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으로 번지는 지혜
허 열 웅
서예書藝는 쓴 사람의 혼을 담는 예술이다. 특히 애국지사들의 글씨에는 고고한 인품과 학식, 나라를 사랑하는 충정이 그대로 깃들어 있다. 이들이 남긴 유묵遺墨에 담긴 뜻을 기성세대는 물론 젊은이에 이르기까지 마음에 새겨 온 국민이 혼란에 빠진 나라를 바로잡는데 모티브로 삼아야 할 것 같다. 뿐만 아니라 세계인들에게도 선열들의 숭고한 애국애족 정신을 알릴 필요가 있다고 본다.
대한민국임시정부수립 100주년 기념으로 백범白凡기념관에서 열리고 있는<큰 뜻, 붓에 담다>를 관람했다. 김구 선생을 비롯한 안중근, 한용운, 여운형 등 독립투사들의 글과 국제서예가협회 회원들의 글씨들이 은은한 묵향을 풍기며 진열되어 있었다. 특이한 것은 서예작품을 어떻게 감상하는지를 설명해주는 안내서를 같이 진열하고 있어 의미를 터득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나는 서예에 관심이 있으면서도 배우질 못했다. 다만 직장에 근무할 때 동료의 권유로 6개월 정도 습작을 하다가 그만 둔 경력이 전부다. 그렇지만 선배나 지인들 중 서예가들이 많아 전시회에 초대를 받으면 거의 빠지지 않고 관람했다. 특히 서예에 대해 깊은 통찰과 지식으로 쓴 이문열의 소설<금시조金翅鳥>에 감명을 받아 열 번 이상 읽었다. 이 소설은 1982년도 ‘동인문학상수상작’으로 베스트셀러가 되어 지금까지 여러 번 중판된 기록을 가지고 있다. 서예에 관심이 있는 분들에게 권하고 싶은 책이다.
서권기 문자향(書卷氣 文字香)이란 말은 책을 많이 읽고 교양을 쌓으면 몸에서 책의 기운이 풍기고 문자의 향기가 난다는 뜻이다. 옛 선비들은 풍부한 학식과 고매한 인격이 뒷받침되면 서권기 문자향의 경지에 다다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추사 김정희가 “가슴속에 만 권의 책이 들어있어야 그것이 넘쳐흘러서 그림과 글씨가 된다”고 말한 것은 이 생각을 정확히 반영한다. 선비들은 시(詩)·서(書)·화(畵)를 중하게 여겼지만 지켜야 할 원칙이 있었다.
글씨를 써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림을 감상할 때도 그림의 겉모습보다는 그 속에 깃든 화가의 정신이 중요했다. 만약 글씨를 쓴다는 것이 문자로 뜻을 전하는 과정에 불과하다면 오랜 숙련이 필요 없다고 본다. 붓이 아니더라도 연필이나 볼펜 같은 간단한 필기구로도 뜻을 전달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서예는 의(意)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정(情)에 있으며 글씨보다는 그림으로 파악되어야한다고 생각한다.
5년 전에 있었던 일이다. 논어를 공부하다보니 사무사思無邪란 의미에 대해 알게 되었고, 이를 소재로 수필을 써서 문화센터의 수업시간에 발표를 하게 되었다. 시경詩經의 내력에서부터 의미와 편집 과정, 책에 실린 305편의 시들을 주제로 구성하여 쓴 글이었다. 내용에 큰 관심을 보이던 회원 한 분이 안타까운 아쉬움을 토로했다. 자기 집 거실에 부모님 살아계실 때부터 걸려있던 액자의 내용이<思無邪사무사>이었는데 오래 되어 좀 퇴색된 모양새였다고 한다. 집수리를 할 때 버렸다며 아쉬워했다.
조선왕족실록에 따르면 노산군(후일 단종)이 경연에서 “사무사란 무슨 뜻인가?”라고 질문을 하자 사육신 박팽년이 “생각하는 바에 사사로움이 없는 것이니 마음이 바름을 일컫는 것입니다. 마음이 이미 바르면 모든 사물에서 바름을 얻을 것 입니다.라고 답변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사무사의 깊은 의미를 잘 모른 채 보통 흔한 서예 액자로 생각하고 집수리를 할 때 버렸다는 것이다.
심오한 철학적 의미와 진리가 담겨있는 줄 알았더라면 소중히 보관했을 터인데 폐기한 것을 몹시 후회를 했다. 많은 가정집에 서예작품 몇 점씩 보관하고 있거나 거실 등에 걸려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문을 배우지 않은 세대나 젊은 세대는 그 의미와 뜻을 잘 이해하지 못하여 무관심한 경우가 많다.
애국지사나 유명인이 쓴 글씨가 아니더라도 그 의미와 숨어있는 역사를 터득하게 하여 마음으로 음미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이 한문을 배운 기성세대들의 책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문화재를 관람할 때 현판이나 사찰의 주련柱聯을 무심코 지나치는 경우가 많은데 글 속에 담겨져 있는 의미를 터득하여 지혜로 받아들이는 것도 살아가는데 큰 도움이 되리라고 믿는다.
백양사, 마곡사 등 큰 절이나 추사秋史고택를 방문할 경우 핵심 콘텐트인 주련, 현판 등에 관심이 없으면 오래된 기와집과 흔한 부처모형만 보고 온 셈일 수도 있다. 천천히 관람하다보니 작품 중에는 내가 좋아하여 이를 주제로 시를 쓰기도한 백범선생의 글씨 <야설野雪>도 진열되어 있었다.
踏雪野中去, 不須胡亂行, 今日我行跡, 遂作後人程
(눈을 밟으며 들길을 갈 때 함부로 걷지 마라,
네가 남긴 발자국이 뒤에 오는 사람에게는 이정표가 될 것이니)
오늘 날 우리가 사는 세계는 작가나 예술가에게 인격적인 완성도보다 장인적인 자세를 더 요구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그러나 글을 쓰거나 그림을 배우기에 앞서 마음을 닦는 일이 우선이라고 생각한다. 기예를 닦으면서 도가 함께 아우러져야 한다는 견해다. 평생 기예에 머물러있으면 예능藝能이 되고, 도道로 한 발짝 나가게 되면 예술藝術이 되고, 혼연히 합일되면 예도藝道가 된다고 하는 주장에 나는 동의한다.
백범기념관이 있는 효창공원에는 안중근, 이봉창, 윤봉길 등 삼의사三義士가 잠들어 계시고, 임시정부요인들의 묘가 조성되어 있다. 수많은 독립투사 가운데 가장 넓은 대지에 웅장하게 지어진 백범기념관을 나오며 비슷하게 공을 세운 일부 애국지사들에게는 소홀함이 없었는지 국가차원에서 검토해 보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한민국의 기틀을 세운 초대 대통령은 기념관조차 없는 현실이다.
백범 선생이나 안중근 의사의 소망을 힘찬 글씨로 남긴 <自主獨立>은 분단의 아픔을 안은 채 오늘도 갈라진 이념으로 나라가 혼란스럽다 못해 위태롭기까지 하다. 넓지도 않은 국토, 그리 많지도 않은 인구가 남북으로 갈라진 채 70년이 넘도록 대결만 하고 있어 언제쯤 통일될지 안타깝기만 하다. 열악한 환경에서도 조국의 자주독립과 통일을 염원했던 애국지사들의 큰 뜻을 붓에 담은 작품에서 흐르는 은은한 묵향을 가슴 깊이 흠향歆饗하면서 승화된 발걸음으로 전시관을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