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 이상 가동이 중단된 현대차 상트페테르부르크 공장(이하 상트 공장)을 재가동하는 '시나리오'가 러시아 현지 언론의 주목을 받고 있다. 상트 공장이 재가동될 것이라는 소셜미디어(SNS)상의 정보가 현지 주요 언론의 검증을 거쳐 널리 확산되는 모양새다.
유력 경제지 코메르산트 등 현지 언론에 따르면 현대차 상트 공장의 재가동 플랜은 우선 공장을 카자흐스탄에 있는 현대차 합작사에 매각한 뒤, 새로운 소유자의 이름으로 가동에 들어가는 방식이다. 새 소유자는 상트 공장에 남아 있는 재고 부품들을 기반으로, 부족한 부품을 한국과 터키 등으로부터 제공받아 SKD(Semicompletely Knock Down, 부분 조립 생산) 혹은 CKD(Complete Knock Down, 반조립 생산)용 자동차 제품으로 1차 조립한 뒤 이를 카자흐스탄 공장으로 보내 완성차로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현대차 상트페테르부르크 공장/사진출처:현대차
현대차를 생산하는 카자흐스탄의 현대트랜스카자흐 공장 모습/사진출처:아스타나모터스 홈피
SKD(CKD)는 한마디로 완성차 생산에 필요한 많은 부품들을 1차 부분 조립한 뒤, 이를 다른 나라로 수출해 그 나라에서 완전히 조립하는 생산 방식을 말한다. 개발도상국에 자동차를 수출할 때 많이 사용되는 방식이다. 현대·기아차는 이미 한국에서 부분 조립된 자동차 부품 덩어리들을 카자흐스탄으로 보내, 현지에서 완전 조립하는 SKD(CKD) 수출 방식을 택하고 있다.
이같은 시나리오는 우선 대외적으로 현대차가 러시아 자산을 제 3자에게 매각해 국제사회의 자동차 생산 보이콧 대열에 합류했다는 명분을 확보할 수 있다. 내부적으로는 자산을 카자흐스탄 합작사에 넘김으로써 카자흐스탄 공장 가동에 필요한 반조립 제품들을 확보하고, 궁극적으로 카자흐스탄산(메이드 인 카자흐) 완성차 형태로 러시아 시장으로 진출할 수 있다.
나아가 우크라이나 전쟁 종료시 언제든지 재빨리 러시아 자동차 시장으로 복귀할 수 있는 기반을 어느 정도 확보해 둘 수 있다. 이론적으로는 명분과 실리를 모두 챙기는 '플랜-B'라고 할 수 있다. 러시아 국영 자동차개발연구소 '나미'(NAMI)에게 지난해 5월와 10월 러시아 현지 공장을 1유로에 넘기되 나중에 되살 수 있는 옵션(금융 용어로는 콜옵션)을 걸어놓은 프랑스 르노와 일본 닛산 자동차와는 다른 플랜이다.
'되산다'는 조건 하에 러시아 측에 1유로에 넘긴 닛산 자동차 공장
현대차의 재가동 시나리오는 상트 공장의 제 3국 매각으로 시작된다. 코메르산트는 외국기업의 투자및 철수를 관할하는 러시아 통상산업부 산하 '외국인투자위원회'가 가까운 시일내에 현대차와 독일 폭스바겐의 러시아 자산 매각을 검토할 것이라고 지난 5일 보도했다. 소식통들은 이 신문에 현대차의 러시아 자산 매각 절차는 거의 완료되었으며, 매주 목요일 개최되는 '외국인투자위원회'의 검토 의제에 올라 있다고 밝혔다.
현대차의 러시아 자산은 상트 공장(정식 명칭은 Hyundai Motor Manufacturing Rus LLC, HMMR)과 현대 위아의 엔진생산 공장, 지난 2021년 제너럴모터스(GM)로부터 인수한 슈사리 공장 등이다. 지난해 2월 러시아의 특수 군사작전 개시와 함께 독일과 일본 등 글로벌 자동차 브랜드들이 대러 경제제재 조치의 일환으로 러시아 시장을 떠났지만, 현대차는 공장 가동만 중단한 채 사태 추이를 지켜봐왔다.
하지만 우크라이나 전쟁이 장기화하면서 러시아 정부의 공장 재가동 압박이 거세지고, 손실도 늘어나는 상황에서 현대차는 국제사회의 흐름을 거스르는 공장 재가동보다는 카자흐스탄 SKD 우회생산이라는 '플랜-B'를 추진중인 것으로 분석된다.
러시아 자산 매각을 위한 준비는 거의 끝난 상태다. 상트 공장의 생산 시설을 봉인하고, 현지 근로자들에 대한 구조조정도 지난 3월 초 합법적으로 끝냈다.
자동차 전문 매체 카위크 등 현지 언론에 따르면 현대차 상트 공장의 유력한 매입자는 카자흐스탄 기업인 아스타나모터스(Astana Motors)다. 이 회사의 자회사인 '현대트랜스카자흐스탄'은 현지에서 현대차의 크레타와 엑센트 모델을 생산하고 있는 한-카자흐 합작사다. 자동차 생산을 위한 부품들은 그동안 러시아 상트 공장으로부터 제공받았다.
그러나 아스타나모터스 측은 일단 현대차의 러시아 자산을 구입할 계획이 없다고 부인했다.
현대차 러시아 공장, 가동을 재개해 연 2만5천대의 자동차 생산한다/젠(dzen.ru) 노보스티 캡처
또다른 자동차 전문매체에 따르면 상트 공장은 앞으로 재고가 많이 남아 있는 부품을 기반으로, 부족한 ECU 장치(자동차의 엔진, 자동변속기, ABS 따위의 상태를 컴퓨터로 제어하는 전자제어 장치)와 전자 부품들을 한국과 터키 등에서 수입해 연 약 2만5,000대 분량의 SKD 제품을 조립 생산할 것으로 예상된다. 유력 매수자인 아스타나모터스가 이를 관장하지만, 실제로는 현대차의 통제하에 있다고 보는 게 정확해 보인다.
때맞춰 기아(기아차의 새 브랜드)가 카자흐스탄 북부 코스타나이 지역에 두번째 자동차 조립(CKD 조립) 공장의 설립을 추진하고 있다는 소식도 전해졌다. 기아는 지난 2월 이 지역에 연 2만대 규모의 CDK 조립 설비를 마련, 인기 SUV 모델인 '스포티지' 생산을 시작했다.
카자흐스탄 현지 매체에 따르면 알루르 그룹(Allur Group)의 안드레이 라브렌티예프 회장은 지난 3일 카심-조마르트 토카예프 대통령을 만난 자리에서 기아 조립 공장 유치 등 기아와의 협력 방안 등을 소개하고 지원을 요청했다. 토카예프 대통령도 적극 지원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고 한다. 상트 공장에서 1차 조립된 자동차 제품들이 제2 카자흐스탄 공장에서 완성차로 생산되지 말라는 법이 없다. 기아는 지난 2021년 3월부터 코스타나이 지역을 중앙아시아 시장 공략을 위한 생산 거점으로 활용해 왔다.
현대자동차는 그러나 아직 구체적으로 결정된 사항이 없다는 입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