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컨대 고려국에 태어나서 한번만이라도 금강산을 보았으면(願生高麗國 一見金剛山)”했으나 결국 그 소원을 이루지 못한 시인이 소동파이다. 이번 중국 여행에서 이 소동파의 자취를 만날 수 있었다.
서호 입구의 소동파 석상
항주의 서호(西湖)에서 소동파 석상을 만난 것이다. 풍류객 소동파가 여기 항주의 지방관리로 와 있을 때 이 서호를 조성했다고 한다. 물이 얕은 호수의 흙을 준설하여 인공으로 제방을 쌓아 물의 깊이를 늘리고 제방에 나무를 심고 배를 띄워 낭만의 휴양지를 만든 것이다. 그래서 이 제방을 소동파의 성을 따서 ‘소제(蘇隄)’라고 한다.
서호는 5개의 인공호수이다. 그중 4개는 진주 양식장으로 쓰이고, 지금 관광객들에게 공개되는 곳은 나머지 단 1곳이다. 지금도 물의 평균 깊이가 1.5m밖에 되지 않을 정도로 물의 깊이는 매우 얕다. 그래서 배의 밑바닥이 평평하게 되어 있다. 일년에 한번씩 전당강의 물로 완전히 물갈이가 될 정도로 고여있는 물이 아니라 늘 교체되는 물이어서 수질이 매우 깨끗하다. 고기잡이까지 통제할 정도로 관리가 철저하다. 유람선을 타고 한 시간 가까이 호수 가운데 섬을 한 바퀴 돌아보는 코스는 아름다움과 신선함을 만끽할 수 있는 여행의 백미이다. 나무들 예쁜 제방을 오가는 자전거와 쌍쌍이 걷는 젊은이들도 참 잘 어울리는 풍경화다.
소동파의 문학적 재능은 천부적이었다. 문장 역시 출중했으며, 시사서화에 두루 능했다. 유명한 문학 작품을 많이 남겼다. 이처럼 소동파는 문학적으로도 칭송을 받았지만 미식(美食)에 있어서도 뛰어난 감각을 가졌었다고 한다.
우리는 이백을 주선(酒仙)이라고 부른다. 그에 견준다면 소동파는 식신(食神)의 경지에 올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음식에 조예가 깊었을 뿐만 아니라 음식을 소재로 삼아 많은 시를 남겼다. “대나무가 없으면 사람들은 속물이 되고, 돼지고기가 없으면 사람들은 마른다. 속물이 되지 않고 마르지도 않으려면, 끼니마다 죽순과 돼지볶음이 있어야 한다.”
이런 시가 있는가 하면“… 황주(黃†)의 좋은 돼지고기, 값은 똥값과 같다. 부자는 먹고 싶어하지 않고, 가난한 자 어찌 요리하는지 모르니, … (중략)… 약한 불로, 적은 물로, 충분히 끓이면, 고기는 자연스레 맛있어 지고, 매일 한 그릇씩 먹으니, 당신은 내가 어찌 먹든 상관치 마라. ” 이 시는 소동파 특유의 소탈한 면모와 대범한 멋이 담겨있다. 해학이 가득 담긴 이 시는 소동파가 호북성(湖北省) 황주에 좌천당했을 때 쓴 것이다.
관료로서 소동파의 삶은 그다지 순탄하지 못했다. 옥에 갇히기도 했고, 죄를 뒤집어쓰고 좌천을 당하기도 했다. 황주로 쫓겨갔을 때는 소동파 개인의 인생에 있어 가장 우울한 시기였다. 그러나 그는 그런 모든 상황을 평상심을 갖고 받아들였다. 황주는 아주 작고 찢어질 듯 가난한 동네였다. 마을은 벽촌이었지만 돼지고기 맛 하나 만큼은 중국 어느 지역보다도 맛있었다고 한다. 미식가로 유명한 소동파도 황주의 돼지고기에 대해서는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해댔다. 소동파는 요리하는 것도 즐겼다. 당시의 사회 풍조로 봐서는 상당히 유별났다고 할 수 있다. 요리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동파육(東坡 肉)이라는 요리를 개발하기에 이르렀고, 자신의 힘을 다해 알림으로써 대중화를 시키는 데도 성공했다. 이렇게 황주 돼지고기가 중국 전역에 알려지면서 황주 사람들은 경제적으로도 윤택해지게 되었다. 이렇게 됐으니 황주 사람들이 얼마나 소동파를 존경했을지는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가 호북성에서 존경받았다는 사실은 호북 지방의 돼지고기 요리에 동파라는 이름이 많이 붙어 있는 데서도 알 수 있다. 음식 이름에 동파의 이름을 붙임으로써 진심으로 감사를 표한 것이다.
그다지 알려지지 않았던 황주라는 작은 마을이 소동파 덕택에 전국적인 명성을 떨치게 되었으며 지방 경제도 덩달아 번영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동파육, 동파완자(丸子), 동파금각(金脚), 동파사자두(獅子頭), 동파수구(繡球) 등이 모두 돼지고기 요리다. 그 중에서 역시 최고로 꼽히는 건 동파육이다.
동파육은 홍소(紅燒) 요리의 최고봉이다. 홍소란 고기에 기름과 설탕을 넣어서 볶은 후 간장을 넣고 오래 익혀 검붉은 색이 나도록 하는 요리법이다.
동파육은 먼저 돼지고기 삼겹살을 껍질까지 붙은 채로 토막내 잘라서 기름에 튀긴다. 한 번 튀긴 삼겹살에 대파, 술, 간장, 설탕, 팔각 등을 넣고 센 불에 국물이 졸 때까지 익힌 다음 약한불로 장시간에 걸쳐 푹 고아낸 요리다. 껍질은 졸깃하고, 고기는 연하고,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음식이다. 금방이라도 흐트러질 것만 같은 삼겹살을 쪽파로 예쁘게 묶어서 내온다. 부드러운 삼겹살이 목구멍 속으로 미끄러지듯 넘어가면 입안에 쪽파의 향기만 은은하게 남는다.
소동파 [蘇東坡, 1036.12.19 ~ 1101.7.28]
메이산[眉山:지금의 四川省] 출생. 자 자첨(子瞻), 호 동파거사(東坡居士), 애칭(愛稱) 파공(坡公) ·파선(坡仙), 이름 식(軾). 소순(蘇洵)의 아들이며 소철(蘇轍)의 형으로 대소(大蘇)라고도 불리었다. 송나라 제1의 시인이며, 문장에 있어서도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의 한 사람이다. 22세 때 진사에 급제하고, 과거시험의 위원장이었던 구양 수(歐陽修)에게 인정을 받아 그의 후원으로 문단에 등장하였다. 왕안석(王安石)의 ‘신법(新法)’이 실시되자 ‘구법당(舊法黨)’에 속했던 그는 지방관으로 전출되었다.
천성이 자유인이었으므로 기질적으로도 신법을 싫어하였으며 “독서가 만 권에 달하여도 율(律)은 읽지 않는다”고 하였다. 이 일이 재앙을 불러 사상 초유의 필화사건을 일으켜 서울로 호송되어 어사대(御史臺)의 감옥에 갇히게 되었으며, 이 때 나이 44세였다. 심한 취조를 받은 뒤에 후베이성[湖北省]의 황주(黃州)로 유배되었으나, 50세가 되던 해 철종(哲宗)이 즉위함과 동시에 구법당이 득세하여 예부상서(禮部尙書) 등의 대관(大官)을 역임하였다.
황태후(皇太后)의 죽음을 계기로 신법당이 다시 세력을 잡자 그는 중국 최남단의 하이난섬[海南島]으로 유배되었다. 그곳에서 7년 동안 귀양살이를 하던 중, 휘종(徽宗)의 즉위와 함께 귀양살이가 풀렸으나 돌아오던 도중 장쑤성[江蘇省]의 상주(常州)에서 사망하였다. 그는 폭넓은 재능을 발휘하여 시문서화(詩文書畵) 등에 훌륭한 작품을 남겼으며 좌담(座談)을 잘하고 유머를 좋아하여 누구에게나 호감을 주었으므로 많은 문인들이 모여들었다. 당시(唐詩)가 서정적인 데 대하여 그의 시는 철학적 요소가 짙었고 새로운 시경(詩境)을 개척하였다. 대표작인 《적벽부(赤壁賦)》는 불후의 명작으로 널리 애창되고 있다.
첫댓글 와아! 좋아요~
음식을 소재로 삼아 많은 시를 남겼다. “대나무가 없으면 사람들은 속물이 되고, 돼지고기가 없으면 사람들은 마른다. 속물이 되지 않고 마르지도 않으려면, 끼니마다 죽순과 돼지볶음이 있어야 한다.” 돼지고기 음식을 좋아하는 소동파 다운 시네요.^^
동파육이 왜 생겨난줄 알겠어요~ㅎㅎ
소동파는 돼지고기를 즐겨했으나 다이어트의 필요성이...ㅋㅋㅋㅋ
소동파에 대해 자세히 알 수 있네요ㅎㅎ
감사합니다^^
이백이 주선이라면 소동파는 식신이라니... 재밌네요^^; 좋은 자료 잘 읽었습니다!
멋지지요
잘 읽었습니다.
잘 읽었습니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