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들에게 들은 이야기다.
오래 전 큰 딸이 초등학교 5학년, 작은 딸이 초등학교 3학년일 때의 어느 토요일,
딸들이 아빠와 함께 점심식사를 하기 위해 라면을 끓였다고 한다.
딸들이 나를 좀 어려워하던 그 시절, 작은 딸이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라면을 끓여왔지만
내가 보더니 아무 말도 없이 방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그러면서 이십 수년이 지난 그때의 사건이 딸에게 지금 트라우마로 남아있다고.
물론 나에겐 기억이 없다. 그렇다니까 그런 줄로. 상황 짐작을 해본다.
그날은 주말이라 아이들이 손수 라면을 끓여서 아빠와 식사를 같이 하겠다는 대견한 의지였을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된 상황인지는 몰라도 라면이 불었다.
아빠가 분 라면을 싫어한다는 사실을 알았는지 몰랐는지 어린 녀석이 신경이 좀 쓰였을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라면 상태를 확인하고 일언반구 없이 방으로 들어간 아빠가 어린 녀석에게 상처를 입힌 것이다.
아, 이걸 어쩐다. 도대체 내가 왜 그런 행동을...?
어린 소녀가 신경쓰며 끓여온 라면에 대해 웃어주며 감사해 하지는 못하고
왜 침묵하고 가버렸다는 건지 지금의 내 심리 상태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
배고픈 상태에서 기다렸던 식사가 너무 실망스러웠다는 말인가? 그게 그렇게 실망할 거리란 말인가?
실망했더라도 상대는 어린아이 아닌가? 어린애가 끓여온 라면이 불었다고 실망을 했다면,
또 실망했다 하더라도 내가 어린아이에게 그런 행동을 했다면 나는 정말 실망스런 존재다.
딸이 거짓말을 할리는 없고, 그렇다면 사실이다. 또 그렇다면 그때 나의 행동은 틀렸다.
그런데......
틀린 행동이 하나뿐이었겠는가? 어쩌면 많은 행동들이 틀렸을 것이다.
내가 최선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내가 그것이 옳다고 장담하는 사이에
옳지 않은 것이 되어 손가락에서 모래 빠져나가듯이 시간 속으로 빠져나갔을지 모른다.
아니다. 단순히 내 어떤 행동 문제가 아니라 내 마음 바탕에 뭔가 잘못된 게 있었을 것이다.
내가 진정 하나님 앞에서, 날 위해 성육신 하셔서 십자가에 오르신 주님 앞에서,
그분 보혈의 은총으로 의로움이 입혀지기까지 난 그냥 죄인에 불과하다는 진실과 충돌하기까지...
이 일을 숙고하고 있을 그때 내 입안에서 아픈 웅얼거림이 일어났다.
"미안하다, 아이야..."
우리 인간은 그렇다. 우리의 일생 속에는 인정하고 싶지 않고 피하고 싶은 과오 내지는 죄가 숨어 있다.
광 속에 쥐가 숨어있듯이 인정하고 싶지 않은 동기, 인정하고 싶지 않은 심리, 인정하고 싶지 않은 자아가
우리의 인생 저 깊은 구석에 웅크리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겸손해야 한다. 그래서 조심해야 한다. 그래서 우쭐거리면 안 된다.
우리가 의로운 자가 된다는 것은 우리가 불의하다는 것을 아는 것이요,
우리가 겸손한 자가 된다는 것은 우리가 겸손하지 않다는 것을 발견하는 것이요,
우리가 거룩한 자가 된다는 것은 우리가 거룩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이 조그만 사건이 나에게 주는 의미는 작은 것이 아니었다.
2018. 11. 11
이 호 혁
첫댓글 아멘!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