥그레진 할아버지는 ‘이게 무슨 횡재야?’라는 표정으로 앞으로 나섰다. 잠시 후 자기 손수레를 가지고 와서 짐을 실었다.
목적지는 제기동 경동시장 근처의 우리 집. 신설동 시외버스정류장에서 약 2km의 거리이니 그렇게 멀지는 않았다. 신설동 로터리를 지나 지금은 흔적이 없어졌으나 예전 서울사대부고와 제기역을 거쳐 집에 도착하기까지는 한 시간 정도가 걸렸을 것이다. 가는 도중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그 할아버지가 물었다.
“손수레로 짐을 나르는 일은 힘이 센 젊은 사람들이 훨씬 잘할 텐데 왜 나한테 짐을 나르라고 했니?”
“시골에 함께 살다가 몇 년 전에 돌아가신 우리 할아버지가 생각났어요”.
‘이심전심’이었는지 아니면 조그만 아이가 혼자서 버스를 타고 짐을 가져가는 게 기특하다고 생각해서 그런지 짐꾼 할아버지는 처음 받기로 했던 짐삯을 다 받지 않았다. 그때는 어릴 때라 별생각 없이 할아버지 이야기대로 짐삯을 다 드리지 않았는데, 나이가 든 지금 생각해보면 다 드려야 좋았을 걸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한편, 내가 무거운 쌀자루를 가지고 시골에서 서울로 가지고 다녔던 이 이야기는 훗날 셋째 형네 아이들에게 전설로 남았다. 셋째 형은 아이들이 하는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을 때마다 이렇게 이야기했다고 한다.
“너희 삼촌은 어렸을 때 쌀자루도 혼자 시골에서 서울로 가져올 정도로 야무졌는데 너희는 나이가 들었는데도 제대로 하지 못하느냐?”
지금은 조카들이 다 성인이 되어 똑 부러지게 잘살고 있다. 어릴 때 그들의 아버지로부터 내 이야기를 자주 들었던 것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을까 궁금하다.
많은 세월이 흘렀다. 이제 내가 옛날 쌀자루를 혼자서 가지고 다닐 때 만났던 그 할아버지의 나이가 되었다. 그때 짐꾼 할아버지를 보면서 우리 할아버지를 떠올렸듯이 나도 누군가에게 추억이 될 수 있는 사람을 연상케 하는 매개체가 되었으면 좋겠다.
지금이야 서울에서 여주까지 한 시간여면 충분하나 당시는 4시간이나 걸렸다. 그렇게 긴 시간 동안 덜커덩거리는 버스를 어떻게 타고 다녔을까 싶다. 그래도 쌀자루를 가지고 다니며 호령(?)했던 그때가 그립다.
첫댓글 여주, 쌀맛 좋기로 유명한 곳에 사셨네요.
어렸을 때부터 인간애가 있으셨나봐요.
쌀자루를 거뜬히 들던 소년의 내공으로 이제 글을 쓰십니다.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