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미트리 드미트리예비치 쇼스타코비치
1906-1975
러시아 피아니스트 겸 작곡가.
그는 세시간 동안 승강기 옆에 내내 서 있었다.
줄 담배를 다섯 대 피웠고, 마음은 어지러웠다.
(집안에서 가족이 보는 앞에서 잡혀 가느니 밖에 나와 있는 것이다.)
스탈린 치하의 <프라우다>지 는
“모든 작곡가는 국가에 고용되었으므로 그들의 기분이 상하더라도
국가가 개입해 청중과 더 큰 조화를 이루도록 그들을 이끄는
것이 국가의 의무이다.”
1929년 쇼스타코비치 는 공식적으로 고발 당했고,
그의 음악이 ‘소비에트 예술의 큰 길에서 벗어났다.’는
비난을 받았다.
같은 해 그가 교향곡 1번을 헌정한 대상인 미사 크바드리 가
그의 친구이자 동료들 중에서 최초로 체포되어 총살 당했다.
1936년 오페라 <므첸스크의 맥베스 부인> 발표했는데
초연 당시 호평을 받았으나 반대파들이 <프라우다> 지에
“음악이 아니라 혼란이었다.” 라는 비평을 기사화해서 곤욕을 치렀다.
“작곡가는 소비에트 관객이 음악에서 무엇을 구하고 기대하는가의
문제는 안중에 없었다. 이렇게 교활한 재주로 장난치는 행위는
끝이 대단히 안 좋을 수 있다.”
섬득한 비평이자 협박이었다.
투하쳅스키 대원수
군사 전략가, ‘붉은 나폴레옹’ 이라 불렸다.
음악 애호가 이자 바이올린 제작자였다.
레닌그라드 지구 군 사령관 시절 학생 쇼스타코비치 의
연주를 보고 후원자가 되었다.
상트레닌스부르크, 네바 강
1937년 봄, 쇼스타코비치 는 네바 강 옆에 위치한
빅하우스 에서 권력층에게 호출되었다.
권력층의 이름은 자크렙스키 였다.
투하쳅스키 대원수 와 의 관계를 집요하게 추궁했다.
스탈린 음모에 대한 자백을 강요했다.
순간 그는 자신이 죽은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스탈린 시대에 두 종류의 작곡가만이 있게 될 것이다.
겁에 질린 채 살아 있는 작곡가들과 죽은 작곡가들.
그러나, 자크렙스키 자신이 의혹의 대상이 되어
심문자가 신문 당하는 신세가 되어 체포 당했다.
투하쳅스키 대원수는 체포된 지 3주 뒤에 붉은 군대의
엘리트들과 함께 총살당했다.
1937년 여름, 교향곡 5번을 초연 했다.
당시 당 관료로부터 호평을 받았다.
현재, 그의 최고 걸작으로 손꼽힌다.
이 곡이 본인의 주체적 음악인지, 당시 강요에 의한
곡인지 확실치 않다.
생명의 은인 이기도 한 곡이다.
1936년부터 1948년 까지 12년간, 그는 ‘위대한 조국 해방전쟁’
(세계 2차 대전) 때 말고는 안전하다고 느껴 본 적이
한번도 없었다.
흔히들 하는 말로 그 전쟁은 구원으로 가는 재앙이었다.
안드레이 즈다노프 1896-1948
스탈린의 후계자로 거론될 정도의 거물급 인사였지만
52세 에 죽는 바람에 권력 승계를 받지 못했다.
1948년 국가의 작곡가 들에게
“혼돈이 아니라 음악이 필요하다. 조화롭고 우아한 음악.”
주요 범인으로 쇼스타코비치, 프로코피예프 등을 지목했다.
그의 음악을 도로 굴착기 와 이동식 가스실에 비유했다.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 1891-1953
1936년 까지 유럽, 미국 등에서 연주 활동을 하다가
영구 귀국하였다.
그러나 즈다노프 로부터 형식주의 라는 비판을 받았고
1938년 여권을 압수 당했다.
정권의 입 맛에 맞는 곡을 만들 수 밖에 없었다.
쇼스타코비치 와 함께 교향곡으로 명성을 날렸다.
뇌진탕 후유증으로 뇌출혈로 사망한다.
시대의 소음
잘못된 귀들이 듣지 못하도록 소중한 것을 숨겨서
통과시킬 수 있는 비밀의 언어로 음악이 남아 있는
한은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음악이 암호로만 존재할 수 없었다.
솔직하게 다 털어놓고 말하고 싶어 좀이 쑤셨다.
(당 관료들은 음악을 비판할 때 소음, 혼란, 소란 등으로
표현하였다.)
시 낭송 그리고 음악
쇼스타코비치 는 셰익스피어의 소네트 66에
곡을 붙였다.
셰익스피어 소네트 66 중에서
“예술이 권력 앞에서 벙어리가 된 것을 보고,”
And art made tongue-tied by authority
<베니스의 상인> 중에서
셰익스피어는
“음악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신뢰할 수 없다.
그런 사람은 살인이나 반역과 같은 비열한 행동조차
할 수 있는 자이다.”
관객들은 자기도 모르게 일어서서 기립 박수를 보냈다.
폭군들은 아무리 음악을 좋아하는 척하려 애를
써도 음악을 싫어했다.
그들은 시는 더욱 싫어했다.
스탈린은 “누가 일어서도록 주동했소?” 라며
격노했다.
니콜라스 나보코프 와 아내
1930년 대 미국을 망명한 작곡가 겸 기획자.
암암리에 CIA를 위해 일했다.
소설 <롤리타>를 쓴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의 사촌이기도 하다.
1949년 봄, 쇼스타코비치가 뉴욕 평화 회의 일원으로
뉴욕을 방문했을 때, 나보코프 는 쇼스타코비치에게 공개적으로
몇 가지 질문을 했다.
“소비에트 정부가 매일 늘어놓는 서구 음악에 대한
끔찍한 비난에 동의 하십니까?”
“예, 개인적으로 그런 의견들에 동의합니다.”
“그러면 즈다노프 서기장이 당신의 음악과 다른 작곡가들의
음악에 대해 내놓은 견해에도 개인적으로 동의 하십니까?”
“예, 개인적으로 동의 합니다.”
쇼스타코비치 는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나보코프 는 “이제 모든 것이 아주 분명해졌습니다.”
라고 했다.
스탈린 체제의 태양 아래 개인적 자유란 없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 쇼스타코비치 는 서슴없이 개인의 삶을
희생시켰다.
그러나 그로 말하자면 해외에서의 삶에 유혹을 느낀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는 러시아에 사는 러시아 작곡가였다.
그는 어떤 대안도 상상하는 것조차 거부했다.
서구식 명성을 잠깐이나마 맛보기는 했지만,
뉴욕에서 아스피린을 사러 약국에 간 적이 있었다.
그가 약국을 나서고 10분도 안 되어 조수가 창문에
이런 표지판을 붙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 가 들른 약국’
안나 아흐마토바, 1889-1966
소련 시인, 부르주아적 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스탈린 사후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즈다노프 는 그녀를 ‘매춘부 이자 수녀’ 라고 비난했다.
그녀 역시 서방 세계의 질문에
‘소비에트 러시아에 대한 서구의 견해는 모두 악의에
찬 공상에 불과하다.
예술가 들은 대접을 잘 받고 있을 뿐 아니라,
최고위 권력층하고도 건설적이고 비판적인 교류가
허용되어 있다.” 라고 대답했다.
진실을 말하고 목숨을 부지 할 수 없다는 현실을
누구나 알고 있었다.
“전쟁 중, 쿠이비셰프 와 모스코바 사이의 발진티푸스가
들끓는 완행 열차에서 쇼스타코비치는 손목과 목에 부적으로
마늘을 걸고 있었다. 그것 덕분에 살아 남았다.
그러나 이제는 마늘을 언제까지나 걸고 다녀야 하게 되었다.
발진티푸스 때문이 아니라 권력층, 적들, 위선자들, 뜻은
좋은 친구들 때문이다.”
“권력층에 진실을 말하는 사람들을 존경했다.
그들이 부러운 이유는 그들이 죽어서 살아있는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기 때문이다.”
드미트리 의 옛 친구 솔로몬 미호엘스 가 스탈린 명령으로
살해 당했다.
드미트리 는 미호엘스 의 아파트로 갔다.
그런 다음 겁에 질려 침묵에 잠긴 문상객들을 등지고
책장에 얼굴이 거의 닿을 만큼 가까이 마주 서서 그들에게
조용하지만 분명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그가 부럽소.”
그의 말 뜻은, 끝없는 공포보다는 죽음이 낫다.
레닌은 음악이 기분을 처지게 한다는 것을 알았다.
스탈린은 자기가 음악을 이해하고 감상할 줄 안다고 여겼다.
흐루시초프 는 음악을 경멸했다.
이중 어느 것이 작곡가에게 최악일까?
미국에서 돌아온 쇼스타코비치 는 <숲의 노래>를 작곡했다.
“모국에 숲으로 옷을 입히자.”
스탈린을 찬양하는 오라토리오였다.
단박에 스탈린 상을 타고, 10만 루블과 시골 저택을 받았다.
도합 6번의 스탈린 상 과 4번의 레닌 훈장을 받았다.
1953년 사망.
니키타 세르게예비치 흐루쇼프 등장.
1894-1971
드미트리 는 그를 ‘니키타 옥수수대’ 라 불렀다.
흐루쇼프 는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에 대해
“오, 그의 음악은 재즈 일 뿐이오, 듣고 있으면 배가
아파온단 말이지, 그런데 내가 박수를 쳐야겠소?”
그러나, 예전에는 죽음이 있었다.
지금은 삶이 있다.
예전에는 명령이 있었고,
지금은 암시가 있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권력층과 대화는 영혼에 더 위험한 것이 되었다.
스트라빈스키, 1882-1971
1934년 프랑스로 귀화, 2차 대전 일어나자 미국으로 망명했다
드미트리 는 스트라빈스키의 음악에 대한 그의 애정과
숭배는 결코 흔들린 적이 없었다.
책상 유리 밑에 그이 사진을 끼워 넣었다.
드미트리 는 스트라빈스키를 작곡가로 존경하는 만큼
사상가로서의 스트라빈스키를 경멸했다.
조국의 예술가, 작가 그리고 가족들이 쫓기고, 투옥되고,
추방당하고, 살해 당할 때 그는 미국에서 공개적으로 항의의
말을 한적이 없었다.
티콘 크레니코프
소련 붕괴 직전까지 40년간 공산당 하수인을 자처했던
소련 작곡가동맹 위원장. 즈다노프 의 똘마니.
자기 스승까지 박해했던 인물.
스탈린이 회의 석상에서 크레니코프 를 무시하고 아무 말없이
째려보자, 잔뜩 겁을 집어먹고 그만 바지에 실례를 했다고 한다.
쇼스타코비치, 프로코피예프 의 작품을 형식주의라고
비난했다.
러시아 연방 작곡가 조합 의장
흐루쇼프 당서기장 제안
전 정권과 다름을 보여주기 위한 정치적 목적이 다분했다.
“저는 작곡가이지 의장이 아닙니다.”
“내 음악을 금지했던 당에 가입할 수는 없어요.”
사람을 죽이는 당에 들어가 감투를 쓴다는 것은 치욕이었다.
권력층의 압력을 받다 보면 자아는 금이 가고 쪼개진다.
결국 입당 원서에 서명한다. (1960년)
아들 막심은 아버지가 우는 모습을 두 번 보았다.
아내 니나 가 죽었을 때 한 번, 입당했을 때 한 번.
겁쟁이가 되기 보다는 영웅이 되기가 훨씬 더 쉬웠다.
영웅이 되려면 잠시 용감해지기만 하면 된다.
그러나 겁쟁이가 된다는 것은 평생토록 이어지게 될
길에 발을 들이는 것이다.
축구 경기 관람
그는 평생 축구를 무척 좋아했다.
정직한 노력 과 아름다움의 순간들로 이루어지는 축구는
권력층과 이데올로기, 인간 영혼의 공허한 언어와 파괴와는
동떨어진 것으로 느꼈다.

첫 번째 아내 니나 바르자르(니타),
사교적이고 주위로부터 사랑을 받았다.
딸 갈리나 와 아들 막심 두 자녀를 두었다
1954년 갑자기 병사한다.
두 번째 결혼
그가 저지른 실수 중에 하나였다.
세계 청년 페스티벌에서 최고 합창단을 뽑는 심판
단장인 마르가리타 가 눈에 띄었다. 1956년 결혼.
그러나 3년만에 이혼했다.
세 번째 아내, 이리나 안토노브나
음악 출판사 직원이었던 그녀(27살, 유부녀)와 1962년 결혼,
1975년 쇼스타코비치가 죽을 때까지 같이 했다.
어릴 때 그의 영웅은 북극을 탐험한 난센 이었다.
노인이 되어서 이리나 와 함께 차를 타고 모스코바를
돌았다. 그는 교외의 난센 이 되었다.
드미트리 는 그 소설가를 존경하고 몇 번이나 되풀이해서
읽으면서도 솔제니친 을 비판하는 더러운 공식 서한에
서명했다.
몇 년 뒤 사하로프 를 비난하는 더러운 서한에도 서명했다.
그는 한편으로는 그가 그 서한의 내용에 동의했다고 아무도
믿지 않기를 바랐다.
그러나 사람들은 믿었다.
친구와 동료 음악가들은 그와 악수를 거부하고
그에게 등을 돌렸다.
그는 자기 자신을 배신했고, 남들이 여전히 그에 대해
품고 있는 선의를 배신했다.
그는 너무 오래 살았다.
그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싶어했다.
그가 두려워하는 것은 죽음이 아니라 삶이었다.
가끔은 죽음이야말로 그를 가장 두렵게 만드는 것이라고도
생각했다.
작가 즐리언 반스
1946년 영국 태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