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로마와 역사를 살펴봤으니, 이제 로마의 주요 성당을 살펴보자.
바실리카 콘스탄티니아노교회(산 조바니 인 라테라노 교회)
예수 승천 후 베드로는 로마를 선교지로 택했고, 유대교의 정통한 학자였 던 바울은 마케도니아로 건너가 전도를 시작함으 로써 유럽에 그리스도교가 전해 진다. 이로서 1 세기 중엽에 지중해로 퍼져가기 시작한 그리스도교는 초기의 유대인들의 반대에 부딪쳤다가, 로마 황제들의 박해를 거치며 음지에서 예배를 보던 기독교인들의 숫자가 늘어나 로마 인구의 10%에 달하자 이들의 협조가 필요해진 콘스탄티누스(그는 임종이 임박해서야 세례를 받았다)가 어머니 헬레나의 영향으로 기독교를 공인하고 이어 니케아 총회에서 국교로 선포하였다. 이후 카타콤베와 개인의 집에서 벗어나 본격적인 대형교회의 건립이 시작되었다.
기독교를 공인한 자리에 세워진 이 성당 자리는 정적으로 밀리우스 전투에서 패한 막센티우스 병사들의 막사가 있던 곳으로, 콘스탄티누스가 그를 무찌른 다음 막사를 허물고 성당을 세웠다는 이야기도 있다. 교회건설 지원에 나선 그가 세운 최초의 교회인 바실리카 콘스탄티니아노는, 후에 교회 옆의 부지를 제공했던 부자였던 라테라노의 이름을 따서 산 조반니(요한) 인 라테라노로 개명하여 로마의 주교좌가 되었다. 대성당과 붙은 우측 건물이 라테라노궁으로 그는 평민으로 최초의 집정관에 오른 인물로 그의 누이가 콘스탄티누스 1세와 재혼하면서 라테라노의 궁전이었던 자리는 황제에게 양도되었다 한다.
기독교를 공인한 역사적인 자리에 세워진 이 교회는 아비용 유수가 있기 전까지 교황청의 궁전으로 사용되었다가 이후 13세기에 두 차례의 화재로 소실된 것을 16세기 식스토 5세가 중건하였다. 18세기 중엽에 교황 클레멘스 12세가 공모를 거쳐 바로크 양식으로 재건한 것이라 건축물 자체는 거대하지만 별로 볼 것이 없으나, 세계 교회의 어머니로 불리며, 5차례의 세계 공의회가 열렸던 유서 깊은 장소다.
대성당 앞에는 이노세트 3세 교황 시절에 이 성당을 방문했던 아씨시의 성 프란시스의 동상이 서있다. 젊은 시절 세속생활에 물들었다가 로마 순례에서 구걸하는 걸인을 보고 개심하여 평생 가난한 삶을 살기로 결심한 그는 생전에 사제 서품을 받은 적은 없지만 봉사활동으로 그의 선종 후 2년 뒤인 1228년 성인의 자리에 오른다. 1210년 ‘한 가난한 수사가 무너져가는 라테라노 대성당 기둥을 어께로 받치고 있는 꿈’을 꾼 날 그가 찾아오자, 이노센트 3세 교황은 프란치스코회 수립을 인가하였다.
콘트라베에서 선출된 교황이 이 대성당으로 와서 미사를 집진하는 공식행사를 마치고 교황좌에 착석하는 순간부터 교황은 전 세계 가톨릭으로부터 권위를 인정 받으니, 이 대성당은 세계에서 서열이 가장 높다. 옆의 사진은 대성당 천정 의 것으로 베드로의 열쇠가 있는 이 문 양은 교황좌가 있는 대성당에서만 사용 할 수 있는 것이다. 궁전 앞의 높이 47m의 오벨리스크는 기원전 15세기 것으로 이집트 테베의 암몬 신전에 있던 것을 357년 콘스탄티누스 2세가 강탈해와 막시무스 경기장으로 옮겨놓은 것을 1587년 식스토 5세가 지금의 자리로 다시 옮긴 것으로 로마에 있는 오벨리스크 중에서 가장 높다.
교회 맞은편의 스탈라 상타(거룩한 계 단)는 예수가 빌라도총독에게 다가가면서 밟았다는 28개의 계단을 326년에 대제의 어머니인 헬레나가 예루살렘에서 옮겨 온 것이다. 초기에는 라테라노궁전에 설치했으나, 1589년 교황 식스토 56세가 건축가인 도메니코 폰타나를 시켜 성 계단 성당을 완성하여 지금 위치로 옮겨 온 것이라 한다. 얼핏보면 성당으로 뵈지 않는 자그마한 성계단성당의 교황 개인 기도실인 산 로렌초는 출입이 불가하다.
성당 2층으로 오르는 계단은 3개가 있으며 그 중 가운데 것이 스칼라 상타로, 나무를 덧쓴 28개의 흰 대리석 계단은 지금도 순례자들은 무릎으로 오르는 고행의 계단으로 삼는다. 워낙 많은 순례자들이 무릎으로 올라 반질반질하고 계단의 나무도 패였다. 무릎으로 오르기 힘든 사람은 계단 가로 조용히 걸어 오르면 되는데, 로마를 방문했던 비대한 마틴 루터는 무릎으로 오르기에 실패한 뒤, ‘사람이 구원을 얻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믿음이지 어떤 행위를 통해서가 아니다.’라 했다는 에피소드가 전해온다. 매사에 패자의 변명이라는 것은 구차한 것이나, 신심과 육체의 한계는 별개라는 것을 그는 체험 했나보다.
산 피에트로 인 빈콜리 성당, 성 베드로 사슬성당
콜로세움을 끼고 돌면 보이는 언덕으로 오르면 관청처럼 보이는 누런 건물이 빈콜리 성당이다. 15세기 중엽에 건설된 작고 아담한 이 성당은 외관이나 내부는 별로 볼만한 게 없지만 순례자와 미술 애호가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이 성당은 황제 발렌티니아누스 3세의 아내인 에우도치아 황비가 세운 것으로, 그녀는 예루살렘 감옥에서 베드로를 묶었던 쇠사슬을 교황 레오 1세에게 기증한다.
‘교황이 로마의 메르티노 감옥에서 베드 로가 묵혔던 쇠사슬과 비교하려고 함께 놓았을 때 그것들이 하나로 붙어버렸다.’ 는 기적을 전해들은 황후의 명으로 지은 이 성당은 에우도치아 성당이라고도 불 린다. 중앙현관은 바치오 폰텔라가 1475 년에 만든 것이며, 24개 기둥이 밭치고 있는 1503년에 증축한 측랑은 줄리아노 다 상갈로의 작품이다.
베드로가 묵혔던 사슬
내부는 중랑(中廊)과 2개의 측랑(側 廊)과 3개의 후진(後陣)으로 구성되어 있고 제대 뒤의 우측 벽에는 쇠사슬 의 기적을 묘사한 파로디가 1705년에 그린 프레스코화가 객을 맞는다. 현시대 아래에는 4개의 기둥이 중앙제단을 받치고 있으며, 제단 뒤에 는 예루살렘 감옥에서 천사의 도움으 로 탈출하는 베드로를 그린 도메니코의 그림이 있고, 경당의 제대 위의 프레스코화는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그리스도’는 프란치오의 작품이고, 제단 아래에는 함께 붙은 쇠사슬이 성물함 안에 전시되어 있다.
8세기와 15세기의 보수를 거쳐, 18세기 초 건축가 폰타나에 의해 개축된 이 성당이 유명세를 타는 것은 쇠사슬과 미켈란젤로의 모세상 때문 이다. 교황보다 군주가 더 잘 어울릴 사람이란 기질의 율리우스 2세는 생전에 사치와 호색에 탐했지만, 그도 명이 다해가면서 그간의 죄업으로 지옥에 떨어지지 않고 후인들과 역사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성 베드로 성당을 허물고 그 자리에 자신의 영묘를 장엄하게 신축하기로 하고 1503년 3월 미켈란젤로를 부른다. 건축은 당대 최고의 건축가인 브라만테가 맡고, 영묘의 벽은 라파엘로가 장식을 맡고, 미켈란젤로는 찬란한 영묘를 세우기로 한 것이다.
미켈란젤로는 영묘에 놓일 조각상을 만들 대리석을 구하려고 대리석 산지인 토스카나의 까라라에서 7개월 동안 산을 뒤지고 돌아다니며 구한 대리석이 포구에 도착하고 경비가 문제가 되고 있을 때, 미켈란젤로에게 쏠리는 교황의 총애를 질투한 브라만테가 교황에게 ‘살아생전에 묘를 만들면 불길하다.’고 부추기자, 교황은 자신의 거대한 영묘에 흥미를 잃게 되고, 성 베드로성당을 새로 짓는 것이 기독교와 그 후손에게 영예롭다는 생각으로 바뀌어 영묘 대신 대 성당의 신축에 몰두한다.
이런 과정에서 영묘를 짓는 데 소요되는 대리석 대금 독촉에 시달리다 지친 미켈란젤로는, 1506년 4월에 무심해진 교황에게서 도망 쳤으나 동년 11월에 교황의 사과를 수용하고, 시스틴 성당의 천장화를 그려달라는 교황의 부탁을 받아들인다. 그러나 스위스 근위대를 만들어 교황청 호위를 맡기는 등, 호기가 넘쳤다는 율리우스 2세는 1513년에 선종하여 산 피에트로에 매장되었다.
이 기구한 운명의 모세상은 나중에 미켈란젤로의 나이가 70세 때 다시 손을 보게 되었는데, 너무 노령이라 처음 계획한 44개의 조각상을 만드는 게 불가능하여 모세상과 몇 개의 부속 조각을 다시 다듬어, 계획이 연기된 영묘에서 이 성당으로 오게 되었다. 2.35m 크기로 십계명이 새겨진 석판을 옆구리에 꽉 끼고 있는 모세 좌상은 인체의 두 배로 거대하며, 피에타, 다비드와 함께 미켈란젤로의 3대 대표작으로, 시나이산에서 십계를 받고 내려온 모세가 여전히 우상숭배 속에 빠져 있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십계명 석판을 던지기 직전의 분노의 시선으로 눈을 부릅뜬 순간을 묘사한 것이다.
율리우스 교황의 얼굴을 모델로 한 모세상이 머리에 뿔을 달고 있는 것은, 고린도서를 히브리어를 라틴어로 번역하면서 모세가 십계명을 받을 때의 '광채가 난 얼굴'을 잘못 해석하여 '뿔을 달고 있다'고 오역에서 야기되었다. 이 조각이 완성하자 미켈란젤로는 조각의 무릎을 두드리면서 ‘왜 말이 없느냐? 일어나라.’고 했을 정도로 사실성이 빼어나다.
원래 모세상과 함께 제작하기로 구상한 네 명의 노예상은 미완성으로 현재 피렌체의 아카데미아미술관에 전시되어있다. 모세상 옆의 두 개의 조각, 레아와 라헬도 미켈란젤로에 의해 시작은 되었으나, 모세상만 미켈란젤로가 완성하였고, 누워서 모세를 바라보는 교황상을 비롯한 나머지 조각은 모두 제자들이 마감했다. 재미난 것은 모세상은 교황의 얼굴이며, 교황상은 미켈란젤로의 얼굴을 모델로 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