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삼성에 반가운 손님이 돌아왔다. 바로 백전노장 투수 이상목(36ㆍ삼성 라이온즈)의 친정 복귀다.
1990년 성광고를 졸업한 뒤 삼성에 입단해 1993년 빙그레(현 한화 이글스)로 트레이드된 뒤 꽃을 피운 포크볼의 대부다. FA 자격 획득 후 롯데에서 활약한 뒤 올 시즌 친정 삼성 품으로 돌아왔다.
이상목은 성광고를 졸업하고 당시로는 드문 고졸 신인이었다. 큰 키(187Ccm)의 대형투수로 성장 가능성이 높았고 당시 투수 기근이었던 삼성에선 기대를 모았던 유망주였다. 그랬던 그가 1993년 빙그레로 트레이드됐다.
◎ 돌아온 이상목 '포수 딜레마의 희생양'
여기엔 삼성의 말못할 고민이 담겨있다. 이상목의 트레이드 카드는 포수 박선일이었다. 그럼 에이스급 자질을 지닌 투수를 내주고 백업용 포수를 영입하는 무리수를 뒀을까.
이상목의 빈 자리는 당시 경주고 출신이던 곽채진이나 후반기에 영입한 재미교포 대니얼 최(한국명: 최용희)등으로 메울 수 있다는 계산이 구단측에 섰던 것. 당시 삼성의 가장 큰 고민거리는 공수 겸장의 포수 확보였다.
'헐크' 이만수(현 SK 수석코치)는 이미 주전포수로 활약하기엔 전성기가 지났고 김성현은 타력은 좋았지만 수비력이 부족했다. 특히 주자 견제능력이 부족했다. 그래서 수비력이 뛰어난 박선일을 영입하기 위해 미래의 에이스감을 내주는 출혈을 감수했던 것.
삼성의 선택은 적어도 정규시즌까지는 대성공이었다. 박선일이 공수에서 맹활약을 펼치며 포수 기근을 한방에 만회한 것. 떠나보낸 유망주 이상목을 잠시나마 잊게 만든 순간이었다.
포수 싸움에서 항상 무릎을 꿇었던 삼성으로선 한국시리즈 처녀 제패의 꿈을 키워갔다. 하지만 LG와의 플레이오프 3차전에서 1루로 헤드퍼스트 슬라이드를 하다가 오른쪽 약지를 다쳤다. 물론 삼성은 한국시리즈에 진출했지만 '야구 천재' 이종범 등이 버틴 해태 사단에 줄도루를 허용하며 한국시리즈를 아쉽게 내줬다.
주전포수 박선일의 부상이 두고두고 아쉬운 대목이었다. 만약 박선일이 부상을 당하지 않았더라면 박충식이 15이닝 완투가 수포로 돌아갈 이유도, 비운의 투수로 조로할 이유도 없었을 수 있다. 게다가, 삼성의 한국시리즈 불운은 1993년에 이미 끝났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 삼성의 아킬레스 '극심한 포수 기근'
이후 삼성은 극심한 포수난에 허덕였다. 어깨는 좋지만 타격이 부족한 김영진을 대신해 '도루하는 포수' 양용모를 영입했지만 도루 저지능력은 떨어졌다. 또 OB(현 두산)에서 박현영과 김광현, 그리고 김지훈까지 데려왔지만 안방을 꿰차기엔 역부족.
삼성의 포수 구애는 해태 출신 정회열을 거쳐 FA 포수 김동수까지 이어졌지만 그 숙원을 푸는 데는 연속적으로 실패했다.
프로 초창기 '헐크' 이만수를 비롯, 백업 포수 박정환과 손상득, 손상대로 이어지는 포수 왕국이었던 삼성에 포수 기근이라는 기현상이 빚어진 것. 삼성이 공수 겸장 포수의 영입을 위해 신인지명과 트레이드 등 백방으로 노력했지만 헛수고는 10년 남짓 지속됐다.
삼성은 결국 포수 공백을 극복하지 못했고 우승 문턱에서 번번히 포수 맞대결에서 패배했다. 급기야 보스턴 밤비노의 저주에 비견될 '헐크의 저주'라는 징크스를 갖게 된 것도 결국엔 주전 포수의 부재에 기인된 아픔의 누적이었다.
◎ 삼성 우승의 '숨은 주연' 진갑용
혹자들은 2002년 삼성의 우승을 김응용 감독의 부임으로 인한 이기는 야구, 그리고 이후 선동열 감독의 마운드 중심의 '지키는 야구'를 강팀 삼성의 우승 원동력으로 꼽는다.
하지만, 그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공수겸장 포수의 확보라고 봐야 한다. 바로 1999년 7월 두산과의 현금트레이드로 성사된 진갑용의 트레이드다.
삼성은 진갑용의 트레이드 이후 안방의 안정이 마운드의 안정으로 직결됐고 또 허약했던 타선의 체질 강화로 이어졌다. 이런 연쇄적 안정감이 2002년 한국시리즈 처녀 제패라는 결실로 이어졌다고 볼 수 있다.
제 아무리 마운드가 든든하더라도 포수의 인사이드웍이나 도루 저지능력이 저조하면 흔들리기 십상. 게다가 하위타선의 4번타자 역할을 해주는 장타력까지 보유한 진갑용의 등장은 90년대 이후 줄곧 포수 딜레마에 빠졌던 삼성으로선 천군만마같은 존재였다.
삼성이 '헐크의 저주'를 깬 원년은 2002시즌이지만 사실 그 사전 정지작업이 진갑용의 영입된 1999년 이후 차곡차곡 진행돼 온 것으로 볼 수 있다. 삼성이 프로야구 원년 이후 가장 성공적인 트레이드를 꼽으라면 단연 진갑용의 현금 트레이드를 들 수 있다.
삼성이 2000년대 최강전력을 구축한 데 따른 화려한 스폿라이트는 김응용 감독과 선동열 감독, 그리고 이승엽이 받았지만 사실상 보이지 않는 우승 기여도는 진갑용이 결코 적지 않다.
◎ 야구의 코어 머슬 '안방 마님'
스포츠에 있어 가장 중요한 근력은 뭘까. 바로 코어 머슬(Core Muscle)이라고 불리는 복근의 힘이다. 팔근육과 다리 근육의 힘도 결국엔 복근에 의해 조절되고 상하체의 밸런스가 유지된다. 스포츠의 모든 힘의 근원은 복근에 있다. 복근을 코어 머슬이라고 부르는 이유도 이때문.
야구에 있어 코어 머슬은 포수다. 공수 겸장의 포수를 보유한 팀은 투타 밸런스를 확보하기가 용이하다. 진갑용이라는 공수겸장의 포수의 확보는 삼성으로선 10년 동안 갈구하던 코어 머슬을 확보한 셈.
진갑용이라는 탄탄한 복근은 배영수라는 신예 에이스를 리그 최고로 성장시키는 원동력이 됐다.
◎ '포스트 헐크' 진갑용
헐크 이만수의 저주를 푼 싯점은 진갑용의 등장과 궤를 함께 한다.
10년에 한번 날까말까한 포수라는 극찬을 받던 진갑용. 하지만 포수왕국 두산에 입단한 후론 찬밥 신세였다. 심지어 후배 홍성흔에 밀려 백업으로 밀려난 뒤 진갑용의 기량은 퇴보했다. 삼성으로 이적한 뒤에도 FA로 이적한 김동수(현대)에 밀려 백업으로 활약했다.
하지만 2001년부터 진갑용이 김동수를 밀어내고 주전자리를 꿰차기 시작했다. 2001년은 포수 진갑용이 프로에서 눈을 뜨기 시작한 원년이다. 생애 최초 3할 타율(.306)을 기록하면서 장타력도 일취월장한 시즌이 바로 2001년이다.
2002년 김동수가 SK로 이적한 뒤 진갑용은 명실상부한 포스트 헐크로 굳건히 자리잡게 됐다.
2002년부터 2004년까지 3할에 육박하는 고타율에, 두자릿수 홈런을 기록하며 리그 최고의 공격형 포수로 자리를 굳혔다. 이후 안정된 안방마님 진갑용의 리더쉽과 선동열 감독의 지키는 야구가 결합, 2년 연속 디펜딩 챔프의 기적을 일궈놓게 된 것.
◎ 'Post 진갑용'을 대비할 시점
삼성은 이제 새로운 숙제를 준비해야 한다. 바로 '포스트 진갑용' 즉, 진갑용의 후계자를 양성해야 할 시점이라는 것.
2001년부터 6년 연속 3할대 언저리에서 놀던 타율이 2007년에는 .246으로 급전직하했으며 홈런도 3년 연속 한자릿수에 머물고 있다. 이제는 공수 겸장의 진갑용에서 살짝 후퇴하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고 분석할 수 있다.
공교롭게도 2년 연속 디펜딩 챔프에서 탈락한 삼성과 진갑용의 부진은 궤를 함께 했다.
삼성이 90년대 이후 10년 동안 포수 기근에 허덕여야 했던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아이러니하게도 당대 최고의 포수 이만수의 존재감이었다. 이만수가 있기에 포수 양성엔 타 포지션에 비해 대비를 덜했고 이런 준비 부족이 90년대 삼성의 발목을 잡았던 것.
'꾀돌이' 현재윤이 돌아왔지만 무게감에선 진갑용에 많이 떨어진다. 손승현과 김동명이 있지만 역시 1군감으론 아직 역부족이다. 그나마 백업으로 가능성을 보였던 이정식은 군에 입대한 상황이다.
만약 지금 포스트 진갑용에 대비하지 않는다면 삼성은 향후 강팀의 반열에서 탈락하지 말란 법이 없다. '포스트 이만수'에 실패했던 삼성이기에 한 발 더 재빨리 '포스트 진갑용' 프로젝트에 돌입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