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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7-21 청운사 망해사 만경 능제방죽 탄허대종사생가 자전거기행
☛hiking시간 및 거리 : 10:00-18:00(8시간)
40.0km 왕복 80km
☛hiking코스 : 익산서부역송학사거리-익산농협-목천포-만경강변-새챙이다리-청운사-진봉-망해사-만경-능제방죽-탄허대종사생가-만경능제방죽-귀로
"내일 세계의 종말이 올지라도 나는 오늘 사과나무를 심겠다. "고 한 위대한 철학자「스피노자」(1632-1675)의 말처럼 무더운 삼복더위에도 자전거페달을 굴리며 자유인 조동화는 청운사와 망해사 탄허대종사 생가를 자전거기행을 하였다.
망해사 가는길에 청운사를 답사하였는데
청운사에는 2만여평의 하소백련지가 있으며, 하소백련축제가7/13-7/14 개최되였고 백련은 순결과 청순한 마음을 담고 있으므로 연꽃을 구경하면 마음이 평화로와 지기에 속세의 번뢰를 잊고 한시간여 망중한을 즐기었도다.
망해사에 가는 중 여러곳에 “망해사 국가자연유산 명승지 지정”되였다는 프랭카드 걸려 있었다.
12:00 망해사입구 정자에서 점심을 먹고 1:00 휴식후 망해사를 답사하였다.
귀로길에 만경능제방죽과 대동리의 탄허대종사생가를 방문하였다.
조동화가 삼복더위에도 자전거기행을 한 것은 땀을 배설하여 몸의 노페물을 제거하는 아주 단순한 목적이 있었소.
땀을 흘리지 않는다면 건강에 적신호가 오는거여.
조동화는 왜 자전거를 라이딩하는지 아는겨.
자전거를 타무로서 대지의 자연의 아름다움에 앤돌핀이 생성되고, 땀을 많이 배설하여 몸안의 노폐물을 제거하여 몸의 활력을 찾는거여.
조동화의 벗님들!
자유인 조동화의 신조는 삶의 여로에서 이세상 살아가는 것이 모두가 “부질없다” 하면서 그냥 하루 하루 최선을 다하며 열심히 살아가는 것이다.
그누가 속세를 가리켜 잠깐의 꿈속세상이라 했던가?
인생은 한조각 뜬구름 같은것이며 자연에 순응하며, 오직 한번의 인생 소중한 시간을 즐겁게 살아야지요.
오늘 해야 할일이 있다면 바로 시행하고, 평범한 일상이 나에게 가장 소중한 행복의 자원임을 꼭 기억하며 사리라.
행복이 뭐 별거 있습니까?
그냥 내가 하고 싶을거 하면 그게 행복입디다.
두발만능자가용으로 망해사 자전거기행을 하면서 새만금 서해바다의 아름다운 풍광을 구경할수 있어 눈이 즐거웠고, 땀을 많이 흘렸으니 자연의 천연보약 최고의 명약 섭취하고 왔도다.
두눈이 있어 대지의자연을 감상할수 있어 감사하고,
두발이 쓸만해 자전거하이킹을 할수 있어 감사하고, 집에 까지 무사히 귀로 할수 있었음을 감사하게 생각하며 오늘하루가 흘러가다.
감사합시다.
행복합시다.
<청하산(靑蝦山) 청운사 하소백련지(蝦沼白蓮池)를 1시간 망중한하다.
백련은 순결과 청순한 마음을 담고 있다.
김제 청하산 청운사 마당 아래 약 2만여 평의 다랭이 연못들이 바로 백련으로 유명한 하소백련지(蝦沼白蓮池)다.
새우가 알을 품고 있는 모양의 곳에 백련지들이 위치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청운사 뒷산은 청하산(靑蝦山)으로 높이는 56m이며 그 모양이 새우가 등을 구부린 형상이다.
연꽃은 씨주머니 안에 씨앗을 담고 있으므로 풍요와 다산을 상징하며 꽃말은 순결과 청순한 마음이다.
또한 연꽃은 진흙탕 속에서 고운 꽃을 피우기 때문에 물 밖에서 살아가는 중생들을 구원한 석가모니를 상징하는 꽃으로 알려져 있고 나아가 어둠을 밝히는 빛과 극락정토를 상징한다.
청운사 주지는 도원스님이며(속명 유삼영 이리중학졸업, 조동화와 이리중학 동창생), 도원스님은 지난 65년 출가해 전주 승암사에서 김만응 스님으로 부터 득도, 수계해 66년 승암사에서 사미과 수료를 받았으며, 2002년 4월 6일 무형문화재 탱화장으로 선정되었다.>
<정면에서 본 무량광전, 여섯 개의 기둥에 걸린 주련(柱聯)이 한글로 되어있어 특이하다.
- 아미타불 아미타불 어느 곳에 계신가요
- 생각 생각 끊임없이 간절하게 이어지고
- 마음 속이 텅 비어 자신마저 사라질 때
- 가슴에는 꽃이 피고 일체병고 사라진다
- 염불하고 참선하면 몸과 마음 정화되고
- 모든 번뇌 소멸되고 큰 깨달음 얻어진다>
<무형문화재27호 탱화장, 청운사 주지 유삼영스님이 열반괘불탱화 불교의 정신을 그린 세계최초, 최대크기의 탱화작품이다.
청운사경내 설치된 열반 괘불탱화는 가로 8.4m, 세로 4.8m의 크기로 만들어서 8만4000 번뇌와 48대 발원의 의미를 담았고 부처의 열반 당시 모습과 부처의 가르침을 표현했다고 한다.
탱화장 도원 스님과 제자들과 함께 3년 4개월에 걸쳐 완성했으며 전통 안료인 색채와 당채로 채색하고 면 100% 옥양목에 한지를 12번 배접해 완성한 놀라운 규모와 정성이 들어간 탱화입니다.>
<12:00가 되어 망해사입구 모종에 도착하여 배가 살짝 고프기에 집에서 가지고 온 고구마2개 빵1개 토마토2개로 점심을 먹는데 고구마 한 개는 남기었다.
나이가 드니 식사량이 줄어들어 과식하면 않되겠기에 고구마 한 개는 먹지 않했지요.
음식은 적당히가 좋은거여.
이곳 모종에서 점심을 먹은후 누워서 빙글빙글 한시간정도 쉬다가 자전거는 한쪽에 받혀놓고 300여미터 떨어진 망해사까지 쉬엄쉬엄 걸어서 올라가 답사하였도다.>
망해사(望海寺)
●주소 : 김제시 진봉면 심포리 1004
전라북도 김제시 진봉면 심포리에 있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7교구 본사 금산사 소속 말사이며, 고군산열도(古群山列島)가 한 눈에 내려다보인다. 이렇게 서해 바다를 내려다보는 곳이어서 절 이름이 망해사이다. 절의 역사는 영호 정호(映湖鼎鎬, 1870~1948) 스님이 지은 「망해사중수기」에 자세하게 전한다. 먼저 창건은 통일신라시대인 754년(경덕왕 13)에 중국 당나라에서 건너온 중도법사(中道法師)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한다. 다른 문헌을 보면 창건주는 중도법사가 아니고 도장법사(道藏法師) 혹은 통장화상(通藏和尙)으로 말하기도 한다. 도장법사 외에 중도법사, 통장화상에 대해서는 전하는 기록이 없어 어떤 스님이었는지 알지 못한다. 그런데 이 세 스님의 법명이 비슷한 발음을 지니고 있어 어쩌면 도장 스님의 이름이 기록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 것인지 모르겠다. 또한 절의 창건에 관해서는 다른 이야기도 전하다. 즉 백제 때인 642년(의자왕 2) 부설거사(浮雪居士)가 처음 창건하였고 이어서 중도법사가 중창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창건의 이야기는 모두 후대의 기록들이고 또 창건 당시의 흔적을 전하는 유물도 전혀 남아있지 않아 분명한 창건 시기나 과정은 알 수가 없는 실정이다.
창건 이후 고려시대에는 1073년(문종 27) 심월대사(心月大師)가, 그리고 고려말인 1371년(공민왕 20) 지각선사(智覺禪師)가 중창하였다.조선 초기에는 억불정책으로 인해 매우 쇠락하였다고 전한다. 그러나 1530년(중종 25)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절 이름이 보이는 것으로 보아서는 나름대로 법등을 이어간 것으로 생각된다. 1624년(인조 2)에는 김제 출신의 고승 진묵 일옥(震默一玉, 1562~1633) 스님이 낙서전(樂西殿)을 새로 짓는 등 절을 중창하여 사세를 크게 넓혔다. 또한 18세기에 편찬된 『범우고』와 『가람고』에도 절 이름이 보인다. 그러나 이후 쇠락과 중건을 몇 차례 거듭하다가, 조선 후기에 만화 관준(萬化寬俊, 1850~1919) 스님에 의해 중창되었다. 이어서 1915년 계산(桂山) 스님이 중창하였으며, 1924년 신중탱화를 봉안하였다. 그리고 1933년 정희(整禧) 스님이 보광명전과 칠성각을 새로 짓고 낙서전을 중수하였다. 한편 1884년(고종 21)의 읍지를 토대로 해서 일제강점기인 1910~1945년 사이에 편찬된 『김제군지』에, ‘망해사는 (읍에서) 서쪽으로 5리에 있으며, 진봉면 진봉산 아래에 자리한다. (현재) 승려 한 명이 주석하고 있다.’는 기록이 보인다. 이 기록을 통하여서도 망해사는 19세기 후반에 중창되어 비록 소규모나마 근대에 이르기까지 꾸준히 법등을 이어왔음을 알 수 있다.
<오늘의 자전거기행은 망해사까지 달리는 목표로 땀흘리며 페달을 밟았기에 망해사에서 서해바다를 조망하며 두어시간을 보내었다.
망해사는 석달전 대웅전이 화재가 발생하여 전소되여 그 자리에 임시로 비닐 천막을 설치하여 불자들이 찾아와 불공을 드린다.
망해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7교구 본사인 금산사(金山寺)의 말사로, 신라 문무왕 11년 671년 부설거사가 창건하고 그 후 중국 당(唐)나라 승 중도가 중창(重創)했으나 절터가 무너져 바다에 잠겨졌다고 한다.
망해사는 이름 그대로 바다를 바라보는 절이다.
망해사 팽나무는 - 도지정 기념물 제 114호이다.
낙서전 전면에 있는 팽나무는 선조 22년 (1589)진묵대사가 낙서전을 창건하고 그 기념으로 심은것으로 전하여 진다.>
<귀로 중 만경능제저수지를 기행하였다.
능제저수지에는 조종 면허시험장이 설치되여 있다.
능제(菱堤)는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의 만경현조에도 능제라고 기록되어 있는 오래된 저수지이다.
‘능제’란 이름은 예로부터 이곳에 연꽃과 마름이 많아서 ‘마름 능(菱)’을 붙인 것이 그 시작이다.
만경능제 저수지는 만수위 면적 1,959ha로 1930년대에 축조하여, 현재는 운암호의 물을 받아 저장하는 양수저수지(揚水貯水池)가 되었다.
능제저수지는 귀[굽이·귀퉁이]가 99곳이나 되는데, 귀가 100곳이 되면 나라에 큰 경사가 일어난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능제수변공원은 봄에는 철쭉, 여름에는 창포와 푸르른 녹음이 가득하다.>
<탄허스님생가는 몇 번 찾아보았으나 자전거기행은 처음이다.
대동리 탄허스님의 생가 '간산재(艮山齋)' 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탄허스님 생가는 탄허대종사 업적을 그려 김제시에서 2016년 11월 복원사업이 추진되어 국비로 2020년에 완공되여 깨끗이 복원되고 관리가 잘 되고 있는 상태를 확인할수 있었다.
70-80년대 한국불교계에서 성철과 탄허대종사는 이름을 날린 스타였다.
우리나라 최고의 학승으로 이름을 떨친 탄허대종사가 태어난 곳이 김제 만경이라니 불교계의 거목이 김제 만경에서 나왔구나.
탄허스님은 가족의 중매로 16세 결혼하여 아내와 아들과 딸을 두고 22세 되던해 오대산 상원사에 한암스님을 은사로 입산, 3년간 참선한 후 14년간 두문불출 참선과 경전을 공부하며 오대산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속명 김금택 탄허스님은 아내와 1남1녀를 두고 오대산 한암스님을 찾아 도의 요체를 깨닫고 귀향할 계획이었으나 일생을 속세와 단절하며 살았다.
조동화는 김제가 낳은 큰 인물이기에 꼬불꼬불한 대동리 시골마을을 종종 찾아 탄허대종사의 초인적인 정신세계를 그려보곤 한다.
탄허 대종사는 소년 시절 신동으로 알려졌으며, 어려서 사서삼경과 노장사상을 두루 섭렵한 후 22세에 오대산 상원사에서 한암 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여 일찌감치 학승으로 명성을 떨쳤다.
당대 성철스님은 3,000배를 해야 사람들을 만나 친견할수 있었는데 반해, 탄허스님은 해박한 지식을 “지식이 있는 자는 경을 배워 중생에게 이익을 주도록 해야 이 세상 업보도 갚는 것”이라며 "10여년 연장자였던 양주동과 함석헌이 배울 만큼 유·불·선과 주역·정역·성경까지 통달해 동서고금의 지혜를 꿰뚫었던 인물이며, 당대 대학자였던 양주동 박사는 탄허스님의 장자 강의를 듣고 감동해 넙죽 절을 올렸다는 일화가 있으며, 함석헌 선생도 탄허스님에게 장자를 배웠다고 전한다.
이곳에서 탄허스님은 1913년 1월 15일 김제군 만경면 대동리에서 독립운동가 김홍규 선생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13세까지 소년기에 이어 호남학파의 거두이신 아버지의 영향을 받았으며, 17세에는 기호학파인 이극종 선생에게 유교의 진수를 받았고, 노자와 장자의 도교학까지 두루 배웠다.
그후 오대산 상원사에 방한암 선사를 찾아 3년간 참선한 후 14년간 두문불출 참선과 경전을 공부하였다.
1955년 오대산에 수도원을 개설하고 불교의 엘리트 양성과 불교경전 번역에 힘썼으며, 가장 위대한 것은 '신화엄경합론' 47권을 들 수 있다.
이것은 하루 14시간씩 약 10년간에 걸쳐 완성한 것으로 원고지 분량만도 무려 6만3천여장에 이른다.
우리나라 최고의 학승으로 널리 이름을 떨친 스님은 1983년 6월 5일 열반에 들었다.
김제만경 대동리에서 우리나라 최고의 승려가 태어났다고 하니 대동리 마을 뿐만 아니라 전라도 대한민국의 자랑이라고 할수 있군요.
천재 탄허대종사는 아는 불법과 지식을 세상에 널리 알린 그런 스님이셨다.>
☛위치:전북 김제시 만경읍 대동리 656(탄허스님생가 길건너집)
<탄허대종사 생가 아랫집에 “미즈노씨네카페”가 있어 들렸다.
“미즈노씨네카페”는 농촌주택을 개조하여 아프리카 우림의 나무위의 집을 연상하듯 이색적인 풍경인디 한적한 곳에 와서 차를 마시러 오는 젊은이들이 쾌나 됩디다.
“미즈노씨네트리하우스카페”는 일본의 국적을 가진 일본인이 이곳 옆마을의 한국인 아내를 만나 대동리에 폐가인 한옥을 손수 고쳐서 살다가 나무 위에서도 쉴수 있는 김제 트리하우스를 짓게 되었다고 합니다.>
탄허 대종사(1913~1983)
▶생가위치 : 전북 김제시 만경읍 대동리 300 (대동1길 32)
1913년 1월 15일 전북 김제 만경에서 김홍규의 5남중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속명은 금택, 본관은 경주김씨, 법명은 택성이며 법호가 탄허이며, 어려서부터부터 사서(四書)삼경(三經)을 외울만큼 천재였던 탄허스님은 열다섯이 되던 해에 충남 보령에서 기호학파의 거유 최면암의 후학인 이극종 선생에게서 유학 및 도교학을 수료하였으나, 학문의 한계를 느껴 진리를 말해 줄 수 있는 훌륭한 스승을 찾아 나섰다.
오대산 상원사에 있는 방한암 스님의 명성을 듣고 19살에 처음으로 한암스님께 장문의 편지를 보냈다. 무려 삼 여 년 동안 주고받은 편지는 일반인의 상상을 초월하는 대문장이었다.
22세 되던 해 탄허스님은 정든 속세, 부모 형제를 두고 방한암 스님을 찾아 오대산 상원사로 입산했다.
“인허스님”이 속세의 3살 아래 동생이며 탄허스님이 오대산 입산후 2년되 오대산 상원사 한암스님을 은사로 상원사에서 속세의 형님 탄허스님과 불경을 공부하며 도를 닦았다.
탄허 김금택은 22살, 1934년부터 새벽 2시가 되면 어김없이 일어나 반드시 참선을 하고 경전을 읽었다고 한다. 이를 입적하기 전까지 49년간 한결같이 했으며, 한암선사에게 정식으로 승려가 되겠다고 삭발을 하는데, 선사로부터 ‘삼킬 탄(呑)’ ‘빌 허(虛)’라는 법명 ‘탄허’를 하사받았다.
특히 탄허는 스승은 제자에게 “지식이 있는 자는 경을 배워 중생에게 이익을 주도록 해야 이 세상 업보도 갚는 것”이라며 경전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이미 가문의 중매로 16세에 결혼해 아들과 딸을 뒀던 탄허는 22세에 출가하였는데 승려가 되기 전 인물 탄허는 학문에 대한 열정이 남달랐다고 한다.
스님은 나이 쉰아홉부터 돌을 갈아 죽을 쑤어 먹으며 수행을 했다. 중생들은 힘들게 일을 하며 연명을 하고 그러면서도 시주를 하는데 승려가 시주의 은혜를 무겁게 여기지 않으면 수행자로서의 자격이 없다는 것을 몸소 실천에 옮긴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탈이 되었는지 스님은 암에 걸리고 말았다. 제자들의 권유로 병원을 찾았을 때는 이미 손을 쓸 수 없을 지경이었다. 의사들은 고작해야 석 달밖에 살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이 같은 사실을 전해들은 탄허 스님은 눈물을 흘리며 안타까워하는 제자들에게 오히려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이놈아, 병이 사람을 잡아갈 수 있는 것이 아니야. 나는 일흔하나가 되는 1983년 계해년 음력 4월 24일 유시에 갈 것이니라.”
국내 최고의 의사들이 내린 진단을 무시하고 무려 6년 후에나 입적을 하게 될 것이라고 장담을 했으니, 이 말을 들은 의사들이나 제자들은 모두 아연실색했다. 하지만 탄허 스님은 자신의 예언대로 암을 몸에 품은 채 6년여를 살았고 그 사이 능엄경, 금강경 등 사교(四敎)를 완간하는 등 더욱 왕성한 번역 활동을 보여 주었다.
1979년 늦은 봄 대학 여교수가 지인의 소개로 박정희 대통령과 혼담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질문을 하였고, 스님은 부정적인 의견을 제시하였다.
1979년 10월 26일이 지나서 정승화 육군참모총장과의 전화 통화를 원했고, 12월 12일이 지나서는 자격이 없다며 부탁을 거절하였다.
1982년 대통령 전두환의 아호(雅號)를 일해(日海)라고 지었다.
평소 승려 교육에 많은 힘을 쏟은 탄허스님은 불교학의 최고 학설인 화엄경 120권을 번역, 출간한 것을 비롯하여 화엄론 40권, 육조단경, 보조법어, 사교, 사집 등 많은 불전을 번역하였다. 승려 교육의 공로로 생전에 인촌 문화상을 수상한 바 있는 스님의 사상은 한국불교에 크나큰 영향을 끼쳤으며 1983년 6월 5일 오후 향년 71세로 입적하실 때까지 오대산 방산굴에 계셨다. 입적 뒤 종교인으로서는 최초로 국가가 추서하는 은관문화훈장을 받았다.
탄허대종사 속세의 아내이야기
출가를 하기 전 결혼을 한 탄허의 아내는 토정 이지함의 16대 종손으로 학문과 덕망을 고루 갖춘 뼈대있는 선비집안의 규수였다.
어릴 적 남자복장을 하고 글방에 다니며 탄허 보다 먼저 중국 사서삼경(四書三經)을 뗐을 정도로 한학에 깊은 조예가 있었다.
탄허도 출가 전의 자신의 내자(內子)를 일러 부부라기 보다는 훌륭한 수학 도반으로 칭찬을 했을 정도였다.
그런 그가 자신의 남편인 탄허의 출가를, 결혼을 한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도 말릴 수 없었던 이유가 있다.
하루는 주역을 구해 보고 싶어하는 남편(탄허)의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 송아지를 팔아 주역 책을 구해 주었다.
주역 책을 본 남편이 어찌나 좋아하는지 책을 받아 가지고 그대로 글방으로 달려가더라는 것.
가만히 뒤따라가 문틈으로 남편의 모습을 살펴보니, 한 손에 책을 들고 읽으며 기쁨을 참지 못하고 덩실덩실 춤을 추고 있는 게 아닌가.
그때 이미 남편은 부부의 연(緣)보다는 공부에 연이 많은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고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속가 탄허스님의 아내 이씨는 슬하의 딸이 15세 되던해, 딸은 어머니가 손에 쥐어준 여비와 주소를 가지고 아버지를 찾아갔다가 그대로 입산 비구니가 됐다.
딸은 수도 정진중 탄허스님을 15년 모신 서우담 수좌와 인연을 맺어 결혼했다.
정진 중 만난 수좌는 도서 출판 교림 서우담 대표이다.
땀과 건강
땀을 보면 건강이 보인다.
조물주는 인체가 스스로 체온을 조절하고 체내 노폐물을 제거할 수 있도록 우리에게 ‘땀’을 선물해주었다. 그래서 땀이 어떻게 나는지를 살펴보면 우리 몸이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지를 체크할 수 있다.
땀이 잘 나야 건강하다.
땀의 가장 중요한 기능은 체온조절이지만 노폐물 배출이라는 다른 기능도 있다. 그래서 땀이 잘 난다는 것은 피부가 건강하다는 증거다. 피부과 의사들에 따르면 아토피나 건선 같은 피부질환이 있는 사람들은 평소 땀이 잘 안 난다고 한다. 땀과 함께 모세혈관 속 노폐물들이 빠져나가는데 이와 같은 과정이 원활하게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실제로 사우나나 운동으로 땀을 흠뻑 흘리고 나면 피부가 매끈매끈해진 느낌이 들지 않던가. 땀을 적당히 흘려야 전신의 노폐물도 잘 배출되고 피부 표면도 건강하게 유지될 수 있다.
만물의 영장인 인체의 신비에 대하여 알아보자
인간은
입에서 항문까지 8.5 킬로미터라~~~~~~~
인체의 핏줄은(동맥, 정맥, 모세혈관의 총길이) 120,000km이다.
경부고속도로 왕복 900km 이니까, 133번 왕복할 수 있는 길이이다.
지구둘레가 40,008km이니까, 지구를 3바퀴 돌 수 있는 거리이다.
놀라운 건 혈액이 몸을 한 번 도는 데 걸리는 시간은 약 46초 정도밖에 안 걸린다.
이렇게 긴 핏줄을 이해한다면 피가 맑아야 병이 없고 오래살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뇌는 1000억개의 신경세포와 100조개의 신경 연접부를 갖고 있어 신경의 연결망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다.
성인의 머리카락 숫자는 10만개, 수염은 3만개, 잔털은 30만개.
하루 호흡수는 2만번 정도로 들숨과 날숨 공기량은 8000ℓ가 된다.
우리가 거의 깨닫지도 못하는 눈 깜빡임은 눈을 보호하고 각막을 매끄럽게 하는데, 1분에 15번, 한 시간에 900번이다.
재채기는 코의 점막이 자극을 받아 일어나는 경련성 반사 운동이다.
눈을 감고 재채기를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재채기는 시속 160Km의 속도로 퍼지는데 이는 야구에서 투수가 던지는 공보다 훨씬 빠르다.
남자의 몸은 60%가, 여자의 몸은 54%가 물로 되었기 때문에 대개 여자가 남자보다 술에 빨리 취한다.
여자가 아기를 출산 때는 자궁 입구가 평상시 때보다 500배나 크게 열린다.
인간에게는 맛을 알아내는 9,000개의 미각이 있다. 혀의 뒷부분은 쓴, 중간부분은 짠맛, 앞쪽은 단맛을 느낀다.
콜레스테롤은 인간의 몸에 해로운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콜레스테롤은 음식물안의 지방을 녹이는등 생리작용에서 생화학적으로 아주 중요하다. 콜레스테롤을 너무 많이 섭취하면 간에 부담을 주고 혈관 속에 쌓여 급기야는 혈관을 막아서 사람을 죽게 하기도 하지만 우리 몸에서 필수 불가결한 요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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