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만주 횡도촌
1905년의 외교권 박탈은 사실상 대한제국의 종말이었다. 1907년의 군대해산으로 대한제국은 외교권도, 군대도 없는 나라가 되었다. 국왕은 순종이었지만 모든 주요직책은 매국 친일파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대한제국은 긴 어둠 속으로 빠져들었다. 춥고 긴 동토(凍土)였다. 국내에서는 더 이상 숨쉴 공간이 없었다. 그래서 국외로 나가 독립운동 근거지를 만들자는 구상이 나왔다. 국외에 독립운동 근거지와 군대를 만들어 결정적 시기에 국내 진공작전을 펼쳐서 나라를 되찾자는 ‘독립전쟁론(獨立戰爭論)’이었다. 이 운동을 따라가다 보면 공통적으로 만나게 되는 인물이 보재(溥齋) 이상설(李相卨:1870~1917)과 우당(友堂) 이회영(李會榮:1867~1932)이다. 이 운동은 두 차례에 걸쳐 진행된다. 첫 번째는 을사늑약 직후이고, 두 번째는 망국 직후이다. 이회영의 평생 동지였던 독립운동가 이관직(李觀稙)은 『우당 이회영 실기(實記)』에서 “1906년 여름 (이회영)선생은 광복운동의 원대한 뜻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국내에서만 행하는 것이 불리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고……이상설·유완무(柳完懋:悠?)·이동녕(李東寧)·장유순(張裕淳) 등과 심심밀의(深深密議) 해서 광복운동을 만주에서 전개하기로 했다”고 전한다. 만주에 독립운동 근거지를 건설할 적임자로 손꼽힌 인물이 바로 이상설이었다. 이회영과 함께 활동했던 아나키즘 계열 독립 운동가였던 이정규(李丁奎)는 『우당 이회영 약전(略傳)』에서 이회영이 이상설을 해외 독립운동 근거지 건설을 지도할 인물로 추천했다고 전하고, 이관직은 이상설 자신이 “내가 재주 없는 사람이지만 만주에 나아가 운동을 열고자 한다”고 자청했다고 서술하고 있다. 『우당 이회영 실기』는 “(이회영)선생이 성(城:서울) 모퉁이에서 만리절역(萬里絶域:멀리 떨어진 지역)으로 홀로 떠나는 지우(知友:이상설)를 전송했다”고 말했다. 이때 이상설의 나이 만 서른여섯이었다. 그가 1917년 망명지 연해주(沿海州) 니콜리스크(雙城子)에서 만 47세의 나이로 병사했을 때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통곡하고 두고두고 아쉬워한 것은 이유가 있다. 명실상부한 국사(國士)였던 그를 제치고 노선투쟁과 자리다툼을 벌이기는 어려웠으리라는 생각 때문이다. 망명 당시 이상설은 대한제국의 고관을 역임한데다 국제적 시야까지 갖추고 있었다. 양명학의 한 반향(班鄕)이었던 충북 진천군 덕산면에서 태어나 여섯 살 때 동부승지 이용우(李用雨)의 양자로 서울로 올라와 이회영과 같은 동네에서 자랐다. 그의 학문에 대한 일화는 많다. 십대 때 신흥사(新興寺)에서 학우들과 합숙하면서 수학·영어·법학 등 신학문을 공부했는데, 위당 정인보는 “통역 정도는 오히려 얕은데 속해서 스승 없이 영어에 능통하였다”라고 회고했다. 영어뿐만 아니라 프랑스어에도 능통했는데, 선교사 헐버트에게 배웠다고 전해지는 것은 회화일 것이다. 이회영의 동생 이시영은 “이상설은 모든 분야의 학문을 거의 독학으로 득달했는데 하루는 논리학에 대한 문제를 반나절이나 풀려다가 낮잠을 자게 되었는데 꿈속에서 풀었다고 기뻐한 일이 있다”고 회고했다. 정인보의 제자인 강화학파 민영규 교수는 “보재와 치재(恥齋:이범세)가 사랑채 뒷방에 몸을 숨기고 왕양명(王陽明)하며 하곡(霞谷:정제두) 등 강화소전(江華所傳)을 읽고 있었다”고 전하는 대로 소론가 자제답게 양명학을 공부했다. 이건창(李建昌)이 스물네살의 이상설을 율곡(栗谷) 이이(李珥)의 뒤를 이을 대학자로 지목한 것처럼 조선의 학문전통을 바탕으로 양명학은 물론 서양의 신학문까지 흡수한 인물이었다. 정인보가 “조정에서는 그(이상설)를 물에 뜬 돛대로 생각했고, 선비들은 주석(柱石)으로 의지했다”라고 말한 것처럼 스물여섯의 나이로 관제 개혁 전의 성균관 대사성에 해당하는 성균관 관장에 올랐다. 이건창이 “(이상설은)나라의 부유함의 상징이요, 백성들의 복이요, 사대부의 영예”라고 말한 것이 전혀 과장이 아니었다. 그러나 자신의 영달보다 나라의 앞날을 더 앞세우면서 고난의 인생길에 접어들게 된다. 1905년 정2품 의정부 참찬이던 이상설은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머리를 돌에 찧어 자살을 시도하는데 이 광경은 때마침 백범 김구가 목도하고 『백범일지』에 “옷에 핏자국이 얼룩덜룩한 채 여러 사람의 호위를 받으며 인력거에 실려 가면서 울부짖었다”라고 썼다. 을사늑약 체결 후 국외 독립운동 근거지 건설에 나서기로 결심하고 1906년 4월 18일 양부(養父) 이용우의 제사를 지낸 후 망명길에 나선다. 이관직은 이상설의 망명 행로에 대해 “웃는 얼굴로 선생(이회영)을 이별하고 인천항에 이르러 중국인 상선에 올라 상해로 잠항(潛航:배에 숨어서 바다를 건넘)하여 거기서 해삼위(海蔘威:블라디보스톡)를 경유해 용정촌에 안착했다”고 묘사했다. 용정촌이 현재의 연길 조선족 자치주 용정시인데, 이상설은 천주교 회장 최병익의 집을 매입해 서전서숙(瑞甸書塾)을 연다. 북간도면서 동만주에 속했던 용정촌은 북동쪽으로는 러시아령과 통하고, 남쪽으로는 두만강을 사이로 국내와 통하는 교통의 요지이고 무엇보다 교포들이 계속 이주하고 있어서 국외 독립운동기지로 적당한 장소였다. 국외 독립운동 근거지 건설 운동이 우리 역사에 끼친 중요한 업적은 좁은 반도를 벗어나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이다. 사대주의적 유학자들이 만든 쇄국은 독립운동가들에 의해 깨져나갔다. 이 시기 독립운동가들이야말로 국제화의 선구였는데 그 대표적인 인물이 이상설이었다. 이상설은 1907년 4월 용정촌을 떠나 네덜란드 헤이그의 만국평화회의에 갔다가 1908년 8월에는 미국 콜로라도주 덴버시에서 개최된 애국동지대표자회의(愛國同志代表者會議)에 참석하고 다시 블라디보스톡으로 돌아오는 등 세계를 무대로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이때 블라디보스톡에는 유림(儒林) 출신 의병장들도 망명해 있었다. 대표적인 인물이 강원도 춘천 출신의 유인석(柳麟錫)과 경상도 성주 출신의 이승희(李承熙)였다. 유인석과 이승희는 같은 유림이지만 사상적 배경은 조금 달랐다. 1908년 블라디보스톡으로 망명한 유인석은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1792~1868)의 문인이었는데, 이항로는 이(理)를 기(氣)보다 높이는 ‘이존기비(理尊氣卑)’ 사상을 갖고 있었다. ‘이’가 주가 되고 ‘기’가 역(役)이 되면 만사가 잘 다스려지고 천하가 편안해지지만 기가 주가 되면 만사가 어지러워지고 천하가 위태로워진다고 보았다. 이런 심전주리설(心專主理說)은 대외적 관점에서 리(理)를 명나라·소중화(조선)로 대치하고 기(氣)를 일본·서양으로 대치하면 강한 침략 저항논리가 될 수 있는 장점이 있었다. 그러나 국내적인 관점에서 리가 양반계급으로 대치되고 기가 일반 백성으로 대치되면 다시 성리학 체제로 회귀한다는 단점이 있었다. 이항로가 고종 3년(1866) 대원군이 철폐한 만동묘(萬東廟:명 신종·의종의 사당) 복설을 청한 것이 그의 이런 사상을 단적으로 말해준다. 이승희는 영남 유림의 거두였던 한주(寒洲) 이진상(李震相:1818~1886)의 아들이었다. 이진상은 남송(南宋)의 주희(朱熹:주자)와 조선의 주자학자들이 심(心)과 리(理)를 별개로 본 것과 달리 심(心)이 곧 리(理)라는 심즉리설(心卽理說)을 주장했다. 심즉리설은 조선의 주자학자들이 이단으로 몰았던 왕양명의 주요 사상 중의 하나이기 때문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양명학자로 자처하지는 않았지만 내용상으로는 양명학에 동조했던 셈이다. 이진상의 학맥인 한주학파에서 면우(俛宇) 곽종석(郭鍾錫:1846~1919)·회당(晦堂) 장석영(張錫英:1851~1929)·심산 김창숙(金昌淑:1879~1962) 등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배출된다. 이승희의 문집인 『한계유고(韓溪遺稿)』 연보는 이승희가 을사오적 참수 상소를 올렸다가 대구경찰서에서 옥고를 치렀고, 1907년 국채보상운동 때는 경상도 성주 국채보상회(國債報償會) 회장을 역임한 개신유학자였다고 전한다. 이승희는 1908년 5월 블라디보스톡으로 망명해 함북사람 김감리(金監理)의 집에 거주할 때 헤이그에서 돌아온 이상설을 만난다. 『한계유고』 연보는 1909년 러시아령 연추(延秋)를 거쳐 그해 겨울 동가강(冬移住) 밀산부(蜜山府)로 이주했다면서, “선생(이승희)이 보재(이상설)와 상의해 황무지를 매입하고 먼저 한기욱(韓基昱)의 집에 들어가 우거하면서 한인들에게 입주해 개간할 것을 청하니 비로소 백여 호가 되어 한흥동의 규약(民約)과 학사(學舍)를 설치하고 마을 이름을 한흥(韓興)이라고 했다.”고 전한다. 이렇게 망국 이전 만주 용정촌에 이어 한민족이 흥하는 터전이란 뜻의 국외 독립운동근거지 한흥동(韓興洞)이 개신 유림과의 합작으로 만들어진다.
독립방략
누군가는 뒤에 오는 세대를 위해 씨를 뿌려야 한다. 또 누군가는 미래를 위해 거름이 되어야 한다. 그렇게 꽃을 피운 미래 세대는 자신을 위해 씨를 뿌리고 거름이 되었던 선조들을 나라의 건국 정신으로 삼는다. 몸은 비록 죽었어도 희생자의 정신은 그렇게 역사와 함께 부활하는 것이다. 1908년 여름. 우당(友堂) 이회영(李會榮)은 두만강을 건넜다. 목적지는 블라디보스톡. 대한제국의 형체는 남아 있었지만 외교권과 군대가 해산된 나라는 종막을 향해 치달리고 있었다. 망국을 기정사실로 여긴 이회영은 나라를 되찾을 방책을 논의하기 위해 이상설을 찾아갔다. 대한제국 보병 부위였던 이관직(李觀稙:1882~1972)은 『우당 이회영 실기(實記)』에서 이상설이 이회영에게 세계정세를 이렇게 설명했다고 전한다. “러시아는 시베리아 철도에 쌍철(雙鐵:복선)을 부설하고, 만주와 몽고의 국경에 많은 군대를 배치하며 군함과 병기를 서둘러 제조하고 있다. 이것은 모두 일본에 대한 전쟁 준비를 하는 것이다. 미국은 일본 세력이 강성해지면서 동양 진출에 장애가 되자 그 세력을 좌절시키려 하고 있고, 중국 또한 왜적을 원수 보듯 미워하며 절치부심(切齒腐心)하고 있으니 중국이 비록 약하지만 4억 인구를 쉽게 볼 수는 없을 것이다.” 이상설은 “조만간 동양에 다시 전운(戰雲)이 일 것”이라면서 “모든 국력을 저축하여 준비하다가 좋은 기회를 잡아 의로운 깃발을 높이 들면 조국 광복을 기약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상설은 시대를 너무 앞서나갔다. 이상설이 말한 국제정세, 즉 일본과 미국·중국·러시아가 충돌하는 정세는 1930~40년대에야 조성된다. 이상설과 이회영은 토의 끝에 4가지의 운동방침을 정했다. “1, 지사들을 규합하여 국민 교육을 장려할 것. 2, 만주에서 광복군을 양성할 것. 3, 비밀 결사를 조직할 것. 4, 운동자금을 준비할 것.” 이상설과 이회영이 세운 방략의 핵심은 ‘국내에 비밀결사를 조직하고, 만주에 독립운동 근거지와 광복군 양성 기지를 만들고, 그를 위한 운동자금을 마련’하는 것이었다. 이후 다양한 운동 노선이 나오지만 한국 독립운동의 방략은 대체로 이 틀 내에서 진행되었다. 국외 독립운동 근거지 건설론이 망명 정부 수립으로 이어지고, 광복군 양성이 ‘독립전쟁론’으로 이어진다. 1940년대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광복군을 양성했던 것도 이 노선의 연장선상이었다. 이회영의 집안은 삼한갑족(三韓甲族), 또는 삼한고가(三韓古家)로 불린 명문가였다. 선조 때 영의정을 지낸 10대조 이항복(李恒福)을 필두로 영조 때 영의정이었던 이광좌(李光佐)·이종성(李宗城) 등 모두 여섯 명의 정승과 두 명의 대제학을 배출했다. 소론 온건파인 완소(緩少)로서 노론 일당독재가 계속되던 조선 후기에도 탕평책을 명분 삼아 정계에서 완전히 축출되지 않았다는 특징이 있다. 이회영의 부친 이유승(李裕承)도 이조판서와 우찬성 등을 역임했으니 삼한갑족이란 말이 과언이 아니었다. 이들이 만든 ‘비밀 결사조직’이 신민회(新民會)였다. 이회영의 부인 이은숙은 자서전 『서간도 시종기( 西間島始終記:가슴에 품은 뜻 하늘에 사무쳐)』에서 이회영이 “남대문 상동 청년 학원 학감(學監)으로 근무하시니, 그 학교 선생은 전덕기(全德基:목사)·김진호·이용태·이동녕 씨 등 다섯 분이다. 이들은 비밀 독립운동(신민회)의 최초의 발기인이시니, 팔도(八道)의 운동자들에겐 상동학교가 기관소(機關所)가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고 회고했다. 상동교회 부설 상동 청년 학원이 비밀결사 신민회의 산실이라는 이야기다. 그러나 신민회는 상동교회 외에도 영국인 배델(Bethell,E.T:裵說)이 발행하던 『대한매일신보』의 주필이었던 양기탁(梁起鐸) 중심의 애국계몽운동 세력과 안창호(安昌浩) 중심의 서북·미주 지역의 신흥 시민세력 등도 결집한 비밀결사였다. 당초에는 신민회가 조직 차원에서 국외 독립운동 근거지 건설운동을 전개했다. 인원과 자금을 신민회에서 분담하기로 했다는 뜻이다. 1949년 공보처에서 발간한 채근식(蔡根植)의 무장독립운동비사(秘史)는 이렇게 적고 있다. “1909년 봄에 서울 양기탁의 집에서는 신민회 간부의 비밀회의가 열렸으니……이 회의에서 결정한 안건은 독립기지 건설건과 군관학교 설치건 이었다……간부 이회영․이동녕․ 주진수(朱進洙)․장유순(張裕淳) 등을 파견하여 독립운동에 적당한 지점을 매수케 하였다. 이회영은 남만주를 유력(遊歷:여러 곳을 돌아다님)하며…….” 이회영·이동녕·장유순·이관식 등은 1910년 8월 초 경 비밀결사 신민회의 결의에 따라 압록강을 건너 서간도로 향했다. 이은숙 여사는 이때 이회영 등이 “마치 백지(白紙) 장수 같이 백지 몇 권씩 지고 남만주 시찰을 떠났다”고 전하고 있다. 한반도와 지형이 비슷한 압록강 건너편 남만주(서간도) 일대에서 국외 독립운동 근거지를 찾기 위한 도강(渡江)이었다. 이회영 일행이 남만주 일대를 답사하다가 약 한 달 후 귀국하니 나라는 완전히 망해 있었다. 이은숙 여사는 “이때 조선은 한일합방 당시라, 공기가 흉흉하여 친일파는 기세등등 살기(殺氣) 험악하고, 배일자(排日者:일본을 배척하는 자)는 한심 처량하지만 어찌하리요”라고 전하고 있다. 공포분위기가 나라를 뒤덮은 동토(凍土)였다. 한국을 강점한 일제는 한국민을 일본 헌법의 적용 대상에서 제외했다. 일왕의 위임을 받은 조선 총독이 제령(制令)으로 직접 통치하는 특별 지역이었다. 일왕의 칙령 제324호 1조는 “조선에서 법률을 요하는 사항은 조선 총독의 명령으로 규정할 수 있다”고 명시했는데, 조선 총독의 명령이 제령이었다. 강제 합병 당일인 1910년 8월 29일자 『조선총독부관보(朝鮮總督府官報)』는 ‘조선총독이 발하는 제령은 조선총독이 서명하여 공포 연·원·일을 기입하여 공포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선거로 구성되는 의회가 아니라 조선 총독에게 입법권도 있다는 뜻이다. 과거 독립기관이었던 사법청(司法廳)은 총독부의 일개 부서인 사법부(司法部)로 격하되어 총독 산하에 두었다. 조선총독은 행정·입법·사법권을 모두 장악한 전제군주였다. 게다가 군인 신분의 헌병(憲兵)이 칼을 찬 채 경찰업무를 수행하는 헌병 경찰제도를 시행했다. 서울에만 외국의 시선을 의식해 경무총장(警務總長)을 두었을 뿐 각 도는 헌병대장이 경무부장(警務部長:지금의 도경국장)을 겸임했다. 『조선총독부 관보(朝鮮總督府官報)』 1910년 12월 16일자는 조선총독의 제령(制令) 10호인 ‘범죄즉결례(犯罪卽決例)’에 대해 싣고 있다. ‘범죄 즉결처분 사례’라는 뜻인데, 핵심은 경찰서장 또는 그 직무취급자가 3개월 이하의 징역이나 금고, 그리고 백 원 이하의 벌금을 부과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사법부의 재판이 아니라 현역 군인인 헌병 경찰이 자의적으로 구속하거나 벌금형을 내릴 수 있었고, 태형(笞刑)까지 칠 수 있었다. 총독부의 행정명령을 어기면 재판 없이 구속되거나 벌금을 부과되고, 태형까지 맞아야 했다. 1912년에 12월 30일자 훈령(訓令) 제40호의 ‘태형 집행 심득(心得:준칙)’ 제1조에 따르면, “수형자를 형판(刑板) 위에 엎드려 눕히고 양팔과 두 다리를 형판에 묶은 다음 바지를 벗기고 둔부(臀部:궁둥이)를 태(笞:매)로 강타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일제는 매국노들과 각지의 양반 사대부들은 은사금을 주어 회유하는 한편 태형을 포함한 ‘범죄즉결례’로 일반 민중들을 위협했다. 물론 은사금을 거부한 사대부도 있었다. 유학자 송상도(宋相燾)는 『기려수필(騎驪隨筆)』에서 원주의 변필환(邊弼煥)의 부인 이씨가 어려운 처지에서도 은사금을 거부한 사례를 전한다. 이장(里長)이 “이 돈을 받지 않으면 내가 일본 경찰에 죽는다”라고 하자 “나라를 빼앗긴 마당에 초개(草芥)같은 목숨이 아까우냐?”고 크게 꾸짖었다는 것이다. 은사금을 받고 기뻐 날뛰는 사대부가 있는 반면 거부하는 사대부도 있었다. 『우당 이회영 실기』는 “당시 왜적이 특히 선생을 엄중하게 감시하여 근역(槿域:무궁화 강역) 산하에 머리를 눕힐 곳이 없게 되었다. 또 생사를 함께 하고 광복 운동의 길에서 손을 잡고 활동하던 동지 가운데는 왜적에게 붙어 작록(爵祿)을 받은 자도 있었고, 왜적의 압박이 두려워 낙심하고 귀가한 사람도 있었다”고 전하고 있다. 누구는 변절하고, 누구는 포기하더라도 누구는 이일을 해야 했다. 뒷 세대를 위해서. 이회영은 남만주의 유하현 횡도촌(橫道村)과 삼원보(三源堡) 추가가(鄒家街)를 독립운동 근거지로 삼았다. 이역 만주의 이 작은 마을들이 나라를 되살릴 터전이었다. 이회영은 집안의 세교(世交)를 통해, 교육 사업 때 맺게 된 인맥을 통해, 그리고 신민회를 통해 만주로 망명할 동지들을 물색했다. 망국의 역사는 이렇게 광복의 역사로 다시 시작되고 있었다.
일가망명
한 사회의 지배층이 권력이나 금력이 아니라 도덕성과 정신으로 일반 백성들의 존경을 받는 사회처럼 건강한 사회는 없다.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자신의 모든 것을 거는 지배층의 존재는 그 사회의 가장 강한 힘이다. 게다가 온 가족이 모든 것을 바쳤다면 더할 나위가 없다.
여류 독립운동가였던 정정화는 자서전 『장강일기(長江日記)』에서 일제는 ‘독립운동은 상놈들이나 하는 것’이라고 선전했다고 전하고 있다. 일제가 수작자(授爵者)들과 양반들에게 막대한 은사금을 내린 데는 독립운동을 상민들만의 것으로 만들어 천시케하려는 이런 교묘한 계산이 있었다. 정정화 여사의 이 말은 구한말 공조판서 등을 역임했고, 남작의 작위를 받았던 시아버지 김가진(金嘉鎭)이 1919년 10월 상해로 망명한 것에 일제의 선전이 큰 타격을 받았다는 뜻에서 한 말이지만 양반 사대부 출신으로 독립운동에 나선 인물이 그리 많지 않았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렇기에 사대부들의 횡도촌 집단 망명은 더욱 큰 가치가 있었다. 우당 이회영의 부인 이은숙은 자서전 『서간도시종기(西間島始終記)』에서 “(이회영이) 안동현(지금의 단동)에서 5백리 되는 횡도촌으로 가셔서 임시로 자리를 잡고, 석오(石吾) 이동녕씨 친족 이병삼(李炳三)씨를 그곳으로 먼저 솔권(率眷)해서 안정을 시키고, 앞으로 오는 동지의 편리함에 대한 책임을 부탁”했다고 전한다. 이상설·이회영·이동녕 등은 1906년 북간도 용정촌에 서전서숙을 설립했던 경험을 횡도촌 건설에 되살렸다. 이은숙 여사는 이회영이 이때 ‘이병삼에게 식량과 김장도 미리 준비하라고 부탁했다’고 전한다. 이런 준비를 마치고 귀국한 이회영·이동녕은 이은숙 여사가 “팔도에 있는 동지들께 연락하여 1차로 가는 분들을 차차로 보냈다.”고 회고한대로 집단 망명을 실행했다. 또한 이회영은 집안 형제들을 설득했다. 이관직의 『우당 이회영 실기(實記)』에는 이회영이 형제들에게, “지금 한일 합병의 괴변으로 인하여 한반도 산하가 왜적의 것이 되고 말았다. 우리 형제가 당당한 명문 호족으로서 차라리 대의가 있는 곳에 죽을지언정 왜적 치하에서 노예가 되어 생명을 구차히 도모한다면 어찌 짐승과 다르겠는가?”라고 설득했다고 전한다. 이회영은 만주로 이주해 일제와 싸우는 것이 “대한 민족된 신분이요 또 왜적과 혈투하시던 백사(白沙:이항복) 공의 후손된 도리라고 생각한다”면서 함께 만주로 가자고 설득했다. 이회영은 6형제 중 넷째로서 위로 이건영·석영·철영이 있었고 아래로 시영(초대부통령)·호영이 있었다. 이 당시 독립운동에 나섰던 명가 출신들에게는 봉건적 구습 타파에 앞장섰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회영은 첫 부인 달성 서씨와 사별한 후 한산 이씨 은숙(恩淑) 여사와 재혼하는데 이여사의 자서전 『서간도시종기』에는 “무신년(1908) 10월 20일에 상동 예배당에서 결혼 거행을 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전통 명가 출신이 교회에서 혼인식을 올린 자체가 사건이었다. 이회영과 같이 활동했던 권오돈(權五惇)은, “(이회영이) 집 안에 거느리고 있던 종들을 자유민으로 풀어놓기도 했고, 남의 집 종들에게는 터무니없게도 경어를 썼다.”고 전한다. 횡도촌에 합류하는 석주 이상룡(李相龍)의 연보인 『선부군유사(先父君遺事)』도 이상룡이 망명하기 전 “노비 문서를 다 불태워서 각각 흩어져 돌아가서 양민(良民)이 되게 했다”고 전한다. 이상룡의 사돈이기도 했던 왕산(旺山) 허위(許蔿)도 마찬가지였다. 1908년 13도창의군 군사장(軍師長)으로서 의병들의 서울진공작전을 총지휘했던 허위는 1904년 의정부 참찬으로 임명되자 제출한 10가지 개혁안 중에 아홉 번째가 “노비를 해방하고, 적서(嫡庶)를 구별하지 말자”는 것이었다. 신분제, 남녀차별 같은 봉건적 인습이 조선 사회를 낙후시켜 식민지로 전락시켰다는 뼈아픈 반성이 담긴 행위였다. 이정규는 『우당 이회영 약전』에서 “(이회영)선생의 의견을 듣자 (형제) 모두가 흔연히 (망명에) 찬동하였다”고 전한다. 보통 봉제사(奉祭祀)를 위해 한 사람은 남았지만 이회영 형제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식민의 땅에서 드리는 제사를 조상들이 흠양하지 않으리란 생각이었으리라. 그러나 여섯 대가족의 망명 준비는 쉽지 않았다. 이은숙은 『서간도 시종기』에서 망명준비에 대해서 이렇게 회고했다. “여러 형제분이 일시에 합력하여 만주로 갈 준비를 하였다. 비밀리에 전답과 가옥․부동산을 방매(放賣)하는데 여러 집이 일시에 방매를 하느라 이 얼마나 극난하리오. 그때만 해도 여러 형제 집이 예전 대가(大家)의 범절로 남종 여비가 무수하여 하속(下屬)의 입을 막을 수 없는 데다 한편 조사는 심했다.” 급매하다 보니 제값도 받을 수 없었다. 그렇게 일가가 전 가산을 정리해 마련한 자금은 사십여만원으로 당시 3원 정도이던 쌀 한 섬을 기준으로 환산하면 현재 약 육백여억원의 거금이 된다. 일가가 이런 거금을 마련할 수 있었던 데에는 둘째 석영의 동참이 결정적이었다. 이은숙 여사가 “영석장(潁石丈:이석영)은 우당 둘째 종씨(從氏)인데, 셋째 종숙(從叔) 댁으로 양자(養子) 가셨다. 양가(養家) 재산을 가지고 생가(生家) 아우들과 뜻이 합하셔서 만여 석 재산과 가옥을 모두 방매”했다고 전하는 것처럼 고종 때 영의정을 지낸 이유원(李裕元)에게 출계(出系)해 상속 받은 만여 석 재산을 내놓았던 것이다. 1911년 발생하는 105인 사건으로 신민회의 자금 모금 계획에 차질이 생기면서 이회영 형제의 재산이 주요한 ‘광복 자금’이 되었다. 이회영 일가는 가산을 급히 정리하고 서울을 떠나 신의주에 도착했다. 이은숙 여사는 “신의주에 연락기관을 정하여, 타인 보기에는 주막(酒幕)으로 행인에게 밥도 팔고 술도 팔았다.”라고 전하고 있다. ‘타인 보기에는 주막’이 이건승·홍승헌 일행이 달포 이상 몸을 숨겼던 신의주 사막촌(四幕村)이었다. 이은숙 여사는 압록강 도강 장면에 대해, “국경이라 경찰의 경비 철통같이 엄숙하지만, 새벽 세 시쯤은 안심하는 때다. 중국 노동자가 강빙(江氷:얼어붙은 강)에서 사람을 태워 가는 썰매를 타면 약 두 시간 만에 안동현에 도착된다. 그러면 이동녕씨 매부 이선구(李宣九)씨가 마중 나와 처소(處所)로 간다.”고 묘사했다. 압록강을 건넌 망명객들은 안동현에서 이동녕의 매부 이선구의 안내를 받아 횡도촌으로 향했다. 횡도촌에서는 이동녕의 친족 이병삼이 망명객들을 맞이했다. 이회영 일가는 워낙 대가족이었기에 여럿으로 나누어 각각 압록강을 건넜다. 이은숙 여사는 “우당장(이회영)은 며칠 후에 오신다고 하여 내가 아이를 데리고 떠났다. 신의주에 도착하여 몇 시간 머물다가 새벽에 안동현에 도착하니, 영석장(이석영)께서 마중 나오셔서 반기시며, ‘무사히 넘어 다행이라’하시던 말씀 지금도 상상이 되도다”라고 회고했다. 이은숙은 “12월 27일에 (이회영이) 국경을 무사히 넘어 도착하시니 상하 없이 반갑게 만나 과세(過歲:새해 맞이)도 경사롭게 지냈으나 부모지국(父母之國)을 버린 망명객들이 무슨 흥분 있으니요”라고 회고했다. 1910년에 나라는 빼앗겼지만 1911년 새해는 망명지에서 맞이한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1911년 정월 9일 6형제 일가족 40~60여 명은 말과 마차 10여대에 나누어 타고 안동현을 떠나 횡도촌으로 향했다. 이은숙은 “6~7일 지독한 추위를 좁은 차 속에서 고생하던 말을 어찌 다 적으리요. 그러나 괴로운 사색(辭色)은 조금도 내지 않았다”면서 “종일 백여 리를 행해도 큰 쾌전(快廛:큰 가게)이 아니면 백여 필이 넘는 말을 어찌 두리요. 밤중이라도 큰 쾌전을 못 만나면 밤을 새며 가는 때도 있었다.”라고 회상했다. 이렇게 6~7일을 달려 이회영일가는 횡도촌에 도착했다. 횡도촌에는 먼저 도착한 정원하·홍승헌·이건승 같은 소론계 강화학파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각자 고향을 떠나 이역만리 작은 마을 횡도촌에서 상봉한 것이었다. 강화학파의 행적을 추적한 서여(西餘) 민영규(閔泳珪) 교수는 「강화학 최후의 광경」에서 “두 행차가 서로 교차되는 순간, 응당 거기엔 억제되었던 감정의 폭발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이때 이건승이 남긴 망명 기록 『해경당수초』 3책 어느 구석에서도 그러한 흔적을 찾아내지 못한다. 비정하리만큼 무장된 함구(緘口)가 있을 따름이다”라고 전하고 있다. 망국에 무한책임을 느끼는 선비들로서 망명지에서 상봉한 것을 마냥 기뻐할 수는 없었다. 또한 순탄하지 못할 앞날도 감정의 표출을 자제케했다. 훗날 민족단일전선 신간회의 회장이 되는 월남 이상재(李商在)는 이회영 일가의 망명소식을 듣고, “6형제의 절의는 참으로 백세청풍(百世淸風)이 될 것이니 우리 동포의 가장 좋은 모범이 되리라.”라고 평했다. 그러나 동포의 가장 좋은 모범에게는 이후에도 시련의 길만이 기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