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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홉산 자락에는 그가 자란 종가가 있다. 40여년 전 아홉산의 나무로만 지은 전통 한옥의 당호는 관미헌(觀薇軒). 고사리를 본다는 뜻에서 산나물인 고사리조차 품에 안고 키우겠다는 이 집안 사람들의 마음이 담긴 듯하다.
9대 종손 직업은 의사
관미헌을 지나 숲길로 접어들면 하늘을 향해 뻗어 있는 아름드리 히말라야시다 백 여 그루와 울창한 대나무 숲이 나온다. 오른편 언덕길을 따라 조금 더 올라가면 양 켠에 수십 그루의 적송이 웅장한 자태를 뽐내고 있다. 아홉산에는 편백, 삼나무, 잣나무, 참나무, 왕벚나무 등 400여 종의 나무들이 숲에 깃든 다람쥐, 고라니, 너구리 등 야생 동물과 오순도순 산다. 적송길을 지나 오른편 오솔길로 방향을 틀면 눈아래에 아홉산이 자랑하는 평지대밭이 나온다. 대나무의 한 종류인 맹종죽이 빼곡한 이 대숲은 일제 때 심은 것으로 이 대나무에서 나오는 죽순은 맛이 좋아 상품의 요리 재료로 쓰인다고 한다.
400여종 나무가 빽빽
아홉산 숲의 역사는 임진왜란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부산에서 살던 문씨 집안은 난리를 피해 이곳 철마로 옮겨와 정착하면서 숲을 가꾸기 시작했다고 한다. “제가 기억하는 것은 증조부때부터입니다. 숲을 보며 윗대 조상님들도 나무를 심고 가꾸셨을 거라고 짐작할 뿐이지요.” 문씨는 어릴 때부터 “산에 숲이 있어야 사람에게 앞날이 있다”는 얘기를 들으며 컸다고 한다.
이 집안의 나무 사랑을 보여주는 일화가 있다. 일제가 군수물자 조달을 위해 집안의 쇠젓가락까지 공출해 가고, 그도 떨어지자 나무를 자르기 시작했을 때였다. 순사들이 뒷산의 나무를 베기 위해 들이닥치자 “집안 어른들이 쇼를 했다”고 한다.
“일부러 놋그릇을 숨기다 들키는 겁니다. 그릇을 뺏긴 뒤에는 조상들 제사를 어떻게 모시느냐며 땅에 주저앉아 대성통곡을 했고 순사는 놋그릇만 갖고 슬며시 집을 나갔다고 합니다. 순사가 간 뒤에는 어른들이 ‘그래도 나무는 남았다 아이가’라며 가슴을 쓸어내렸다고 해요. 서너 차례 그렇게 해서 아홉산 숲의 나무를 살렸다고 합니다.”
철마에서는 두 손가락에 꼽히는 지주였지만 산을 보살핀 덕이었을까, 문씨 집안은 빨치산으로부터도 화를 입지 않았다고 한다. “조상 대대로 머슴 못지않게 일을 하는 게 가풍이었고 또 일제때는 연해주 지역에서 활동하는 독립군에게 군자금도 적지 않게 보냈다고 해요.” 문씨는 나름의 분석을 곁들인다. 물론 요동치는 근대사속에서 이 집안도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했다. 문씨의 종조부는 해방 뒤 여운형이 이끌던 건준 경주지역 책임자로 일하다 경찰로 옷을 갈아입은 일제시대 경찰들에 의해 피살됐다고 한다. 그 뒤로 집안 어른들은 자손들의 정치 활동을 금지시킨 채 미래의 후손들을 위한 숲가꾸기에 더욱 마음을 쏟았다. 하지만 집안의 ‘반골 기질’은 문씨에 내림이 되어 그는 열린우리당 울산시 부지부장으로 정치 개혁을 위한 일에도 열심이다.
너희는 정치하지 말거라
하지만 그렇게 가꿔온 아홉산 숲도 위기를 맞게 된다. 숲을 관통하는 임도가 만들어진 것. 기장군은 ‘테마가 있는 임도’를 내걸고 홍보를 시작했고, 행락객들이 몰려들었다. 어떤 때는 관광버스를 타고 100여명씩 몰려오기도 했다. 반 세기의 고요를 간직한 아홉산 숲은 고기굽는 냄새와 행락객들의 음주가무로 몸살을 앓았다. 심지어 트럭을 몰고와 대나무를 베어가는 이들도 있었다. 야생난은 자취를 감췄고 희귀식물은 뿌리째 뽑혀 갔다. 중국에 유학을 갔다 2000년에 돌아온 문씨는 기가 막혔다. 암투병 중이던 부친은 임도가 난 뒤 숲이 병들어 가는 것을 보고 “나라에서 하는 일이라 그냥 믿고 따랐었는데…”라며 후회했으나 발만 동동 구를 뿐이었다. 문씨는 그 해 여름 부친이 세상을 뜬 뒤 행동에 나섰다.
“군청에 단속을 해달라고 했는데도 인력이 없다는 겁니다. 혼자 막기는 불가능했습니다. ‘당신이 산주인이면 다냐’고 도리어 드잡이하며 달려드는 사람도 적지 않았습니다.”
결국 외부인의 출입을 막기 위해 철조망을 쳤다. 2년에 걸쳐 숲 주위에 둘레 2.5㎞의 철조망을 세웠다. 비용만 1억5천만원이 들었다. 조상들의 땀과 혼이 배인, 어린 시절 어머니 품처럼 뒹굴던 아홉산에 쇠심을 박는 것이 마음이 아팠다.하지만 사람들의 탐욕으로부터 숲을 지키기 위해서는 이 방법밖에 없었다. 10개월쯤 지나자 사람들의 발길이 뜸해지면서 숲은 조금씩 살아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본래의 모습을 되찾기 위해서는 한참의 시간이 흘러야할 것으로 보였다.
“혼자 막기 불가능 했습니다”
철조망으로 숲의 가치를 모르는 사람들의 접근을 막았지만 문씨는 아홉산 숲을 지역의 환경운동 단체와 함께 이를 생태 교육장으로 만들었다. 이를 위해 지난해 3월부터 숲 체험학습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지금까지 4000명이 숲을 다녀갔다고 한다. 원군도 생겨났다. 부산 환경연합에서 일하던 최인화(37)씨는 가족들과 함께 아예 이곳으로 이사와 지킴이로 나섰다. 고종 동생인 박무근(42)씨도 외가 마을로 이사와 숲을 지키는 데 힘을 보태고 있다. 지난해 9월 문씨는 아홉산 숲의 올바른 활용을 위해 ‘아홉산 숲사랑 시민모임 추진위원회’를 만들었다. 그는 아홉산과 자신의 고향 마을을 에코콤플렉스(Eco-Complex)로 키워갈 생각이다. 이를 위해 숲연구소를 만들고 부설로 토종 종자를 보존하는 종자은행을 만들 생각이다. 그가 조상들로부터 배웠듯이 많은 이들이 자연과 인간의 공존을 배우기를 그는 바란다. 그 때가 되면 아홉산을 둘러싼 철조망이 걷히고 굳게 닫힌 철문도 활짝 열릴 것이다.
“할아버지는 숲을 가꾸느라 과로로 돌아 가셨습니다. 생전에 나무를 심으시면서 제게 ‘섭이 니도 덕 못 볼끼다’라고 말씀하시던 게 잊혀지지 않습니다. 이제 이 숲은 우리 집안사람만의 것이 아닙니다. 아홉산 숲은 사람과 자연의 조화로운 공존을 모색하는 이들을 키워내는 장소로 쓰이게 될 겁니다
첫댓글 이글의 광고없애는 법 아시는분....퍼왔더니 이것까지 따라왔네요. 하여튼 한겨레신문기사입니다.
명진씨 참 좋은 글을 올려 주셔네요 고맙게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