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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31. 묵상글 들 ( 동정 성 마리아 방문 축일-성사적인 만남.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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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31.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1.05.31 06:09
동정 성 마리아 방문 축일-성사적인 만남
“그 무렵 마리아는 길을 떠나 서둘러 유다 산악지방에 있는 한 고을로 갔다.
마리아의 인사말을 들을 때 엘리사벳은 성령으로 가득 차 큰 소리로 외쳤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조금 유치한 얘기일 수도 있는데
프란치스코와 클라라가 어떻게 만나게 됐는지 엇갈리는 증언이 있었습니다.
봉쇄 수녀처럼 집밖을 나오지 않고 살아가는 클라라에 대한 얘기를 듣고
프란치스코가 먼저 클라라를 찾아가 만났다는 증언이 있는데
향기는 상자에 담아도 그 향기가 퍼지는 것처럼 클라라의 성덕이
그렇게 프란치스코에까지 전달돼 프란치스코가 찾아와 만났다는 얘기입니다.
다른 하나는 프란치스코의 명성을 익히 들어 알고 있던 클라라가
와 주기를 프란치스코에게 청하여 만나게 되었다는 증언인데
클라라의 사촌 오빠인 루피노가 그 다리 역할을 했다는 얘기입니다.
그런데 이런 주장들이 있음을 의식한 때문인지
성녀 클라라의 전기 작가인 토마스 첼라노는
두 사람의 만남은 성령께서 두 사람의 움직인 것이라고 얘기합니다.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방문한 축일에 이 얘기를 길게 한 것은 당연히
두 분의 만남도 성령에 의한 만남이라는 것을 얘기하기 위함이고
우리의 만남들도 이런 만남이 되어야 함을 얘기하기 위함이지요.
어제 삼위일체 축일 강론에서도 성령의 인도를 받음에 대해 얘기했지만
우리의 많은 만남이 성령에 이끌려야지 그 만남들이 성사가 됩니다.
우리의 많은 만남이 성사가 되지 못하고,
그저 좋아하는 사람끼리 만나는 계모임이나 친목회가 되거나
또는 좋아하는 것이 같은 사람끼리 동호회가 되거나
심지어 다른 사람을 같이 험담하는 모임이 되는 것은
비록 악령에 이끌리지 않더라도 성령에 이끌리지 않기 때문이지요.
성사란 무엇입니까?
성사적인 만남이란 어떤 것입니까?
성사란 하느님이 그 일 안에 있는 것이고,
그 일을 통해서 하느님이 발생하는 것이니 성사적 만남도 그런 거지요.
오늘 마리아와 엘리사벳이 만난 것은 하느님이 자기들 안에서
이루신 일들 곧 은총을 같이 확인하고
같이 기뻐하며 함께 하느님을 찬미하기 위함이었지요.
이런 뜻에서 우리의 만남들을 돌아보는 오늘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우리의 만남 중에 이런 성사적인 만남들은 얼마나 되고
그저 그런 만남은 어떤 만남들인지.
또 어떤 만남은 은총이 발생하는 성사적인 만남이고,
어떤 만남은 죄악이 발생하는 만남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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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31.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방문 축일 /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주님의 어머니께서 나를 찾아 주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오늘 축일은 가브리엘 대천사로부터 주님의 잉태 소식을 들은 마리아가 예루살렘 남쪽 유다 지방에 사는 친척 엘리사벳을 방문한 것을 기념하는 것이다. 엘리사벳은 노년에 이르도록 자식이 없었다. 그런데 그 나이에도 아이를 가진지가 여섯 달이나 되었다는 말씀을 천사에게서 듣고 “길을 떠나, 서둘러”(39절) 엘리사벳의 집으로 바삐 가시는 모습이다. 친척 엘리사벳의 임신 소식을 들은 마리아는 “길을 떠나, 서둘러”(39절) 가는 모습을 우리는 주의 깊게 바라보아야 한다. 마리아가 하느님의 아들을 이 세상에 낳아주고, 하느님의 어머니가 될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이유는 바로 이웃을 향한 사랑의 실천에서 비롯되었다고 많은 영성가는 말하고 있다. 가브리엘 천사로부터 잉태 소식을 듣고,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였기 때문만이 아니라, 바로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인 마리아는 거기에 그냥 머물지 않고 이웃에게로 향했다는 그 사실이, 그것도 걸음을 서둘러 이웃에게로 향했다는 사실이 마리아를 구세주의 어머니가 되게 했다는 것이다.
마리아의 이 모습은 바로 우리 신앙인들에게 큰 모범을 주신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고, 복음을 받아들이면서 하느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났다. 우리는 이렇게 신앙인이 되었다. 그러나 그것으로 모든 것이 끝난 것은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오늘 마리아를 통하여 배워야 하며, 그대로 실천해야 한다. 즉 신앙을 갖고 사는 우리는 이제 마리아와 같이 즉시 이웃에게로 ‘걸음을 서둘러’야 한다. 이때 우리도 마리아와 같이 사랑이신 하느님을 이웃에게 낳아주는 또 하나의 마리아가 되는 것이다. 즉 ‘태어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완숙에 이르기까지 하느님의 자녀라는 새로운 조건에서 성장해야 한다. 여기서 예수님의 “말씀”이 우리의 삶 속에 살아있어야 한다. 즉 “하느님에게서 난 사람”은 자신의 태도가 사랑(1요한 4,7), 즉 형제들을 향한 사랑으로(참조: 3,1) 특징지어져야 하며, 자신의 인격을 걸고 자신을 변화시켜야 한다. 자신이 근본적으로 변화하는 삶이 되지 못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1,45) 복되신 마리아는 주님을 찬미하는 마리아의 노래를 부른다. 우리 역시 하느님을 체험할 수 있을 때,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를 드릴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삶을 통하여 언제나 감사드릴 수 있는 삶이 되도록 해야 한다. “마리아는 석 달가량 엘리사벳과 함께 지내다가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56절) 마리아의 봉사는 바로 세례자 요한이 태어날 때까지의 봉사였다. 엘리사벳의 산후조리까지 도와주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참으로 위대한 사람은 사랑을 많이 가진 자일 것이다. 참으로 높은 사람은 자신을 작게 보고 모든 귀한 영예를 허무와 같은 것으로 보는 자일 것이다. 마리아의 방문이 이 같은 느낌이 들게 해 준다. 만왕의 왕이신 분을 가지신 분이 엘리사벳을 찾아가 봉사하다니! 놀라운 겸손과 사랑의 신비를 보는 것 같다. 마리아를 닮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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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31.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방문 축일 / 새벽을 열며. 빠다킹 신부님.
어떤 사람이 미켈란젤로의 작품을 보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작품을 보니 미켈란젤로 당신은 정말로 조각의 천재입니다.”
그러자 그는 웃으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제가 매일 20시간씩 14년간 계속 일했는데도 제가 천재로 보이십니까?”
어떤 선천적인 천재도 노력하는 사람을 이길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이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천재가 아닌 평범한 사람도 노력을 통해 다른 이의 눈에는 천재 이상의 인물로 보이게 된다는 것입니다. 능력과 재능을 주지 않으신 하느님 탓을 할 것이 아니라, 노력하지 않고 있는 자신의 탓을 해야 하지 않을까요?
주님을 따르는 것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사람은 특별한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하느님의 은총일까요? 아닙니다. 주님의 뜻을 따르려는 계속되는 노력을 통해서만이 주님과 진정으로 함께 할 수 있습니다.
오늘이 벌써 5월의 마지막 날입니다. 그리고 5월의 마지막 날을 보내면서 나 자신은 세상 안에서 얼마나 의미 있게 살아왔는지를 반성하게 됩니다. 주님을 따르기 위한 노력이 과연 충만했을까요? 마치 세상의 주인인 것처럼 교만과 이기심으로 똘똘 뭉쳐서 살았던 것이 아닐까요?
성모님께서 엘리사벳 성녀를 방문하신 것을 기념하는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방문 축일을 지내고 있습니다. 당시 이 두 분에게는 큰 걱정이 있었지요. 엘리사벳 성녀는 늙은 나이에 아이를 갖게 된 것에 대한 걱정, 성모님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을 잉태한 것에 대한 걱정입니다. 이러한 걱정이 있을 때, 성모님께서는 엘리사벳 성녀를 방문하셨고 이 둘은 서로 큰 위로와 힘을 얻게 되었던 것입니다.
성모님과 엘리사벳 성녀의 이 만남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지금처럼 교통이 편한 시절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휴대전화가 있어서 쉽게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도 이 만남을 위해 성모님께서는 힘든 방문을 하셨습니다.
걱정으로 가득 차 있을 때 자기 자리만 지켜서는 안 됩니다. 그때일수록 주님께 가까이 할 수 있는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성모님은 엘리사벳과의 만남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어떤 노력을 하시겠습니까?
하느님께서 알아서 해 주시길 바란다고 기도하시는 분을 봅니다(사실 자기 뜻을 이뤄달라는 기도입니다). 자신의 어떤 노력도 없으면서 말이지요. 과연 하느님께서는 어떠실까요? 노력하는 사람만이 하느님의 뜻을 따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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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사람의 지적에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과 자기 스스로의 지적에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탈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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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와의 싸움.
우리는 늘 다른 사람을 보고 있습니다. 그들의 눈치를 보고, 그들 마음에 드는 삶을 살아야 잘 사는 것처럼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잘 사는 사람은 자기와의 싸움에서 이기는 사람이 아닐까요?
나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기면 세상도 이길 수가 있지만, 나 자신과의 싸움에서 지면 세상과의 싸움도 이길 수가 없게 됩니다. 실제로 세상을 이긴 사람의 말을 들으면,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겼다고 말합니다. 1953년 인류 최초로 에베레스트산 등정에 성공한 에드먼드 힐러리도 기자가 묻는 소감을 “제가 정복한 것은 산이 아니라, ‘나 자신’입니다.”라는 멋진 명언을 남겼지요.
남과의 싸움에만 신경을 쓰면 힘든 싸움을 할 수밖에 없지만, 자기와의 싸움만을 신경 쓰면 손쉬운 싸움을 할 수 있습니다. 나를 제일 잘 아는 것은 나밖에 없으니까요.
자기와의 싸움에서 이기세요.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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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31.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방문 축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월, 성모성월을 마감하면서, 우리는 “복된 동정 마리아의 방문 축일”을 지냅니다.
오늘 <복음>은 두 가지의 ‘아름다운 만남 이야기’ 입니다.
<첫째 만남>은 두 여인의 만남입니다.
이들은 하느님의 놀라운 손길을 체험한 이들입니다.
한 여인은 동정인 채 아기를 가진 처녀이고, 다른 한 여인은 아이를 가지지 못하는 돌계집으로 나이가 많아서 아기를 가진 여인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이성으로는 납득할 수도 받아들일 수 없는 놀라운 일이 이 여인들에게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이 만남에서, 나자렛의 시골 처녀 마리아에게 생긴 하느님의 놀라운 개입이 기쁨과 찬송이 되어 터져 나옵니다.
먼저, 그것은 “성령으로 가득 차 큰 소리로 외치는” 엘리사벳의 입술을 타고 흘러나옵니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된 일입니까?”(루카 1,44)
참으로 아름답고 겸손한 만남입니다. 엘리사벳은 마리아의 믿음을 찬송합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믿으신 분!”(루카 1,45)
오늘 우리가 성모님처럼,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믿는다면 우리 안에서도 놀라운 탄생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이 놀라운 일을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나를 낳으신 분을 내가 다시 낳는 것입니다.”
마리아는 스스로 가난하고 비천한 종임을 고백합니다.
그리고 그 작고 낮은 자 안에 벌어진 하느님의 자비를 찬송합니다.
마리아가 엘리사벳의 찬양을 받은 이유는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곧 비천한 이에게 베푸시는 하느님의 자비의 권능과 자비로우신 하느님을 믿은 마리아의 믿음입니다.
<둘째 만남>은 더욱 더 의미심장한 만남입니다.
마리아의 태중에 계신 예수님과 엘리사벳의 태중에 있는 세례자 요한의 만남입니다.
사실, 요한이 6개월 형이지만, 아우 예수님께 먼저 태중에서 기뻐 용약합니다.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방문을 받고 당황하여 몸 둘 바를 몰랐듯이, 요한도 태중에서 하느님인 예수님의 방문에 대해 몸 둘 바를 몰라 태중에서 기뻐 뛰놀았습니다.
마리아와 함께 벌어진 아기 예수님의 이 신비로운 방문은 동시에, 하느님이 인간세상을 방문하신 것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이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벌어지는 만남이요 친교요 소통입니다.
곧 그들의 만남과 친교와 소통은 '믿음'이라는 공감대 안에서 벌어집니다.
엘리사벳은 믿음 안에서 마리아의 임신에 대하여 의심을 품지 않았으며, 여인들 가운데 가장 축복받은 여인'이라고 마리아를 찬양합니다.
마리아와 엘리사벳은 믿음으로 하나가 되었으며, 믿음으로 서로 소통하고 서로 친교를 나눕니다.
아기 예수님과 세례자 요한의 신비로운 소통과 친교도 그렇습니다.
사실, 이 두 여인은 무명의 시골 아낙이었습니다.
궁중의 여인도, 부잣집 마님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신분과 지위에서 보통 여인이었지만, 믿음에 있어서는 위대한 여인이었습니다.
믿음으로 어머니가 된 여인들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갈수록 '능력 있는 사람'을 원합니다.
그러나 정작 필요한 사람은 '믿을만한 사람이요, 거룩한 사람'입니다.
그러니, 우리에게는 믿음으로 교제하는 깊은 친교가 필요합니다. 또 서로 믿음 안에서의 만남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더 능력 있는 부모, 더 이익을 주는 동료, 더 똑똑하고 재주 많은 후배가 아니라, ‘더 믿어주는 이’가 되어야 할 일입니다. 아멘.
-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당신의 자비를 기억하시어”(루카 1,54)
주님!
제 안에서 활동하시는 당신을 찬미합니다.
제 안에 베푸신 측량할 수 없이 큰, 헤아릴 수 없이 놀라운 당신의 자비를 찬미합니다.
당신의 자비를 기억하여 찬미하는 일이 제 삶의 전부가 되게 하소서.
제 삶이 당신 자비의 노래 외엔 아무 것도 아니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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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31.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방문 축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전능하신 분께서 큰 일을 하셨습니다
찬미예수님, 사랑합니다. 믿음의 어머니와 함께하는 오늘 어머니를 통하여 우리의 모든 바람이 주님께 전구되고 가슴에 담았던 아픔과 시련의 상처들이 치유되기를 기도합니다. 카나의 혼인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킨 첫 기적이 어머니의 청을 통하여 이루어졌듯이 오늘 우리에게도 어머니의 전구를 통하여 모든 소망이 이루어지길 희망합니다.
베르나르도 성인은 “성모님을 통하여 은총을 구하십시오. 성모님을 통하여 반드시 얻을 것입니다.” 하고 말하였습니다. 준비된 마음 안에 여러분의 모든 바람을 성취시켜 주시길 기도드립니다. 어머니의 마음과 하나가 되어 예수님의 구원능력에 우리의 모든 소망을 맡겨 드려 풍성한 열매를 반드시 얻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뜻을 늘 곰곰이 생각하고(루카1,29), 마음속에 간직하며(2,19.51) 사셨던 성모님의 모습이 우리의 모습이기를 기도합니다.
일상 안에서 누군가를 찾아갈 수 있는 마음을 지니고 또 그것을 행동으로 옮기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리고 만나서 끝까지 기쁨을 나눈다는 것은 더더욱 어려운 일입니다. 어떤 사람은 도와달라고 부탁을 하지 않았는데도 실컷 도와주고서는 그것으로 끝나면 좋은데 나중에 고맙다는 인사를 제대로 받지 못하였다고 서운한 감정을 드러내는 사람이 있습니다. 차라리 하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을 구지 스스로 해 놓고는 서운한 감정을 지니고 화로 가득 채우는 것이 우리의 어리석음입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서둘러 유다 산골에 있는 한 동네를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즈카르야의 집에 들어가 엘리사벳에게 인사하였습니다. 그것은 이웃 사랑의 실천입니다. 그리고 둘은 뱃속에 든 세례자 요한과 함께 기쁨으로 가득 찼습니다. 사실 엘리사벳은 아기를 낳지 못하는 여인 이라고 손가락질을 받던 처지였습니다. 그러나 임신을 하였고, 더욱이 마리아의 방문에 성령을 받아 외쳤습니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그러자 마리아가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 보셨기 때문입니다….” 하며 찬미의 노래를 합니다.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신 하느님, 돌계집의 부끄러움을 없애주신 하느님께서는 두 여인으로부터 찬미를 받으시고 또한 두 여인은 참으로 서로의 기쁨을 나누었습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석 달가량이나 엘리사벳과 함께 지내다가 자기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서로가 통하지 않는데 그렇게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낼 수 있겠습니까? 사랑하는 사람은 못 봐서 애달프고 미운사람은 봐서 가슴이 아프답니다. 해외 교포사회에서는 ‘손님이 오실 때 반가운 손님, 떠나실 때 더 반가운 손님’이라고 합니다. 서로의 마음을 주고받으며 행복한 시간을 갖는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서로의 만남은 믿음 안에서 하느님의 손길을 체험할 때 풍요로워집니다. 함께 나눌 수 있음이 기쁨입니다.
누가 참으로 행복한 사람입니까? 루카복음 11장 27절 -28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말씀을 하고 계실 때에 군중 속에서 어떤 여자가 목소리를 높여,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 하고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르셨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이 말씀은 성모님께서 “모든 여인들 가운데 가장 복되신 분”이라는 것은 예수라는 훌륭한 아들을 낳아서 젖을 먹였기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에 순종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행복이란 그렇게 하면 행복해진다는 말씀이 아니라 그렇게 하는 것 자체가 행복이라는 것입니다. 무엇이 이러이러 해서 행복하다면 그 행복은 무엇이 저러저러해질 때 없어지고 맙니다. 그러나 참 행복은 주 하느님을 믿고 믿음에 따르는 실천을 하는 것 자체입니다.
그러므로 성모님께서 하느님의 말씀을 믿고 행함으로써 복되었듯이 우리도 주님의 말씀을 믿고 행하는 것이 곧 행복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이러저러한 조건과 환경이 마련되어서 행복한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주님 안에 있다는 자체가 행복의 순간임을 잊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주님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시고 마리아를 통하여 큰일을 하셨듯이 오늘 우리의 부족함도 굽어보시고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통하여 당신의 뜻을 이루시리라 믿습니다.
“가장 큰 일은 가장 작은 곳에서 일어납니다. 그래야 그 잉ㄹ이 큰 일이라는 것이 역으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성모님의 가장 겸손하고 가장 작은 마음에서 가장 크고 위대한 마음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바로 그런 시선에서 우리는 진정으로 소중한 것들을 분별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성모님의 영성입니다”(함께야).
이 시간 무엇보다도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 믿으셨던 성모님의 믿음을 간직할 수 있는 은총이 주어지길 희망합니다. 성 베르나르도는 말합니다. “내 행복은 오직 하느님 곁에 있는 것, 내 주 하느님께 희망을 두는 일입니다.” 우리도 오직 주님의 뜻에 맞는 삶을 사는 것으로, 하느님께 희망을 둠으로써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주 하느님께서 우리의 비천함을 굽어보실 것입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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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31.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방문 축일.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루카 1, 43)
따뜻한 사람
따뜻한
방문(訪問)이
있다.
믿음은
서로
주고받는
것이다.
마음을
헤아려주는
것이다.
진정한 믿음은
진정한 애정이다.
믿음은
지금 할 수
있는 것을
하는 것이다.
믿음은
혼자서는
갈 수 없던
이 길을 걸어
갈 용기를 준다.
믿음의 여정은
믿음으로
사는 법을
서로에게서
배우는
여정이다.
삶은
신비이다.
하느님의
이끄심과
은총은
우리가 계획한
것보다 훨씬 크고
더 따뜻하다.
하느님께서
계시기에
믿음이 있다.
믿음이 있는
인생이야말로
진정 아름다운
삶이다.
삶은 믿음을
일깨우고
믿음은 삶의
관계를 풍요롭게
한다.
오늘 우리는
누구를
방문하고
있으며
무엇을 나누고
있는지를
묻게된다.
믿음은
서로에게
더 좋은 사람이
되게한다.
더 좋은 사람은
상대의 가치를
인정하고
도와주는
사람이다.
그것이
하느님을
받아들이는
믿음이다.
하느님의 방문은
믿음과 설레임의
방문으로 이어진다.
하느님과
사람이
만들어가는
믿음의 역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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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31.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방문 축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내 주님의 어머니>
“그 무렵에 마리아는 길을 떠나, 서둘러 유다 산악 지방에 있는 한 고을로 갔다.
그리고 즈카르야의 집에 들어가 엘리사벳에게 인사하였다.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인사말을 들을 때 그의 태 안에서 아기가 뛰놀았다. 엘리사벳은 성령으로 가득 차
큰 소리로 외쳤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보십시오, 당신의 인사말 소리가 제 귀에 들리자
저의 태 안에서 아기가 즐거워 뛰놀았습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루카 1,39-45)”
1) 우리 교회는 성모 마리아께서 엘리사벳을 방문하신 일을 중요하게 여겨서
그 일을 기념하는 축일을 지내고 있습니다.
마리아께서 엘리사벳을 방문하신 일이 왜, 무엇이 중요한가?
‘메시아 강생’이라는 ‘기쁜 소식’이 처음으로 사람들에게 전해진 일이라는
점 때문에, 그리고 그것을 믿은 엘리사벳의 증언 때문에,
그 일은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가브리엘 천사가 성모 마리아를 찾아와서 예수님의 탄생을 예고하고,
또 성모 마리아께서 예수님을 성령으로 잉태하신 일은,
본 사람도 없고 아는 사람도 없는, 성모 마리아 혼자만 알고 있는 일입니다.
그런데 엘리사벳은 성모 마리아에게 일어난 일은 하느님께서 직접 하신 일이라고
증언했고, 바로 그것을 증언한 첫 증인으로서 중요한 인물입니다.
<복음서에 표현되어 있는 대로 엘리사벳이 성령으로 가득 차서, 성모 마리아께서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말씀하시기도 전에 그 일을 알게 되었을 수도 있지만,
성모 마리아께서 엘리사벳에게 인사하실 때 인사만 하신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직접 말씀하셨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렇다면 성모 마리아는 ‘기쁜 소식’을 사람들에게 알려 준
첫 선교사가 되는 셈입니다.
어떻든 엘리사벳은 성모 마리아에게 나타나서 예수님 탄생을 예고한 존재가
하느님의 천사라는 것과 천사가 한 말들은 모두 하느님의 말씀이라는 것과
성모 마리아 태중의 아기가 메시아라는 것을 믿고 증언한 첫 증인입니다.
그리고 엘리사벳의 증언은 메시아께서 이미 세상에 오셨음을 확인하고 선포한
첫 증언이라는 점에서도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2) 성모 마리아께서 엘리사벳을 방문하신 것은,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알려 주기 위해서, 또 엘리사벳의 임신을 축하하기 위해서,
그리고 엘리사벳의 출산을 도와주기 위해서라고 생각됩니다.
복음서의 표현만 보면, 성모 마리아와 엘리사벳만 만난 것으로 생각하기가 쉬운데,
옆에 즈카르야도 있었을 것이고,
다른 가족이나 친척이나 이웃도 있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성모 마리아께서 다른 사람들 모르게
엘리사벳만 몰래 만나신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당시에 즈카르야는 말을 못하는 상태였고,
아마도 듣는 일도 못했던 것 같습니다(루카 1,62).
그래서 성모 마리아와 엘리사벳의 대화에 직접 참여하지는 못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두 어머니의 대화에서 완전히 배제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즈카르야는 엘리사벳의 임신을 알게 되면서, 천사가 전해 준 말을
믿게 되었을 것이고, 성모 마리아에게 일어난 일을 알게 된 뒤에는
더욱 깊이 확신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3) <성령으로 가득 차>
엘리사벳이 성령으로 가득 차서 말을 했다는 것은, 자유의지 없는
로봇처럼 되어서 말했다는 뜻이 아니라, 성령의 인도를 받아서 믿게 되었고,
그 믿음을 자신의 자유의지로 말했다는 뜻입니다.
그의 태 안에서 아기가 뛰놀았다는 말은,
엘리사벳의 믿음과 기쁨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물론 천사는 세례자 요한이 어머니 태중에서부터
성령으로 가득 찰 것이라고 예고했었습니다(루카 1,15).
그래서 아기가 뛰놀았다는 말은, 세례자 요한 자신의 기쁨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4)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여인들 가운데에서’ 라는 말은 뜻으로는 ‘모든 사람들 가운데에서’입니다.
성모 마리아가 모든 사람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신 이유는, 메시아의 어머니로
선택되셨기 때문이고, 하느님의 은총을 가득히 받으셨기 때문이고,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루카 1,28).
태중의 아기가 복되신 이유는 모든 사람을 구원하실 분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모 마리아는 하느님의 복을 충만히 받으셨다는 점에서 복되신 분이고,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복을 주실 분이기 때문에
복되신 분이라고 정리할 수 있습니다.)
5)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여기서 ‘내 주님의 어머니’ 라는 말은 대단히 중요한 말인데,
뜻은 “우리를 구원하실 메시아의 어머니”입니다.
엘리사벳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은 첫 번째 인물이고,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른 첫 번째 인물로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라는 말은,
기쁨, 감사, 겸손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이 말을 넓은 뜻으로 생각하면, 메시아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을 기뻐하는
사람들을 대표해서 한 말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구약시대 때부터 많은 사람들이 메시아를 갈망하면서 기다리고 있었지만,
언제, 어떻게 오실지는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런 점을 생각하면, 메시아 강생은
‘뜻밖에 주어진 큰 은총’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6)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여기서 ‘주님’은 ‘하느님’이고,
‘주님께서 하신 말씀’은 예수님에 관해서 천사가 한 말들을 가리킵니다.
‘행복하십니다.’ 라는 말은, 뜻으로는 ‘복되십니다.’입니다.
엘리사벳이 성모 마리아의 믿음에 대해서 찬양하는 말은,
사실은 성모 마리아의 순종과 응답을 찬양하는 말입니다.
(순종과 응답은 믿음에서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하실 일에 관해서 천사가 전해 준 말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일에
관한 말이지만, 성모 마리아께서는 그 일이 틀림없이 이루어진다고 믿으셨고,
믿으셨기 때문에 응답하셨습니다.)
7) 엘리사벳의 찬양에 대해서 성모 마리아께서는 ‘마리아의 노래’로 화답하십니다.
‘마리아의 노래’는 메시아를 보내 주신 하느님을 찬양하는 찬미가이고,
그 하느님에 대한 신앙고백이고, 메시아께서 하실 일에 대한 예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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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31.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방문 축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동창 신부님이 한국에서 전화하였습니다. 요즘은 카톡으로 전화를 하니 전화비에 대한 부담은 없습니다. 반가운 마음에 받으니 ‘잘 지내는지 물었습니다.’ 며칠 전에 꿈속에서 저를 보았다고 합니다. 아시안에 대한 차별이 있다는 소식도 있었고, 걱정도 되어서 전화를 하였다고 합니다. 사실 저는 꿈에서 봤다고 전화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한국의 소식을 듣고 전화하는 경우도 거의 없습니다. 동창 신부님은 늘 세심한 배려와 따뜻한 마음으로 친구들을 대하였습니다. 동창 회장이었을 때입니다. 축일을 맞이하는 친구가 있으면 꼭 찾아가서 축하해 주었습니다. 친구의 성격과 분위기에 맞는 화분을 준비해서 방문했습니다. 준비해온 화분을 가지고 이야기를 나누었고, 축일을 챙겨주는 마음이 고마웠습니다. 저도 동창 회장을 했었습니다. 축일 선물은 한꺼번에 같은 것을 사서 동창 모임에서 주었습니다. 형식은 갖추었지만 세심한 배려는 부족했습니다.
코로나19로 요즘은 거의 없지만 코로나19 이전에는 제가 있는 신문사로 신부님들이 자주 오셨습니다. 2019년 10월부터 2020년 2월까지 4달가량 신부님들이 방문하였습니다. 신부님들은 대부분 안식년이었습니다. 저도 뉴욕에서 도착한지 2달가량 되었을 때입니다. 불편한 잠자리지만 신부님들은 모두 즐겁게 지냈습니다. 뮤지컬도 보았고, 센트럴파크에도 다녀왔습니다. 근교로 여행을 다녀오기도 했습니다. 백신이 널리 보급되고 상황이 좋아지면 좋겠습니다. 강남 갔던 제비들이 봄이 되면 다시 찾아오듯이, 좋은 소식을 가지고 신부님들이 뉴욕을 찾아오면 좋겠습니다.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제자들이 주님을 모시고 하루 지내면서 식사를 하고, 주님의 말씀을 들었던 것처럼 신부님들이 오면 식사도 같이하고,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를 나누면 좋겠습니다. 학창시절로 돌아가서 함께했던 시대의 고민과 아픔을 나누면 좋겠습니다. 사목의 경험을 나누면 좋겠습니다.
뉴욕에 있으면서 보스턴, 코네티컷, 필라델피아의 한인 성당을 방문하곤 하였습니다. 신부님들은 모두 저를 따뜻하게 대해 주었습니다. 보스턴에 가면 미사 전에 자비를 청하는 기도를 함께 하였고, 미사를 봉헌하였습니다. 역사와 문화를 간직한 보스턴 시내를 구경하였습니다. 보스턴의 신부님은 소탈한 웃음으로 배웅하며 다음에도 오라고 하였습니다. 코네티컷 신부님은 인터넷에서 요리하는 법을 배워서 맛있는 식사를 준비해주었습니다. 텃밭도 가꾸고, 직접 술도 담았습니다. 더덕주, 과일주, 막걸리를 만들었습니다. 생각이 깊고, 성실한 신부님이었습니다. 필라델피아 신부님은 신자분들과의 만남을 주선해 주었습니다. 신문을 홍보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고, 신자분들은 후원금도 주었습니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마음을 놓고, 쉴 수 있는 신부님들이 있어서 행복합니다. 같은 곳을 향해서 가는 동반자인 신부님들이 있어서 위로가 되고, 힘이 납니다.
오늘 우리는 엘리사벳을 찾아가는 마리아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엘리사벳은 찾아온 마리아를 축복하여 주었고, 마리아는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찬가를 부릅니다. 이것은 학교에서 배울 수 없는 그러나 우리 신앙인이라면 누구나 마음에 품어야 할 가르침입니다. 엘리사벳은 마리아에게 축복의 인사말을 하였습니다. 마리아는 엘리사벳의 축복에 기도로서 화답합니다. 김수환 추기경님께서 즐겨 부르셨다는 ‘만남’이란 노래를 함께 나누면서 5월의 마지막 날을 보내고 싶습니다.
“우리 만남은 우연이 아니야
그것은 우리의 바램이었어
잊기엔 너무한 나의 운명이었기에
바랄 수는 없지만 영원을 태우리
돌아보지 마라 후회하지 마라
아~ 바보같은 눈물 보이지 마라
사랑해 사랑해 너를 너를 사랑해”
오늘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방문해서 ‘마리아의 노래’를 불렀듯이, 우리 또한 각자의 노래를 만들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하느님을 찬미하고, 하느님이 나에게 어떤 분이신지를 고백하는 신앙의 노래를 만들어 보면 좋겠습니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 과연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하리니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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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31.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방문 축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영적 도반, 영적 우정
- 존중, 배려, 공감 -
지난 주일 성령강림대축일 이후 선물같은 참 감사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순전히 자비하신 하느님 섭리의 배려입니다. 우연偶然은 없고 지난 일들 잘 헤아려 보면 모두가 자비하신 하느님 섭리攝理의 배려임을 확연이 깨달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깨달음에서 저절로 샘솟는 하느님 감사와 찬미입니다.
얼마전의 개인사에 관한 깨달음을 잊지 못합니다. 저는 2011년에 수도서원25주년 은경축을 했고, 그해에 마치 은경축 기념 선물처럼 졸저 ‘사랑밖엔 길이 없었네’책이 출간되었습니다. 2012년에는 수도원 설립 25주년 기념 감사 음악회가 수도원 정원에서 성황리에 열렸고, 이때 제 대표적 좌우명 자작시 ‘하루하루 살았습니다’가 처음으로 발표 소개되었고 가슴 뭉클한 전율戰慄같은 감동을 선사했다는 말도 들었습니다. 아마 이날처럼 수도원을 사랑하는 영적도반들이 많이 참석한 때도 없었을 것입니다.
더불어 2012년은 오틸리엔 연합회 총회에서 요셉수도원이 원장좌 자치 수도원으로 승격이 결정된 해이기도 합니다. 이어 2013년에는 왜관수도원 분도계간지가 그동안 25주년 수도원 삶을 회고한 ‘불암산 정주기’란 제 글을 4차례에 걸처 연재함으로 제 소임은 일단 마감되었음을 은연중 예감했습니다. 이어 2014년 원장좌 자치 수도원으로 승격되면서 새 원장이 선출되었고 1992년부터 2014년 까지 무려 22년 동안의 제 원장 소임은 아름답게 끝맺게 되니 얼마나 감사한 일이었던지요!
얼마전의 주마등走馬燈처럼 떠오른 새삼스런 회고回顧에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릅니다. 이어 2014년에는 원장직에서 떠나 안식년 여정중, 800km 2000리 산티아고 길을 영적도반과 함께 순례했고 이해(2014.7.11.) 수도공동체는 사제서품 25주년 기념행사도 마련해주어 많은 분들로부터 넘치는 감사 축하 인사도 받았습니다. 2015년 귀원후로는 지금까지 한결같이 하루하루 봉헌의 삶을 살 수 있게 되었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요!
특히 지난 주일 성령 강림 대축일에 있었던 선물과도 같았던 44년전 초등학교 여러명 제자들의 방문도 잊지 못합니다. 이제는 스승과 제자 관계를 넘어 영적도반과도 같은 제자들이 되었습니다. 후에 제자들이 집무실에서 기타 연주와 함께 조졸히 마련해준 음악회는 얼마나 흥겨웠던지요. 코로나 사태로 조심하면서 제자들은 ‘스승의 은혜’, ‘어린이날 노래’, ‘과수원길’을 가열加熱차게 열창熱唱해 줬고 동영상도 만들어 전송해 줬기에 참 많은 영적도반들과 기쁨을 나눴습니다.
진짜 영적 부자는 영적우정을 나누는 영적도반을 지닌 사람일 것입니다. 광야인생여정중 참 영적도반은 사막의 오아시스 샘과도 같습니다. 이런면에서 저는 참 영적부자입니다. 영원한 영적도반이신 예수님과 더불어 참 많은 영적도반들을 지녔기 때문입니다. 매일 제 강론을 나누는 무수한 분들도 ‘더불어(together) 인생 순례 여정’중의 제 영적도반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어제도 반가운 영적도반의 방문이 있었습니다. 참 좋은 영적 도반은 빈손으로 와도 반갑고 좋은데 대부분 정성이 담긴 이러저런 선물을 갖고 옵니다. 오늘은 5월 성모성월 마지막날 참 아름다운 ‘복되신 동정 마리아 방문 축일’입니다. 오늘 미사주례는 제 차례이지만 어제 잠시 2박3일차 수도원에 영적 주유注油와 충전充電을 위해 휴가차 온 영적도반 임마누엘 사제가 집전하니 말 그대로 ‘임마누엘 사제 방문 축일’처럼 느껴져 참 즐겁고 기쁩니다. 마침 임마누엘 사제는 어제 고백성사후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이콘도 선물해 잠시 십자가 예수님 아래서 함께 기념 축하 사진도 찍어 나눴습니다.
오늘 복되신 동정 마리아 방문 축일에 만나는 영적도반 관계인 마리아와 엘리사벳의 영적우정은 얼마나 아름답고 사랑스러운지요! 참 상징성이 깊은 복음입니다. 뜻밖에 예수 아기를 잉태하게 된 마리아와 늦은 나이에 이미 세례자 요한을 몸가진 엘리사벳은 동병상련의 처지였기에 참 반갑고 서로 위로와 격려가 되는 만남이었을 것입니다. 이 두 영적도반들인 두 자매의 서로간의 존중과 배려, 공감 능력은 얼마나 뛰어난지요! 참으로 영원한 도반이신 하느님을 모시고 배웠기에 이렇게 서로 환대하며 영적 우정 나눔이 가능했을 것입니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보십시오, 당신의 인사말 소리가 제 귀에 들리자 저의 태 안에서 아기가 즐거워 뛰놀았습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말한마디 천량빚을 갚는다 했습니다. 성령의 가득 차 큰 소리로 외친 엘리사벳의 고백이 감동적입니다. 존중과 배려, 사랑과 공감이 가득한 말마디에 마리아의 어둡고 무거웠던 마음도 활짝 개어 푸른 창공의 마음이 되었을 것이며 두분간의 영적우정도 참 깊어졌을 것입니다. 이어 하느님께 감사와 찬미로 가득한 마리아의 화답 찬가는 얼마나 아름다운 감동인지요!
이천년 가톨릭 교회와 함께 하는 마리아의 마니파캇 찬미가요, 영적 아나뷤인 우리 수도자들이 날마다 저녁기도를 마치면서 성모님과 함께 부르는 찬가입니다. 찬미와 감사의 양날개를 달고 하느님 창공을 나는 새처럼 정화淨化와 성화聖化은총과 더불어 치유되는 우리 영혼들입니다. 마리아의 찬가와 더불어 마리아는 물론 엘리사벳의 내적 상처와 아픔도 말끔히 치유되었을 것입니다.
마리아는 석달 가량 엘리사벳과 함께 지내다가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니 이 두분의 영적우정과 더불어 태중의 예수아기와 세례자 요한 아기의 영적우정도 참 깊어졌을 것입니다. 흡사 제1독서 스바니야 예언서에 나오는 딸 예루살렘과 딸 시온이 상징하는 바 마리아와 엘리사벳은 물론 주님을 영원한 영적도반으로 삶의 중심에 모신 우리들을 상징하는 듯 합니다.
“딸 예루살렘아, 마음꺼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이스라엘 임금 주님께서 네 한가운데에 계시니, 다시는 네가 불행을 두려워하지 않으리라. 딸 시온아, 두려워하지 마라. 힘없이 손을 늘어 뜨리지 마라. 주 너의 하느님, 승리의 용사께서 네 한가운데에 계시다. 그분께서 너를 두고 기뻐하며 즐거워하신다. 당신 사랑으로 너를 새롭게 해 주시고, 너 때문에 환성을 올리며 기뻐하시리라. 축제의 날인 양 그렇게 해주시리라!”
얼마나 아름답고 고무적인 위로와 격려가 되는 주님 말씀인지요! 그대로 이 미사 축제 분위기를 연상케 합니다. 우리의 영원한 영적도반이신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전례 은총으로 당신과의 영적우정은 물론 우리 영적도반들 사이의 영적우정도 날로 깊이해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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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31.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방문 축일. 신우식 토마스 신부님.
오늘의 묵상
유다 전통에서 ‘시온의 딸’은 바빌론 유배에서 귀환한 뒤에 선포한 신탁으로 다시 세워진 하느님의 백성을 일컫습니다. 이들은 유배에서 돌아온 ‘남은 자’들이며, 종말에 메시아를 맞이한 예루살렘(즈카 9,9 참조)을 의미합니다. 구원 역사 안에서 성모님께서는 메시아 예수님에 관한 구절들에서 새로운 하와로서 불순종이 아닌 순종의 신앙인으로 나옵니다. 메시아를 잉태하시고 이스라엘을 재건하시는 성모님께서는 시온의 딸의 전형이며, 세상의 어느 것보다 하느님을 더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의 모범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루카 복음사가는 성모님을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감싸 주시는’(루카 1,35), 마치 구약 성경의 커룹들이 감싸고 있는 ‘계약의 궤’(탈출 25,20 참조)처럼 표현합니다. 그리고 엘리사벳은 마리아를 ‘주님의 어머니’라고 노래합니다. 성모 마리아께서는 가브리엘 천사가 말하였듯이 “은총이 가득한” 행복한 여인이십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의 눈으로 보면 마리아보다 엘리사벳이 더 행복한 여인으로 보입니다. 그 당시 문화 안에서 엘리사벳은 늙도록 아이를 가지지 못한 여인이었기에, 창피함과 부끄러움 가운데 일생을 살아야 하였습니다. 그래서 엘리사벳이 늦은 나이에 아이를 잉태한다는 것은 수치스러운 죄인이라는 굴레에서 해방되는 것이었고, 당당하게 한 여인으로 서게 하는 기쁜 소식이었습니다. 반면에 마리아의 잉태는 축복이라기보다는 염려스럽고 걱정스러운 일이었습니다. 결혼도 하지 않은 처녀가 아이를 잉태한다는 것은 그 자신이 죽을 수도 있는 일이었고, 사람들에게 무시당하고 외면당하는 일이며, 걱정스럽고 고통스러운 일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엘리사벳과 그의 태 안의 세례자 요한은 기쁨 속에서 성령으로 가득 차 마리아를 칭송합니다. 이에 성모님께서는 겸손하고 온화하게 모든 것이 주님의 은총이라고 노래합니다. 이렇게 마리아를 만난 엘리사벳은 인류를 구원하고자 하시는 하느님의 크신 자비를 자신의 삶에서 체험합니다. 우리의 삶이 어떠하더라도 우리가 체험하는 많은 만남을 통하여 주님의 은총을 발견하는 것은 신앙인의 기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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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31.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방문 축일. 오 상선 바오로 신부님.
성모성월의 마지막 날인 오늘, 미사의 말씀은 강생하신 창조주와 인간의 만남을 기쁨에 찬 어조로 전합니다.
"마리아는 길을 떠나, 서둘러 유다 산악 지방에 있는 한 고을로 갔다."(루카 1,39)
예수님 탄생 예고 때 노령의 사촌인 엘리사벳의 임신 소식을 듣게 된 마리아는 "서둘러" 그녀를 방문합니다. 당시 교통 여건이나 사회적 안전망은 소녀가 홀로 여행을 하기에 썩 적합하지 않았지만 마리아는 참 적극적이고 용감해 보입니다.
혹자는 이 방문에 대해 출산을 앞둔 노령의 사촌에게 봉사하려는 마리아의 착한 심성을 주목하기도 하고, 또 누군가는 천사의 전언을 확인하려는 발걸음으로 보기도 합니다만, 저는 이 순간을, 강생하신 창조주를 인간의 무리가 환대하는 첫 만남의 자리라 보고 싶습니다. 사실 인간적 의도가 무엇이었든 모든 지향은 하느님의 계획 안에서 움직이고 있으니까요.
"보십시오. 당신의 인사말 소리가 제 귀에 들리자 저의 태 안에서 아기가 즐거워 뛰어놀았습니다."(루카 1,44)
마리아의 인사말이 들리자 엘리사벳 태 안에서 아기가 기뻐 뜁니다. 훗날 예수님의 오실 길을 마련할 세례자 요한은 어머니 태 안에서와 마찬가지로 요르단 강가 광야에서도 예수님의 목소리를 듣고 기뻐할 "신랑의 친구"입니다.(요한 3,29 참조)
마리아가 남모르게 성령으로 잉태한 뒤 이토록 기쁨 충만한 축하와 격려를 받은 순간이 있었을까요! 또 마리아의 순결한 태 안에 자리하신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이토록 열렬히 환대를 받으신 적이 있었던가요! 지금 이 자리가 바로 그 때이고 그 순간입니다.
엄마 엘리사벳은 뱃속 아기의 움직임에서 창조주를 맞이하는 영광에 찬 기쁨을 감지하고, 있는 그대로 마리아에게 전합니다. 이를 듣는 마리아의 마음에서 형언할 수 없는 기쁨이 찬미의 기도로 터져 나오지요. 그 기도가 바로 우리가 사랑하고 즐겨 부르는 '마니피캇'입니다.
마리아와 엘리사벳, 태아 요한의 기쁨에 찬 환영을 받으신 마리아 태중의 아기는 당신의 마음을 어머니에게 그대로 드러내십니다. 그래서 마니피캇 안에는 고통과 슬픔에 찬 세상에 대한 하느님의 마음이 생생히 녹아있는 겁니다.
하느님은 마음속 생각이 교만한 이, 불의한 통치로 제 잇속이나 채우는 권력자, 자기만 누리는 부유함에 도취된 이들을 내치시는 혁명가 같은 분이시지요. 동시에 그분은 비천하고 굶주리는 가난한 이들에게 손을 내밀어 끌어 올리시는 보호자이십니다. 마리아의 입을 통해 창조주 하느님께서 당신이 어떤 분이신지를 계시하신 것이지요.
제1독서에서도 예루살렘 한가운데에 오시는 주님과 그분을 맞이하는 백성의 기쁨을 노래하며 복음의 장면을 준비시킵니다.
"마음껏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스바 3,14)
이제 이스라엘은 한껏 기뻐하고 즐거워해도 됩니다. 승리의 용사이신 주님이 원수들의 손에서 예루살렘을 구하시고 영영 불행을 치워버리시기 때문입니다. 이제 누구의 눈치를 볼 것 없이, 느닷없이 닥칠지도 모르는 또 다른 역경을 염려할 것 없이 이제로부터 영원히 이어질 주님 현존의 축복을 마음껏 누리라는 위로입니다.
"그분께서 너를 두고 기뻐하며 즐거워하신다. 당신 사랑으로 너를 새롭게 해 주시고, 너 때문에 환성을 올리며 기뻐하시리라."(스바 3,17)
우리와 주님이 서로를 향해 환성으로 올리는 이 장면을 관상합니다. 우리 안에 거처를 정하신 주님의 기쁨이 그런 주님으로 인해 느끼는 우리의 기쁨을 압도합니다. 하느님이 비천하고 가난한 우리로 인해 이토록 행복하시다니요! 이토록 열락에 차 어쩔 줄을 모르시다니요!
스바니야 예언서의 이 행복이 마리아와 엘리사벳, 태아 예수님과 태아 요한에게로 이어졌지요. 이 복되고 신비롭고 유쾌한 만남이 이루어진 유다 산골은 이 순간 이스라엘 전체, 온 세상 전체를 품고 있는 작은 우주일 것이고, 이 축제는 영원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위로의 어머니 마리아는 버겁고 힘겹고 슬프고 아픈 우리를 방문하십니다. 그분은 홀로가 아니라 항상 예수님과 함께시지요. 예수님을 빼고는 마리아의 존재를 설명할 수 없는 까닭입니다. 마리아는 태중에 모신 하느님의 마음을 투영해 우리를 격려하고 어루만져 주시며 힘을 북돋우시는 어머니이십니다.
개인적으로, 공동체적으로, 사회적으로 여러 기쁨과 슬픔의 궤적을 지나온 오월을 마무리하며, 우리에게 하느님을 선물하신 마리아를 깊은 감사와 사랑으로 환대하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마리아와 함께 예수님을 맞이하는 우리는 복됩니다. 이 행복을 잘 간직한 채, 뜨거운 예수님의 성심으로 더욱 깊이 파고드는 6월을 향해 나아갑시다. 지난 한 달 수고 많으셨습니다.
▶ 작은형제회 오 상선 바오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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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31.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방문 축일. 이병우 루카 신부님.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루카1,43)
5월의 마지막 날인 오늘은 주님의 어머니로 간택되신 마리아가 친척 엘리사벳을 방문한 것을 기념하는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방문 축일'입니다.
마리아의 고향인 '나자렛'에서 엘리사벳이 있는 '아인카림'까지의 거리가 150킬로미터나 되는 먼 거리였는데, 마리아는 천사로부터 전해들은 친척 엘리사벳을 서둘러 방문합니다.
오늘 복음은 하느님의 큰 은총을 입은 두 여인이 하느님께 드리는 '찬미가'입니다.
먼저 엘리사벳이 자신을 찾아온 마리아를 극진하게 칭송합니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루카1,42)
이어서 마리아는 자신과 이스라엘 민족에게 베푸신 하느님의 자비에 대해 감사드리는 노래인 '마니피캇'을 바칩니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루카1,46)
하느님의 은총을 입은 마리아와 엘리사벳의 만남은 우리가 실행해야 할 '이웃 사랑의 실천'입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마태5,45)
이는 하느님의 보편 사랑에 대한 말씀입니다.
하느님께서 내려주시는 '은총의 비'는 모두에게 공평하게 내려집니다. 이 은총을 받고 못 받고는 절대적으로 나의 손에 달려 있는 문제입니다. 하느님의 은총을 가로막고 있는 것이 '나의 나약함'이기 때문입니다.
쏟아지는 하느님의 은총을 받으려면 '나의 나약함'이 치워져야 합니다. 이 치움이 바로 '회개'입니다.
이 회개를 통해 날마다 나에게 베풀어 주시는 하느님의 은총을 충만히 받고, 받은 이 은총을 기쁘게 너와 함께 나누는 하느님의 자녀들이 됩시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루카1,45)
이병우 루카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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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31.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방문 축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저희의 목소리를 들어주십시오. 저희와 함께 걸어주십시오. 바로 그것 뿐입니다!
살레시오회 세계 총회 때의 일입니다.
청소년 사목을 주로 하는 저희 살레시오회이기에, 당사자인 청소년들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10명의 청소년들을 초대했습니다.
청소년들은 전 세계 각국에서 온 대의원 살레시오 회원들과 함께 모임에 참석하고 대화도 나누었습니다.
청소년들이 떠나는 날, 자신들이 쓴 편지를 총회 석상에서 공개했습니다.
대표 청소년이 낭독한 편지글을 들으면서, 그 자리에 있었던 모든 살레시안들은 집단적 성찰과 회개를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사랑하는 살레시오 회원 여러분, 솔직히 저희는 지금 두렵고 혼란스럽습니다.
저희들의 삶은 하루 하루 힘겨운 투쟁의 연속입니다. 저희에게는 살레시오 회원 여러분의 사랑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저희는 여러분의 손을 잡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길을 걸어가고 싶습니다.”
“존경하는 살레시오 회원 여러분, 저희에게 다가오는 것을 제발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저희가 여러분에게 바라는 것은 그 누구도 풀지 못할 인생의 어려운 문제를 풀어달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저희와 함께 있어 달라는 것입니다.
너무나 외로워 울고 있는 저희 옆에 그저 현존만 해주셔도 충분합니다.”
“친애하는 살레시오 회원 여러분, 저희를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편안하고 쾌적한 사무실 의자를 박차고 일어나
저희가 지금 서 있는 이 거리, 이 운동장으로 나와주십시오.
저희의 목소리를 들어주십시오.
저희와 함께 걸어주십시오. 바로 그것 뿐입니다.”
오늘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방문 축일을 맞아 청소년이었던 마리아를 따뜻하게 환영하고 위로했으며,
격려하고 동반했던 엘리사벳의 지혜로운 모습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나자렛에서 아인카림으로 며칠이나 걸리는 여행길이었는데, 서둘러 걸어온 나자렛의 마리아를
엘리사벳은 극진히 환영하고 환대합니다.
혼전 잉태로 인해 혼란과 당혹 속에 힘겨웠던 마리아에게 얼마나 큰 힘이 되었는지 모릅니다.
마리아가 자신의 집에 들어서는 것을 발견한 엘리사벳은 나이에 걸맞지 않게 큰 목소리로 외쳤습니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보십시오, 당신의 인삿말 소리가 제 귀에 들리자 저의 태안에서 아기가 즐거워 뛰놀았습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루카 복음 1장 42~45절)
아인카림에서 있었던 마리아와 엘리사벳의 만남은 참으로 어색하고 당혹스런 만남이었습니다.
그러나 루카 복음사가가 묘사하고 있는 만남의 장면은 무척이나 흥겹고 기쁨에 찬 분위기입니다.
마리아를 맞이하는 엘리사벳은 환희에 찬 목소리로 마리아를 찬미하는 노래를 부르고 있습니다.
환대를 받고 있는 마리아 역시 기쁨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참으로 비극적인 동시에 희극적인 만남이었지만, 그 만남이 기쁨과 환희, 축복과 감사로 가득 차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성령께서 그들 가운데 함께 계셨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을 다 이해하고 계시는 주님께서 현존하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가끔씩 우리네 인생도 정말이지 어처구니 없는 상황 앞에 설 때가 있습니다.
참으로 이해하지 못할 만남을 가질 때가 있습니다.
그때 우리에게 필요한 노력이 한 가지 있습니다.
인간적인 시선으로 바라볼 것이 아니라 영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려는 노력입니다.
인간의 마음으로 이해하려고 노력할 것이 아니라 성령 안에, 주님의 현존 안에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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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31. 전삼용 요셉 신부님. [복되신 동정 마리아 방문 축일]
참 기쁨의 삶을 위해 꼭 필요한 세 요소.
오늘은 성모님께서 엘리사벳을 찾아보심을 묵상하는 날입니다.
성모님은 엘리사벳을 방문하시고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 과연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하리니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라고 기도하십니다.
기쁘고 행복하다는 뜻입니다.
성모님은 엘리사벳을 방문함으로써 참 기쁨의 삶이 무엇인지 알려주십니다.
성모님은 하느님을 잉태하신 어마어마한 분이십니다.
그렇다면 온 인류에게 이 행복을 전할 수 있을 때 비로소 기쁠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늙은 사촌 누이와 그 태중의 아기를 기쁘게 했다는 것만으로 기뻐하십니다.
이를 볼 때 참 기쁨을 위해 필요한 것이 세 가지가 있는 것 같습니다.
첫째는 줄 것이 있어야 합니다.
EBS 다큐프라임, ‘가족쇼크’에서 김용준(21세) 씨는 말기 암으로 죽어가는 엄마의 전화를 계속 받지 않습니다.
엄마는 아들과 단둘이 살았는데, 아들이 호스피스 병동에 찾아오지도 않고 전화도 안 받으니
혼자 고통을 견뎌야 할 뿐입니다.
어버이날 카네이션도 자신이 직접 만들어서 방에 놓습니다.
그러며 전화를 안 받는 아들을 원망합니다.
아들은 왜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어머니의 전화까지 외면하는 것일까요?
김용준 씨는 이렇게 말합니다.
“‘연락을 안 하면 싫어할 수 있겠다.’ 생각은 하지만,
전화해서 목소리 들을 때마다 진짜 현실이 눈앞에 딱, 있다는 느낌? 엄마가 저보고 살았고 저도 엄마만 보고 살았으니까.
엄청 소중하죠. 아직은 함께 할 게 많았는데! 제일 하고 싶은 건 엄마가 만들어주는 밥 먹는 거.”
김용준 씨는 아직 엄마의 사랑이 더 필요한 상태입니다.
더 받아야 하는 상태인데 이제 엄마를 위로해야 하는 상황을 감당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결국, 엄마 임종 직전에야 엄마를 볼 용기를 내어 찾아갑니다.
그러나 울기만 합니다.
엄마는 정신이 혼미한 중에도 아들을 위해 머리맡에 숨겨 두었던 5만 원 지폐를 쥐여줍니다.
엄마는 주고 싶은데 줄 수 없는 상황이 안타깝고, 아들은 받아야 하는 나이인데 주어야 하는 안타까운 상황입니다.
무언가 주어야 하는데 아직 가진 것이 없어서 사랑하면서도 죽어가는 엄마를 볼 힘이 없는 것입니다.
주고 싶은데 줄 것이 없다면 얼마나 고통스러울까요?
두 번째는 내가 주는 것을 기쁘게 받을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참 기쁨의 삶은 누군가를 기쁘게 해 줄 수 있는 것에 있습니다.
성모님께서 예수님을 잉태하신 후 당신의 능력으로 누구를 가장 기쁘게 할 수 있는지 아셨습니다.
늙은 나이에 아기를 잉태한 엘리사벳에게 가시면 가장 좋겠다고 생각하셨습니다.
내가 아무리 은총이 있더라도 그 은총을 상대가 받아들일 수 있는 수준이 아니라면 그것은 기쁨이 아니라 슬픔의 원인이 됩니다.
레오파드 증후군이라는 병 때문에 태어나면서 눈이 보이지 않고 귀가 들리지 않는 상태로 자란 이예지 양.
검은 상자 속에 갇혀 사는 예지 씨는 부모의 존재도,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른 채 힘겹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먹으면 좋고 배고프면 화를 내는 동물과 같은 상태입니다.
부모는 그녀와 소통을 할 수 없어서 예지가 짜증을 내며 손으로 자기 머리를 때리고 자해를 해도 무엇을 원하는지 도저히 알아낼 길이 없습니다.
주고 싶어도 받을 능력이 없는 자녀를 둔 부모의 마음은 미어질 것입니다.
아버지는 그런 말을 하면 안 되겠지만 딸이 자신보다 먼저 죽기를 바란다고 합니다.
누구도 그녀에게 자신들처럼 대해줄 수 없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성모 마리아에게는 당신을 받아들이고 이해해 줄 능력을 지닌 엘리사벳이 있어서 다행이었습니다.
그래서 그에게 달려가실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이 얼마나 큰 행복일까요? 누군가를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다는 것이...
그러나 주의할 것이 있습니다. 이 세 번째가 가장 중요합니다.
사실 사랑하면 누구나 줄 것이 있고 그 줄 것을 받을 사람이 있습니다.
그렇더라도 행복할 수 없는 이유가 있는데 ‘겸손’이 없다면 그렇습니다.
제가 예전에 사순절 동안 특강을 같은 내용으로 17번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강의를 많이 하는 것이 사순절 때 주님께 바치는 희생으로 여기고 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17번째 강의를 마치고 많은 감사와 박수를 받으며 집으로 향하는 자동차 안에서 커다란 공허함을 느꼈습니다.
‘이게 다인가?’
저는 저도 모르게 저 자신의 영광을 위해 강의를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저 남을 기쁘게 하는 것만으로 행복하려면 겸손해져야 합니다.
나는 누군가를 기쁘게 할 능력이 없는데 내가 기뻐지라고 주님께서 나에게 그 능력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 누군가를 기쁘게 했다면 그것만으로 기쁠 수 있어야 합니다.
김용준 씨는 엄마를 기쁘게 해 드리고 싶었어도 아직 힘이 없었습니다.
그 한 명을 기쁘게 할 힘도 받아야 생기는 것입니다.
내가 누군가에게 무언가 줄 수 있다면 그것 자체로 참으로 감사한 일입니다.
전에 ‘가장 작은 학교’라고 하는 제목으로 기사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중국의 한 시골 학교인데 선생님이 한 명이고 학생도 한 명입니다.
선생님은 그 한 명에게 매우 고마워하고 아이도 선생님에게 참으로 고마워합니다.
그 한 명이 없으면 자신은 선생님일 수 없고 아이는 학생일 수 없습니다.
교실에 선생님 한 분, 학생 한 명이 수업하는 사진을 보며 ‘하느님께서 세상에 말씀을 주실 때도 이와 같았겠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하늘에서 하느님께서 주시려는 것은 ‘말씀’, 곧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런데 그 말씀을 알아들을 수 있는 유일한 분은 원죄 없으신 ‘성모 마리아’뿐입니다.
하느님은 얼마나 다행이셨을까요? 들어줄 성모 마리아가 없으셨다면 말씀은 아버지 입에서 나오실 수 없으셨을 것입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도 당신의 말씀을 받아줄 성모 마리아 한 분을 보며 기뻐하셨고, 오늘은 성모 마리아께서 엘리사벳 한 분을 보시며 기뻐하셨습니다. 더 바란다는 것은 교만입니다.
저도 유튜브를 하면서 가장 기쁜 것은 내가 가진 것이 있고 그 가진 것을 들어줄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많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끔은 조회수에 신경이 쓰입니다.
교만의 병이 도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다시 내가 할 말이 있고 한 사람만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이 있어도 기쁠 수 있는 성모님의 겸손을 본받으려 합니다.
이것만 있으면 기쁘고 행복합니다.
내가 누군가를 기쁘게 해 줄 수 있는 것, 그다음은 내가 줄 것을 받을 그 누군가가 있다는 것, 마지막으로 이 모든 것은 주님께서 이루시는 것이니 줄 것이 있고 받아주는 한 사람만 있어도 기쁘게 감사해야 할 겸손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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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31.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방문 축일. 이기우 사도요한 신부님.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해마다 5월 31일에 지내는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방문 축일’은 성모 마리아께서
예수님을 잉태하시고, 친척이며 세례자 요한의 어머니인 엘리사벳을 방문하신 일
(루카 1,39-56)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그래서 3월 25일에 지내는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과 6월 24일에 지내는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 사이에 기념합니다.
이 방문 때에 마리아께서는 홀몸이 아니셨고
이미 태중에 아기 예수님을 잉태하고 계셨습니다.
엘리사벳은 성령으로 이를 알아보고 인사말을 건넸는데,
이 인사말이 오늘날 성모송의 전반부가 되어 있습니다.
“주님께서 함께 계시니 여인 중에 복되시며, 태중의 아들 예수 또한 복되시도다.”
한평생 이 방문 사건을 하나의 신비로 묵상했던 인물이 샤를르 드 푸꼬 신부입니다.
그는 태중에 예수님을 모시고 엘리사벳을 방문했던 성모 마리아를 본받고자
프랑스의 식민지였고 이슬람 신자들이 사는 알제리로 가서, 가장 가난한 이들이
사는 사하라 사막 마을에서 그들보다 더 가난하게 살면서 말이나 복장으로가 아니라
삶으로 예수님을 모시고 살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모슬렘 이웃들이 자신의 생활을
통해서 예수님의 복음을 알아보기를 원하며 살다가 프랑스로부터 알제리가
독립하기를 원하여 혁명을 꾀했던 모슬렘 민병에 의해 살해되었습니다.
바오로 6세 교황은 회칙 ‘민족들의 발전’에서
샤를르 드 푸꼬는 “만인의 형제”로 불렀습니다.
또한 그의 영성을 본받고자 하는 이들은 ‘예수의 작은 형제회’와
‘작은 자매회’라는 이름으로 수도회를 이루어 그의 삶을 본받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복음과 신성이 종교적인 형식에 가리어 너무도 천박하게 취급되는 것이
싫었던 푸꼬는 소박하지만 귀하게 그분의 복음과 신성을 자신의
가난한 삶으로 드러내고 싶었던 것이고, 이것이 오늘날 그리스도인들로부터
예수님의 품위를 느끼지 못하는 현대인들로부터도 요청받고 있는 사항입니다.
푸꼬가 생의 마지막을 보냈던 사하라 사막은 알제리 땅이고,
프랑스는 이 알제리를 120년 동안 식민지로 삼았으면서도 이슬람 신자가
거의 대부분이었던 알제리인들에게 그리스도 신앙을 전해주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착취와 억압을 일삼았는데, 푸꼬의 선택은 이러한 모국 프랑스의 비복음적인 행태와
자국 정부를 종교적으로 계도하지 못한 모국 교회에 대한 항의였습니다.
그래서 알제리 출신으로 프랑스에서 의학을 공부하고 정신과 의사가 된
프란츠 파농이 쓴 책은 푸꼬의 항의를 짐작하게 해 주는 외침이었습니다.
그 책 이름이, “자기 땅에서 유배된 자들”이었고, 이 책의 논지가 “수직 폭력은
수평 폭력을 낳는다.”는 폭력 이론이었습니다.
프랑스 정부의 위선과 프랑스 가톨릭교회의 직무유기를 고발하는 이 책으로
말미암아 프랑스 지성이 각성되었고, 프랑스 신앙인들이 회개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태중에 예수님을 모시고 엘리사벳을 방문했던 마리아의 찬송에는 예수님의
복음과 신성을 종교적으로 왜곡하지 말고 드러낼 수 있는 세 가지 길이 담겨 있습니다.
첫째는 겸손과 신앙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팔로 권능을 떨치시어,
마음속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둘째는 정치의 복음화입니다.
“하느님께서는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습니다.”
셋째는 경제의 복음화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셨습니다.”
교우 여러분, 겉으로가 아니라 삶으로 예수님을 모시고 살면서
그분의 복음과 그분의 신성을 드러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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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31.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방문 축일. 김 로마노 형제님.
마리아의 방문 축일 (스바3,14-18)
주님께서 보호하셨다'는 이름 뜻을 지닌 '스바니야'서의 작중 연대를 1장의 머리글을 보면 요시야 임금 통치 시절(B.C.640-609년)로 제시한다.
한 세기 이상 고대 근동 전체를 호령하던 아시리아 대제국이 서서히 몰락해 가는 것을 보면서 유다 임금 요시야는 가나안의 바알 숭배와 아시리아의 천체 숭배를 근절하는 종교개혁을 단행한다(2열왕23,4-14).
이런 상황에서 스바니야 예언자는 주님의 권능이 온전히 드러나게 될 주님의 날을 선포한다. 스바니야서는 니네베의 파괴를 주님께서 하늘과 땅의 임금이심을 드러내는 사건으로 계시한다.
스바니야서의 대부분은 요시야 임금의 통치 시절과 부합하지만 일부 대목은 유배 이후의 상황을 반영한다.
예를들어 오늘 독서의 예루살렘의 재건을 노래하는 마지막 대목 3장 14-20절은 이 책의 다른 대목보다 적어도 한 세기 이상 늦게 곧 6세기 말에 작성되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스바니야서는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부분(1,2~2,3)은 예루살렘의 주민들에게 보내는 경고의 신탁이다.
그들은 야훼 종교와 주변의 다른 다신교를 혼합함으써 결과적으로 야훼 하느님의 주권과 권능을 제대로 인정하지도 않고 거기에 존경을 표하지도 않았다.
둘째부분(2,4-15)은 이스라엘 이외의 다른 민족을 거슬러 선포한 신탁이다.
주님의 주권은 사방의 민족뿐만 아니라 그들이 섬기는 모든 신들에게까지도 미친다.
마지막 세째부분(3장)은 다시 예루살렘 주민들에게 관심을 집중한다.
먼저 예루살렘 주민을 대표하는 지도자, 통치자, 예언자, 사제들의 잘못을 고발함으로써 그 곳을 단죄한다(3,1-4).
대신과 판관들은 백성들을 착취하고, 예언자들은 거짓 예언으로 사람들을 속이며
사제들은 종교 혼합주의로 성소를 더럽히고 율법을 짓밟는다.
이런 예루살렘의 불의와는 달리 하느님께서는 날마다 올바른 판결을 내리시는 공정한 분이시다(3,5).
그분은 당신의 도읍인 예루살렘만은 당신을 경외하고 당신의 가르침을 받들거라고 기대했지만 그들은 그분의 기대를 저버리고 빗나갔다(3,7).
그래서 그분은 뭇 민족과 더불어 당신의 백성도 없애 버리기로 작정하셨다(3,8~9).
그러나 주님의 뜻을 받드는 적은 수의 겸손한 이들을 살아남게 하심으로써 그들에게서 당신의 백성을 새롭게 일으키리라고 하신다. 이들이 바로 '남은 자들'이다.
"나는 네 한가운데에 가난하고 가련한 백성을 남기리니, 그들은 주님의 이름에 피신하리라.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은 불의를 저지르지 않고, 거짓을 말하지 않으며, 그들 입에서는 사기치는 혀를 보지 못하리라. 정녕 그들은 아무런 위협도 받지 않으며, 풀을 뜯고 몸을 누이리라." (스바3,12~13)
주님께서 친히 보살피시고 다스리시는 이 남은 자들을 통하여 주님의 도성 시온은 회복되고 그분의 백성 이스라엘은 온 세상 민족들의 칭송을 받으며, 이름을 떨치게 될 것이다(3,16~20참조).
"딸 시온아, 환성을 올려라. 이스라엘아, 크게 소리쳐라. 딸 예루살렘아, 마음껏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스바3,14)
여기서 제시되는 '시온의 딸'과 '이스라엘'과 '예루살렘 딸'은 모두 동격이다.
'환성을 올려라'와 '크게 소리쳐라'와 '마음껏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란 점층적 표현을 사용하여 그 기쁨을 매우 생생하게 표현하고 있다.
'환성을 올려라'에 해당하는 '란니'(ranni)의 기본형 '라난'(rannan)은 '소리내어 노래하다'는 의미를 가지며 기쁨에 겨워 크게 소리내어 노래하는 것을 말한다.
'크게 소리쳐라'에 해당하는 '하리우'(hariu)의 기본형 '루아흐'(ruah)는 '부르짖다', '외치다', '즐거이 부르다'등으로 번역되는데, 여기서는 부르짖듯 큰소리로 즐거이 노래하는 것을 의미한다.
'마음껏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란 표현에서 사용된 '즐거워하여라'에 해당하는 '웨알레지'(wealezi)의 원형 '알라즈'(allaz)는 '기뻐 날뛰다','몹시 기뻐하다'라는 의미이다.
이는 전쟁의 승리와 같은 주체할 수 없는 기쁨으로 인하여 잔치를 열거나 격렬하게 움직이면서 기뻐함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영어로 표현하면 'sing', 'shout out', 'Be glad and rejoice' 라는 점층적 표현을 쓸 수 있겠다.
본절에 사용된 이러한 점층적 표현은 하느님께서 가져다주실 선민의 복락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잘 보여준다고 하겠다.
선민의 이러한 기쁨에 대한 세 단문처럼, 하느님의 기쁨에 대한 세 단문이 3장 17절 하반부에 점층적 표현으로 교차 대구를 이루며 나온다.
"(주 너의 하느님, 승리의 용사께서 네 한가운데에 계시다.) 그분께서 너를 두고 기뻐하며 즐거워하신다. 당신 사랑으로 너를 새롭게 해주시고, 너 때문에 환성을 올리며 기뻐 하시리라." (스바3,17)
'그분께서 너를 두고 기뻐하며 즐거워하신다', '당신 사랑으로 너를 새롭게 해주시고', '너 때문에 환성을 올려 기뻐하시리라'는 사실상 같은 개념으로 삼중적으로 강조해서 표현하고 있다.
이전에 하느님의 분노와 진노의 대상이었던 선민들이 완전히 용서받고 거룩하게 되어 하느님의 사랑과 기쁨의 대상이 됨을 보여주고 있다.
원문은 '그가 베푸는 그 사랑 안에서 스스로 만족하시고 기뻐하시며, 조용히 그 사랑을 향유하실 것이다.' 라는 뉘앙스를 강하게 드러낸다.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의 애틋함을 더욱 강하게 드러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우리를 향하신 그분의 사랑이 얼마나 크시면, 그 사랑에 스스로 빠져서 만족과 기쁨으로 잠잠히 안식하실 수 있겠는가!
하느님의 지극한 사랑을 이보다 더욱 절실하게 나타내는 표현이 있을 수 있겠는가!
전능하신 용사의 강한 이미지(스바3,17절 전반부)가 그가 구원을 베푸신 그 자녀를 향한 어버이의 사랑으로 놀랍게 승화되고 있는 것이다(스바3,17절 후반부).
이러한 선민에 대한 하느님의 기쁨을 묘사하는 표현은 결국 하느님의 선민에 대한 사랑의 깊이를 보여주면서, 한편으로는 장차 선민들이 하느님으로 말미암아 흠없이 거룩하게 성화될 것임을 전제로 하고 있는 것이다.
영어로 하면 이런 의미일 것이다.
"He will take great delight in you, he will rest(quiet) you with his love, he will rejoice over you with singing."
스바니야서 3장 14절-17절은 히브리서에서 자주 사용되는 교차 대구 구조로 이루어졌다.
A. 선민의 기쁨에 대한 세 단문(14절) - A' 하느님의 기쁨에 대한 세 단문(17절 하반부)
B. 주님께서 형벌을 제거하고 - B' 주님은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심(17절 상반부)
원수를 쫓아냄(15절 상반부)
C.주님의 임재(15절 하반부) -C' 주님의 임재(17절 상반부)
D.불행을 당할까 두려워하지 아니할 것임 -D' 두려워하지 말고 손을 늘어뜨리지 말아야 함(16절 하반부) (15절 하반부)
이렇게 스바니아서 3장 16절 상반부의 '그 날'을 중심으로 대조를 이루고 있다.
선민들로 하여금 이 하느님의 종말론적 심판과 구원의 날, 결정적인 '그 날'이 반드시 도래할 것임을 강조하면서 그 날을 바라보고 주어진 현실 가운데에서 좌절하지 말고 하느님께 대한 신앙으로 굳게 설 것을 권면함과 동시에 이를 통해 선민들을 위로하고 있는 것이다.
'주님께서 너에게 내리신 판결을 거두시고, 너의 원수들을 쫓아내셨다.' (스바3,15)
'주님께서 너에게 내리신 판결을 거두시고'란 표현은 주님의 사죄의 은총을 나타낸다.
여기서 '거두시고'로 번역된 '헤씨르'(hesir)는 '제하다', '제거하다'란 뜻의 동사 '쑤르'(sur)의 사역형이다.
이스라엘의 구원에 있어서 행하신 하느님의 주권적 역사를 '쑤르'란 동사를 사용하여 다시 한번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그들 가운데서 '거만스레 흥겨워하는 자들을 치워 버리리라'(11절) 하셨을 뿐 아니라 그들을 두렵게 하는 형벌을 제거하기까지 하심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주님께서는 그들의 구원을 가로막을 수 있는 모든 것들을 완전히 제거하신다.
이러한 능력을 지니신 주님만이 진정하고도 완전한 구원을 이루실 수 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더 나아가 앞으로 있을지도 모를 외부적 위협마저 철저히 제거하신다. 즉 이스라엘의 원수를 쫓아내시는 것이다.
여기서 '판결'(형벌)은 주님께서 판결하여 내리시기로 결정하신 심판을 의미하며 '원수'란 심판의 형벌을 수행하기 위해 주님께서 모으셨던 이방의 여러나라와 민족들(8절)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제 심판을 끝마치시고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에 대한 구원의 역사를 이루셨기 때문에 더 이상 그들은 필요가 없게 되었다.
오히려 그들은 이 남은 자들에게 위해를 가할 소지가 충분하기 때문에 주님께서 그들을 쫓아내신 것이다.
'힘 없이 손을 늘어뜨리지 마라' (스바3,16)
'두려워하지 마라'는 직설적인 표현에 이어 '네 손을 늘어뜨리지 마라'는 간접적인 표현이 사용된다.
'손을 늘어뜨린다'고 하는 것은 절망이나 낙심의 상태를 묘사하는 히브리적 관용구이다(2사무4,1; 이사13,7; 예레6,24).
주님께서 그들 가운데 그들의 왕으로 계시기 때문에 결코 두려워할 것도 그리고 낙심하거나 좌절할 일도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전달한다.
즉 만군의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 그들의 왕으로 그들 앞에서 싸우실 것이기 때문에 결코 어떤 대적, 어떤 전쟁에서도 그들은 패하지 않으며, 어떤 원수도 그들에게 해악을 끼치지 못하니 강하고 담대한 마음을 품어야 한다는 것이다.
'주 너의 하느님, 승리의 용사께서 네 한가운데에 계시다' (스바3,17)
'승리의 용사'에 해당하는 '낍보르'(gibor)는 전투의 문맥에서는 '용사', '전사'를 언급하고 있다.(여호1,14; 6,2; 판관5,13; 2사무1,19 등).
그러나 이 단어가 하느님께 적용될 경우에는 단순히 '용사'를 언급하는데 그치지 않고 모든 싸움에서 승리를 가져다 주시는 '전능하신 용사'라는 개념을 내포하게 된다.
즉 여기서는 이스라엘의 하느님은 전능하신 용사이심이 선포되고 있는 것이다(이사10,21).
그는 이러한 능력으로 그의 백성들을 모든 전투에서 구원하시며 승리로 이끄신다.
따라서 하느님의 백성은 어떤 역경 가운데서도 궁극적으로 안전에 대한 신뢰를 가질 수 있다.
'축제의 날인양 그렇게 하시리라. 나는 너에게서 불행을 치워버려, 네가 모욕을 짊어지지 않게 하리라.' (스바3,18)
새 성경의 번역이 좀 잘못된 것 같다. 여기서 선민은 '축제(절기)로 인하여 근심하는 자들'로 묘사된다.
이것은 이방인 여러 나라에 흩어져 있던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이 신분의 제약으로
'축제'(절기)때마다 그 '축제'(절기)를 지켜야하는 장소였던 예루살렘에 사실상 참여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할 것임을 전제한다.
이러한 이유때문에 그들은 '축제'(절기)로 인하여 항상 근심하는 처지에 놓일 수 밖에 없었는데(이것이 '불행'이요, '모욕'으로 표현), 본절에서 하느님께서는 바로 이러한 자들을 모으실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주님의 구원이 선포되고 성취되는 그 날에 그들은 그들의 거룩한 산 시온으로 돌아오게 될 것이며, 그곳에서 마음껏 주 하느님의 이름을 부르며, 기쁨으로 축제(절기)를 지키게 될 것이라는 사실이 예언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하느님의 회복의 역사로 인해 그들의 어깨 위에 드리워진 모욕(치욕)의 짐은 벗어지게 될 것이다.
교회가 루카복음 1장 39~56절의 말씀과 더불어 스바니야서 3장 14~18절을 묵상하는 것은 '시온의 딸', '이스라엘', '예루살렘'을 성교회로 보기 떄문이다.
죄로 말미암아 멸망과 지옥과 저주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세속사(인간사)를 구원의 역사로 바꾸시는 단초로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수태한 마리아를 엘리사벳이 '주님의 어머니'(루카1,43)로 알아보고 그 태중의 예수님을 알아 뵌 것은 성령으로 가득차서(루카1,41)가능한 것이다.
마리아의 방문을 받은 엘리사벳의 태안에서 세례자 요한이 마리아의 인사말에 즐거워 뛰놀았다라는 것은 마리아로 말미암아 아니 마리아의 태중에 계신 메시아이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원죄의 용서함을 받았다는 의미가 있다.
무죄하신 주님께서 인류구원 사업이라는 아버지의 뜻을 십자가의 죽음으로 이루실 것이기에 이제 악의 세력들은 완전히 패배할 것임을 스바니야서 3장 15절에서 미리 예언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마리아와 엘리사벳처럼 기뻐할 수 밖에 없고, 감사하고 찬양할 수 밖에 없다.
마리아의 방문 축일 복음 (루카1,39-56)
"그분께서는 당신 팔로 권능을 떨치시어, 마음 속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어셨습니다.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으며,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셨습니다." (51~53)
루카 복음 1장 51절에서 53절까지는 하느님의 공평하신 속성에 대한 찬양이 이어진다.
루카 복음 1장 51절의 '팔'로 번역된 '브라키오니'(brachioni; arm)는 단순히 신체의 한 부분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히브리어 '야드'(yad)와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능력을 상징하는 구약적 표현으로 볼 수 있다(신명26,8; 시편29,14).
이 단어가 '권능'으로 번역된 '크라토스'(kratos; strength; mighty deeds)와 함께 사용되어 하느님의 크고 무한하신 힘과 능력을 반복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또한 '교만한 자들'에 해당하는 '휘페레파누스'(hyperephanus; the proud)는 '~위에', '~을 넘어서', '~이상의' 등의 뜻을 가진 전치사 '휘페르'(hyper)와 '나타나다', '자신을 나타내 보이다'등의 의미를 가진 '파이노'(phaino)의 합성어에서 파생한 단어로서 '하느님 앞에서 자신을 지나치게 내보이는 자들', '하느님을 대적하는 자들'이라는 의미를 가진 단어이다.
이것은 루카 복음 1장 50절의 '경외하는 이들'과 분명한 대조를 이루면서, 그 결과 또한 엄청난 차이를 가져온다.
다시 말해서 하느님을 '경외하는 이들'에게는 그분의 자비가 미치지만, 반면에 그분을 '대적하는 자들'에게는 '흩어지는'심판이 따른다는 것이다.
루카 복음 1장 51절은 '주님이신 그분께 맞서는 자들은 깨어진다'(1사무2,10)는 한나의 노래를 연상시키는데, 여기서 마리아는 교만한 자들을 치시는 하느님의 성품을 정확하게 깨닫고, 자신의 모습을 비천한 종의 위치에 놓음으로써 높고 위대하신 하느님의 능력을 찬양하고 있다.
이제 루카 복음 1장 52절은 '가난한 이를 먼지에서 일으키시고 궁핍한 이를 거름 더미에서 일으키시어 귀인들과 한자리에 앉히시며 영광스러운 자리를 차지하게 하신다.'(1사무2,8)
라는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의 노래를 떠올리게 하는 부분으로서, 분명한 대조를 이루는 단어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것은 '통치자들'과 '비천한 이들','끌어내리시고'와 '들어 높이셨으며'라는 단어들이다.
권세있는 자와 비천한 자에 대한 하느님의 공평하신 심판을 다루고 있는 루카 복음 1장 52절은 이 단어들의 대조를 통해 하느님께서 어떤 분이신가를 분명하게 나타내 주고 있다.
먼저 '통치자들'로 번역된 '뒤나스타스'(dynastas; the mighty; rulers)는 '주권자','통치자' 등을 의미하는 '뒤나스테스'(dynastes)의 복수이므로, '권세있는 자들', '통치자들'로 번역하는 것이 옳다.
그리고 '왕좌'로 번역된 '트로논'(thronon; thier thrones)은 그 통치자들이 앉는 '권좌들', '보좌들'이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하느님께서 그들을 '끌어내리신다'는 것은 비록 세상 가운데서 권세있는 자들이라고 할지라도, 하느님께서는 당신 마음에 합당치 않는 자들을 얼마든지 그 권좌에서 내리칠 수 있는 능력의 하느님이심을 밝히는 것이다.
한편, '비천한 이들'로 번역된 '타페이누스'(tapeinus; the humble)는 '낮은 지위의', '천한', '겸손한'이란 뜻을 가진 형용사 '타페이노스'(tapeinos)의 복수형이므로, '비천한 이들'로 번역하는 것이 옳다.
이 단어는 앞의 '통치자들'과 대조를 이루면서 직접적으로는 세상에서 소외되고 낮은 지위에 있는 자들을 의미하지만, 영적으로는 하느님 앞에서 겸손한 자들을 나타낸다.
그러니까 하느님께서는 비록 그들이 세상에서는 낮고 천한 자들일지라도, 하느님 대전에 겸손하며 하느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자들을 높이시는 분임이 드러난다.
세상 사람들은 좀 더 높은 지위와 권세를 위해 목숨을 걸지만, 그 모든 것들이 하느님 앞에서는 무의미한 일이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느님 대전에 우리가 먼저 겸손한 모습으로 바로 서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루카 복음 1장 53절에서도 52절과 마찬가지로, '굶주린 이들'과 '부유한 자들', '좋은 것'과 '빈손', '배불리시고'와 '내치셨습니다'라는 단어들의 대조가 선명하게 드러난다.
먼저 '굶주린 이들'과 '부유한 자들'은 복수형으로 일차적으로 경제적 의미에서의 가난한 자들과 부자들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지만, 이렇게 보면 부자들은 그들의 신앙 여부와 관계없이 모두가 가난하게 된다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그래서 본문은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마태5,3),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마태5,6) 등과 같은 산상설교의 표현처럼, 자신을 버리고 겸손한 마음으로 오직 하느님의 은총을 청하는 자들과 교만하여 하느님을 필요로 하지도 않는 자들을 의미한다고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다.
여기서 '좋은 것'으로 번역된 '아가톤'(agathon)는 '선한', '적합한' 등의 뜻을 가지고 있는 형용사로서, 하느님께서 굶주린 이들에게 주시는 '좋은 것'은 바로 그들에게 가장 적합한 것들임을 의미하고 있다.
또한 '배불리시고'로 번역된 '에네플레센'(eneplesen; He has filled)은 '채우다', '만족하다'는 의미를 가진 '엠피플레미'(empiplemi)가 원형인데, 이 단어는 단순한 만족이 아니라 더 이상 부족할 것이 없는, 가득차고 넘치는 상태를 의미한다.
이러한 표현을 통해 하느님께서는 당신 대전에 겸손한 마음으로 자신을 비우고 주리는 자들에게 가장 적합한 것들로서 부족함이 없이 가득 채워 배부르게 하시는 자비로우신 분이시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빈손으로'라고 번역된 '케누스'(kenus; empty away)는 '빈', '헛된', '내용이 없는' 등의 의미를 가진 형용사로서, '좋은 것으로'라는 표현과 대조를 이루는 단어이다.
아무 것도 없는 것을 의미하는 '케누스'(kenus)는 부족할 것이 없는 부자들이 받게 될 심판의 엄중함을 부각시켜 주며, 두 단어의 대구를 통해 심판을 행하시는 하느님께서는 아무리 부자라고 할지라도, 하느님 대전에 교만한 자라면 얼마든지 '텅 빈' 가난뱅이로 만드실 수 있는 분임을 나타내 주고 있다.
또한 '배불리시고'와 대조를 이루는 '내치셨습니다'라고 번역된 '엑사페르테일렌'(eksapesteilen; he has sent)은 '밖으로'란 뜻의 '에크'(ek)와 '내보내다'란 의미를 가진 '아포스텔로'(apostello) 에서 유래한 동사로서, '밖으로 멀리 내보내어 가까이 하지 않는다'는 매우 강한 의미를 갖고 있다.
이것은 스스로 부자라고 하는 자들을 빈 손으로 멀리 내보내시어 가까이하지 않는, 공의로우신 하느님을 드러낸다.
18 나는 이 책에 기록된 예언의 말씀을 듣는 모든 이에게 증언합니다. 누구든지 여기에 무엇을 보태면, 하느님께서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보태실 것입니다. 19 또 누구든지 이 예언의 책에 기록된 말씀 가운데에서 무엇을 빼면, 하느님께서 이 책에 기록된 생명 나무와 거룩한 도성에서 얻을 그의 몫을 빼어 버리실 것입니다. (요한묵시록22,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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