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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사주명리(좋은사람 정모카페) 원문보기 글쓴이: 도무사
노기 마레스케 | 시즈코 - 부인 |
양 력: 1849년 12월 25일 음/평: 1849년 11월 12일 남자
시 일 월 년 @ 乙 丙 己 @ 巳 子 酉
丁 戊 己 庚 辛 壬 癸 甲 乙 대운: 역행 卯 辰 巳 午 未 申 酉 戌 亥 85 75 65 55 45 35 25 15 5.13
사망일자: 1912년(64세, 庚午대운 壬子년) 9월 13일 부부가 같이 할복자살함. | 양 력: 1859년 11월 29일 음/평: 1859년 11월 6일 여자
시 일 월 년 @ 辛 乙 己 @ 未 亥 未
甲 癸 壬 辛 庚 己 戊 丁 丙 대운: 순행 申 未 午 巳 辰 卯 寅 丑 子 82 72 62 52 42 32 22 12 2.12
사망일자: 1912년(54세, 辛巳대운 壬子년) 9월 13일 부부가 같이 할복자살함. |
사무라이의 장남으로 출생함. 유년기에 사고로 왼쪽 눈을 실명하였고 아버지를 따라 조슈로 귀향하였다. 메이지 유신이 일어나자 유신군에 가담하여, 도쿠가와 막부 군대와 싸웠고, 메이지 유신 왕정복고가 이루어지자 1871년 육군 소좌로 임관하였다.
1871년 도쿄로 가서 신친위대의 육군 소좌로 임관했다.
1877년에는 보병 제14연대장으로 세이난 전쟁에 참전하였으나, 군기를 사이고 다카모리가 이끄는 사쓰마 번의 반란군에게 빼앗기는 치욕을 당했다. 10월 31일 부친 사망.
1886년~1888년 독일에서 군제와 전술을 공부하고 돌아와 청일전쟁에 보병 제1여단장으로 출정했다.
1894년 소장으로 승진하였고 제1여단장을 맡아 청일 전쟁에 참전했다. 이후 중장으로 승진하여 타이완 원정에 참전했고, 타이완 총독에 취임하였다. 그러나 타이완에서 일본의 통치를 반대하는 반란이 계속되어 총독직을 사임하였다.
1896년 모친 사망.
1899년 다시 사단장으로 복귀하였으나 휴직했고,
1904년 러일전쟁이 일어났을 때는 휴직 중이었으나 소집되어 같은 해 5월 대장으로 승진하여 제3군 사령관으로 뤼순을 공격했다. 그는 13만 병사를 이끌고 있었는데, 6만 가까운 커다란 희생 끝에 뤼순의 203 고지를 함락시켰다. 대규모 희생을 낸 까닭에 본국으로 돌아갔을 때 사임과 할복자살을 하려했으나 메이지 천황이 만류한다. 이 희생 때문에 지휘관으로는 무능하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그의 두 아들도 이 전투에서 잃었다.
1912년 자신을 신임하던 메이지 천황이 죽자 장례일에 도쿄의 자택에서 부인과 함께 자결했다.
[火요일에 읽는 전쟁사] 지휘관의 '미신'이 부른 참극, 뤼순 공방전
이현우 입력 2016.11.08
[아시아경제 이현우 기자]최순실사건 이후 역사 속 국가 지도자들이 미신에 혹했던 이야기들이 재조명을 받고 있다. 러시아의 유명한 요승 라스푸틴, 고려 말 권세를 부렸던 신돈, 조선왕조 말기 명성황후의 측근으로 전횡했던 진령군의 이야기 등 국정을 농단했던 미신에 대한 이야기는 다양하다.
역사 속의 수많은 전쟁 지휘관들도 국가 지도자들과 마찬가지로 각종 미신을 믿고 있었다. 생사를 오고가는 전쟁터에서 미신에 기대는 것은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지만 이 미신 때문에 병사들이 떼죽음을 당한 전투도 있다. 러일전쟁 당시 단일전투 중 가장 많은 사람이 죽은 뤼순(旅順) 공방전이다.
러일전쟁 초반 한반도 전역을 점령하고 압록강을 건너 만주로 진격한 일본군은 후방 견제를 위해 랴오둥 반도 끝에 위치한 뤼순 요새를 공격하기로 하고 노기 마레스케(乃木希典) 장군 휘하에 10만의 대군이 뤼순 요새를 포위했다.
당시 일본군 3군 사령관이자 육군에서 군신(軍神)으로 떠받들던 노기 장군은 빠른 속도로 뤼순 요새를 함락시키라는 명령을 받고 10만 대군으로 무작정 정면공격을 실시했다.
그러나 뤼순 요새는 5만명의 러시아군이 주둔해있었고 각종 대포와 기관총으로 방비가 탄탄한 요새였기 때문에 막연한 육탄 돌격작전으로는 도저히 뚫을 수 없는 요새였다.
하지만 노기 장군은 전쟁은 정신력과 기합의 싸움이란 옛 사무라이 돌격정신에 빠진 인물이었고 이로 인해 뤼순 공방전에서만 6만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러일전쟁 전체 일본군 사상자가 10만명 정도이니 이중 절반 이상이 뤼순 전투에서 애꿎은 죽음을 맞이한 셈이다.
일본군의 막대한 피해는 노기 장군의 참모장인 이치지 고스케(伊地知幸介) 소장의 미신 때문에 더 커졌다. 이치지 소장은 매달 26일마다 대공세를 펼쳤는데 그 이유는 숫자 26에 대한 그의 믿음 때문이었다.
그는 "매달 26일에 공격하는 이유는 26이 짝수이며 운수가 좋은 숫자기 때문이다. 26이 13으로 반토막 나듯이 26일에 적을 공격한다면 뤼순요새도 반토막 낼 수 있다"라는 논리를 내세우며 병사들을 사지로 내보냈다.
이 미신에 빠져있는 참모장은 독일에서 유학까지 하고 온 엘리트 장교 출신이었다.
이에 러시아군은 매달 25일마다 일본군이 오는 길목에 화력을 집중시켜놓고 26일날 일본군이 육탄돌격을 할 때마다 기관총을 난사했다.
얼마나 많은 일본군이 죽었는지 러시아군은 시신이 부패한 냄새 때문에 나프탈렌을 코에 대고 전투를 해야할 지경이었다고 전해진다.
결국 피해가 막대해지며 뤼순 요새 공방전의 소규모 전투 중 하나인 203고지 작전에서만 1만6000명 이상이 희생되자 일본 본국에서 노기 장군을 사령관에서 해임한다.
노기 장군에게서 작전권을 이양받은 고다마 겐타로(兒玉源太郞) 장군은 무식한 돌격작전을 멈추고 대포를 활용한 포격작전으로 5시간만에 203고지를 점령한다.
5개월간 지휘관을 잘못만난 수만명의 병사들이 희생된 전투는 그렇게 싱겁게 끝나고 말았다.
노기 장군은 전쟁이 끝난 뒤 귀국해 멱살을 잡히기도 했지만 그의 잘못된 지휘에 두 아들까지 전사했기 때문에 처벌받지는 않았다.
크나큰 수치심과 절망 속에서 할복자살을 하려고 했으나 일왕 메이지(明治)의 어명으로 할복이 금지돼 메이지가 죽은 후에 부인과 함께 할복 자결로 생을 마쳤다.
낡은 전 근대적인 사무라이 정신에 빠져 병사들을 사지로 몰아넣고 미신을 신봉하던 참모장을 기용한 것은 그의 큰 실책이고 당시 일본군이 고쳐나가야 할 숙제로 남았다.
그러나 오히려 1930년대 들어서서 군부가 정권을 잡고 노기 장군의 전략이 숭배되면서 일본군은 또다시 비논리적인 작전에 희생되고 만다.
이후 이 전투는 지휘관 한명의 상식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생명과 직결되는지 잘 보여준 사례로 남았다. 장군 한 사람의 영향력이 이런 상황에서 최순실사건의 여파에 국민들이 불안해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노기 마레스케 (일본어: 乃木希典 のぎ まれすけ, 1849년 12월 25일 ~ 1912년 9월 13일) 은 러일 전쟁에서 활약한 일본의 육군 군인이다.
조슈 번의 무사 출신으로서 에도 바쿠후의 조슈 정벌 때 조슈번의 보국대에 가담해 포병대원으로 전투에 참가했다. 보신전쟁에도 참가하여 야마가타 아리토모를 따라 에도 바쿠후의 군대와 싸웠다. 1871년 도쿄로 가서 신친위대의 육군 소좌로 임관했다. 1886년~1888년 독일에서 군제와 전술을 공부하고 돌아와 청일전쟁에 보병 제1여단장으로 출정했다. 1904년 러일전쟁이 일어났을 때는 휴직 중이었으나 소집되어 같은 해 5월 제3군 사령관으로 뤼순을 공격했다. 1912년 자신을 신임하던 메이지 천황이 죽자 장례일에 도쿄의 자택에서 부인과 함께 자결했다. 당시 일본군의 최고 지도자로서 도고 헤이하치로와 함께 '해군의 도고, 육군의 노기'라고 일컬어진다.
생애[편집]
1849년 현재의 도쿄에서 조슈 번(현재의 야마구치 현) 출신의 사무라이의 장남으로서 태어났다. 유년기에 사고로 왼쪽 눈을 실명하였고 아버지를 따라 조슈로 귀향하였다. 메이지 유신이 일어나자 유신군에 가담하여, 도쿠가와 막부 군대와 싸웠고, 메이지 유신 왕정 복고가 이루어지자 1871년 육군 소좌로 임관하였다. 1877년에는 보병 제14연대장으로 세이난 전쟁에 참전하였으나, 군기를 사이고 다카모리가 이끄는 사쓰마 번의 반란군에게 빼앗기는 치욕을 당했다.
이후 독일에 유학을 다녀와 1894년 소장으로 승진하였고 제1여단장을 맡아 청일 전쟁에 참전했다. 이후 중장으로 승진하여 타이완 원정에 참전했고, 타이완 총독에 취임하였다. 그러나 타이완에서 일본의 통치를 반대하는 반란이 계속되어 총독직을 사임하였다.
1899년 다시 사단장으로 복귀하였으나 휴직했고, 1904년 러일 전쟁이 발발하자 대장으로 승진하여 제3군을 이끌고 뤼순 공략에 참전하였다. 그는 13만 병사를 이끌고 있었는데, 6만 가까운 커다란 희생 끝에 뤼순의 203 고지를 함락시켰다. 대규모 희생을 낸 까닭에 본국으로 돌아갔을 때 사임과 할복자살을 하려했으나 메이지 천황이 만류한다. 이 희생 때문에 지휘관으로는 무능하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그의 두 아들도 이 전투에서 잃었다. 그러나 그는 러시아 군 포로를 관대히 처리하여 서양에서 일본군의 대외이미지를 개선시켰다.
전쟁 이후 그는 황족과 귀족의 교육기관인 가쿠슈인(学習院)의 원장으로 취임하였다. 이때 황손이었던 쇼와 천황도 엄격하게 지도하는 것으로 유명했으며, 그의 인격 형성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1912년 메이지 천황이 사망하자, 아내와 함께 할복자살하였다. 한편, 노기의 집은 아직도 도쿄 한복판의 고층 빌딩에 둘러싸인 가운데 나무로 지은 이층집 그대로 남아있는데, 현재는 노기 신사(乃木神社)로 알려져 박물관 역할을 하고 있다. 이 신사는 전쟁 중에 폭격 피해를 입지 않은 아오야마 지역에 있다.
가족 관계[편집]
노기 씨(野木氏)[1]는 59대 "우다 천황(宇多天皇)"의 후손가문 중 하나다. 노기 미쓰쓰나(野木光綱)는 노기 씨의 시조.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노기 마레스케의 추모제가 사후 20주년을 기념하여 경성에서 열렸다. 같은 해 10월 18일 조선총독으로부터 공식적으로 노기 신사 건축 허가를 받은 후 노기 장군 부부에 대한 제사를 매해 9월 13일에 노기 신사에서 행해졌다. 현재 서울에 노기 신사 일부가 남아있어 일본관광객이 방문하고 있다.
(증조부)"노기 지카나카"(乃木周仲)( ~ 1796년 11월 12일)
(조부)"노기 마레타케"(乃木次郎左衞門希健)(1764년 - 1833년)
(의붓 조모)"노무라 씨"(野村氏)( ~ 1794년)
(조모)"요시무라 씨"(吉村氏)
(부)"노기 마레쓰구"(乃木希次)(1805년 ~ 1877년10월31일)
(모)"하세가와 씨"(長谷川氏)(1828년 ~ 1896년)
(본인)"노기 마레스케"(乃木希典)(1849년 ~ 1912년 9월 13일)
(아내)"시즈코"(옛 성: 유지 씨湯地氏)(1859년 11월 29일 ~ 1912년 9월 13일)
(아들)"가쓰스케"(乃木勝典)(1879년 8월 28일 ~ 1904년 5월 27일)
(아들)"야스스케"(乃木保典)(1881년 12월 16일 ~ 1904년 11월 30일)
(아들)"나오스케"(乃木直典)(1889년 ~ 1889년)
(딸)"쓰네코"(乃木恒子)(1885년 ~ 1886년)
(양자)"노기 모토토모"(元智, 옛 성: 모리 씨毛利子爵家, 후에 모리 씨로 복성)
(아들)"가쓰스케"(乃木勝典)(1879년 8월 28일 ~ 1904년 5월 27일)
양 력: 1879년 8월 28일
음/평: 1879년 7월 11일 남자
시 일 월 년
@ 癸 壬 己
@ 未 申 卯
癸 甲 乙 丙 丁 戊 己 庚 辛 대운: 역행
亥 子 丑 寅 卯 辰 巳 午 未
86 76 66 56 46 36 26 16 6.10
사망일자: 1904년(26세, 庚午대운 甲辰년) 5월 27일 전투에서 사망함.
(아들)"야스스케"(乃木保典)(1881년 12월 16일 ~ 1904년 11월 30일)
양 력: 1881년 12월 16일
음/평: 1881년 10월 25일 남자
시 일 월 년
@ 甲 庚 辛
@ 申 子 巳
辛 壬 癸 甲 乙 丙 丁 戊 己 대운: 역행
卯 辰 巳 午 未 申 酉 戌 亥
83 73 63 53 43 33 23 13 3.2
사망일자: 1904년(24세, 丁酉대운 甲辰년) 11월 30일 전투에서 사망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