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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이야기 스크랩 지난 세월(8) - 518
산적 추천 0 조회 30 15.12.17 13:54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지난 세월(8) - 518


애띤 얼굴이라 나보다 어리겠지 짐작했는데 아뿔싸~!

나보다 두살이 많았다.

게다가 내 누님과 여고 동창이었다.


박정희가 저격되고 보안 사령관이었던 대머리 전두환이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휘어 

잡는 가운데 민주화의 봄이 와서 연일 데모가 일어나던 혼란 스러운 시절


독서실이 망하고 큰누님의 약국일을 돕다가 둘째 누님께 돈을 빌려 자취방을 얻었다.

그리고 나는 당시 학원가 근처의 궁동의 어느 서점에 취직했다.

봉급을 얼마 받았는지 기억 나진 않지만 그다지 많은 액수는 아니었지만 서점을 취직

했던 이유가 책을 원없이 보고 싶어서였다.


학원가 근처라 주로 팔리는 책이 학원 교재나 참고서들이었지만 구색을 갖추느라 소설,

에쎄이, 레코드까지 판매했었다. 오전에는 거의 할일이 없어 다들 신간 서적을 뒤적거

리곤 했다. 당시 하루 책 세권씩 읽어 데꼈다. 자연스레 속독법이 체득이 되었다.


긴머리 아가씨는 오빠 친구가 일본어 학원 차렸다고 공짜로 일어를 배우러 다니기 시작

했다. 내가 서점에서 퇴근할 무렵 긴머리 아가씨도 학원을 파해 같이 걸어서 집에 돌아

오곤 했다.


그러던 어느날 긴머리 아가씨는 성당의 교리 문답을 받으러 다니지 않겠냐는 제의를 했고

계림동 성당의 조 비오 신부님으로 부터 교리 문답을 배우러 다니기 시작했다.


80년 5월이 다가오자 데모는 전국적으로 심해졌고 서점 근처에 있던 광주 경찰서에는

방석복 차림의 4, 50 대 순경들이 지방에서 차출되어 진을 치고 있었다.




5월 16일 저녁 지금의 문화의 전당앞, 당시 전남 도청앞 분수대와 금남로 일대에서는 민주화를 

요구하는 횃불 시위가 일어났고 별다른 불상사 없이 저녁 10시쯤 자진 해산되었다.


5월 17일 새벽 간밤에 투입된 공수 부대원들은 전남대 주변, 조선대 주변에서 자취하던 대학생

들을 연행하기 시작했고 당시 대학 다니던 내 친구들도 광주를 도망쳐 시골의 친척집등에 피신

하기 시작했다.




이 시민들이 폭도라고? 이런 평화적 시위를 빌미삼아 광주를 초토화 시킨 나쁜 놈들




5월 19일 오후 화가 난 시민들은 당시 전남여고 앞에 있던 MBC 청사앞길에 모였고 각목을 등에 

맨 공수부대와 대치하기 시작했다. 

서점에서 퇴근하여 시민들과 합류했는데 MBC 청사에서 연기가 피어 올랐다. 

바로 옆 병원에 입원해 있던 환자들이 대피하고 가전 제품 대리점에서는 불이 옮겨 붙을까 걱정이 

되어 가전 제품들을 끄집어 내었고 많은 시민들이 가전 제품들을 도로변으로 옮기는데 도와 주었다.


 왜 MBC가 불에 탔는지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정부쪽에서는 시위대가 불을 질렀다 하나 그때

까지만 해도 평화적인 시위였다.


어둠이 깔리면서 MBC 청사는 홀라당 타버리고 31 사단 병력들이 장갑차를 앞세우고 최루탄을

던지며 시위대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길가로 끄집어 냈던 가전 제품들은 장갑차들이 다 짓뭉개 

버렸다.


서로들 도망가느라 정신 없는 가운데 나도 근처의 골목길로 뛰어 들었는데..

바로 앞에 뛰어 가던 사람이 넘어지는 바람에 나도 걸려서 나동그라지고 말았다.

뒤에서 ?아오던 군인은 내 무릎을 한방 가격하고 다른 골목으로 사라졌다.


안경이 어디론가 날아가 버렸다.

만일 내가 앞서 가는 사람 발에 걸려 넘어지지 않았다면 필시 머리통이 곤봉으로 가격 당했을게다.


밀고 밀리는 시위 현장.

누군가가 외쳤다.

광주역에 서울 대학생들이 관광 버스 대절해서 도착했다고~


가로등도 없는 캄캄한 밤길을 걸어 당시 대인동에 있었던 고속버스 터미날에 도착하니 관광버스

두대가 있었고 그 버스의 헤드라이트 불빛을 앞장세운 시위대들은 광주역 방향으로 진행하는데...


탕~! 탕~! 따따따다~


총소리에 놀란 시위대들은 순식간에 흩어졌고 총에 맞았는지 다친 사람들을 부축해서 근처의

굳게 닫힌 병원문을 두들겼다.

밤이 이슥해지고 시력도 좋지 않은데 안경마져 날아갔으니...

저녁도 먹지 않았지만 배가 고픈줄도 느끼질 못했다.


큰길을 피해 골목으로 골목으로 집에 돌아가는데 헬기 한대가 떠서 서치라이트를 골목 골목 비

추고 지나간다. 서치라이트 불빛에 노출 되지 않기위해 어느집 처마밑에 꼭 붙어 있다가 집에

돌아갔다.


정신없이 곯아 떨어져 일어나니 산수동 대로변에는 당시 광천동의 아시아 자동차( 현재는 기아

자동차 )에서 군수용으로 제작한 차량들을 탈취한 시위대들이 시민들을 독려했다. 왜 우리가

잘못이 없는데 당해야 하느냐며..


시위대 차량을 얻어타고 금남로에 도착하니 당시 전남 도청( 현재의 문화의 전당 )을 에워싸고

공수부대가 가로 막고 있었고 그 앞에 지난 밤에 총에 맞아 사망한 시민의 사체 두구가 놓여 있

었다.


아주머니들은 그사이에 김밥이며 주먹밥을 가져와서 시민들에게 나누어 주고 있었다. 누가 시

킨것도 아닌데 다들 자발적으로 조금이나마 그 상황에 도움이 될수 있는 일을 하려고 자청하고

나선것이다.


현재 동구청 건물이 있는 기계 공고 사거리에서 시위대와 군인들 충돌이 벌어졌다는 소식을 접

하고 현장을 떠났다. 한참 투석전이 벌어지고 군인들은 최루탄을 쏴대곤 했다.


다시 금남로로 돌아오니..

상황이 많이 바뀌어 있었다.

내가 자리를 뜬 사이 공수부대원들이 비무장 시민들을 향해 무차별로 총을 쏴대는 바람에 많은 

사상자가 발생해 있었다. 조금전까지 나도 바로 그곳에 있었는데...


시위대가 탈취한 경찰 장갑차 위엔 해치를 열고 고등학생인듯한 빡빡 머리 청년이 대형 태극기를 

앞세워 공수부대원을의 방어막을 뚫으려는 찰나 근처 건물 옥상에 배치되어 있던 저격병이 청년의

머리통을 날려버렸다. 어이가 없는 일이었다. 그때까지도 시민들이 합세한 시위대는 무장이 없

었다. 그런데 태극기 들고 있다고 머리를 날려버려?


얼마되지 않아 금남로 3, 4가 교차로에 차량 한대가 도착했다.

예비군 무기고를 털어버린거다.

칼빈총, M1, LMG 30 이 내려졌다.


방위 생활할때 LMG 30 특수 분해까지 해보았기에 총을 잡고 싶었지만 안경도 없이 총을

쏠수는 없는 일.


순식간에 시가전이 벌어졌다.

나는 허탈감을 느끼며 집으로 돌아갔다.

왜 이토록 사태가 악화 되어 가는걸까..

왜 무고한 학생들과 시민들은 개죽음을 당해야 하는 걸까...




당시 공수부대와 군 병력을 투입하여 많은 꽃다운 청춘들을 저세상으로 보낸 전두환과 노태우.

그들은 반성하지 않는다.

상무관에 대형 태극기로 감싼채 안치된 시신들을 홍어 운운하며 지금도 폄하하며 희생자들을

욕되게 하는 정치꾼들.


518 민주화 항쟁으로 명칭이 바뀌었으나 당시에는 광주사태라며 광주 시민들을 싸잡아 폭도

라 했고 희생자 유가족들이 어디로 이사를 가던 추적해가며 해꽂이 했던 나쁜 놈들.


5월 27일 진압군에 의해 마지막 항전이 끝났다.

그 기간 동안 총기가 여기 저기 널려 있었으나 강도 사건 한건도 발생하지 않았던 민주 도시 광주.

나는 지금도 떳떳하게 광주 출신이라 애기 한다.

518을 직접 겪었다고 애기한다.


그렇게 아프디 아픈 5월이 지나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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