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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요한복음 제6강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말씀/요5:1-29
요절/요5:25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오늘 말씀은 예수님의 세 번째 표적입니다. 표적은 놀랍기도 하지만 그 안에 어떤 의도가 포함되어 있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의 표적은 그 사건을 통해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나타내고자하는 의도가 담겨있습니다. 요한복음 20장 30,31절은 말합니다.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이처럼 표적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나타내고 예수님을 통해 생명을 얻게 하려는데 있습니다. 우리는 표적을 통해 예수님이 어떤 분인가를 발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어떤 분입니까?
때는 유대인의 명절입니다. 그 명절은 유월절, 오순절, 장막절 중에 하나일 것입니다. 이 명절이 되면 유대인 성인 남자는 예루살렘 성전에 가서 제사를 드려야 했습니다. 갈릴리 가나에 계셨던 예수님도 규례를 따라 예루살렘에 올라가십니다. 예루살렘은 이들로 인해 북새통을 이루며 들뜬 축제 분위기가 됩니다. 예루살렘 성 주위로는 여러 문들이 있는데 그 중에 양문이 있었습니다. 이 문은 명절 때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제사 드리기 위해 양을 몰고 들어오는 문입니다. 그 문 곁에는 ‘베데스다’라 불리는 연못이 있습니다. '베데스다'는 ‘자비의 집’이란 의미입니다. 연못 주위에는 행각 다섯이 있는데 행각은 햇빛이나 비를 피하고자 지은 벽이 없는 집입니다. 이 행각에 많은 병자가 모여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이 연못에는 옛날부터 전해 내려오는 전설이 하나 있습니다. 천사들이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움직이게 하는데 물이 움직인 후에 제일 먼저 들어가는 사람은 무슨 병에 걸렸든지 낫는다는 것입니다. 이 전설이 진짜일까요? 아무튼 이 전설을 믿고 연못 주위에 많은 병자들이 모여들었습니다. 이곳에 모인 병자들은 당시 의술로는 치료할 수 없는 맹인, 다리 저는 사람, 혈기 마른 사람들입니다. 사람이 아프면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낫고 싶은 것이 병자의 간절한 마음 아니겠습니까?
동병상련이라고 그들은 평소엔 서로의 딱한 처지를 동정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연못물이 조금이라도 움직일 기미가 보이는 순간 아비규환이 펼쳐졌습니다. 친구가 친구의 다리를 붙들고 늘어지고 친구가 친구의 그런 손을 짓밟았습니다. 연못의 이름은 ‘베데스다’ 자비의 집이지만 이곳에 자비는 없었습니다. 경쟁에서 낙오되어 떠밀려온 사람들이 모인 이곳에는 더 치열한 경쟁이 펼쳐지고 있었습니다. 결국 그나마 덜 아픈 사람, 힘이 남아 있는 소수의 사람만 바늘귀를 통과해 1등을 차지할 수 있었습니다. 나머지 사람들은 다음에는 내가 1등을 할 수 있으리라는 실낱같은 희망을 붙들고 오늘도 비루한 인생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바로 거기에 누가 있었습니까? 오늘의 주인공 38년 된 병자입니다. 당시 평균 수명이 40세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38년 동안 병자 신세라니 상상이 되십니까? 이런 사람에게 무슨 희망이 있겠습니까? 그가 언제 이곳에 왔는지는 잘 모르지만 오랜 세월 자신의 병 때문에 고통했을 것입니다. 그저 죽지 못해 사는 인생이다고 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사회에서 이미 이 사람을 잊은 지 오래였습니다.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투명 인간입니다.
그러나 다들 성전 안으로 들어갈 때 예수님은 거절당한 자, 잊혀진 자들이 모여 있는 베데스다 연못으로 향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명절의 흥분된 분위기를 뒤로 하고 소망 없던 38년 된 병자를 찾아오시고 주목하여 보셨습니다. 세상 모든 사람이 그를 포기하고 잊으려할 때, 심지어 자기 자신마저 자신에 대한 기대와 희망을 접을 수밖에 없을 때, 그를 잊지 않으신 분이 계십니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유일한 분이 계십니다. 그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6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이 그에게 물으셨습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왜 이런 질문을 하셨을까요? 웬만한 보통 사람에게 던진 질문이라면 하나마나한 질문입니다. 그러나 38년 된 병자에게는 이야기가 다릅니다. 사람이 반복해 절망하다 보면 그 절망 상태에 적응하게 됩니다. 병든 상태가 자연스러운 상태가 되고 맙니다. 이런 사람에게 나을 수 있다는 희망을 품으라는 것은 사실상 그를 고문하는 것이나 다름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에게 나을 수 있다는 희망을 말씀하십니다. 회복을 말씀하십니다. 새로운 삶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왜냐면 예수님께는 죽음을 이기는 생명의 능력이 있고 예수님은 회복의 희망을 현실로 만들어주실 수 있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질문에 병자의 대답이 어떻습니까? 7절을 보십시오. “주여, 이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여기서 ‘주여’라고 부르지만 이것은 예수님을 메시야로 영접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모르는 사람이 찾아와 자기에게 말을 걸어주고 관심 가져주니까 그냥 감사해서 ‘주여’라고 부른 것입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병자의 말투는 심드렁합니다. 그의 말은 이런 의미입니다. “관심 가져줘서 고맙소만 나를 도와줄 사람이 없어 저 싸가지 없는 것들이 선후배도 없이 지들만 먼저 내려간다니까요. 정 나를 생각해준다면 물이 움직일 때 내가 먼저 들어갈 수 있게 도와주시오.” 그는 자신 앞에 서 있는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기껏해야 베데스다 경쟁에서 이기게 해줄 도우미 정도로 생각합니다.
병자의 말에 예수님은 어떻게 반응하셨습니까? 베데스다 연못 가장 가까운 쪽으로 데려다주셨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대신 말씀하셨습니다.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그러자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 사람이 즉시 곧 바로 나았습니다. 38년 동안 한 번도 스스로 일어나 본 적 없던 그 사람이 자리를 들고 일어났습니다. 뚜벅뚜벅 걷기 시작했습니다. 이 사람은 아무 것도 한 일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다만 그를 긍휼히 여기셔서 고쳐주신 것입니다. 베데스다 연못물은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38년 된 병자는 고침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병자를 향한 주님의 마음이 움직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주권적으로 일방적인 은혜를 베풀어주셨습니다. 진정한 자비의 집, 베데스다는 바로 예수님입니다.
베데스다 연못가는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세상의 축소판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과거에 비해 엄청난 발전을 이루었습니다. 한국 영화가 아카데미 작품상을 타고 한국 회사의 스마트폰과 자동차가 세계 시장에서 잘 나가고 있습니다. 세계 지도자들이 K-방역을 부러워합니다. 많은 외국인들이 한국을 살기 좋은 나라, 코로나 방역도 제일 잘하는 나라라고 말들 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화려한 대한민국이 전부는 아닙니다. 그늘에서는 오늘의 좌절과 절망을 곱씹고 있는 세대가 있습니다. 취업문이 바늘구멍이 된 지 오래 되었습니다. 부동산값이 폭등해 내 집 마련은 언감생심 꿈도 꾸기 어렵게 되었다고 아우성입니다. 소수 금수저들은 어쩔지 몰라도 상당수 흙수저들은 기댈 곳이 없습니다. 흙수저는 흙수저끼리 치열한 경쟁을 뚫어야 겨우 그럴듯한 자리를 얻을까 말까입니다. 그들은 가끔 천사가 내려와 주식시장이나 암호 화폐, 비트코인 시장을 동하게 하는데 그때 가장 먼저 들어가는 사람이 대박난다는 신화를 굳게 믿어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대박 신화의 주인공은 언제나 내가 아니고 남입니다. 치열한 경쟁에서 밀려난 사람들은 더 깊은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사람들 사이에서 점점 잊혀져 갑니다. 어느 새 회복되고자 하는 희망도 없이 무기력과 절망감, 불만불평과 남탓에 찌든 채 38년이란 세월이 흐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들을 잊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끝까지 희망의 끈을 놓지 않으십니다. 세상의 베데스다는 움직이지 않을지라도 진정한 베데스다이신 예수님의 심장은 긍휼과 자비로 꿈틀거리며 뛰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눈과 발은 움직여 그들에게 향하고 계십니다. 또 예수님은 당신의 몸인 교회 공동체가 자비의 집, 긍휼의 집, 은혜의 집, 명실상부한 베데스다가 되길 원하십니다. 지금 우리의 눈은 어디를 향하고 있습니까? 우리의 발은 어디를 향하고 있습니까? 우리의 심장은 무엇으로 인해 뛰고 있습니까? 우리가 세상의 화려한 성공신화, 근사하고 세련되고 멋진 곳만 바라보고 향해 가고 그런 것들로 인해 심장이 뛸 것이 아니라 38년 된 병자와 같은 사람들을 바라보고 그들을 향해 가고 그들을 위한 자비와 긍휼로 우리 마음이 움직이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 안에 진정한 희망과 생명이 있다고 전해야겠습니다.
38년 된 병자가 나음을 받은 날은 안식이었습니다. 어둠과 절망 속에 있던 병자가 건강과 평안을 얻었으니 얼마나 기쁜 날입니까? 하지만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이를 못마땅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들에게는 이 사람이 낫거나 말거나 아무 관심이 없었습니다. 안식일법이 더 중요했습니다. 안식일인데 자리를 들고 걸어가는 것을 보고 율법을 어겼다고 비난을 합니다.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한 영혼이 생명을 얻는 것보다 율법 조항에 묶여 있는 자들이었습니다. 원래 하나님은 안식일 규례를 복잡하게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하지만 유대 장로들은 39가지의 안식일 규례를 유전으로 만들어 백성들을 얽어맸습니다. 무거운 안식일 규례 때문에 안식일이 평안과 기쁨의 날이 아니라 부담스럽고 얽매이는 날이 되게 했습니다. 유대 지도자들은 안식의 참 의미를 전혀 모르는 종교인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는 것을 보고 정죄하고 있습니다. 깔판 드는 것이 안식일을 범한 노동이라고 생각한 까닭입니다. 당시 안식일법을 어긴 것은 생명의 큰 위협이 되는 그런 문제였습니다. 두려웠을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를 낫게 한 이가 자리를 들고 가라 그랬다고 둘러댑니다. 하지만 그는 자기를 누가 고쳐주었는지 모르고 있었습니다. 왜냐면 예수님께서 이름도 안 가르쳐 주시고 재빨리 피하셨기 때문입니다. 이후 예수님은 성전에서 은밀하게 그를 만나셨습니다. 이렇게 말씀해주십니다.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얼핏 들으면 죄를 지으면 이전보다 더 건강이 나빠질 수 있으니 죄를 짓지 않도록 주의하라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그런데 38년 동안 병을 앓는 것보다 더 심한 것이 생길 수 있을까요? 여기서 죄를 범하는 것은 예수님의 은혜를 부인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더 심한 것이 생긴다는 것은 예수님의 은혜를 부인함으로 영생을 얻지 못하고 심판에 이르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육신의 질병을 고침 받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은혜를 믿고 힘입어 영생을 얻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이없게도 그는 예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곧바로 유대인에게 조르르 달려가 꼬지릅니다. “나 보고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한 사람은 바로 예수라는 사람입니다. 난 그저 그 사람이 시킨 대로 했을 뿐이라고요.” 그 결과 예수님은 유대인들에게 안식일법을 여겼다는 죄목으로 거센 공격을 받게 되었습니다. 다 죽어가던 사람을 살린 일이 그렇게 욕먹을 일입니까? 병 나은 사람이 도로 가서 깔판 깔고 다시 드러누워야 그들의 직성이 풀릴까요?
예수님은 박해하는 자신을 변호하십니다.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내 아버지는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은 안식일에 일하실까요? 쉬실까요? 당연히 일하십니다. 만약 하나님이 안식일이라고 쉬시면 세상은 그 즉시 엉망진창이 될 것입니다. 이 사실은 유대인들도 인정하는 바였습니다. 안식일에도 사람이 태어나고 죽는 것을 보며 그들은 하나님께서는 안식일에 생명을 부여하는 일과 심판하시는 일을 쉬지 않으신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내 아버지’라고 표현하신 것에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저 하나님이 아버지라서 아버지라고 했을 뿐입니다.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하는데 이게 왜 문제입니까?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몰랐습니다. 그들은 무지했습니다. 그래서 안식일법을 어긴 것으로도 모자라 감히 하나님을 친아버지라고 부르다니 신성모독이라며 길길이 날뛰었습니다. 저런 자는 당장 돌로 쳐죽여야 한다며 코를 씩씩 불었습니다. 아이러니한 점은 이날 가장 안식을 누리지 못하고 있는 사람은 바로 그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감시하고 추적하랴, 병 나은 사람 추궁하랴, 예수님을 죽일 음모를 꾸미느라 하루 종일 분주하고 바쁘고 정신없었을 것입니다. 안식은 정작 자신들이 누리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안식일법의 본질적인 의미를 제대로 지키지 못한 것입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누가 신성모독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아들을 비난하고 박해하는 바로 그들입니다.
안식일의 본질이 무엇일까요? 베를린 예술대 교수이자 철학자인 한병철 교수가 있습니다. 그는 대한민국을 ‘피로 사회’라고 규정합니다. 상당수 사람들이 반복적이고 누적된 피로 가운데 살아가고 있습니다. 어린 아이부터 노인들까지 다 피곤하다는 말들을 하루에도 몇 번씩 합니다. 왜 그럴까요? 그만큼 갈수록 경쟁이 치열해지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남들보다 앞서 가려면, 적어도 뒤쳐지지 않으려면 달릴 수밖에 없습니다. 이럴 때는 쉬어도 쉬는 것이 아닙니다. 뒤처지고 낙오될까 두렵습니다. 이런 세대 가운데서 진정한 안식은 어디서 얻을 수 있을까요? 참된 안식은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합니다. 내 인생의 주인은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내가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습니다. 오직 주님만이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생명을 받아 누릴 때 비로소 안식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죄의 욕망과 죽음의 두려움으로부터 자유함과 해방을 경험할 때 안식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야말로 우리의 진정한 ‘안식처’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일을 대신할 대리자로 삼으셨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아들이 아버지의 일을 대신할 수 있도록 하나님 아버지는 두 가지 일을 행하셨습니다.
첫째, 하나님께서 무엇을 하고자 하시는가? 하나님의 계획을 아들에게 다 알려주셨습니다. 아주 유명하고 오래된 식당이 있었습니다. 그 집만의 비법 레시피가 있는데 주인이 이제껏 그 누구에게도 그 비법을 알려주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유일하게 딱 한 사람에게만 레시피를 알려주었다고 합니다. 다름 아닌 식당을 가업으로 물려받을 아들입니다. 그 이유야 당연히 아들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면 다 알려주고 싶어집니다. 사랑하면 비밀이 없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아들을 사랑하사 아들에게 모든 것을 알리시고 보여주십니다. 그러면 아들은 어떻게 합니까? 아들이신 예수님은 자기 뜻대로 맘대로 하지 않으십니다. 아버지께서 알려 주신대로 아버지의 뜻대로 모든 일을 행하십니다.
둘째, 하나님은 자신의 고유 권한을 아들에게 위임해 주셨습니다. 직장 생활을 하고 계시는 분들은 아실 것입니다. 직장 상사가 쫀쫀하게 권한을 위임해주지 않으면 아랫사람은 아무 일도 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아들에게 두 가지 권한을 주셨습니다. 하나는 사람을 살리는 권한이고 다른 하나는 심판하는 권한입니다. 이 두 권한은 본래 하나님의 것이었는데 하나님이 이제는 아들 예수님의 손에 다 맡기셨습니다. 하나님이 원하는 자들을 살리심 같이 아들 또한 아버지의 뜻을 따라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살리십니다. 이제 모든 인간의 영원한 운명은 예수님께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인생들을 사망에서 생명으로, 심판에서 구원으로,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종노릇하던 데서 하나님의 자녀로 옮기는 것입니다. 이것은 죄와 죽음의 세력에 얽매여 있는 자들에게 자유와 해방을 주어 참된 안식에 이르게 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은 이 안식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다 마치시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심으로 이 프로젝트를 성공리에 다 이루셨습니다.
그러면 주님의 이 같은 안식 프로젝트가 우리 인간에게 어떻게 현재 삶에서 적용될 수 있을까요?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가는 구원의 역사가 무엇을 통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까? 25절을 보십시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바로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통해서’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자는 살아납니다. 38년 된 병자도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자리를 훌훌 털고 일어났습니다. 죽어 무덤에 묻힌 지 나흘이 된 나사로도 ‘나사로야, 나오라’하시는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무덤 문을 박차고 나왔습니다. 한 선교사님은 첫 1:1 말씀공부하는 날, 창세기 1장 31절 ‘하나님이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이 말씀으로 삶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의 음성을 영접하고 구원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이 말씀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을 믿고 우리 영혼이 구원받았다 이걸로 끝나는 걸까요? 아닙니다. 이 말씀은 구원받은 우리에게 현재도 여전히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생명력을 누리며 생명력 넘치는 삶을 살아가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이 생명이라고 말하면서도 그 생명력 넘치는 삶이 왜 나에게는 일어나지 않을까요? 적지 않은 세월을 말씀의 홍수 속에서 말씀을 들으며 살아왔지만 왜 그 말씀이 나를 변화시키지 못하고 생명력이 없어 보일까요? 미국의 한 목사님은 이렇게 말합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도 내 삶에 아무런 변화가 없는 것은 마치 짐을 가득 실은 15톤 덤프트럭이 시속 130km로 달려와 어린아이와 정면으로 부딪혔는데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 것보다 더한 기적이다.” 문제가 무엇입니까?
데살로니가전서 2장 13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끊임없이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도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가운데에서 역사하느니라.” 바울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을 때 믿는 자 가운데서 역사한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는다는 것은 단순히 듣는 것이 아니라 말씀에 대한 믿음과 마음가짐과 자세입니다. 저는 신대원에서 존경하는 역사신학 교수님이 있습니다. 기독교 역사에 있어 해박 다식할 뿐만 아니라 그 역사 가운데 일하시는 광대하신 하나님에 대해 은혜롭게 강의합니다. 그래서 저는 그 교수님을 존경하고 그분의 말씀을 그대로 믿고 그분이 하라는 대로 합니다. 어떤 책을 읽어보라고 추천하면 그대로 사서 읽어봅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는 이 같은 자세가 없을까 회개합니다. 인간 교수의 말도 존경하고 그대로 믿고 따르고자하는데 광대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경외하고 그대로 믿고 순종하고자 하는가? 우리는 어떻게 말씀을 받고 있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을 때 그 말씀은 우리 안에 역사하여 생명력 넘치는 삶이 될 줄로 믿습니다. 장차 주님 재림의 때에도 예수님의 음성을 듣는 자들이 생명의 부활에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표적을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사실이 무엇입니까?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은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셨고 말씀으로 38년 된 병자도 낫게 하셨고 말씀으로 죽은 자도 살리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을 심령 깊이 영접할 때 그 안에 생명이 살아나고 회복되는 역사가 있습니다. 생명력 넘치는 인생을 살게 됩니다.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하나님으로 대하기를 기도합니다. 그래서 주님의 말씀을 통해 살아나고 회복되고 생명력 넘치는 삶 되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