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모악산(母岳山)의 지명이 삼국유사(三國遺事)와 고려사(高麗史)에도 금산(金山)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모악산으로 불린 것은 조선시대로 추측하고 있다. '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 6권의 기록에 의하면 모악산은 호남정맥(湖南正脈)의 중심에 위치하며 호남의 서안과 남부의 산봉우리를 이어주는 주봉(主峰)역할을 하고 있음을 볼수
있다.
[연려실 기술의 모악산]
"마이산(馬耳山)의 산맥은 서남쪽으로 가다가 북으로 뻗어 금구(金溝)의 모악(母岳)이
되며, 서남쪽으로 뻗어 순창(淳昌)의 부흥산(復興山)과 정읍의 내장산(內藏山)과 장성(長城)의 입암산(笠巖山). 노령(蘆嶺)이 되고, 또 남쪽으로는 나주부(羅州府) 금성산(金城山)이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동국여지승람(東國餘地勝覽)의 모악산 위치]
제34권 전주부(全州府)편, 태인현(泰仁懸)편, 금구현 편의 기록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모악산은 전주부 서남쪽 20리에 있으며, 금구현에서도 보인다." 또 "모악산은
태인현에서 동쪽으로 30리에 있다." 그리고 "모악산은 금구현에서 동쪽으로 25리에 있고, 태인에서도 보인다."
[금산사지(金山寺誌/金映遂 편찬)의 모악산 유래]
"이 산의 외산명(外山名)을 조선의 고어(古語)로 '엄뫼'라고도 불렀고, '큰뫼'라고도 칭하였던 것이다. '엄뫼'나 '큰뫼'라는 이름은 다 제일 수위(首位)에 참열한 태산(泰山)이란 의미로서 조선의 고대의 산악 숭배로부터 시작된 이름이다. 이것을 한자로 전사(轉寫)할 때에 '엄뫼'는 모악이라 의역(意譯)하고, '큰뫼'는 '큼'을 음역(音譯하여 '금(金)'으로 하고 '뫼'는 의역(意譯)하여 산(山)으로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금산사지'에 따른 다면 모악산은 큰산의 의미를 갖게 된다. 큰산으로 치면 모악산보다 높고 큰산이 많다. 왜 큰산의 의미로 '엄뫼'라고 불렀는지를 생각해보면 다른 지역에서도 '母'(모)의 의미로 산을 보려 했지만 유독 어머니가 아이를 껴안고 있는 형상의 전설이 우리지역에서 회자(膾炙)되었는가는 미명(美名)의 측면이 아닌 신화적(神話的) 접근으로 이해해야 될 것 같다.
모악산이 어머니인 것은 '징게맹경외애밋들'로 묘사하듯 넓고 비옥한 호남평야를 지탱시켜 김제시 자체만도 전국의 2.5%(강원도 전체 규모)의 쌀을 생산하고 있는데, 모악산은 북으로는 만경강을 남으로는 동진강을 발원시켜 우리나라의 도작문화(稻作文化)를 발생시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명산(名山)이 그렇듯 모악산 역시 수많은 삶의 잉태를 잉태해 낸 문화의 산실이요, 지키고 가꿔온 그대로 어머니의 산임을 다시금 느낄 수 있다. 모악산 문화는 호남평야를 품에 안고 이룩한 도작문화의 풍요성에서 기인한다고 보아야 할것이다.
동양최고의 수리시설인 벽골제(사적 제111호)는 김제시에서 월촌을 거쳐 신태인쪽으로 6km 정도가면 부량면 신용리 길 왼족으로 벽골제비와 제방이 나온다. 삼국사기에 백제 비류왕 27년(330년)에 축조하였고, 통일신라시대와 고려 때에도 수축하였고, 그후 조선조 태종 15년(1415년0에도 보수하였다고 한다. 지금남아 있는 제방은 남북으로 길이 3.3km 높이 5.61m의 규모이며, 5만6천평에 이르는 벽골제 사적지에는 긴 제방과 2개의 돌기둥으로 된 수문, 사적비 등이 있고 대규모 수리민속박물관을 건립하였다.
벽골은 '벼의골' 즉 벽골의 다름아닌데, 이는 바로 모악산과 이 금만평야의 역학관계로 파악해야 할 것이다. 삼국유사 2권에는 모악산은 금산(金山)으로 표기되어 있다.
아마 금산사(金山寺)란 이름은 여기에서 연유했을 것이다.
[택리지(擇里志)의 금산사 유래]
"모악산 남쪽에 있는 금산사는 본래 그터가 용추로서 깊이를 측량하지 못하였다. 신라때 도사가 여러만석의 소금으로 메워서 용을 쫏아내고 그 자리에 대전을 세웠다 한다. 네 모퉁이 뜰아래서 가느다란 간수가 주위를 돌아 나온다.
지금도 누각은 높게 빛나고 골자기 마을은 매우 깊숙하다. 호남에서 크고 이름난 가람이다. 전주부에서 대단히 가까운 거리에 있다."
[이 내용은 백제말의 거찰(巨刹)로 위축된 왕업의 위엄성을 고양하기 위해 엄청난 규모로 건축된 미륵사(彌勒寺) 개산(開山)의 유래와 유사하다. 그러나 금산사는 백제의
유민들이 제도화된 기존의 불교보다 미륵신앙에 더 매달렸다는 점이 이미 사라진 익산의 미륵사에 비해 그의 의미를 한층각별하게 하는 것이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 기록된 진표율사(眞表律師)]
"산에서 내려와 대연진(大淵津)에 이르니 갑자기 용왕이 나와서 옥가사(玉袈裟)를 비치고 팔만권속을 거느리고 그를 호위하여 금산사로 가니 사방에서 사람들이 모여들어 며칠안에 절이 완성되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송고승전(宋高僧傳)에 등재된 진표율사]
"진표가 산에서 내려올 때 남녀가 머리를 풀어서 진흙을 덮고 옷을 벗어 길을 깔고 방석 담요를 펴놓고 발을 밝게하고 화려한 자리와 아름다운 요로 구덩이를 메우기도 하였다. 진표는 정성되어 인정에 쫓아서 일일이 밝고 갔다."
[중국에서 내로라하는 스타급 고승들만 입전되는 '송고승전'에 저술하나 남기지 않은
변두리 국가출신인 진표율사(眞表律師)가 당당하게 들어갈 수 있었던 이유로 신통력(권능)과 관련이 있다.]
[동국여지승람(東國餘地勝覽)의 견휜이 금산사에 유폐된 사연]
"견휜의 어린아들 금강(金剛)은 키가 크고 지혜가 많으니 휜이 특별히 귀엽게 여겨 전위(轉位)할 생각을 가졌다. 청태(淸泰)2년 3월에 맏아들 신검(神劍)이 휜을 금산사에 가두어 장사 30명으로 하여금 지키게하고 드디어 왕위를 찬탈하여 금강을 죽였다. 휜이 금산사에 갇혀 있은지 무릇 석달이 되었는데 6월에 술을 가지고 지키는 자들을 먹여 모두 취하자 이에 막내아들 능예(能乂), 딸 애복(哀福), 첩 고비(姑比) 등을 데리고 나주로 도망쳐서 해로를 이용하여 고려에 돌아왔다 한다."
[야사에 의하면 견훤은 왕건보다 인물이 좋았고 당당한 체격과 외모를 지니고 있어 한번보는 사람은 반할 정도였다고 한다. 견휜은 시간만 나면 금산사 미륵전에 와서 살았다. 미륵의 힘을 받아 후삼국을 통일하기 위해서 였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금산사에서 이들에게 유폐당하고 만다. 역사는 반복된다더니 견휜과 신검의 부자관계는 이성계와 방원의 부자관계와 흡사하다. 이방원은 나라를 유지했지만 신검은 망해 먹었다. 결과적으로 견훤은 아들농사를 잘못지어 망한 셈이다.
[진묵대사의 칠언절구(七言絶句]
조선조 도승으로 그 유명을 떨친 진묵대사(震默大師)는 모악산을 빛낸 인물이었다. 김제시 만경면 화포리에서 불거촌 출생으로 조선시대 설화불교, 민중북교의 대표적 기승(奇僧)으로 유명하다. 특히 그의 어혼환생설화(漁魂還生說話)는 널리 회자된 바이다. 지금도 만경면 화포리에는 그의 어머님 무덤과 이를 관리하는 성축암, 그리고 진묵대사를 신앙하는 주행조양사(舟行組仰寺)등이 조앙산을 중심으로 남아있다.
대원사에 진묵대사가 거쳐했던 주공간이 있고, 그때 남겨진진묵대사의 호방한 기개를 보여주는 시구가 지금도 남아 전하는데 진묵대사의 조사전에 걸려 있는 칠언절구의 주련(柱聯)을 소개한다.
하늘은 이불이요. 땅은 자리니
산은 베개가 되는구나
달은 촛불이요 구름은 병풍이고
바다를 술통으로 삼는 도다.
거나하게 취하여서 일어나 춤추고자 하나
곤륜산에 소매자락이 걸려 아니꼽구나
모악산 "가다 못가면 쉬었다 가지‥"
793m 오르막 완만, 20~30분마다 안락한 쉼터
"하늘은 이불이요. 땅은 자리니/ 산은 베개가 되는구나/ 달은 촛불이요 구름은 병풍이고/ 바다를 술통으로 삼는 도다."
전북 완주군 구이면 원기리 일원에 위치한 모악산(母岳山ㆍ793m). 조선시대 이곳에서 수도했던 한 도승이 남긴 시구이다. 도승의 말대로 모악은 그다지 높지는 않지만 베개처럼 포근하고, 어머니 품속처럼 웅대하다.
1972년 12월 도립공원으로 지정된 모악산은 호남 4경의 하나. 변산반도의 녹음이 여름을 대표하고, 내장사와 단풍 가을에 자태를 뽐내고, 백양사의 설경이 겨울에 절경을 이룬다면, 벚꽃이 풍성한 모악산은 봄에 가장 아름답다.
금산사를 거쳐 오르는 산길. 졸졸졸 흐르는 계곡물은 봄이 멀지 않았음을 노래하고 있었다.
산책로처럼 완만하게 이어지는 등산로를 30분쯤 걸었을까. 모악정이라는 정자가 보이고 그 왼편으로 제법 가파른 오르막이 눈에 들어왔다. 800m도 안되는 작은 산이라 만만하게 보았는데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히고 숨도 차 올랐다.
쉬어갈 때가 됐나 했더니, 반갑게도 나무의자가 놓여있다. 이 길엔 이렇게 20~30분 걷다 쉬다를 반복할수 있게 쉼터가 마련돼 있다.
국내 산이란 산은 대부분 다녔다는 한 사람이 말을 건넸다. "등산에서는 쉬는 맛도 일품"이라고. "산행에 그다지 부담을 주지 않는 이 산, 자녀들 함께 찾으면 좋겠다"며 또 다른 이가 호응한다.
드디어 산 정상. 드넓게 펼쳐진 만경평야와 올망졸망한 구릉들이 한 눈에 들어왔다. 이 산이 왜 모악, 즉 '어머니 산'이란 이름이 붙었는지 별다른 설명 없이도 수긍이 간다.
옛부터 엄뫼, 큰뫼로 불려져온 모악산은 정상 아래에 자리잡고 있는 '쉰길바위'가 아기를 안고 있는 어머니의 형상과 같아서 모악산이라 칭해졌다고 한다.
이름처럼 모악산은 북으로는 만경강을 남으로는 동진강을 발원시키고, 호남평야를 품에 안으면서 우리나라의 도작문화(稻作文化)를 잉태했다.
그런 연유인지 모악산은 계룡산과 쌍벽을 이루는 민중신앙의 텃밭 노릇을 해왔다. 금산사는 미륵신앙의 본산이요, 신라말 견훤이 이 곳을 근거로 후백제를 일으켰으며, 조선조 말에 강증산은 대원사에서 도를 깨우쳐 증산교를 일으켰고, 이밖에 수 십 종의 신흥종교가 이 산에서 발원됐다.
그 자취는 지금도 유적으로 문화자원으로 남아있다.
금산사ㆍ대원사ㆍ수왕사ㆍ귀신사ㆍ청룡사ㆍ용화사 등 사찰과 미륵신앙의 본거지인 오리알터의 증산교 본부 등이 민중적 종교가 발생했던 현장. 지금도 금산사엔 현세와 내세의 행복을 구하는 행렬이 줄을 잇고 있었다.
다시 하산길. 정상에서 모악정을 향하는 길엔 갓대 밭이 길게 이어졌다. 그리고 지천에 퍼져있는 진달래와 벚꽃나무. 아직은 시린 계곡물에 얼굴을 씻으니 모악의 아름다운 봄이 상상 속에 성큼 다가왔다.
◇등산코스 ▦구이중학교-대원사-수왕사-정상-헬기장-심원암-금산사(10km, 3시간40분) ▦주차장-금산사-케이블카-정상-수왕사-대원사-구이(10km, 3시간30분) ▦주차장-금산사-케이블카-헬기장-염불암-금선암-중인리-(11km, 4시간) ▦주차장- 금산사-청룡사-배재-장근재-헬기장-정상-케이블카-금산사-주차장(12km, 4시간30분)
◇현지교통 ▦전주에서 모악산 상학행 좌석버스 이용 종점 하차(1시간 간격ㆍ25분 소요) ▦전주에서 시내버스 운암교, 원안덕, 미치, 대모, 원백행 시내버스 이용 구이중학교 앞 하차(20분 간격ㆍ25분 소요)
◇도로안내 ▦호남고속도로 전주IC-전주시내(전북도청앞)-순창방면 27번 국도- 원기리 구이중학교 앞 100미터 지나면 모악산 입구 진입로
◇먹거리 ▦도토리묵ㆍ산채비빔밥ㆍ순두부백반(소라네집 063-222-1999, 등산로상회 063-221- 1365, 모악산 순두부 063-221-08980) ▦민물고기매운탕(호수산장 063-222-9138)
◇관광코스 ▦전주-구이상학-대원사-구이상학-구이저수지-상관면 죽림온천 ▦전주-송광사- 위봉사-마애석불-소양면 화심온천 ▦전주-모악산-죽림온천-송광사-위봉사-마애석불- 화심온천-운장계곡-대아저수지-경천저수지-화암사-대둔산
◇문의 ▦완주군청 문화공보과(063-240-4227) ▦모악산 도립공원 관리사무소(063-548-0734)
/김제= 글ㆍ사진 문성진기자 hnsj@sed.co.kr
고려의 개국 과정을 그린 드라마 ‘왕건’(KBS1)이 방송되고 있다. 초반의 산만한 전개에서 벗어나 주인공들의 개성이 부각되면서 보는 재미가 점점 깊어진다. 후삼국의 영웅은 왕건, 궁예, 견훤 등 세 호걸.
현재까지 드라마에서 어깨를 펴고 있는 인물은 궁예와 견훤이다. 파죽지세로 세력을 넓히고 있는데다 이미 황제의 칭호까지 듣고 있다.
역사에 비참하지 않은 패배가 있을까. 둘은 결국 왕건에게 패하고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 미륵불의 현신을 자처하던 궁예는 지나친 폭정으로 왕위에서 쫓겨나 백성들에게 맞아 죽는다. 폭압자에 어울리는 인과응보일 수 있다. 견훤의 최후는 조금 다르다. 스스로도 가슴이 미어질 만큼 불쌍한 죽음을 맞는다.
지평선으로 해가 떠서 지평선으로 해가 지는 전북 김제. 한반도에서 가장 너른 들판 한켠에 모악산이 우뚝 서 있다.
모악산 남쪽 자락에 자리잡은 금산사(金山寺)는 호남 미륵신앙의 터전이다. 백제 법왕 원년(599년)에 임금의 복을 비는 사찰로 처음 지어졌으니 만 1,400년이 넘었다. 10세기 초에 활동했던 견훤의 모습을 가장 가까이서 보았고 그의 죽음과도 인연이 깊은 곳이다.
후백제는 고창(古昌)에서 왕건에게 대패하면서 갑자기 망국의 내리막길을 달렸다. 그 때 견훤의 억장을 완전히 무너뜨린 것은 다름 아닌 맏아들 신검.
넷째 아들 금강에게 왕위를 물려주려는데 불만을 품은 신검은 아버지를 잡아 가두는 집안 쿠데타를 일으켰다. 지키는 군졸에 술을 먹인 후 천신만고 끝에 탈출한 견훤은 왕건에게 투항하고 아들에게 칼을 겨누며 후백제 멸망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는 왕건으로부터 후한 대접을 받았지만 황산(논산)의 한적한 산사에서 등창에 걸려 곧 죽음을 맞았다. 울분과 번민으로 얻은 병이었다.
금산사는 신검이 아버지 견훤을 잡아 가둔 유폐의 절이었다. 견훤은 이 절에서 석달간 갇혀있으면서 배신에 치를 떨며 자식에게 복수를 다짐했다.
그후 1,000여 년이 흘렀다. 그 때의 주인공들은 이미 역사의 한 켠으로 밀려나 있지만 미륵정토 금산사는 그 허망한 권력싸움을 비웃듯 여전히 강건한 모습으로 남아있다.
모악산의 옛 이름은 엄뫼와 큰뫼. ‘어머니의 산’이자 ‘큰 산’이란 의미다. 사방이 평야였던 이 곳에서 모악산은 자연스럽게 숭배의 대상이었다. 한자로 이름이 바뀌면서 엄뫼는 지금의 산 이름이, 큰뫼는 절 이름이 되었다.
금산사는 김제의 너른 벌판을 닮아 시원스럽고 장중하다. 일주문 금강문 불이문 등을 차례로 지나면 학교 운동장만한 마당이 나타난다. 마당 한가운데에는 후백제의 비운을 기억하라는 듯 큰 소나무 한그루가 ‘누워있다’. 육중한 절 건물들은 이 소나무를 중심으로 둘러서 있다.
이 절은 통일신라시대 불교의 5대 흐름 중 하나인 법상종의 원찰이었다. 모두 11개의 국보와 보물이 있어 예전의 위용을 증명한다. 중생의 머리를 절로 숙이게 하는 곳은 보물 제62호인 미륵전. 밖에서 보면 3층이지만 안은 모두 터져있다.
법당 안에는 10㎙가 넘는 미륵불이 자애로운 표정으로 내려다 본다. 머리를 조아리고 ‘나무아미타불’을 읊조릴 수 밖에 없다. 금산사에서 또 하나의 명물이었던 것은 보물 제476호였던 대적광전 정면 7칸, 측면 4칸 건물로 한반도에서 옆으로는 가장 긴 법당이었는데 1987년 12월 소실됐다.
드라마나 영화의 무대가 인기 여행지가 되고 있다. 드라마 ‘왕건’이 크게 성공할 경우 견훤의 비운을 간직한 금산사는 다시 한번 세상에 얼굴을 크게 드러낼지 모른다.
권오현 생활과학부차장 koh@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