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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리고로 본 자아 Ⅰ (수 6:1-5)
이 시간에는 "여리고로 본 자아"라는 제목입니다. 여리고성이 무너지듯 우리 마음의 완악한 자아가 무너지는 복된 시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신앙생활하면서 자기 십자가를 져라, 나를 죽여라, 내가 죽어야 산다는 말씀을 자주 듣는데 내가 죽는다는 것이 무엇이며 어떻게 내가 죽는 것입니까? 이것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본문의 여리고성입니다.
여리고는 중부 가나안에 위치한 가나안의 첫 성으로 여기를 정복하지 못하면 가나안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만큼 전략적으로 중요한데 이처럼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반드시 먼저 정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나라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눅9:23에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하셨습니다. 내 주장 내 생각 가운데 있으면 예수도 안 믿을 것이고 예수 믿어도 성경 말씀대로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최고의 원수는 사실 우리 안에 있습니다.
내가 죽는다 란 무엇일까요?
1. 복음 안에서 주신 새 자화상에서 시작합니다.
2절에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여리고와 그 왕과 용사들을 네 손에 넘겨주었으니" 하셨습니다. 여기 붙이다란 군사적인 용어로 '권력이나 통치권을 넘겨주다', '어떤 사람에게 승리를 허락하다'는 뜻입니다. 이처럼 여리고성 정복은 전쟁이 시작되기도 전에 이미 하나님의 작정 가운데 승리가 확정되었습니다.
이처럼 내가 정복되고 죽는 일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일입니다. 성경은 내가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갈2:20에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오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했습니다. 즉 나는 이미 십자가에 못 박힌 옛사람일 뿐입니다. 이 복음부터 인정해야 합니다.
그런데 현대의 사상을 가리켜 포스트 모던(탈현대주의)이라 해서 그 동안 믿어왔던 절대가치에나 권위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모든 것을 상대적이고 다원주의적이고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며 무엇이 하나님의 뜻이냐 보다 무엇이 내게 유익하고 원하는 것에 부합하냐 하는 자아중심으로 흐르고 있습니다.
이런 이론들은 나를 절대 가치와 기준으로 삼는 자아를 키우는 사상들입니다. 인간에게는 무한한 잠재력이 있다니, 믿을 것은 나 뿐이고 나를 의지해서 산다느니, 이런 사상에 붙잡혀 있으면 더욱 자아를 키우기 때문에 절대 내가 죽을 수 없습니다. 오히려 자아를 개발하여 자기 안에서 무언가 찾으려고 노력할 뿐입니다.
이것이 다 허무한 이론이라는 것을 믿고 두 손 든 사람만이 복음 안에 들어올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성경의 결론을 존중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죽는 일은 예수 안에서 죽었다는 말씀을 믿는 그 새 자화상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2.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죽는 것입니다.
잘 길들여진 말처럼 순종이 죽는 것입니다. 3절에 "너희 모든 군사는 그 성을 둘러 성 주위를 매일 한 번씩 돌되 엿새 동안을 그리하라" 하셨습니다. 그래서 엿새 동안 여리고를 돌았습니다. 여기 엿새의 6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날과 같이 우리 인간이 최선을 다해 노력할 부분입니다. 그래서 신5:13에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그랬습니다.
마치 여리고를 도는 일을 반복한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내가 죽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매일 반복하면서 하나님께서 왜 이렇게 반복하게 하실까 의문을 품을 수도 있었지만 그러나 그 생각 다 내려놓고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이기 때문에 그 일을 계속했습니다. 이것이 내가 죽는 것입니다.
내 생각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이 가는 곳에 내가 가고 하나님의 말씀이 머무는 곳에 내가 머물러야 합니다. 고전4:6에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위하여 이 일에 나와 아볼로를 들어서 본을 보였으니 이는 너희로 하여금 기록된 말씀 밖으로 넘어가지 말라 한 것을 우리에게서 배워 서로 대적하여 교만한 마음을 가지지 말게 하려 함이라” 했습니다.
에녹이 300년 동안 하나님과 동행한 것처럼 매사에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두 사람이 의합치 않고서 어찌 동행할 수 있겠습니까? 이처럼 내 뜻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에 맞추어 사는 것이 내가 죽는 것입니다.
3. 하나님께 최선을 다하는 것이 죽는 것입니다.
그래서 축도록 충성하라 하셨습니다. 4절에 "일곱째 날에는 그 성을 일곱 번 돌며 그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 것이며" 매일 한 바퀴씩 돌다가 마지막 일곱째 날에는 일곱 번 돌았습니다. 여기 7일, 그리고 일곱 바퀴의 7은 완전한 사역의 수입니다.
이처럼 마음과 뜻과 정성과 성품과 힘과 목숨까지 최선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외하는 것이 내가 죽는 것입니다. 부모가 자식을 위해 인생을 바치는 것처럼 하나님을 위해 사는 것이 죽는 것입니다. 내가 죽는다는 건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죄에 대해서는 죽는다는 것이지 하나님과 의에 대해서는 더욱 열심히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롬6:10-11에 “그가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가 살아 계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계심이니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했습니다.
4. 믿음으로 사는 것이 죽는 것입니다.
5절에 "제사장들이 양각 나팔을 길게 불어 그 나팔 소리가 너희에게 들릴 때에는 백성은 다 큰 소리로 외쳐 부를 것이라 그리하면 그 성벽이 무너져 내리리니 백성은 각기 앞으로 올라갈지니라" 했습니다.
여기 제사장의 양각나팔은 양뿔로 만든 나팔로 신약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그 나팔소리를 신호로 백성들이 다 큰 소리로 외치며 무너진 성벽을 향해 돌진한 것은 예수의 복음을 믿고 시인할 때 일어나는 구원의 기적을 예표한 것입니다.
롬10:9-10에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했습니다.
이처럼 믿음으로 사는 것이 내가 죽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내 눈에 보이고 검증된 것만 믿었는데 지금은 성경이 무엇이라고 말씀하느냐에 따라 믿고 행합니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지만 보이는 것처럼 믿음으로 늘 하나님과 교제하고 의지하고 사랑하고 찬양합니다. 우리가 육신을 입고 사는 날 동안은 보이지 않기에 보이는 것처럼 믿음으로 행해야 합니다.
5. 하나님 중심으로 사는 것이 죽는 것입니다.
8-9절에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이르기를 마치매 제사장 일곱은 양각 나팔 일곱을 잡고 여호와 앞에서 나아가며 나팔을 불고 여호와의 언약궤는 그 뒤를 따르며 그 무장한 자들은 나팔 부는 제사장들 앞에서 행진하며 후군은 궤 뒤를 따르고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며 행진하더라"
여기 군대의 행렬을 보면 하나님 중심입니다. 나팔 부는 제사장과 여호와의 언약궤를 중심으로 전군과 후군이 배치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말씀의 나팔 중심, 하나님 중심입니다. 하나님 중심으로, 하나님의 말씀 중심으로 사는 것이 내가 죽는 것입니다.
광야 이스라엘 백성들은 진을 질 때도 여호와의 성막 중심으로 성막 둘레에 제사장 지파가 진을 피고 그 둘레는 12지파가 진을 쳤습니다. 온전히 하나님 중심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성도의 죽은 것을 귀히 여기십니다. 잘 죽어야 복입니다. 안 죽으려고 하니까 힘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복음을 믿고 늘 말씀에 순종하고 하나님 섬김에 최선을 다하고 믿음으로 살고 하나님 중심으로 사는 가장 잘 죽은 가장 복되고 귀한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여리고로 본 자아 2 (수 6:26-27)
26. 여호수아가 그 때에 맹세하게 하여 이르되 누구든지 일어나서 이 여리고 성을 건축하는 자는 여호와 앞에서 저주를 받을 것이라 그 기초를 쌓을 때에 그의 맏아들을 잃을 것이요 그 문을 세울 때에 그의 막내아들을 잃으리라 하였더라 27.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와 함께 하시니 여호수아의 소문이 그 온 땅에 퍼지니라
성경을 6장을 다 읽어야 하는데 시간 관계상 조금만 읽었습니다. 계속해서 “여리고로 본 자아”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자아처리 즉 내가 잘 죽어야 하나님 원하시는 대로 살 수 있는데 내가 죽는다는 것은 무엇이며 어떻게 처리하는 것인지 계속하여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6. 내가 죽는다는 것은 악에 반응하지 않고 선에 반응하는 것입니다.
10절에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너희는 외치지 말며 너희 음성을 들리게 하지 말며 너희 입에서 아무 말도 내지 말라 그리하다가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여 외치라 하는 날에 외칠지니라 하고" 했습니다. 자기 소리를 드러내지 않음이 여리고 작전의 최고의 금기사항입니다.
소리를 내지 않는다는 것은 소리를 낼 수밖에 없는 심각한 상황을 전제로 한 말씀입니다. 그리고 소리란 가득한 내면의 표현이라는 점에서 참을 수 없는 어떤 상황을 가정한 말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리를 내지 않는 것은 그 일과 분명한 선을 긋고 반응하지 않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 예수님께서 얼마나 잘 죽으셨는지 모릅니다. 마치 잠잠한 어린양과도 같았습니다. 마12:19에 "그는 다투지도 아니하며 들레지도 아니하리니 아무도 길에서 그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했습니다.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어야 마땅한데도 대응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참으시니까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조용한 것처럼 교회가 조용한 것은 아무 일이 없어서가 아니라 누군가가 참고 죽었기 때문입니다. 누군가가 죽어졌기 때문에 평안을 유지하고 모두가 평안한 마음으로 신앙생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10절 후반절에 "그리하다가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여 외치라 하는 날에 외칠지니라" 했습니다. 전반절에서는 소리 내지 말라. 후반절에서는 함께 외쳐라. 이것이 바로 죄에 대해서는 죽고 하나님과 그 의에 대해서는 사는 것입니다. 죄에 대해서는 반응하지 않지만 하나님과 그 말씀에는 반응하는 것이 잘 죽은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7. 인간의 사상과 지식과 생각을 물리치는 것입니다.
21절에 "그 성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온전히 바치되 남녀노소와 소와 양과 나귀를 칼날로 멸하니라" 했습니다. 이스라엘 군대가 여리고를 정복할 때 생명체는 다 멸해야 했습니다. 이들을 살려두면 번성하여 이스라엘의 대적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칼날로 멸했는데 칼을 우리에게 적용하면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엡6:17)입니다. 이처럼 우리 마음의 잘못된 사상 이론 전통 습관 생각 등 잘못된 것들을 하나님의 말씀 칼로 잘 쳐내야 합니다.
그래서 고후10:4-5에 “우리의 싸우는 무기는 육신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어떤 견고한 진도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모든 이론을 무너뜨리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한다고 했습니다.
잘못된 생각이나 주장이 사로잡으려고 할 때 거기에 동의하지 말고 물리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잠4:22-23에 “그것은 얻는 자에게 생명이 되며 그의 온 육체의 건강이 됨이니라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했습니다.
조용기 목사와 그의 장모 최자실 목사가 여의도에 그 큰 교회를 만든 것은 그것을 만들기까지 자기 생각과의 처절한 싸움에서 승리했기 때문입니다. 안 된다. 못한다. 절망 낙심 등 온갖 부정을 마음에서 추방하고 극복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절대 긍정의 믿음 가진 자에게 역사하십니다.
불신앙적 생각을 몰아내지 못하고 사탄이 시험하는 대로 낙심과 슬픔과 걱정과 타락과 시험 가운데 붙들려 있다면 그게 다른 말로 안 죽은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늘 성경을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내 생각이 변합니다. 지식이 변합니다. 그 말씀이 나를 붙들어줍니다.
8. 성령의 충만으로 마음이 변화되는 것입니다.
24절에 "무리가 그 성과 그 가운데에 있는 모든 것을 불로 사르고 은금과 동철 기구는 여호와의 집 곳간에 두었더라" 했습니다. 여기 불은 성령의 상징입니다. 성령의 불은 열심의 불이요 죄를 소멸하는 불입니다. 성령충만 받으면 여러 면에서 변화가 옵니다.
그것이 바로 성령의 열매입니다. 갈5:22-23에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 이 말씀은 성령을 받으면 미움도 사라지고 슬픔도 불평도 참지 못함도 긍휼도 불량도 불충도 무례함도 무절제함도 사라진다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성령의 불로 살라주시기 때문입니다.
사 6장에 이사야가 성전에 나아와 기도할 때 왕이신 하나님을 뵙고 소리쳐 탄식한 것은 자신의 부정한 입술 때문이었습니다. 어떤 언어적 실수를 했다는 것일까요?
성경의 배경으로 추측해 본다면 영웅 웃시야가 병들어 죽자 그는 큰 절망에 빠졌을 것입니다. 그래서 말하기를 ‘이제 우리는 지도자를 잃었다. 우리에게는 영웅도 없다. 열강의 위협은 날로 커져만 가는데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큰일났다. 망했다.’ 대충 그런 생각이 이사야와 그 시대 사람들의 생각이었을 것입니다.
그가 그런 회개를 한 이유는 사6:5에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하였더라” 한 말씀에 이유가 나타나있습니다. 하나님이 나라를 책임지시고 다스리고 계시는데 그 하나님을 모르고 사람의 생각으로 하나님 앞에 불경스런 말을 했었기 때문입니다.
10.26 사건으로 박대통령이 서거할 때 저도 그런 허탈감을 느껴보았습니다. 가난을 몰아내고 나라의 경제기반을 구축하고 국가 안보를 튼튼히 하며 일밖에 모르는 그 영웅 같은 대통령이 죽고 우리만 남았다는 생각에 그 허탈감이 컸습니다. 이사야가 그런 셈입니다.
그런데 그 잘못된 입술이 고쳐집니다. 사6:6-7에 “그 때에 그 스랍 중의 하나가 부젓가락으로 제단에서 집은 바 핀 숯을 손에 가지고 내게로 날아와서 그것을 내 입술에 대며 이르되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성령의 불로 사라졌습니다.
이처럼 우리 마음의 연약함에서 나오는 온갖 육신적인 마음들까지도 성령의 불 앞에서는 다 사라진다는 교훈입니다. 성령 받으면 강하고 담대하고 좌우로 치우치지 않고 굳세게 믿음으로 살고 악의 세력 앞에 굳게 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충만 받는 것이 자아를 죽이는 것이다.
9. 마음이 완고함에 돌아가지 않게 지키는 것입니다.
26절에 "여호수아가 그 때에 맹세하게 하여 이르되 누구든지 일어나서 이 여리고 성을 건축하는 자는 여호와 앞에서 저주를 받을 것이라 그 기초를 쌓을 때에 그의 맏아들을 잃을 것이요 그 문을 세울 때에 그의 막내아들을 잃으리라 하였더라"고 했습니다.
이 맹세는 500년 후에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왕상16:34을 보면 아합왕 때에 벧엘 사람 히엘이 여리고를 건축하였는데 그 터를 쌓을 때에 맏아들 아비람을 잃었고 그 문을 세울 때에 말째 아들 스굽을 잃었다고 했습니다. 이들 이름이 ‘존귀한, 고귀한’ 이런 뜻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자아가 다시 출현하면 고귀한 것이 희생된다는 경고입니다. 장자를 잃듯 우리 영혼에 은혜가 떠날 것이고, 말째를 잃듯 우리 육체도 평안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는 길은 어떤 가운데서라도 내가 나타나지 않고 죽는 것입니다. 즉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의 주요 왕이십니다. 그렇다면 왕답게 섬겨야 합니다. 이 왕 중심으로 살 때 우리의 자아는 다 무너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나를 내려놓고 하나님을 우리 주와 왕으로 삼고 온전히 엎드려 경배하며 그 분의 뜻대로 사는 가장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출처: 한국강해설교연구원 글쓴이: agas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