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구의 정체성
시월의 휘파람이 강변의 검붉은 그림자를 훑고 지나간다. 늦가을의 숲은 이미 빛을 잃었고, 차가운 바람은 거침없이 깊은 늪 속으로 자신을 던져 넣는다. 문득 시린 강물 위에 비친 나를 향해 물어본다. 넌 과연 오늘을, 그리고 지나온 이 수많은 날들을 잊을 수 있겠는가. 겨울은 어쩌면 완강하게 저항하던 지난날의 열정이 맞이하는 마지막 반항의 계절일지도 모른다.
어둠이 짙어지면 찬 서리는 비로소 고삐를 풀고 세상 위로 길게 채찍을 내리친다. 그 순간 하늘에서는 유성처럼 별빛이 떨어지고, 내 젊음을 뜨겁게 불태웠던 붉은 석양은 눈송이가 되어 차갑게 내려앉는다. 그리하여 세상은 온통 하얗게 분칠을 하며 다시금 순결했던 꿈을 꾸려 할 것이다.
너와 나는 이 거대한 우주 속에 던져진 동반자다. 밤은 어느새 숨겨둔 쾌락의 늪이 되어 우리를 매혹한다. 내가 누구인지, 지구라는 거대한 별 위에 아주 작은 하나의 생명체에 불과하다는 사실조차 잊은 채 말이다. 돌이켜보면 내 삶은 수백 번의 연극이었다. 가면을 쓰고 무대에 올라 타인의 시선을 흉내 내며, 수천 리의 험난한 길을 맨발로 피 흘리며 걸어온 허망한 여정이었다.
그 연극의 무대 위에서 인간의 존엄성이란 얼마나 자주 '허구의 굴레'가 되어버렸던가. 진실은 차갑게 외면당하고, 갈 곳을 잃고 표류하는 인간의 양심은 무모하게 대자연을 농락했다. 세월은 끝없이 무겁게 흘러가고, 모든 삶은 결국 다시 죽음이라는 이름으로 환생하는가 하는 깊은 허무가 몰려온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계속해서 걸어갈 수밖에 없다.
오늘이라는 시간의 가치는 손에 잡히지 않는 망상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그러나 서슬 푸른 진리 앞에 서면, 시대를 먼저 살아간 어느 위인의 죽음조차 내가 지금 이렇게 살아 숨 쉬고 있는 단 하나의 명확한 이유가 된다.
망상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며 홀로 기울이는 술잔은 도리어 나 자신을 희롱할 뿐이다. 허수아비처럼 텅 빈 웃음을 지어 보이는 만취한 세상 속에서, 굽어지고 왜곡된 사실들은 결국 언젠가 눈부신 진리 앞에 무릎을 꿇으리라. 저 거대한 허공조차 지쳐 누워버리는 이 밤, 나는 비로소 거짓된 가면을 벗어 두고 묵묵히 참된 나 자신을 향해 걸음을 옮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