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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서녁으로 가고지고
글/이원익
오늘도 속절없이 서쪽 하늘이 붉게 물든다. 곧 어둠이 깔리리라. 그리고 내 삶의 남은 시간은 그만큼 줄어들 것이고 이윽고 한밤이 지나 동이 트면 간밤의 지향 없는 꿈과 애틋함을 등 뒤에 묻은 채 나는 또 차를 몰고 여느 날처럼 동쪽의 일터로 달려가야 하리라.
우리가 미국에 살면서 무슨 일을 하며 무슨 재미로 시간 가는 줄을 모르게 세월을 보내든 가슴 깊숙이 마음의 고향은 한바다 건너 서녘에 있음을 부정하기 어렵다. 그야 고국이, 고향이 그 쪽에 있어서 그렇겠지. 그렇다면 한국에 살고 있는 동포들은 어떨까? 서쪽이 아니라 부단히 동쪽 하늘을 훔쳐보며 언제 한 번 저 바다를 날아 건널까, 바로 질러갈까 돌아서 갈까 하고 벼르는 이들이 적지 않을까? 하지만 그러는 이들도 어쩌면 더 깊숙이, 스스로도 잘 알아채지 못하는 마음바닥엔 그 옛날 조상들이 떠나온 북방이나 서방에의 그리움이 깔려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 겨레가 반도로 흘러들면서 더러 남방이나 남서쪽이 물줄기를 보탰는지도 모르겠지만 아마도 큰 흐름은 대체로 북서쪽이었겠지. 불교에서 서방정토를 일컫게 된 것도 혹시 불교의 그루터기인 브라만교를 이룩한 아리안 족들이 서쪽에서 와서 그런 것은 아닐까?
그런데 민족들의 이러한 핏줄기의 흐름과는 좀 달리 우리 조상들도 한 번 종교적인 열정이 불붙자 방향을 좀 틀어 간절히 서남쪽 부처님의 나라, 천축국을 다녀오고자 염원하기도 하였으니 그 대표적인 예가 삼국시대의 구도승들이다. 천축이 어디냐면 오늘날의 인도인데 초음속 여객기가 날아다니는 요즘도 선뜻 길을 나서기가 만만찮은데 천 년 전에야 오죽했으랴! 그 옛날 더러 성공적으로 갔다 온 분들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한국 사람으로서 근세 이전에 확실히 천축을 다녀온 기록으로는 신라 스님인 혜초(慧超 AD704~AD787) 한 분뿐이다.
이렇게 단정 지을 수 있는 것은 혜초 스님이 남긴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An Account of Travel to the Five Indian Kingdoms: 인도의 다섯 나라 다녀온 이야기) 덕분인데 일설에는 이것이 세계 사대 여행기에 속한다고 한다. 한국 사람이 쓴 가장 유명하고도 하나뿐인 중세 여행기다.
혜초스님의 왕오천축국전
말이 나온 김에 세계 사대 여행기가 뭐냐고 하면 가장 오래 된 것이 AD723년부터 AD727년까지 4년에 걸쳐 인도와 중앙아시아를 여행한 혜초의‘왕오천축국전’이고 그 다음이 마르코 폴로(Marco Polo AD1254~AD1324)의 유명한‘동방견문록(東方見聞錄 Il Milione)’이다. 이탈리아 베네치아 출신인 마르코 폴로는 17년 동안(AD1275~AD1292) 중앙아시아를 거쳐 중국, 몽고, 베트남 등지를 여행하였다.
모로코의 탕헤르 출신인 이븐 바투타(Ibn Batutta AD1304~AD1368)의‘여행기(旅行記 Rihla)’는 우리에게 덜 알려졌지만 그 당시 이슬람권 전역과 인도, 수마트라까지 12만킬로미터에 이르는 광대한 여정을 24년 동안 여행한 대단한 기록이다. 마지막으로 이탈리아 프란체스코파 수사인 오도리크(Odoric of Pordenone AD1265~AD1331)의‘동유기(東遊記 The Travels of Friar Odoric)’가 있는데 그는 동방 선교를 위해 이란, 인도, 동남아를 거쳐 중국 원나라에 도착하였다. 그 후 12년 만에 이탈리아로 돌아가 다시 동방 여행단을 꾸리다 병들어 죽게 되자 라틴어로 여행기를 구술했는데 기독교적인 편견에다가 기억의 혼미 등 단점도 있지만 중요한 여행 기록이다. 이렇듯 왕오천축국전을 뺀 나머지 셋은 다 지중해 지역에서 왔다. 그래서 이들의 여행기는 서녘 대신‘아, 동녘으로 가고지고’의 결과물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사대 여행기에 오도리크의‘동유기’대신 현장(玄奘) 스님(AD602~AD664)의‘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 Great Tang Records on the Western Regions: 당나라 서쪽 지역의 기록)’를 넣는데 내 생각에도 그게 맞는 것 같다. 아니면 오대 여행기로 하든가. 사실 시기적으로 보나 그 기록 내용의 풍부함으로 보나 지금 발견 된 왕오천축국전은 대당서역기에 한참 못 미친다. 그도 그럴 것이 대당서역기는 왕명에 의하여 잠재적 적국이나 정복대상지역에 대하여 상세히 기술한 일종의 정보보고서인데 반하여 지금 우리에게 남아 있는 왕오천축국전은 원본이 아니라 누군가가 원본을 간략히 요약하여 기술한 필사본인 것 같고 그마저 앞뒤가 잘려 나간 불완전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저러나 8세기의 인도나 이슬람 지역에 대한 정보로는 왕오천축국전만 한 것이 없으니 원본이 본래 어땠는지 알 수 없는 게 아쉬울 따름이다.
한 가지 곁가지로, 동방견문록은 일찌감치 한국어 번역판이 나왔지만 나머지 세 여행기가 한 사람에 의해 풍부한 각주와 함께 몽땅 번역 되어 나왔다는 얘기는 아시는지 모르겠다. 연변 조선족 출신의 정수일(鄭守一) 교수, 아랍인으로 위장했던 12개 나라 말을 할 줄 아는 일명 무함마드 깐수가 그 주인공인데 이 사람과 관련 된 이야기를 조금 더 들추면 놀랍고도 서글픈 사연이 펼쳐진다. 혹시 기억이 나시는가? 유명하고 대단한 학자에다가 남북관계가 얽힌 비극에다가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있지만 아직은 시절이 하수상하니 이 정도로 맛보기만 보이고 넘어가자. 아무튼 이 ‘분단시대의 불우한 천재학자’ ‘문명교류학의 세계적 권위자’는 한국에 살아 있고 값진 책은 계속 나오고 있으니 결과적으로 북은 괜히 보물 하나를 남에 퍼 준 셈이 됐다.
그건 그렇고 아시다시피 삼장법사인 현장 스님이 인도를 다녀온 근본 동기는 원전 불경을 구하기 위함이었다. 중국에 불교가 전래된 초창기에는 주로 서역승이나 인도승들에 의해 여러 경로로 갖가지 종파의 불교가 순서 없이 전해지고 경전도 한역 되었는데 중국에서는 불교가 처음 알려지는 낯선 종교이다 보니 주로 도교의 개념과 용어를 빌어서 불경을 번역하기 비롯하였다. 이러다 보니 여러 가지 이유로 시간이 갈수록 부처님 가르침의 참뜻을 알기가 어려워졌고 경전마다 말이 다른데다 헷갈려서 갈피를 잡기가 어려워졌다. 이에 여러 중국 스님들이 참다못해 부처님 나라로 구법 여행을 떠났는데 말이 여행이지 사생결단의 각오 없이는 될 일이 아니었고 성공률도 희박했다. 삭막한 사막과 고산지대, 거친 유목민들과 약탈자들, 이교도들을 뚫고 살아 와야 하는 천신만고의 길이었다. 오직 치열한 구도정신과 먼저 가다 죽은 이들의 해골만이 이정표가 되었다. 이른바 비단길을 따라 일단 서쪽으로 사막과 초원을 뚫고 가야하는데 바닷길이 열리면서 쇠퇴한 길이지만 인공위성으로 분석을 하면 지금도 그 옛길의 흔적이 드러난다고 한다. 수백 년 수천 년 대상들이 몰고 간 낙타가 지나다니면서 유기물을 뿌렸으므로 주위보단 좀 다르게 나타난다고 한다.
현장은 처음에는 국법이 금하므로 몰래 구법여행을 떠났는데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자 딴판이었다. 지금의 신장 위구르 자치주의 여러 오아시스 나라를 거치며 당나라의 서쪽에 당도하자 흉노 제압과 영토 확장에 몰두하던 당태종이 버선발로 반기며 칙사대접을 하였다. 그러면서 지나온 여행기를 자세히 적어 올리라고 명령하니 현장은 비상한 기억력으로 둘도 없는 여행보고서를 올렸다. 그게 바로 대당서역기다. 당태종으로서는 적정에 관한 너무나도 값진 정보인지라 그 후 현장의 본래 목적인 역경 사업을 크게 후원했음은 물론이다. 이 대당서역기에 영감을 받아 뒷날 명나라 때 오승은(吳承恩AD1500~AD1582)의 서유기(西遊記 Journey to the West: 서쪽에 놀러 갔던 얘기)가 나왔다. 이는 중국 사대 기서(진기한 책)의 하나다.
현장 이전에 법현(法顯) 스님(AD337~AD422)이 있는데 예순 다섯의 나이에 과감히 길을 떠나 기어코 돌아와 불국기(佛國記 A Record of Buddhist Kingdoms: 부처님 나라 기록)를 남겼다. 중국에서 인도로 가자면 바닷길과 뭍길이 있는데 법현은 혜경, 혜은, 혜외, 도정 등 스님들과 뭍길로 떠났으나 혼자만이 뱃길로 싱가포르를 돌아 다시 중국에 돌아올 수 있었다. 현장은 뭍길로 떠나 뭍길로 왔고 남해귀기내법전(南海寄歸內法傳 A Record of Buddhist Practices Sent Home from the Southern Sea: 남해에서 불법을 가져온 기록)을 남긴 의정(義淨) 스님(AD635~AD713)은 뱃길로 가서 뱃길로 왔다. 우리의 혜초 스님은 지금의 홍콩 근처 광주를 떠나 뱃길로 인도 동부에 도착하여 동서남북중 인도의 다섯 나라를 중심으로 여러 나라를 돌아보고 서북쪽, 지금의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을 거쳐 이슬람 세계의 한 자락을 밟아 보고 그 쪽 방면 소문을 들은 뒤 북쪽으로 지금의 중앙아시아 여러 나라를 거친 뒤 동쪽으로 나아가 다시 중국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혜초는 신라 스님이라고 했는데 어찌 중국에까지 온 이야기 밖에 없나? 사실 혜초는 신라 출신이지만 중국에서 살다 입적하였다. AD704년 성덕왕(聖德王) 3년에 신라에서 태어난 혜초는 열여섯 살 때 중국 광주에서 인도 스님인 금강지(金剛智 Vajrabodhi)와 불공(不空 Amoghavajra)을 만나 불법을 배우다가 금강지의 권유로, AD723 년경이니까 우리 나이로 스무 살에 인도로 구도 여행을 떠났다. AD727년 안서도호부가 있던 쿠차 나라에 도착하여 그 후 장안에 머물다가 오대산 정원보리사에 들어가 AD787년 입적할 때까지 살았다.
공부든 사업이든 결혼 목적이든 요즘 한국 사람들이 걸핏하면(?) 미국으로 오듯이 그 당시 삼국시대 사람들도 뭔가 뜻을 품으면 곧잘 중국으로 일단 가게 마련이었다. 스님들은 특히 더 그래서 고구려, 백제, 신라 할 것 없이 중국으로 공부하러들 갔는데 너무 오니까, 그것도 잠재적 적대 세력인 동이족들이 몰려오니까 수나라, 당나라에서는 이를 경계하고 관리하느라 상당히 신경을 썼던 모양이다. 그리고 요새 한국 애들이 미국 학교에서 곧잘 두각을 나타내듯이 이들 스님들도 중국 불교계에 업적을 남긴 분이 많다. 현장 스님의 불경번역도 신방, 지인, 승현, 순경 등 신라 유학승들이 많이 도왔다. 티베트어, 산스크리트어 등 6개 국어에 능통했던 원측(圓測) 스님도 열다섯 살에 당나라로 갔는데 유명해지니까 신라 신문왕(神文王)이 귀국을 요청했지만 측천무후가 놓아 주지 않았다. 이렇게 서쪽에 눌러 앉은 스님들을 서화(西化) 스님들이라고 일컬었다. 미국에서 못 돌아가고 있는 우리들은 동화(東化) 동포들인가?
물론 귀국하여 활동한 스님들도 많았다. 자장, 순경, 혜통, 의상, 명랑, 도증, 명효, 승전…… 그리고 서화 스님이든 귀국 스님이든 기록에도 남아 있지 않은 이들은 또 얼마나 많을 것인가! 사실 왕오천축국전이 발견 되고도 얼마 동안은 아무도 혜초가 신라 스님인 줄을 몰랐었다. 이 이야기를 하자면 막고굴 이야기를 해야 하니 천생 시대를 청나라 말기로 좁혀서 화면을 들여다봐야겠다. 그런데 지금도 좀 그렇지만 청나라 말기, 그 때는 참 세상이 아수라장이었다. 특히 중국은.
중국 북경에서 서쪽으로 4,000 킬로미터쯤 곧바로 날아가면 감숙성 서북쪽에 돈황이라는 곳이 있다. 이곳은 한무제(漢武帝) 때 장건(張騫)이 개척한 이래로 남북조, 당, 송, 원나라 시대까지 서역과의 중요한 교역로였는데 인도에서 생긴 불교가 중국에 들어온 통로이기도 했다. 이 돈황에서 동남쪽 20 킬로미터 지점에 명사산이 있는데 말 그대로 모래가 우는 산이다. 모래언덕이 바람에 따라 생겼다 없어졌다 하며 움직이는데 올라가 밟으면 모래가 무너지면서 운다고 한다. 이 명사산 동쪽 끝 깎아지른 절벽에 꼭 벌집처럼 굴을 파서 만든 석굴암 사오백 개가 천불동(千佛洞)이라 일컫는 막고굴(莫高窟)이다. 본래 거의 천 개쯤 되는 석굴이라는데 현재 벽화와 소상이 남아 있는 굴이 그 정도다. 오호십육국의 하나인 전진 2년(AD366)부터 굴을 뚫기 시작했다는데 위나라, 수나라, 당나라, 오대, 서하, 원, 청나라에 걸쳐 있는 거대한 불교유적으로서 유네스코 인류 문화유산으로 등재 되었다.
이렇듯 많은 시간과 노력으로 이룩된 이 천불동에 1900년대에 와서 놀라운 사건이 벌어졌으니 곧 돈황 고서의 발견이다. 19세기 말쯤 왕원록(王圓籙)이라는 사람이 이곳에 흘러 들어왔는데 그는 도교의 성직자랄 수 있는 도사(道士)였다. 아마 그는 이 굴 중 하나를 개조하여 도교 사원으로 만들 참이었나 보다. 그래서 제자 하나를 데리고 마침 들어앉았던 곳이 제16호 굴, 곧 지금의 장경동(藏經洞)인데 몇 가지 좀 다른 이야기가 있지만 대충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한다.
하루는 왕원록이 제자더러 굴속에서 도교 경전을 베끼라고 시켰는데 이 친구가 담배를 피우면서 도사가 시키는 작업을 하는데 담배연기가 앉은 등 뒤 벽 틈으로 마구 빨려 들어가는 것이 아닌가! 이상하게 생각 되어 벽을 두드려 보니 뒤편이 비어 있는 듯 퉁퉁 소리가 나는 것이었다. 이에 도사에게 보고하니 도사는 벽을 허물었다. 그러자 조그만 문이 드러나고 문을 열자, 짠! 그 안에는 5만여 점에 이르는 엄청난 양의 문서와 경전, 그림, 옛날 악기 등이 쌓여 있지를 않았겠나! 왕도사는 그 중에 책 몇 권을 꺼내어 주위의 아는 사람들이나 학자, 관리들에게 보였지만 아무도 진가를 알아보지 못하고 시큰둥해 했다. 이러고 한 세 해가 흘렀는데 소문을 듣고 감숙성의 장학사가 관심을 보였지만 가져가자면 운반비가 많이 든다고 다시 봉해 두라고 명령을 했다. 하지만 이러는 사이에 소문은 더 퍼져 나갔다.
그 당시 중앙아시아와 신강(동터키스탄) 지역은 열강의 관심지역으로 이목이 집중되어 각국이 경쟁적으로 탐험대를 보내고 있었는데 특히 영국과 러시아의 경쟁이 심했다. 1905년에 러시아의 지질학자인 오브루체프가 왕도사를 찾아와 그가 가지고 온 옷감, 등잔기름, 식기 등 잡다한 물건 여섯 보따리와 여러 나라 말의 돈황 고서 두 보따리를 맞바꾸어 갔다. 1906년부터 영국의 탐험가 스타인(Aurel Stein)이 인도 정청의 명령을 받고 찾아와 왕도사를 꼬셨다. 그리하여 사경류 스무 상자, 그림 다섯 상자를 헐값에 사 가지고 갔다. (시야 좁은 얼치기 성직자만큼 속여 먹기 쉬운 상대도 없나 보다)
월맹의 하노이에 교수로 있던 프랑스인 펠리오(Paul Pelliot)가 본국의 명령으로 1907년 돈황에 도착했다. 한문을 잘 아는 그는 왕도사를 매수하여 스타인이 남기고 간 것들을 하나하나 살펴보고는 알짜배기만 골라서 사경류 스물 네 상자, 그림, 직물류 다섯 상자를 헐값에 사서 프랑스로 싸 보냈다. 스타인은 한문을 몰라 아무 거나 쓸어 갔던 것이다. 도둑질이나 사기도 뭘 좀 알아야 하는 것이다. 펠리오는 프랑스에 도착하여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고 이때부터 프랑스, 중국, 일본 같은 나라에서는 돈황학이라는 새로운 학문이 대두되기도 했다.
폴 펠리오
이때쯤 돼서야 중국학자들과 관헌들도 돈황 고서의 진가를 눈치 채고 달려들었지만 때는 이미 늦은 거였다. 그나마 남은 것들을 북경으로 옮기는데 도중에 관리들이 알짜배기는 빼돌려 사라지는 등 제국은 말기적 현상을 드러내었고 근근이 도착한 오륙천 권 되는 서적은 거의가 다 불경이었다. 황제에게 상주하여 사라진 책들을 되찾으려고 하였으나 때마침 신해혁명이 일어나 만사 흐지부지 되고 말았다.
이런 일에 일본이 빠질 수는 없지. 1912년에 오타니 코즈이(大谷廣瑞) 탐험대가 돈황에 와서 나머지 고서 가운데 500여 권의 사본을 가져갔다. 1914년에는 스타인이 다시 오고 그 후엔 러시아의 올덴부르크가 벽화를 뜯어갔다. 1924년에는 미국 예일대의 워너(Warner)가 벽화와 불상을 가져갔다. 지금도 중국 사람들은 스타인, 펠리오, 오타니를 문화재 삼대 도둑이라고 부른다. 오타니는 교토에 있는 절의 주지가 되어 탐험대를 후원했는데 중국 서역 각지에서 손에 넣은 5,000여 점의 유물을 일본으로 빼와 이른바 오타니 컬렉션을 이루었다. 이러다 그는 재정을 방만하게 운영하는 등 파탄이 나서 유물의 1/3은 일본에, 1/3은 그가 은퇴 후 머물던 중국 여순(旅順)에, 나머지 1/3은 일본 광산 재벌에게 넘겼는데 이 재벌이 이권을 위해 이를 조선총독부에 기증하는 바람에 결국 대한민국 차지가 되어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돼 있다. 독일로 가져간 것들은 이차대전의 폭격으로 다 사라졌다.
그런데 왜 그 당시 돈황의 스님들은 이렇게 많은 전적들을 그 동굴 속에 감추어 둔 것일까? 여러 설이 있다. 누구는 감춘 게 아니라 그 당시 별로 쓸모없어진 것들을 모아 둔 것이라 했다. 경전 따위라서 함부로 태워 버릴 수도 없었다는 얘기다. 이보다 더 설득력이 있는 것은 11세기에 티베트계 탕구트인들이 세운 서하(西夏)가 흥기하여 이 지방을 침략하려 하자 이 천불동에 기거하던 스님들이 귀중한 전적들을 한데 모아 밀봉해 놓고 피난을 갔다 와서는(못 돌아왔는지도 모른다) 그대로 잊어버렸다는 설이다. 아무튼 이 막중한 문화재는 대체로 남북조시대부터 송대에 이르는 유교, 도교, 불교의 각 경전, 각종의 필사본 문서, 서역, 인도, 아라비아 등 여러 나라 의 문자, 기타 불화, 판화, 탁본, 자수물, 염직포 등인데 지금은 몇 나라에 일부 보존 되고 나머지는 산지사방 흩어져 사라져 버렸지만 실로 값을 매기기 어려운 귀중한 물품이었음에 틀림없다. 이렇듯 자손이 변변찮으면 족보를 지킬 수 없고 민족이 각자 제 살기에만 급급하면 조상의 광휘를 땡처리하고야 마는 것이다.
그런데 어찌 보면 그 당시 그렇게라도 뿔뿔이 흩어서 가져갔기에 그나마 상당 부분 보존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아니었으면 그 불행하고 혼란스러웠던 시기에, 그 귀중한 문서들이 북경 뒷골목 한약방 약봉지로 쓰였을지도 알 수 없는 일이다. 아무튼 그런 와중에 우리의 왕오천축국전은 펠리오의 보따리에 싸여 프랑스로 가게 되었다. 펠리오가 석굴에서 다 떨어진 어느 두루마리를 펼쳐 보니 이게 보통 문서가 아닌 거라, 열세 나라 말을 쉽게 배운 그는 전문가였으므로 이전의 다른 문서에서 읽은 바 있는 왕오천축국전이라는 문서가 바로 이 두루마리였음을 직감하였던 것이다. 이 두루마리는 앞뒤가 잘려 나가 제목도 저자의 이름도 없었는데도 말이다.
펠리오가 이 두루마리를 그렇게 단정한 근거는 당나라 고승 혜림(慧琳)의 저작인‘일체경음의(一切經音義)에 두었다. 이 책은 경전을 이해하는데 필요한 낱말이나 어귀를 여러 문헌에서 뽑아 그 음과 뜻을 풀이해 놓은 것인데 그 속에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에 대한 언급과 어휘 풀이가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펠리오가 펼쳐 본 이 두루마리에 그런 어휘가 눈에 띄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혜초가 어느 나라 사람인 줄은 몰랐는데 1925년에 일본인 학자 다카쿠스 준지로(高楠順次郞)가 ‘혜초전고(慧超傳考)’를 발표함으로써 혜초가 신라의 스님임이 밝혀지게 되었다. 1938년에 독일의 동양학자 푹스(Fuchs)가 독일어로 번역하였고 1943년에 최남선이 삼국유사 부록에다가 그 원문을 싣고 간단한 해제를 붙여 발행함으로써 국내의 연구 붐에 일조하였다.
아무튼 중국 남부 광주에서부터 뱃길로 인도에 닿아 다섯 천축국을 비롯한 서역의 여러 나라를 섭렵하고 중국에 돌아온 수만리 장정의 여행길이지만 비교적 기술이 간단하여 법현의 불국기와 같은 문학적 가치도 모자라고 현장의 대당서역기 같은 정밀한 서술도 없다. 이미 말했듯이 그것은 발견된 두루마리가 원본을 요약하여 서술한 간략본일수도 있고 그마저 앞뒤가 잘려나간 것이라서 그럴 수도 있겠다. 어쨌거나 이렇게 불완전한 기록일망정 8세기 전반기의 인도 불교의 상황을 전해 주는 더없이 귀중한 자료이며 지금의 아프가니스탄이나 이란, 중앙아시아의 풍속이나 지리, 역사 등을 알 수 있는 드문 기록임에는 틀림없다. 그리고 이‘인도의 다섯 나라 다녀온 이야기’는 부처님의 참된 가르침을 찾아 서녘으로 가고자 했던 우리 조상들의 간절했던 꿈의 한 자취일 뿐만 아니라 오늘을 사는 우리를 위하여 지워지지 않고 기적적으로 살아남아 구도자의 갈 길을 보여 주는 앞사람의 위대한 발자국임에도 틀림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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