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오늘은 밥 세 끼를 혼자서 먹었다.
남해안 순천, 내륙인 구례, 함양으로 1박2일 여행 떠나가기 직전에 아내가 보온밥통에 지은 밥이 잔뜩 있기에 접시에 조금씩 떠 담아서 먹었다.
명태국, 오징어국, 애호박국이 세 개나 되었기에 밥과 국 걱정은 하나도 없다.
아내는 전남 광양 갯마을 출신이라서 그럴까? 국과 반찬이 무척이나 짜다. 또 손이 큰 탓일까? 보온밥통 속의 밥도 무척이나 많다.
나는 어린시절부터 어머니와 떨어져서 객지에서 살았기에 밥투정, 반찬투정을 하지 않고는 그 어떤 밥도 맛있게 먹는다. 밥은 적게, 국과 반찬은 싱겁게 먹는다.
몇 해 전, 내가 퇴직한 뒤 시골로 내려가 그때까지 혼자서도 아흔 살이라도 살던 늙은 어머니와 함께 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어머니가 해 주는 밥을 먹었지만 엄니가 자꾸만 늙어갈수록, 치매기가 진행할수록 내가 밥 짓고, 국 끓이기를 시작했다. 이빨(치아)가 무척이나 부실한 어머니였기에 나는 밥을 질퍽하게 지었다. 멀건 국으로도 너끈히 끼니를 떼웠다.
어쩌면 밥 해 먹는 연습은 충분히 해 두었다는 뜻이다. 5일장 장터에 나가면 콩졸임, 멸치졸임 등이 나왔으며, 농협마트에는 반완성된 반찬류가 잔뜩 진열되어 있기에 지갑만 열면 반찬 걱정은 끝이었다.
나는 밥을 적게 먹는 체질이다. 그대신 군것질을 무척이나 좋아해서 고구마, 감자 등 식재료가 있으면 충분했다. 이들은 값이 싸면서도 많이 살 수 있고, 끓이는 데에는 시간이 그다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냄비 안에 이들을 넣고는 한 25분 쯤이면 삶을 수 있다. 보온밥통에 밥 지을 때 쌀 위에 고구마, 감자를 넣어 두면 밥이 되면서 저절로 이들도 익었다. 밥보다는 뜨거울 때 이들을 먹는 게 훨씬 맛이 있었다.
내가 사는 시골집은 마을회관에서 약간 외진 곳에 있다.
텃밭 세 자리가 온통 키 큰 나무들이 무성히 들어섰기에 남한테 내 모습이 거의 들어나지 않기에 나는 옷을 아무렇게나 입었다. 텃밭농사를 지으려면 아무 헌옷이나 다 입었다. 두툼하고 소매길이가 길면 그것으로써 족했다. 마을사람의 눈치를 전혀 보지 않을 위치에서 살았기에 나는 작업복이 더러워도 그다지 마음을 쓰지 않았다.
먹고, 입고, 자고, 일하는 것들이 나한테는 그냥 다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농약을 전혀 치지 않고서 농사를 지었기에 텃밭에는 정말로 많은 종류의 식물이 늘 들어찼다. 나한테는 다 먹을거리로 활용할 수 있었다.
어린 잎과 순을 따서 국냄비에 넣고는 끓이면 그것으로 충분했다. 온갖 식물들이 다 들어갔다.
텃밭에서 매실, 왕보리수, 은행알, 앵두, 쥐똥나무 열매, 오갈피열매, 사철나무 열매, 모과 등을 따서 설탕가루에 재거나 햇볕에 말려 두었다가 9 ~10가지의 식재료를 주전자에 넣고는 끓이면 훌륭한 음료수가 되었다. 여기에는 구절초(여러 종류), 씀바귀, 쑥부쟁이, 익모초 등 들풀도 뜯어서 넣었다.
나한테는 모든 게 다 먹을거리였다.
이런 것들은 홀로서기 연습일 게다.
장에 나가서 씨앗을 사고, 채소 모종을 골라서 텃밭에 뿌리고 심으면 몇 개월 뒤에는 아주 훌륭한 식재료가 되었다. 사 온 값의 몇 배나 더 뽑을 수 있었다. 불과 두서 너 달이면 몇 배의 이득을 올릴 수 있었다.
어미 종합병원에 장기간 입원시켰고, 돌아가신 뒤에는 시골집은 텅 비었다.
내가 아내를 따라서 서울 올라와 아파트에서 살기 시작한 뒤로는 내 홀로서기 연습도 잠시 멈추었다.
요즘 문득 시골로 내려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퇴직한 지가 벌써 10년째가 되니 세상 사는 데에 별 욕심도 없다. 아무런 희망도 기대도 없다. 그저 한 마리의 벌레처럼 산다.
비 내리면 비 맞고, 눈 내리면 눈 맞으면서 산다. 햇볕 나면 더욱 기운이 나고...
그저께는 고교 여동창생의 자녀 결혼식날.
나는 허름한 잠바를 걸치고, 운동화를 신은 채 결혼식장에 들어섰다. 촌늙은이 몰골이었다.
친구들은 간소복 양복을 입었고, 더러는 신사복에 넥타이도 매어서 정장차림이었다.
아무려면 어떠랴 싶다. 얽매인 직장이 없으니 그냥 헐렁하게 살면 그뿐이다.
텃밭농사를 짓다가 서울에 도로 올라와서 산다고 해도 본바탕은 촌늙은이다.
홀로서기를 조금 연습해 둔 사람이라서 그럴까? 아무 거나 먹고, 마시고, 걸치고 산다.
오늘은 나 혼자서 마포구 상암동 하늘공원에 나가서 억새축제를 구경하려다가 그만 두었다.
혼자서 무슨 청승이랴는 생각도 들었다.
사실은 간밤에 늦게 자고, 오늘 아침에는 일찍 잠이 깨었기에 낮에는 무척이나 피곤했다. 눈 붙인 게 낮잠으로 이어졌다. 아무도 없는 텅 빈 아파트를 지키는 늙은이가 된 날이기에 더욱이나 게으름을 피웠다.
혼자서 밥 세 끼니를 먹고도 남는 게 시간이다. 이런 잡글을 쓰는데 또 하루를 보낸다.
홀로서기 연습이 뭐 별 것인가?
아내가 남도여행 떠난 오늘은 내가 무척이나 그랬다.
혼자 산다는 게 무척이나 외롭고 쓸쓸하다는 느낌이 들었고, 평생을 대부분을 혼자서 살았던 늙은 어머니도가 생각난다.
나는 어린시절 객지로 떠났고, 누이들도 객지에서 중고교 대학을 다녔기에 어머니는 노년 초기 이후부터는 아흔 살이 될 때까지 혼자서 그 넓은 시골집에서 살았다.
시골집은 외진 곳에 있어서 마실 올 사람도 없었기에 더욱 그랬다. 엄니는 그 외롭고 적적함을 잊으려고 늘 텃밭에서 꼼지락거렸다. 차 멀미를 하도 심하게 해서 차를 타지도 못했기에 외지로 나가지도 못했다. 더군다나 무학자. 겨우 언문을 깨우쳐서 글씨를 읽는다고 해도 혼자서는 외지로 나가지 않았다. 더우기 나이 든 노년에는 더욱 그랬다.
혼자서도 너끈히 인생 말년을 살았던 엄니는 삼 년 전인 2015. 2. 25. 먼 여행 떠났다.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서낭댕이 뒷편 낮은 산에 있던 아비 무덤에 합장했다.
산소에서 서쪽으로 고개를 왼쪽으로 틀면 멀리 무창포 갯바다가 보이고, 오른쪽으로 틀면 용머리해수욕장이 보인다. 갯바람 막는 송림 뒷편이 바로 외가집. 더 오른쪽으로 틀면 대천해수욕장이 내려다 보였다.
이제는 엄니의 집은 무덤들이 잔뜩 있는 산속이다. 어머니가 함께 했던 시할아버지, 시아버지, 시어머니, 죽은 쌍둥이 아들, 남편 들의 무덤이 선산 말랭이에 있다.
일전, 대전 사는 누나는 고향 텃밭에서 호박잎을 보았다며, 잎을 뜯어 살짝 데치면 좋은 반찬거리(쌈밥)가 된다고 말했다. 내가 이백 포기 쯤 호박모종을 심었는데...
이번 추석 때 보령 미산면 공원묘지에 누워 있는 남편 무덤에 갔다가 인근의 친정집에 잠깐 들렸나 보다. 텅 빈 집, 빗장을 대문을 열리 못한 채 텃밭이나 후이 둘러보았나 보다.
어미가 죽은 뒤의 고향, 텅 빈 집과 잡초만 가득 들어찬 텃밭에서 무엇을 보았을까? 무엇을 느꼈을까? 쓸쓸함과 허무함이었을까?
며칠 뒤 시골집에 다녀와야겠다. 텅 빈 텃밭에서 제멋대로 크는 나무(과일나무, 정원수)들도 올려다 보아야겠다.
바깥마당에는 은행나무, 배롱나무, 동백나무, 대추나무, 솔나무들이 떨어뜨린 잎들이 바람에 마구 날렸을 게다. 텃밭 속에는 감(홍시), 모과, 대추, 밤들이 다 떨어졌을 게다.
나는 오늘, 아내가 없는 집에서 나 혼자서 세 끼니를 먹고는 이런 글 쓴다.
서해안고속도로 무창포나들목이 바로 건너다 보이는 고향으로 가고 싶다고.
텅 빈 집, 잡목 잡초가 우거진 집이라도 보고 싶다고.
오늘은 2107. 10. 16. 월요일.
혼자서 밥 먹었다.
이런 것도 홀로서기 연습일까?
2.
오늘은 내가 혼자서 집에서 있는 탓일까?
예전, 시골집에서 엄니와 함께 살았던 때의 기분(느낌)이 새삼스럽게 들었다.
예전, 시골집에서는 밤중에 할 일이 없었다. 늙은 어미는 안방 아랫목에 눕거나 쇼파 위에 앉아서 TV를 보았다. 내가 이따금 물었다.
'엄니, 저 텔레비젼에서 하는 이야기를 알아 들어요? 무슨 의미인지를요?'
어미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몰라. 그냥 보는 거여.'
아흔 살을 훌쩍 넘긴 엄니한테는 TV가 보여주는 것들이 아무런 뜻도 없었다. 그저 TV 속의 사람들이 들락거리고, 왕왕거리는 소리밖에는. 언젠가는 그랬다.
'애비야, 텔레비젼 속에서 저 사람들이 사느냐?'
세상에나. 텔레비젼에서 비치는 사람들이 저 작은 텔레비젼 박스 안에서 사는 것으로 보였을까?
나도 그랬다.
부엌에 있는 책상에서 책을 보거나 일기를 썼다. 그냥 잡글이다.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고, 늘 보는 살림살이만 가득 찬 시골집 부엌방에서 머물렀다.
이따금 방문을 열고는 엄니를 살폈다.
그렇게 세월은 갔다. 별로 할 말도 없고, 서로를 물끄러미 쳐다보고, 그냥 같이 자고, 같이 밥 먹고 군것질하고..
당시에 나는 낮에는 텃밭에서 일했고, 어미는 방안에서 가만히 의자에 앉았거나 갑갑하면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천천히 바깥으로 나왔다. 아무 것이나 지팡이 삼아서...
그 당시 어머니와 나는 꿈같은 시간을 그렇게 보냈다.
특히나 추운 겨울밤에는 긴긴 시간을 말없이 보냈다.
이런 외로움도 쓸쓸함도 나한테는 홀로서기 연습이었을까?
아내는 이따금 다니려고, 내려가는 시골 생활을 힘들어 했다. 고작 일주일 정도나 머물면서도.
나는 그 시골로 도로 내려가고 싶다. 낮에는 텃밭에서 일하고, 밤에는 부엌방에서 책을 읽고, A4 용지에 낙서나 긁적거리면서 시간을 보내고 싶다. 며칠이 가도 찿아오는 사람도 없고, 갈 곳도 없는 그런 산골마을이었다. 이따금 젊은 우체부가 오토바이 타고 마을안길을 지나가는 그런 시골이라도..
오늘 밤, 나는 혼자서 긴 밤을 보내다가 주방 뒷편에서 앵두를 담은 패트병을 살짝 기울였다.
발효시킨 지 몇 년 된 건더기에서 즙이 조금 흘러나왔기에조심스럽게 따라서 작은 패트병에 담았다.
앵두 건더기를 몇 스푼 떠서 물컵 속에 넣고는 미숫가루를 조금 붓고는 후이 내저었다.
미숫가루 묻은 건더기를 조금씩 떠서 입안에 넣고는 오물거리다가 목질의 씨를 내뱉었다.
이런 것도 고향의 맛이다, 나한테는.
2017. 10. 16. 월요일.
첫댓글 홀로서기는 말처럼 쉽지 않아요
그러겠지요. 많은 것을 내려놓아야 하기에.
요즘 예순다섯 살의 늙은 아내가 몸이 무겁다고 하면 덜컥 겁이 나대요.
아내도 그러하겠지요. 나보는 늘 건강해라고 다구치대요. 제발 좀 걸어요, 제발 좀 운동하세요.
댓글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