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은 우리 육체의 오감을 만족시켰을 때 제맛이 난다.살포시 잔을 잡을 때, 잔 속에 든 술의 향을 맡을 때, 은은한 빛깔이 눈에 스칠 때, 입술에서 혀 끝까지 천천히 적셨을 때, 그리고 건배를 하면서 ‘쨍~’ 하고 술잔을 부딪칠 때 오감 만족이 이뤄진다.
이 가운데 잔을 부딪칠 때의 맑고 청아한 소리는 와인을 담은 유리잔이 가진 독특한 멋이기도 하다.
일반적으로 와인이라면 대부분 포도를 연상한다. 그런데 감으로 와인을 빚으면 어떤 맛이 날까. 세상에서 둘도 없는 감와인이 경북 청도에서 생산되고 있다.
청도와인(주)이 빚어낸 ‘감그린’이 바로 그것이다.
#APEC 정상회의 만찬석상 올라
청도는 납작하면서도 씨가 없는 감, 즉 반시로 유명하다. 씨는 기름기와 약간의 독성을 함유하고 있어 씨가 있는 감을 이용해 술을 만들 경우 일일이 씨앗을 골라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다. 청도감을 이용하면 이 공정을 줄일 수 있고, 특유의 높은 당도 또한 와인을 빚는데 더 없이 좋은 소재다.
감그린의 우아하고 깊은 맛은 감나무의 수명과도 관련이 있다. 일반적으로 와인의 재료인 포도나무 수명은 고작 10년 안팎. 그러나 감은 10년이 지나서야 제대로 된 감이 열린다. 감나무의 수명이 50~100년이니 포도나무와 비교도 안될 만큼 길다. 떫은 맛을 내는 ‘탄닌(Tanin)’ 성분이 포도에 비해 20%나 더 많다.
혈관을 튼튼하게 하고 심장병에 탁월한 효과를 나타내며 숙취 해소에 그만인 탄닌 성분의 대량 함유는 곧 이를 소재로 만든 감그린의 좋은 효능으로 이어진다.
고급스러운 황금 빛을 내는데다 동·서를 막론하고 입맛에 맞아 APEC 정상회의 참가 대표단의 만찬 석상에 오르기도 했다.
#온도 일정 폐 철도터널서 숙성
감그린의 숙성은 폐 철도터널에서 이뤄진다.
경북 청도군 화양읍 송금리 남성현 고개 아래 길이 1,200여m, 폭 4.5m, 높이 5.3m 크기로 직육면체로 깎은 돌과 붉은 벽돌로 만들어진 기차 터널이 감그린의 숙성실이다. 입구에 ‘명치(明治) 37년’(1904년)에 건설됐음을 알리는 초석이 붙어 있다.
일제가 대한제국 말기 철도부설권을 따내 건설했다가 1926년 경부선 철도가 놓이면서 폐쇄한 뒤 방치된 것을 청도와인측이 임대해 사용하고 있다.
입구에서 50여m를 들어가면 양쪽 벽면에 놓인 철사를 엮어 만든 저장통에 검푸른색의 와인병이 가득 쌓여 있다. 이곳의 온도는 섭씨 11~13도. 습도가 80%여서 와인 숙성의 최적 조건을 갖췄다.청도와인측은 이 터널에 감즙으로 만든 와인 1만여병을 보관 중이고, 올해에만 모두 15만병을 저장할 계획이다. 입구쪽에는 6명이 한꺼번에 앉을 수 있는 원목 테이블 10개와 주변에 연분홍 빛 조명, 유럽식 카페 지붕이 설치된 시음장이 들어서 있다.
흔히 포도로 만든 화이트 와인은 생선, 레드 와인은 육고기를 안주로 삼는다.
때문에 포도 와인은 어떤 음식을 먹느냐에 따라 테이블에 놓이는 와인의 종류가 달라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감와인은 안주의 종류에 구애받지 않는다.
구운 것이든 날생선이든, 육류이든 감그린의 안주로 못쓰는 것이 없다. 한정식과 함께 감와인을 마셔도 전혀 손색이 없고, 감 맛을 그대로 느낄 수 있는 점이 특징이다.
〈청도|백승목기자 smbaek@kyunghyang.com〉
〈사진 김영민기자 viola@kyunghyang.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