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을 잔인한 달이라고 했던가요?
생때같은 아이들을 진도 바다에서 건져올리지도 못하고 치르는 42차 삼태극 정기모임이었습니다. 그러한 와중에 진행된 정기모임 강좌는 아주 유익했습니다.
본 행사가 시작하기 전에 카페지기님의 풍물수업이 진행되는 동안 한 쪽에서는 세월호이야기로, 역사이야기로 도란도란 시간을 보냈습니다.
현재 우리나라에는 국사가 왜곡되었다는 것을 인지하는 분들이 늘어나고 있고, 거기에 더하여 잃어버린 대륙의 역사를 찾기위해 곳곳에 남아있는 역사의 편린들을 주워서 보배로 꿰어내는 분들이 계십니다. 삼태극 정기모임에서는 그런 분들을 모시고 정기강좌를 열고 있기에 다른 곳에서는 쉬이 들어볼 수 없는 내용들이지요. 나라의 큰 고난 중에도 역사강의를 듣기위하여 모이신 회원님들은
디아블로님, 빠미라님, 신완순선생님, 이충복님, 송영재님, 을지문덕님, 후곡님, 비사벌님, 이준설님, 천자님, 둥근이님, 김자님, 배나무골님, 설악님, 순한님, 이종진님, 쉬어가자님, 이정호님, 박정인님, 이병화님,
삼태극님, 초자유인님, 이선민님, 김영주님, 이진우님, 서정 이렇게 26분이었습니다.
행사진행은 미리 공지한 대로 16시 부터 약 30분간 삼태극님의 풍물장단을 연주가 있었습니다. 이번에는 '지신밞기'라고도 하는 '질(길)굿'을 할 때 치던 장단을 들려주셨답니다.
다음으로 강의는 Daum카페 '잃어버린 역사 보이는 흔적'의 주인장이신 이진우박사님이 <고려의 왕경개성부를 찾아서>라는 주제로 열강을 해주셨습니다. 박사님 강의의 요지는 한마디로 "고려는 대륙에서 태동해서 14세기 중반경에 한반도로 옮겨와서 그 생을 다했다."였습니다. 그 증거들로
현재 중국의 현지(縣紙)와 현에서 운영하는 홈페이지에서 그 지명유래, 고려 학자들의 문집(이승휴, 목은 이색)에서 보이는 대륙의 지명들, 서긍의 <고려도경>, <문헌통고>에서 보이는 대륙의 흔적, 무신의 난의 기록에서 보이는 지명들, 고려에서 석유가 산출(본초강목 등)된다는 기록이 있는데 실제 석유가 나는 곳의 위치, 고려사의 일식기록(고려하대부터 적중률이 높은 점), 태조왕건의 활동무대(<한서>, <유씨남당기>등 참고), 송대의 그림 <청명상하도>에서 보이는 우리의 의복관련 문화, 여러 사서에서 보이는 <개성부>관련 기록 등을 들었습니다. 제가 어설프게 강의를 요약하는 것보다 이진우박사님의 카페에서 최근 고려관련 게시글을 한 꼭지 옮겨적는 것으로 강의내용을 요약할까 합니다.(이박사님 용서하시옵소소~) 아래 파란색 글씨는 심제 이진우박사님의 카페에서 옮겨온 이진우박사님의글입니다.
운영자(심제 이진우박사)는 자연과학전공자이다. 그만큼 과학적 사실 그리고 자연사적 사실에 근거하여 글을 쓰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대부분의 자연과학자들이나 운영자의 사고체계에는 학문적 절대 진리는 없으며 논증적 사실이 바뀌면 이전의 주장을 과감히 포기 할 수 있는 로직(Logic)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다.
고려와 관련된 대륙사에 대한 주장은 그 동안 많은 의문과 질책을 받은 것이 사실이고 몇몇 대륙사를 주도하고 있는 재야사가들이 고려 사천성 존재설과 조선의 대륙설을 줄기차게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대륙이라는 존재만으로 환호하는 독자들이 그 글을 옮기는 과정에서 확대 재생산 되어 무차별적으로 퍼져나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들이 주장하는 대륙고려나 조선설을 뒷받침하려면 좀 더 정밀한 근거와 자연사적 근거로 무장해야하며 그래야 학계에서 인정받을 수준의 논리적 고리를 확보할 것으로 보인다.
소위 재야사학계에서 천문학자 박창범의 역사천문학의 결과를 금과옥조로 받아들이고 그에 근거하여 고구려, 백제, 신라의 대륙 존재설은 주장하면서 그의 또 다른 <고려 한반도존재설>을 부정하는 것은 논리에 맞지 않을 분더러 입증 가능한 타당한 자연사적 이론이 새로 나와도 수정하지 않는 행위는 소위 재야사학이 강단 사학을 <조폭적 식민사학>이라고 공격하는 빌미와 다르지 않다. 즉 자신이 주장해온 논거를 체면이나 조직의 유지를 위해 고집하는 이유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소위 학자라는 사람들이 취할 행동이 아니다. 운영자가 고려사를 태조부터 고조까지 통람하고 얻은 <고려 대륙 존재설>에 대한 결론은 대체적으로 아래와 같이 정리될 수 있다.
1. 초기 고려는 대륙에서 태동했다.
정인지의 지리서 서문에서와 마찬가지로 고려는 그 폭이 1만리의 대국이었으며 운영자가 고려사란에서 기록한대로 고구려, 신라, 백제가 영유했던 대륙영토의 일부분을 고려 초기까지 영유하였고 왕건의 탄생지인 한주와 시봉지 자체도 현 하북으로 보인다. 이는 후당서, 요사, 송사 등에서 후대에서는 이역지나 원사에서도 이를 사서적으로 증명해주고 있다.
고려사에 보이는 초기영역이 10도 12주 등의 초기영역 명칭이 그것을 뒷받침 해주고 있으며 13세기 이후 5도 양계로 대폭 축소되었으며 결정적인 원인은 한국사가 국수적인 편향성으로 인해 지금까지 승전으로 가르친 거란과의 전쟁 그러나 세 번의 전쟁중 현종 때 크게 패한 것이 가장 결정적인 요인으로 보인다.
기록에는 숨겨져 있으나 현종 때 거란 성종의 친정인 2차 공격으로 최초의 고려수도 하간부의 개성이 분탕질 당하고 강동6주 실지 이후 고려는 초기기록을 분실하고 거란 중심부와 인접한 왕도 개경을, 안전한 외지 한반도 중심부 개성으로 수도를 옮긴 것으로 보인다. 또한 원나라의 접전시기 고려토호 최탄 이현령 등 3인이 고려 60개 성을 원에 바치고 몽고로 귀화한 사실에서 고려의 커다란 실지가 확인되며 이러한 사실은 원사지리지에 고려가 동령로에 존재한다는 기록에서 확인되기도 하다.
2. 시기별 전쟁기록에서 전투 규모와 사상자수의 차원이 다르다.
10세기말 고려 성종부터 시작된 거란과의 전투기록을 보면 거란이 동원한 병사 40만, 고려도 20여만의 병력으로 치룬 2차 전쟁에서고려사에 기록되지 않은 요사 성종조 기록에 의하면 이 전쟁에서 고려군 3만 여 명이 사망하며 수천여명이 부상당한 기록이 등장하지만 반대로 거란군이 3차전에서 강감찬에게 패한 기록만 고려사에 등장한다.
그러나 요나라 이후 고려와 금나라, 후거란, 원나라간의 전투 기록을 보면 많아야 수 백 명 적으면 십 수 명 정도의 전사자 밖에 기록되지 않으니 이는 결국 인적자원이 부족한 지역에서 소규모 전쟁을 수행했다는 증거인 결론에 도달하는 것이다. 결국 당시에 만주와 한반도는 자연사적으로 인구밀도가 낮은 지역으로 해석되어야 하며 전쟁지역도 이전의 수도 남쪽이 아닌 동북과 서북면으로 국한되어 나타나는 양상이 그것을 증명한다.
3. 고려왕궁의 궁전 殿閣 이름 현종 이후 다르다.
고려사에 태조의 즉위 장소인 포정전부터 목종가지 전각 이름들과 현종 이후의 전각이름이 다르다는데 그 근거가 있으며 현종 이후 인종까지의 전각명이 모두 같고 인종4년 이자겸의 반란과 궁궐 방화로 인해 대규모의 전각이 소시로딘 이후로 재건 또는 중수하면서 이전의 전각이름을 새로 짓게 된다. 그러나 장소는 동일지역으로 보인다.
서경의 경우 태조가 서경을 중시하라는 유훈을 남기고 건설한 적각 이름은 기록되어 있지 않고 거란과 전쟁이후 현종이 서경에 새롭게 전각을 짓는 기록 그리고 인종13년(1022) 묘청의 대규모 반란으로 인해 김부식이 진압하는 과정에서 많은 서경의 전각이 훼손되는데 이후 인종이 중수하면서 전각 장락전을 제외하고 대부분 바뀌게 된다. 그러나 남경의 연흥전이라는 이름은 숙종 이후에도 바뀐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고려의 남경은 일정기간 동안 강소성에 있다가 13세기 초 몽골의 원나라 발호 후 정치적 압력에 의해 한반도로 이동한 것으로 보인다.
4. 고려의 천문기록에 관하여
위 식분도는 박창범의 연구결과를 인용한 것이다. 그의 연구결과를 인용하면 고려의 중심강역은 한반도로 해석한다. 그것이 진실일 것이다. 2번째 원내에서 측정된 결과들은 아마도 과학자들이 고려가 한반도에 있었다는 선입견으로 인해 그 밖의 지역에 있었던 왕조의 존재를 무시했을지도 모른다. 위 식분도로 본다면 일식은 한반도와 두 번째 선 안 중국 동해안 일대에서도 관측 가능한 것으로 해석된다.
이후 다른 그룹에서 연구된 고려사 근거 천문기록을 살펴보면 태조부터 현종 이전까지 즉 태조 원년 918년 3월 15일(양력)부터 현종 4년인 1012년 2월 25일까지 기록은 현재 개성에서 관측되지 않는 지역에서 일식을 기록한 것으로 해석하거나일식이 있었음에도 기록되지 아니한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우리나라 5명의 천문학자들이 2012년 8월 20일 이후 자료를 해석한 것은 고려개성이 한반도에 있다는 근거에 의해서이다. 또한 고려사 천문기록에는 아시아에서는 일식이 일어나지 않았거나 아시아에서 일식이 있었으나 한반도 개경에서 관측되지 않은 자료도 포함되어있다. 이러한 자료에 대한 관측자의 위치는 운영자 역시 저자와 확인예정으로 있다.(*) 이후 천문연구원의 저자와 메일로 확인하였다.
5. 그 밖에 외국사서의 고려 대륙 존재 기록은 왜 일까?
고려시대 우리나라의 관리이거나 문인 등이 송나라, 거란, 원나라 등을 다닌 사행기록이나 문인의 시첩에 기록된 중국 각지를 직접 발품 팔며 다닌 기록과 변형된 무수한 고려지명, 대룩에서 만난 고려인, 조선 원주민들의 기록은 무엇일까? 송나라 사신의 거란 사행기록인 <왕기공행정록>, 고려사신 이승휴의 원나라 사행기록인 <빈왕록> 이외에 운영자가 소개했던 강소성 양주의 <려왕성>을 소개한 <보응현지략>등 수많은 기록에는 고려왕조가 또한 고려인이 공식적으로 대륙에 궁성을 짓고 하북에서 티벳까지 중국 대륙 각지를 활보하고 다닌 기록이 버젓이 남아있다.
심지어 조선에서까지 대륙 중심부인 산동통로를 다니다가 명나라 홍력제 왕제이자 산동 번왕의 제지를 받는 기록도 등장한다. 결국 이는 삼국시대에 대륙에 남아있다가 중국왕실의 흔적으로 사라진 삼국의 지배층보다 그 지배지역에 흩어져 살고있었던 일반 백성 그리고 집단 취락지역에서 모여 살던 조선인들의 흔적으로 고려가 창업하고 백여년 후 한반도로 이동 한 후 과거 고려왕조가 지배했던 대륙에 대한 지리적 연고권을 중국왕조 중앙에서 통념적이며 암묵적으로 인정했던 결과로 보인다.
소위 임내(臨內)지역이라 하여 산동, 요녕, 하북에 대한 고려인(혹은 조선인)의 영향력을 인정했던 것으로 보이는 증거가 많이 남아있다. 이는 교통이 발달하지 않았던 130년 그 이전 왕조들이 그 넓은 대륙을 빠르게 경영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어서 황제의 교지가 북경에서 수 천리 떨어진 강서성의 산간 오지에 닿는 일은 거의 일 년 후에나 가능한 것이기에 그러한 통치방법을 사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6.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까지 내륙에 남아있는 무수한 고려라는 지명과 변형된 지명 등은 한민족의 자취라고 볼 수 있다. 고려사에 기록된 수많은 전쟁의 지명기록과 위치는 조선이 남겨놓은 지리지와 지도상의 지명과 일치하지 않음을 볼 수 있는데 동일한 지명이라도 실제 위치가 조선과 고려가 다르거나 현재 사가들이 과거의 고려지명을 바르게 추적하여 비정하지 못하고 학자로서 공부하지 않고 게으른 죄가 큰 것도 있을 것이다.
http://cafe.daum.net/dobulwonin/MJS6/273
이상 "잃어버린 역사 보이는 흔적"카페에서 가져온 글로 강의요약을 대신합니다. 공학박사답게 정제되고 치밀한 언어로 격조있는 강의를 해주신 이진우박사님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혹시나 이진우박사님의 강의를 더 듣고 싶으시거나 우리의 참역사에 대해 더 공부를 하고 싶은 회원님들은 매주 토요일에 역사강의가 개설되어 있는 '한울빛 새움터(ttp://cafe.daum.net/mookto/ISY3/31)를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첫댓글 수고하셨습니다. 사진 아주 잘 나왔네요,
누가 찍었는지...^^*
큭...
사진사께서 자화자찬을~ ^^
수고많으셨습니다^^
고맙습니다 신선생님~
수고 하셨습니다,회비 계산 하겠습니다~순한님 10만원,김자님5만원,서정님3만원,초자유인님,디아블로님,설악님,쉬어가자님,비사벌님,둥근이님,배나무골님,박정인님,이준선님,빠미라 이만원씩,이정호님,이병호님 일만원 해서 총합이400,000원에서 -뒷풀이비154,000원-장구,징 추가금70,000원-간식비54,400=121,600원 남았습니다.
통장에 있던돈2,544,894원+121,600원 =2,666,494원남음
회비내주신 회원분들께 감사 드립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총무님^^*
여건상 참석못해 늘 아쉽습니다...
언제나 뵐 수 있을런지요 하늘미소님~
후기인지 논문인지 모를 정도로 해설 잘해주셨습니다~
대륙고려에 대해선 이진우샘과 이병화선생님간 간극의 차이가 있음을 알게 돼 유익했고 치열한 연구로 대륙고려와 대륙조선으로 나가줬으면 하는 소망입니다~^^
늘 좋은 말씀으로 칭찬만 해주시는 둥근이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