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구원을 받았는가?
1. 회심이란 무엇인가? 데살로니가 전서에는 참으로 "진짜 회심"이라고 할 수 있는 매우 현저하고도 아름다운 모습이 있다. 우리는 독자들과 함께 이 모습을 연구하기로 하자. 우리가 지금 큰 실수를 하고 있지 않다면, 즉시 흥미 있고 유익 된 연구를 하게 될 것이다. 이 연구는 이 글의 제목인 "회심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분명하고도 확실한 해답을 줄 것이다. 이것은 결코 작은 일이 아니다. 오늘날과 같은 시대에 위와 같은 질문에 대한 하나님의 해답을 얻는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요즈음 여러 사람이 하나님의 훌륭한 능력으로 회심했다는 소식을 듣는다. 그래서 하나님께 진실로 회심한 모든 심령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진심으로 감사하는 바이다. 우리는 신성한 회심의 절대적이고 필요 불가결한 우주적 필요성을 믿는다고 말로만 해서는 안된다. 사람이 어떤 직업을 가졌고, 또는 유대인이든, 헬라인이든, 야만인이든, 수크다아인이든, 종이든, 자유인이든, 개신교인이든, 로마카톨릭교인이든, 다시 말해서 국적이 무엇이든 간에 또는 교회에서의 직분이 무엇이든 또는 그의 신학적 신조가 무엇이든 간에 꼭 회심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직통으로 지옥과 연결된 넓고도 영원한 길목에 있게 된다. 진정한 의미에서 모태로부터 기독 신자가 된 사람은 없다. 또한 누구든지 교육으로 기독 신자가 될 수도 없다. 누가 태어나면서부터 또는 교육으로 또는 물세례로 또는 어떤 종교적 의식으로 기독 신자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치명적 실수이며 엄청난 기만이며 영혼에 대한 사단의 기만술인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신성한 회심에 의해서 기독 신자가 되는 것이다. 우리는 모든 사람의 마음에 하나님께로 향한 진실 된 회심이 절박하고도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을 진심으로 강조하는 바이다. 이것은 그냥 넘길 수 없는 일이다. 사람이 이것을 무시하거나 가볍게 본다면 엄청난 어리석음에 빠지게 된다. 자기 앞에 끝없는 영원한 내세가 펼쳐져 있는데도 불멸의 존재인 영혼이 자신의 회심의 엄숙한 문제를 거역한다는 것은 죄책감을 가질 수 있는 최대의 우매함인 것이다. 이 최대로 중요한 문제와 비교해서 어떤 것이라 할지라도 별로 견줄만큼 의미 있는 것은 없다. 우리 주위에서 분요하게 사람들의 생각과 에너지를 몰두시키고 빼앗아 가는 여러 가지 일들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께로 향하는 심령의 중요하고도 엄청난 회심의 문제와 비교해 볼 때 한낱 저울 위에 묻은 작은 먼지에 불과한 것이다. 모든 상거래의 투자라든가, 모든 돈 버는 계획이라든가, 이익 되는 투자의 흥미진진한 문제라든가, 모든 쾌락 추구 곧 극장, 음악회, 무도회, 당구, 카드놀이, 주사위 놀이, 경마, 사냥, 음주 등 이름 댈 수도 없는 수많은 여러 가지 일들 즉 이런 것들은 마음에 만족이 없는 가련한 사람들이 추구하고 붙잡으려고 하는 것인데, 이런 것들은 마치 아침 안개와 같은 것에 지나지 않으며, 물거품과 같은 것이며, 굴뚝의 연기이며, 가을 낙엽과 같이 모두 사라지고 없어지는 것이며, 후에는 고통스런 공허만 남긴다. 이런 사람들은 회심하지 못했기 때문에 만족이 없고, 그 심령은 구원받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어쨌다는 것인가? 무시무시한 질문이다. 상거래의 흥분과 정치적 싸움(권력투쟁)과 야망과 돈벌이와 쾌락 추구 끝에는 무엇이 남는가? 왜 인간은 죽음을 맞이해야만 하는가?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히 9:27) 누구든지 이 죽음의 문제를 뛰어 넘을 수는 없다. 이 죽음과의 싸움을 피할 길은 없다. 우주의 모든 재물로도 무자비한 원수 사단의 손에서 한 순간의 휴식도 취할 수 없는 것이다. 세상이 행할 수 있는 모든 의학적 기술로도, 모든 애정 어린 친척이나 친구들의 염려와 그들의 모든 눈물과 한숨과 간구로도 그 무서운 순간을 없앨 수는 없는 것이며, 공포의 왕 사단으로 하여금 그의 무서운 칼을 거두게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죽음은 어떤 인간의 예술로도 처리 될 수는 없다. 그 죽음의 순간은 인간의 생활의 모든 아름답고 매혹적인 것들과 마음의 이음줄이 끊겨지면서 틀림없이 찾아온다. 즐겁게 지냈던 사랑하는 친구들과 매혹적인 일들과 모든 탐욕의 대상물들은 포기되어져야만 하는 것이다. 세상이 천 개가 있다 할지라도 이 충격을 피할 수는 없다. 죽음은 대면하여 똑바로 보아야만 한다. 이것은 무서운 신비이며, 엄청난 사실이며, 확실한 실제인 것이다. 이 죽음은 하늘 아래 모든 회심하지 못한 남녀와 아이들 앞에 우뚝 버티고 서 있다. 죽음이란 년, 월, 일, 시, 즉 시간의 문제인데 그 시간 속에 있는 헛되고 공허한 그림자 같은 것들을 굉장한 실재를 갖고 있는 영원으로부터 분리시키는 분계선을 통과하는 것이다. 그래서 어쨌단 말인가? 성경에서 해답을 얻자. 성경 외에는 해답이 없다. 인간은 자신의 헛된 사상으로 선뜻 대답하려고 한다. 사람들은 죽음 이후에는 아무 것도 없다는 사상을 주입시키려 한다. "먹고, 마시고, 그리고 내일 죽자!" 이 얼마나 허황된 자만심인가! 그것은 헛된 속임수다. 이것은 이 세상 신에 의해서 가려진 인간의 바보 같은 꿈에 지나지 않는다. 어떻게 불멸의 영혼이 소멸될 수 있단 말인가? 에덴동산에서부터 인간은 결코 소멸되지 않는 영혼을 소유한 자가 되었다. "여호와 하나님이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창 2:7) 절대로 소멸되는 영혼이 아니다. 영혼은 틀림없이 영원히 존재한다. 회심을 한 사람이든, 또는 회심을 하지 않은 사람이든 영혼은 영원성을 지내고 있다. 오, 모든 사려 깊은 심령에 이 얼마나 무거운 생각인가! 어느 누구도 이 광대한 사상을 습득하지 못한다. 그것은 인간의 이해력을 초월하는 생각이다. 그러나 우리의 믿음을 초월하지는 않는다.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 보자. 성경은 무엇을 말하는가? 성경의 단 한 구절이 만개의 인간 마음의 주장과 이론을 쓸어버리기에 충분하다. 죽음은 소멸인가? 아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 9:27) "그 후에는 심판이 있다"는 말에 주목하시라. 이 말은 오직 자신의 죄 속에서 죽는 사람과 불신자에게만 해당되는 말이다. 기독교도에게는 성경 여러 군데에서 언급한 대로 심판은 영원히 지나갔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영생은 그리스도 안에만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 밖에 있는 모든 사람은 죽으면 그뿐이라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다. 죽음 이 후에는 심판이 있다. 그러면 심판은 어떤 모습으로 드러날까? 성경은 엄숙하고도 확실하게 말하고 있다. "또 내가 크고 흰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자를 보니, 땅과 하늘이 그 앞에서 피하여 간 데 없더라.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무론 대소하고 그 보좌 앞에 섰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이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바다가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 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 주매, 각 사람이 자기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지우니, 이것이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지우더라"(계 20:11-15) 이 모든 것들은 말씀이 표현하는 한 확실한 것이다. 거기에는 한 점의 이의나 거치는 것이 있을 수 없다. 생명책에 기록된 사람들에게는 전혀 심판이 없다.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들은 자신들의 행위에 따라 심판을 받을 것이다. 그래서 어쨌다고? 죽으면 끝이라고? 아니다. 오히려 불못 속에서 영원히, 영원히 있게 된다. 이 얼마나 엄청난 말씀인가! 회심하지 않은 사람은 그가 누구이고, 어떤 사람이든 간에 자기 앞에 죽음과 심판과 불못이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자신의 매순간의 맥박 소리는 점점 더 두려운 곳으로 끌고 가고 있는 것이다. 독자께서 머지 않아 영원 속에 빠져든다는 사실은 내일 아침 태양이 다시 뜬다는 사실보다 더 확실한 것이다. 그의 이름이 생명책에 없고, 회심하지 않았다면, 또한 그리스도 안에 거하지 않고 있다면 그는 틀림없이 그의 행위를 따라 심판을 받게 된다. 그리고 그 심판의 모습은 불못으로 나타날 것이요, 그것은 끝없이 영원한 것이다. 독자들께서는 이런 무서운 주제로 우리가 오래 상고하는 것에 대해 아마도 놀라움을 금치 못할 것이다. 그는 이렇게 묻고 싶을 것이다. "그 따위 말이 사람들을 회심케 할 수 있겠는가?" 설사 이런 말이 사람들을 회심시키지 못한다 하더라도 회심의 필요성은 알게 할 것이다. 그들에게 다가 올 절박한 위험은 알게 할 것이다. 다가 올 하나님의 진노에서 벗어나도록 권면은 할 것이다. 왜 축복 받은 사도는 벨릭스와 함께 "다가 올 심판"에 대해서 언쟁을 하였던가?(행 24장) 그것은 틀림없이 벨릭스로 하여금 그의 악한 길과 생활에서 돌이키게 하기 위해서 설득한 것이다. 우리 주님은 왜 청중들에게 영원한 곳에 대해서 계속적으로 강조를 했던가? 왜 주님은 자주자주 벌레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않는 곳을 말했던가?(막 9:48) 그것은 틀림없이 그들에게 위험을 알게 할 목적으로 하셨을 것이고 그러하므로 그들이 그 위험으로부터 도망하여 그들 앞에 제시된 소망을 붙잡고 피할 수 있도록 하신 것이다. 우리는 주님보다 더 현명한가? 우리가 그분보다 더 온화한가? 우리가 사람을 회심시키기 위해서 보다 나은 방법을 찾아낸 적이 있던가? 주님께서 당시 사람들에게 강조했던 주제와 같은 것을 독자들에게 강조한다고 해서 염려할 것이 있겠는가! 누구든지 회심하지 않으면 크고 흰 보좌 앞에 불가피하게 서게 되며, 불못에 던지운다는 확실한 말씀을 가지고 있는 우리가 교묘히 반대하는 사람들로부터 위축되어야 하겠는가? 그것은 하나님이 금하는 바다. 절대로 그렇게 되어서는 안된다. 우리는 회심하지 못한 독자들에게 엄숙히 말하는데, 이 중요한 영혼의 문제에 집중적으로 주의를 기울이기 바란다. 그 무엇도 이것에 대해서 독자로 하여금 거역하게 해서는 안된다. 세상의 어떤 걱정거리나 즐거움이나, 어떤 직업도 이 중요한 문제의 심각성에서 독자로 하여금 돌이켜 못 보게 해서는 안된다.
"사람이 세상 모든 것을 얻고 자기의 목숨을 잃으면 그것이 그에게 무슨 유익이 되겠는가?" 아니면 "사람이 자기 목숨과 바꿀 것이 무엇이겠는가?" (마 16:26) 오, 만일 당신께서 구원받지 못하고 회심하지 못했다면, 우리는 그대에게 지금 간청하노니, 이 문제를 심사숙고하고 구원받고 하나님께로 회심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기 바란다. 이것이 바로 그의 왕궁으로 들어가는 유일한 길이다. 그래서 우리 주님은 분명히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다. 그리고 당신도 최소한 이 문제를 알게 되기를 믿고 싶다. 그의 말씀은 일점 일획이라도 없어지지 않는다. 하늘과 땅은 없어지겠으나 그의 말씀은 절대로 없어질 수 없다.(마 24:35) 땅과 지옥의 모든 권세와 인간과 악마라 할지라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헛되게 할 수는 없다. 당신 앞에 두 길 중 하나가 놓여 있다. 지금 회심하든지 아니면 이후로 영원히 멸망하든지 둘 중 하나다. 이것이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의 인도를 받고, 이런 견해에서라면 우리가 접촉하는 모든 회심하지 못한 자에게 말로나 글로나 지금 이 순간 다가오는 진노에서 벗어나 축복의 구세주에게로 도피해야 한다는 절대적인 필요성을 열의를 다해서 열렬히 강조하는 것이 지나친 일이겠는가? 주님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분이다. 그분은 누구든지 자기에게 오는 것을 두 팔 벌리고 환영하고 계시다. 그리고 사랑스럽게 은혜의 말씀으로 "누구든지 내게로 오는 자는 결코 내어쫓지 않으리라"(요 6:37b)라고 말씀하신다. 2.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아니하면 성경은 성경의 권위에 머리를 숙이는 모든 사람에게 그것을 의심할 수 없도록 하고 있다. "너희가 어린아이들과 같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 18:3) 이 말씀은 그 말씀 자체의 영적 권위와 엄숙함과 함께 타락한 아담의 모든 후손들에게 적용되는 말씀이다. 이 지구상의 수십 억 인구 중 단 하나의 예외도 있을 수 없다. 회심(돌이킴)이 없이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뿐 아니라 그렇게 될 수도 없다. 회심하지 못한 모든 영혼은 하나님 나라 밖에 있는 것이다. 내가 누구며 어떤 사람이냐 하는 것은 조금도 문제되지 않는다. 만일 내가 회심한 사람이 아니라면 나는 사단의 수하에서 내 죄로 인하여 흑암의 권세 하에 있으며 지옥 길에 서 있는 것이다. 나는 도덕적으로 흠 없는 사람일 수 도 있다. 흠 없는 명사일 수도 있다. 높은 위치의 종교 지도자일 수도 있다. 또는 포도원의 일꾼일 수도 있다. 주일 학교 교사일 수도 있다. 복음을 시인했다고 하는 교회의 공직자일 수도 있다. 자격 있는 선교사일 수도 있다. 집사, 장로, 목사 또는 카톨릭 주교일 수도 있다. 또는 가장 자비심 많은 사람일 수도 있고, 종교단체나 자선단체에 아낌없이 바치는 기부금 수여자일 수도 있다. 그래서 타인으로부터 나의 인격과 도덕적 영향력 때문에 우러러 보임을 받는 자일 수도 있고, 선망의 대상일 수도 있다. 나는 이 모든 것을 갖춘 사람이거나, 또는 그 이상의 사람일 수도 있다. 나는 사람들이 바라는 사람일 수도 있으며, 모든 것을 소유한 자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심하지 못했다면 하나님 나라 밖에 있는 자요, 사단의 왕국에 속한 자요, 죄책감의 소유자요,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으로 직통하는 넓은 길목에 서 있는 자다. 이것은 바로 마태복음 18:3의 우리 주님의 말씀의 정확하고 분명한 의미이며 능력인 것이다. 이 말씀 앞에서는 피할 길이 없다. 그 말씀은 태양 빛과도 같이 분명한 말씀이다. 우리는 그 말씀을 그냥 지나칠 수 없다. 그 말씀은 우리 세상에 엄청날 정도로 위엄 있다고 할 수 있는 그런 위엄으로 이 지상에 있는 모든 회심하지 못한 사람들의 마음을 압도하고 있는 것이다. "너희가 돌이키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이 말씀은 거리를 배회하고, 짐승보다 못할 정도로 타락한 술주정뱅이에게나, 또는 회심하지 못한 상태에서 성전 직임을 맡은 자에게나, 또는 몇 날, 몇 주, 몇 달, 몇 년이라 할지라도 계속 금주하는 것을 자랑하며 항상 방정한 태도를 보이는 것으로 우월감을 갖는 절대 금주자에게나 동일하게 적용되는 말씀이다. 그들은 모두 똑같이 하나님 나라 밖에 있는 것이요, 똑같이 자신의 죄 속에 갇혀 있고, 똑같이 영원한 멸망으로 치닫고 있는 것이다. 술주정뱅이에서 돌이켜 방정한 사람이 될 수 있다. 그것은 도덕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매우 축복할 만 하다. 그러나 술 취함에서 돌이켜 절제하는 생활을 하는 것으로 자신의 도덕성을 자랑하며, 그러한 자만심으로 자신을 헛된 데로 자신을 속여 하나님의 아들의 나라로 들어가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도 사실이다. 술주정뱅이와 절제 자 사이에 외형적 차이점은 있다. 즉 금주 자는 자신의 절제하는 마음 위에 자신을 올려놓고 자신의 도덕성을 자랑한다. 그러면서 자기가 옳다고 하는 헛된 사상으로 자신을 속이고 있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는 그렇지 못한 것이다. 술주정뱅이는 틀림없이 잘못된 모습이다. 모든 사람은 술주정뱅이는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고 알고 있다. 그러나 회심하지 못한 상태의 절제 자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는 것도 마찬가지 사실이다. 둘 다 하나님 나라 밖에 있는 것이다. 전자나 후자나 다 하나님께로 회심하는 것이 절대 필수적인 것이다. 사회 각층의 여러 사람들로부터, 또는 여러 생활 수준의 사람들로부터, 도는 모든 피부색의 사람들로부터, 모든 사회 계급으로부터, 그리고 해 아래서의 모든 환경의 사람들로부터 동일한 질문을 받게 된다. 이런 크나큰 질문에 대한 해답에는 그들 모두에게 똑같이 적용되는 말이 있다. 그들의 외모가 어떻든, 사회적 지위가 어떻든 "너희가 돌이키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나는 돌이켰는가(회심했는가?" 라는 질문은 모든 사람에게 매우 중요하고도 엄청난 질문이다. 인간의 언어로 이 질문의 중요성과 위엄을 밝힌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것이다. 한 인간이 매일 또는 매년 이 귀한 질문에 대한 확실하고도 확정적인 해답 없이 계속 이 생각에만 몰두한다는 것은 최고의 어리석은 자로 지목 받을 수도 있다. 그래서 그것 때문에 더욱 죄책감을 느낄 수 있다. 만일 인간의 자신의 세상 문제를 불확실하고도, 가장 안정되지 못한 상태에 내버려둔다면, 그는 가장 악하고 못된 자기 무관심과 자기 부정이라는 송사에 자신을 드러내는 꼴이 된다. 그러나 영혼 구원과 비교해서 현세에서 무엇이 가장 긴박하고도 중요한 문제가 될 수 있을까? 불멸의 영혼의 유익과 비교해 볼 때(불멸의 영혼은 가장 중요한 영원의 실재이다.) 모든 세상 염려는 단지 여름 타작 마당의 겨와 같을 뿐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자신이 진실로 하나님께로 회심했다는 분명하고도 평안한 확신 없이 단 한 시간이라도 쉴 수 있다는 것은 도무지 말도 안되는 소리다. 회심한 심령은 구원받은 자와 구원받지 못한 자의 분계선을 통과한 사람이다. 그 분계선은 흑암의 자녀와 빛의 자녀를 구별하는 분계선이며, 이 악한 현세와 하나님의 교회를 구별하는 분계선이다. 회심한 심령에게는 사망과 심판은 뒤에 있고 오직 영광만이 앞에 있다. 그는 이미 그 자신이 천국에 있는 것처럼 천국을 확신할 수 있는 것이다. 실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으로 이미 천국에 속한 자가 된 것이다. 그는 흠 없는 자녀의 명칭을 소유한 자며, 어두움이 없는 내세를 소유한 자다. 그는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세주로 알며, 하나님을 자신의 아버지와 친구로 알며, 성령을 자신의 축복의 위안자, 또는 인도자와 선생으로 안다. 또한 천국은 자신의 밝고도 행복한 가정으로 안다. 오! 회심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가! 누가 그렇게 말할 수 있겠는가? "기록된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오직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믿는 자들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고전 2:9-10) 자! 이제 이 회심이 무엇인지, 참으로 우리가 이 문제에 대해서 하나님의 거룩한 인도하심을 받을 것인가? 거기에 한 점의 실수라도 있다면 치명적 재난으로 판명될 것이다. 많은 사람이 회심에 대해서 잘못된 생각을 갖고 있다. 참으로 우리는 이 제목 하의 매우 중요한 어떤 사실에서 결론을 내릴 수 있는데, 즉 그 사실이라는 것은 우리의 원수이며,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원수인 사단은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우리를 회심에 대해서 잘못된 길에 빠지게 한다는 것이다. 만일 사단이 계속적으로 사람들은 이 회심의 문제에 대해서 전혀 무관심케 하는 데로 이끌지 못한다면, 한 술 더 떠서 사단은 그 회심의 본질에 대해서 사람들은 눈을 가리게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한 사람이 여러 방법으로 이 세상 오락이 몹시 헛되고, 만족을 주지 못하는 것이라는 것을 감지하여 자신의 생활 변화의 긴급한 필요성을 알게 될라치면, 그 최고의 속임 자는 그런 사람을 오히려 종교적인 사람이 되게 하여 예배 형식과 의식과 행사에 바쁘게 하여 무도회나, 파티나, 극장이나, 콘서트나, 음주나, 놀음이나, 사냥이나, 경마를 다시 말해서 모든 쾌락이나 오락을 버리게 하면서 오히려 종교적 생활에 빠지게 하며 또 모든 종교 행사에 부지런히 참석케 하여 성경도 읽게 하고, 기도도 하게 하고, 구제도 하게 하며, 큰 종교 행사나, 그 지방의 자선 단체를 지원하는데 헌신하게 한다는 사실이다. 이런 것은 회심이 아니다. 사람은 위의 모든 것을 행할 수도 있다. 그러면서도 전적으로 회심하지 않은 상태에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한 독실한 종교인이 자기의 전 생활을 철야라든가, 금식, 기도, 금욕, 구제 행위 등을 실천하면서도 전혀 회심하지 않을 수도 있다. 이것은 마치 시들어 가는 나뭇잎이나, 꽃 등, 무가치한 대상물을 추구하면서 전 생활을 보내는 사냥꾼이나, 사려 깊지 못한 세상 취미 생활을 하는 사람과 동일하게 하나님의 나라와는 거리가 먼 생활인 것이다. 상기 두 인물(철저한 종교인과 세상 취미 생활자)들은 틀림없이 서로 외형적으로 크게 다르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회심하지 못했다. 둘 다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 밖의 사람들이다. 둘 다 자신들의 죄 속에 사는 사람들이다. 사실 하나는 "악한 행위(골 1:21)"에 몰입한 자요, 다른 하나는 "죽은 행실(히 6:1)"에 빠진 자다. 그들 모두가 그리스도 밖에 있는 자들이다. 그 둘은 다 구원받지 못한 자들이요, 소망 없고, 끝없는 고통의 길에 있는 자들이다. 만일 구원의 회심을 못했다면 다른 한 쪽과 마찬가지로 불과 유황이 타는 불못 속에서 자신들의 들어 갈 자리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다시 한 번 말하겠는데, 회심은 한 종교에서 다른 종교로 옮기는 것이 아니다. 사람은 유대교나, 이방 종교나, 마호멧교나, 또는 카톨릭교에서 개신교로 전환 할 수 있다. 그러면서도 전혀 회심하지 않을 수 있다. 틀림없이 사회적으로나 도덕적으로나, 지적 기준에서 볼 때 개신교인이 되는 것은 마호멧 교인이 되는 것보다 나아 보인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 다루고 있는 주제에서 볼 때 그들은 모두 공통 플랫폼에 있는 것이고, 둘 다 회심하지 못한 것이다. 진실로 이쪽이나 저쪽이나 마찬가지이겠지만, 회심하지 못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회심은 어떤 종교 제도에 영합하는 것이 아니다. 비록 그 종교제도가 항상 순수하고, 항상 건전하고, 항상 권위가 있는 제도라 할지라도 말이다. 사람이 기독교 내의 가장 존경스러운 종교 단체의 한 일원이 될 수는 있다. 그러면서도 회심하지 않고 구원받지 못한 사람으로 영원한 멸망의 길에 있을 수도 있다. 마찬가지로 신학적 신조에서도 그렇다. 사람이 어떤 위대한 기준인 종교적 신념에 가입할 수도 있다. 39개도(영국 국교의 신조)나, 웨스트민스터 고백이나, 요한 웨슬레의 설교문에나, 폭스나, 바클레인이나, 또는 어떤 다른 신조에 가입할 수도 있다. 그러면서도 전혀 회심하지 못하고 허물과 죄로 죽어 있는 상태에서 한 가닥의 소망의 빛조차 없는 비참하고도 영원한 우울한 장소인 지옥으로 향하는 길목에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한 가닥의 하나님의 생명조차 없는 사람에게는 아무리 합법적으로 종교 문답을 할 수 있다 해도, 그 종교적 제도나 신학적 신조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제도나 신조가 심령을 살릴 수 없고, 구원할 수 없고, 영생을 줄 수는 없다. 사람이 매일 매일 계속해서 맷돌을 돌리는 말과 같이, 한 해 한 해 종교라는 기계 장치 위에서 일 할 수도 있지만 그것은 황량하고 단조로운 죽은 행실로 제자리걸음만 하는 격이다. 그런 것이 무슨 가치가 있겠는가? 그 결과가 어떻게 될 것인가? 어디에서 끝장 날 것인가? 죽음! 맞다. 바로 끝은 죽음이다. 그래서 어쨌다는 건가? 아! 바로 이것이 문제다. 하나님께 이 질문의 중요성과 심각성이 보다 진지하게 알려지기를 바랄 뿐이다. 그러나 기독교 그 자체는 더욱 만월의 빛 가운데서 아마도 종교적 신념의 제도로서 옹호될 수도 있을 것이다. 사람이 지식적으로 영광스런 은혜의 교리와 함께 충만하고도 값없이 받는 복음으로, 행한 것 없이도 받은 구원으로, 오직 믿음으로만 되는 칭의에 거의 입문하여 기뻐할 수도 있다. 다시 말해서 이 모든 것들은 우리의 영광스런 신약적 기독교 교리를 구성하고 있는 것들이다. 사람이 이 교리를 믿고 기쁨을 지식적으로 시인할 수도 있다. 그는 능력있는 작가로 기독교 교리를 옹호하는 사람이 될 수도 있다. 또는 복음을 웅변적으로 열의를 다해 설교할 수도 있다. 이 모두가 사실일 수 있다. 그러면서도 그 사람이 전혀 회심하지 못하고, 허물과 죄로 죽은 자일 수도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이 귀한 복음의 진리에 익숙해진 나머지 오히려 마음이 굳어져서 스스로 속임을 당하고, 파멸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 복음의 진리는 그 사람의 이해력을 초월하지 못하고, 그의 양심에 도달되지도 못하고, 그의 마음을 감동하지 못하고, 전혀 그의 영혼을 회심시키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가장 극단적인 예만을 말한 것이다. 사람이 믿고 기뻐한다고 하면서, 또한 실제로 하나님의 복음을 설교하면서, 또는 기독교 교리의 가장 특이한 모든 진리를 가르치면서도 아직도 회심하지 못하고, 구원받지 못하고, 이루 말할 수 없는 비참한 영원의 길로 향하고 있다면, 이것보다 더 고통스러운 불행은 없으리라. 이 불행은 그가 한 때 믿고 죽어 가는 모든 사람의 귀에 가장 영광스런 복음의 소식을 실제로 설교한 적도 있었다는 사실을 상기하기 때문에 그 불행은 더욱 최고조에 달하는 것이다. 오! 독자여 당신이 누구며 무엇을 하는 사람이든 상관없이 우리는 당신에게 간청하는 바이다. 위와 같은 사실에 대해서 당신의 모든 주의력을 집중하길 바란다. 당신의 오류 없는 진짜 회심이 하나님 앞에서 확인될 때까지는 한시라도 안일한 마음을 갖지 않기를 바란다. 3.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지금까지 어떤 경우에라도 회심해야만 하는 절대적인 필요성에 대해서 알아보았고, 또 어느 정도 무엇이 참 회심이 아니라는 것도 지적했기 때문에 이제는 진짜 회심이 무엇인가를 알아보아야겠다. 그래서 성경 말씀의 확실한 가르침에 접근해야만 한다. 우리는 보다 못하지 않고, 보다 틀리지 않은 확실한 해답을 얻을 수 있을 것을 기대한다. 요즈음 많은 사람이 회심했다고 하는데 전혀 회심이 아닌 것으로 판명 난 것에 대해 몹시 염려되는 바다. 소위 회심했다고 하는 많은 간증이 나오고 또 그런 소문을 듣고 있는데 그것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비춰 볼 때 적합 되지 않다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회심했다고 고백하고 또 그렇게 믿어 주고 있는데, 그들이 단순히 무감각한 청중에 지나지 않음이 드러나고 있다. 그들 마음에는 내면 깊은 곳에서부터 영적 움직임은 없고, 양심에서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실제적 활동도 없고, 세상과 함께 철저한 부서짐이 보이지 않는다. 아마도 사람의 영향력을 받아 감정의 작용이 일어난 것이 아닌가 생각 들고, 또는 어느 복음 전도자의 감정이 그들의 마음을 휘어잡은 것이 아닌가 생각든다. 그러면서도 자아(self)는 판단 받지 않고, 오히려 세상과 자연에 대한 집착은 계속 있고, 하나님을 향한 깊은 열의는 없고, 또한 신약 성경에 기록된 회심의 특성을 지닌 그런 진짜 회심자는 없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진실하게 회심하는 그런 회심자를 찾고 있다. 우리가 지금 그러한 천박한 경우를 들어 설명하고, 시도하자는 것이 아니다. 다만 은혜로운 복음 전도 사업에 몰두하는 모든 이들로 하여금 성경의 밝은 빛으로 그 문제를 상고하기를 바라는 뜻에서 언급하는 바이다. 그리고 많은 복음 사역자들이 얼마나 성경 원리에서 이탈하고 있는가를 알리기 위함이다. 아마도 우리의 복음 사역에 많은 인간적 요인들이 있을 것이다.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영이 일하시도록 맡기지 않는다. 우리는 단순히 그리스도의 사역의 능력과 효율성 자체를 신뢰하는 믿음이 부족하다. 아마도 사람들의 감정을 움직이려는데 신경을 쓰고, 그들에게 감동을 주어 선풍을 일으키는데 많은 할애를 하는 것 같다. 아마도 좋은 결과를 보려는 욕심에서 많은 회심자들의 일시적 모습임에도 불구하고 우리 전도자들은 그들을 회심으로 인정해 주고, 공중 앞에서 공포까지 하는 것 같다.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우리들의 열의가 위축되겠는가? 그렇지 않다. 오히려 정반대다. 우리들의 열심을 더 강렬하게 해 줄 것이다. 우리는 남모르게 더 열심을 간구할 것이며, 공중 앞에서는 청중들에게 더 열렬히 호소할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역의 중요성을 보다 깊이 깨닫게 되고, 우리 자신의 사역에 대해서는 매우 부족하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우리는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으로부터 역사하심이 와야 함을 전적으로 확신해야 한다는 사실을 항상 소중히 해야 한다. 이런 생각이야말로 우리를 바른 자세에 있도록 하는 것이다. 그 바른 자세란 지상에서 행해지는 모든 역사하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께 자아를 비운 마음으로 의뢰하는 마음이다. 우리는 골방에서나 공중 앞에서나 회심의 영광스런 사역에 관한한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서 보다 똑바른 마음으로 직면해야 할 것이다. 그럴 때 황금 같은 알곡과 잘 익은 열매가 열릴 것이다. 그럴 때 진짜 회심자들이 나타날 것이다. 그런 회심은 그 회심 자체가 증거 되고,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회심자와 함께 회심의 신용장을 드러내 보일 것이다. 그럴 때 진실로 우리의 마음은 귀한 영혼들이 구원받음으로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높여 주시는 은혜의 하나님 아버지께 찬양하는 마음으로 충만하게 될 것이다. 이런 모습은 사람들이 회심한 경우를 일일이 세고, 우리들의 사역으로 그렇게 되었다는 자만심과 자기 만족 속에서 거들먹거리는 어리석은 우리들의 마음과 비교해 볼 때 참으로 귀한 모습인 것이다. 하나님의 보좌 앞에 머리를 조아리고 예배하는 마음 자세가 우리 자신의 이름을 위대한 설교자로 또는 대단한 복음 전도자로 땅 끝까지 드러내는 것보다 얼마나 훌륭하고 안전하고 행복한 자세인가! 진실로 영의 인격으로 판단해 볼 때 우리의 사역은 비교조차 되지 못한다. 하나님께 맡길 때 복음 사역의 위엄과 실제적 효과와 중요성은 드러나게 될 것이다. 우리 사역자들의 마음에서는 행복과 영적 평안함과 실제적 효과는 점점 증대 될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은 온전하게 되고 계속될 것이다. 이 모든 사실이 데살로니가 전서 1장에서는 어떻게 묘사되었는가를 알아보자.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는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 교회에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우리가 너희 무리를 인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도할 때 너희를 말함은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쉬지 않고 기억함이니"(살전 1:1-3) 이것은 참 기독교의 위대한 근본원리다.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형제들아 너희를 택하심을 아노라"(살전 1:4) 사도 바울이 어떻게 알았단 말인가? 바로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생활 속에 드러난 확실하고도 의심할 바 없는 증거로 알게 된 것이다. 즉 한 성도가 택함을 입었을 때, 알 수 있는 바로 그 동일한 방법으로 알았다. "이는 우리 복음이 말로만 너희에게 이른 것이 아니라 오직 능력과 성령의 큰 확신으로 된 것이니, 우리가 너희 가운데 너희를 위하여 어떠한 사람이 된 것은 너희 아는 바와 같으니라"(살전 1:5) 축복 받은 사도는 그의 일상생활 자체가 그 자신이 설교하는 복음의 해설자였던 것이다. 그는 복음으로 살았다. 바울은 성도들로부터 무엇을 요구하거나 강요하지 않았다. 바울은 그들의 짐이 되지 않았다. 그는 그들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값없이 설교했고, 그렇게 살기 위해서 밤낮 없이 일하고 수고했다. 그는 사랑스럽고 유순한 유모와 같이 그들 가운데 함께 있었다. 자신에 대해서나, 자신의 직분에 대해서나, 자신의 권위에 대해서나, 자신의 은사에 대해서나, 자신의 설교에 대해서나, 다른 지역에서의 기적 행함에 대해서 전혀 과장하는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오직 사랑하고 낮아진 자세에서 난체하지 않고, 열심을 다하는 헌신하는 사역자였다. 그러한 그의 생활 자체가 회심의 일을 했고, 그의 전 생활이, 그의 영이, 그의 생활 모습이, 그의 태도가, 그의 생활 습관이 그의 설교와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었던 것이다. 이런 모습은 모든 사역자들이 깊이 생각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천박한 사역이 사역자의 천박성에 결과임을 바울의 생활 태도로 믿게 된다. 능력은 어디에 있을까? 성령의 드러남이 어디에 있는 것일까? "충만한 확신"이 어디에 있는 것일까? 우리들의 설교에는 혹 이런 생활의 부족함은 없지 않은가? 유창한 언어구사가 많을 수 있다. 소위 재치라는 것도 많이 발휘할 수 있다. 사람들이 귀를 즐기고 사람의 생각에 영향을 주는 많은 것들이 일시적으로 유익을 줄 수도 있다. 그리고 단순한 호기심도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 그러나 오! 거룩한 기름부음은 어디 있으며, 살아 있는 열의와 깊은 진지함은 어디 있단 말인가? 그럴 때 일상 생활과 습관이 산 해설자가 되는 것이다. 이런 것이 어디로부터 오는 것인가? 주께서 그의 사역자들의 마음에 작용하여 그의 사역을 되살아나게 하기를 바랄 뿐이다. 그럴 때 우리는 사역의 열매를 보다 많이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지금 회심의 일이 사역자에게 달렸다고 주장하고 있는가? 천만의 말씀이다. 그런 괴기한 생각은 멀리멀리 안녕이다! 그런 일은 전적으로, 절대적으로 성령님의 능력에 의한 것이다. 지금 우리 앞에 펼쳐져 있는 데살로니가 전서 1장이 모든 의문점을 해소한다.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슥 4:6)는 말씀은 사역의 모든 부분과 매 경우마다 항상 바르게 붙들어야 할 말씀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성령님은 보통 어떤 도구를 사용하실까? 우리 사역자들에게 이 말씀은 너무나 중요한 질문이 아닐까? "주님의 마음에 드는"것은 어떤 그릇일까? 그것은 비고, 깨끗한 그릇이다. 우리는 과연 그런가? 우리는 자신을 비웠는가? 우리의 손은 깨끗한가? 우리의 교제, 우리의 방법, 우리의 환경은 깨끗한가? 그렇지 못하다면 어떻게 주께서 그의 거룩한 봉사에서 우리를 사용하실 수 있단 말인가? 우리 모두 하나님 앞에서 이 중요한 문제에서 은혜 받기를 바란다. 주께서 우리의 마음을 온통 감동하사 당신의 영광을 위해서 사용하실 수 있을 정도로 보다 합당한 그릇이 되게 하옵소서! 데살로니가 전서 1장을 계속 진행하자. 그 전체의 내용은 능력으로 가득차 있다. 한편에는 사역자의 특성이요, 다른 한편에는 사역 자체의 특성인데, 그 특성들은 우리에게 매우 세심한 주의를 요하고 있다. "또 너희는 많은 환란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도를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 그러므로 너희가 마게도냐와 아가야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는지라. 주의 말씀이 너희에게서부터 마게도냐와 아가야에만 들릴 뿐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는 너희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지므로 우리는 아무 말도 할 것이 없노라. 저희가 우리에게 스스로 고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너희 가운데 들어간 것과 너희가 어떻게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 돌아와서 사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며"(살전 1:6-9) 이것이야말로 참 사역이다. 그 사역은 그 자체에 신임장이 있는 것이다. 거기에는 헛된 것이나 불만족이 전혀 없다. 그 일에 대해서 어떤 비평도 할 수 없다. 거기에는 주님의 인침이 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의 마음에 분명함을 줄 수 있는 확고함이 있다. 회심의 역사는 행해졌고, 그 회심의 결과는 기쁨 충만함으로 뒤따랐다. 그 증거는 더 멀리 더 넓게 펴져 갔다. 그래서 사역자는 자신의 사역에 대해 말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데살로니가에 있는 회심자의 수를 세어 드러낼 필요도 없다. 모든 것은 하나님이 직접하신 것이다.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영의 사역이었는데 거기에는 실수가 있을 수 없고, 그 사역에 또 다른 말을 더할 필요조차 없게 된다. 사도는 충만한 확신으로 성령님의 능력을 의지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단순하게 설교한 것 뿐이다. 거기에는 헛됨도 없고, 그의 증거에 대해서 의심 할 수조차 없다. 그는 그 자신의 설교 내용을 믿고, 그 내용에 전적으로 몰입하여 설교했을 뿐이다. 그것은 어떤 단순히 알고 있는 지적 진리의 유창한 언어구사가 아니었다. 어떤 틀에 박힌 열매 없는 교리 강연이 아니었다. 절대로 아니고 말고다. 그것은 살아 있는 하나님의 영광스런 복음의 퍼부음이었다. 그것은 바로 모든 말씀의 의미를 깊숙이 느끼는 그러한 가슴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설교였다. 그리고 하나님의 성령에 의해 가슴에 와 닿은 모든 것을 수령한 것이었다. 데살로니가에서의 그의 사역이 그러했다.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이고, 실제로 있었던 것으로서 하나님의 영적 참 열매였던 것이다. 그것은 단순히 종교적 흥분도 아니고, 선동도 아니고, 들뜸도 아니고, 리바이벌 붐을 일으키려는 시도도 아니었다. 모든 것이 아름다울 정도로 고요했다. 사도 행전 17장에서 사도는 "데살로니가에 이르니 유대인들의 회당이 있는지라, 바울이 자기의 규례대로 저희에게로 들어가서 세 안식일에 성경을 가지고 강론"했다.(행 17:1-2) 귀하고 능력 있는 강론이었다. 하나님께 구하노니 우리 가운데서도 그보다 더한 역사가 있기를 빈다. "뜻을 풀어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야 할 것을 증명하고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전하는 이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행 17:3) 이 얼마나 단순한가! 성경으로 예수를 설교했다. 그렇다 여기에 위대한 바울의 설교의 비밀이 있다. 그는 살아 계신 인격자 그리스도를 살아 있는 능력으로, 살아 있는 말씀의 권위로 설교했다. 이 설교가 산 믿음으로 받아들여졌고, 회심자들의 생활 속에서 산열매로 드러난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이 인정하고 사용하시는 방법이다. 그것은 단순한 틀에 박힌 설교가 아니고, 종교 대담도 아니다. 오직 자신들이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에 자신을 낮추는 사람들을 통해 말씀하고 계시는 성령님에 의해서 선포된 그리스도의 설교였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보다 더한 것을 우리에게 허락하시기를 바랄 뿐이다. 4. 탐심은 우상숭배 데살로니가 전서 1장의 마지막 두 절은 우리에게 매우 특별한 주의를 요한다. 그 구절들은 회심의 참 특성에 대해서 특이할 만한 언급을 하고 있다. 그 구절들은 아주 분명하게 데살로니가 교회 회심자들 속에 있는 하나님의 영적 깊이와 확실성과 충만함과 실제성을 보여주고 있다. 거기에는 실수라고는 없다. 거기에는 그 자체의 신임장을 갖고 있다. 그것은 결코 불확실한 사역이 아니었다. 그것을 믿기 위해 어떤 세심한 테스트를 할 필요는 없다. 그것은 분명하고도 실수 없는 하나님의 사역이었으며, 모든 회심자들에게 분명하게 나타난 것이었다. "저희가 우리에게 스스로 고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너희 가운데 들어간 것과 너희가 어떻게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사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며,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심을 기다린다고 말하니 이는 장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예수시니라."(살전 1:9-10) 그래서 이제 간략하지만 납득이 갈 만한 회심에 대한 하나님의 정의를 깨달을 수 있게 됐다.
회심은 어떤 기점에서 어떤 다른 기점으로의 전환이다.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우상으로부터 돌이켰다. 거기에는 과거와의 완전한 단절, 즉 그들의 과거 생활과 관습에서 단번에 그러면서도 영원한 돌이킴이 있었다. 즉 그것은 그들의 마음과 그들의 에너지를 지배하고 휘어잡고 있었던 세상 것들에 대한 전적인 포기였다.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하나님의 진리의 빛 안에서 그들 자신의 전체 과거 생활을 판단했을 뿐만 아니라 솔직하게 그것을 포기할 수 있었다. 그 모습은 이것도 저것도 아닌 어떤 어정쩡한 행위가 아니었다. 거기에는 애매하다거나 모호함이 없었다. 그것은 그들의 생애 속에서 특별한 기점이 되었다. 그것은 그들의 도덕적인 면에서나 실 생활면에서도 엄청난 변화의 기점이었다. 그것은 단순한 자기들의 어떤 의견의 변화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어떤 새로운 이론의 수용도 아니었다. 또는 그들의 지적 견해에서의 어떤 변화도 아니었다. 전혀 그런 것들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그것은 그들의 전체 과거의 경력이 하나의 엄청난 어두움의 괴물과 같은 거짓 생애였음이 엄숙하게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그것은 마음으로부터의 실제적인 확신이 있다. 하나님의 진리의 빛은 그들의 심령에 강하게 들어갔고 그 진리의 빛의 능력 속에서 그들은 자신과 그들의 과거 전부를 심판 내렸던 것이다. 거기에는 지금까지 그들의 마음을 휘어잡았던 이 세상 것의 철저한 부서짐이 있었다. 조금도 세상 것은 남겨지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이런 신비한 변화를 가져왔을까?" 라는 질문을 하게 된다. 그것에 대한 해답은 간단하다. 하나님의 말씀이 전능하신 성령의 능력으로 그들의 심령에 간절히 호소했던 것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바울 사도의 데살로니가 방문에 대해서 영감으로 설명했다.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며…"(행 17:2). 바울은 데살로니가 사람들의 마음을 하나님의 살아 있고 영원한 말씀에 직접 연결시키려 애썼던 것이다. 거기에는 데살로니가 사람들의 감정이나, 생각에 작용하는 어떤 인위적 시도도 없었다. 그런 것은 축복 받은 사역자 바울에게는 무가치한 것이었다. 바울은 그런 시도는 믿지 않았다. 그의 신뢰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뿐이었다. 이 점에 대해서 사도는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태도를 다음과 같은 감동적인 자세로 확인했다.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하고 쉬지않고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속에서 역사하느니라"(살전 2:13). 이점이 바로 생동감 있고 지고한 중점이라고 할 수 있는 부분이다. 바로 이 하나님의 말씀이 전능하신 성령님의 능력으로 데살로니가에서 이런 위대한 결과를 낳았던 것이다. 그로 말미암아 축복 받은 사도 바울의 마음에는 하나님께 대한 진실한 감사가 채워졌다. 바울이 기뻐한 것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자기와 연결된 점에 대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나님과 연결되었다는 점이었다. 하나님과의 연결은 소멸될 수 없는 것이다. 인간의 말은 인간이 소멸될 때 함께 소멸되는 것이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은 영원한 것이다. 사도 바울은 참 사역자로서 이 점을 깨우쳤고, 또한 감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그의 신성한 열심히 생겼고, 그의 모든 사역에서 그가 전한 복음을 들은 모든 심령들이 하나님이 아닌 자기에게 의뢰하지 않기를 바랬던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단순히 하나님의 말씀의 전달자요, 사역자이기 때문이었다. 바울이 고린도 성도들에게 전하는 말씀을 들어보자.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면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고전 2:1-5) 여기서 우리는 참 복음 사역을 보게 되는데 그것은 곧 "하나님의 증거"와 "성령의 나타남"이다. 즉 말씀과 성령이라는 말이다. 이보다 더 귀중한 것은 없다. 모든 인간의 영향력이라든가 인간의 능력, 인간의 지혜와 인간의 에너지에 의한 결과는 철두철미하게 무가치한 것이다. 그렇다. 오히려 해로운 것이다. 사역자들은 자기네들이 나열하고 지껄여 온 자기네들의 두드러진 사역의 결과로 마음이 부풀게 된다. 그러나 그들의 거짓된 영향력을 받은 불쌍한 심령들은 속은 것이 되고, 전적으로 거짓된 곳으로 끌려 들어가게 되고 거짓 신앙고백을 하게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 전체 사역은 최고의 재난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전지 전능의 영적 능력과 성령의 활력 하에서 인간의 마음과 양심에 거하게 될 때는 그렇지 않다. 그 때는 데살로니가에서 보여진 경우와 같이 우리는 하나님의 엄숙한 결과를 보게 되는 것이다. 그럴 때 모든 의문점을 뛰어넘어 누가 참 사역자인지 분명하게 판가름나는 것이다. 복음 사역이 신임을 얻게 되는 것은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의 사역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사역 때문이다. 그렇게 될 때 그것은 영원히 서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에 영광을 돌리자! 바울 사도는 데살로니가에서의 그의 사역의 결과를 셈하거나 떠버릴 필요가 없었다. 오히려 그 자신을 사용하신 하나님의 사역에 초점을 맞추었다. 하나님의 말씀은 스스로 드러냈다. 그것이 진짜 사역이었다. 틀림없이 하나님의 인침이 확고히 그 사역에 있었던 것이다. 이것으로 바울은 매우 만족했다. 이점이 바로 스스로 마음을 비운 모들 사역자들에게는 만족을 주는 것이다. 바울은 말씀을 전달했고, 그 말씀 자체가 심령을 살리는 성령의 능력으로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마음에 간절히 호소했던 것이다. 그 말씀은 좋은 땅에 떨어져 뿌리를 내리고 풍부한 결실을 맺었던 것이다. 이제 그 결과를 살펴보자. "우상을 버리고"(살전 1:8). 여기서 우리는 회심하지 못한 모든 세상 사람들의 생활을 한 마디로 알 수 있다. 그것은 모두 "우상"이라는 하나의 표현으로 포장되어 우리 마음에 던져진다. 우상 숭배자가 된다는 것은 결코 가축이나 돌에만 머리 숙이는 것은 아니다. 마음을 사로잡은 모든 세상 것이 우상이다. 어떤 대상에 마음을 복종시키는 것이 우상 숭배다. 또 그것에다 마음을 빼앗기는 자는 우상 숭배자다. 이런 말이 자존심 강한 어떤 사람에게는 불쾌하게 들릴는지 몰라도 그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며, 이 점에서 이 말은 엄연한 진리인 것이다. "탐심"이라고 불리 우는 일반적인 큰 죄 하나를 예로 들어보자. 영감 받은 바울 사도는 "탐심"을 무엇이라고 했던가? 그는 "탐심"을 "우상 숭배"라고 했다.(골 3:5)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마음이 돈의 지배를 받고 있는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금이라는 우상 앞에 머리를 조아리던가? 탐욕은 무엇인가? 좀더 얻고자 하는 욕망이거나, 현재 소유하고 있는 것에 대한 애착이 아니겠는가? 우리는 신약에서 그 두 가지 형태를 다 보게 된다. 그리스 원어에는 이 두 가지 의미를 다 내포하는 단어가 있다. 그러나 얻고자 하는 욕망을 가졌던지, 아니면 쌓아 두려는 욕망을 가졌든지 이 둘은 다 우상인 것이다. 그러나 이 두 가지는 표면적으로는 같은 모습이 아니라 전자는 더 얻고자 하는 욕망은 쓰기 위해서 예비하는 것과 연관시킬 수 있다. 후자 곧 쌓아 두려는 욕망은 반대로 일반적으로 저장하려는 강렬한 정신과 연결되어진다. 예를 들어 큰 사업 능력을 갖춘 한 사람이 있다고 하자. 그는 장사에는 천부적 재능이 있다. 그의 손안에서는 모든 것이 불어나는 것 같다. 그에게는 사업에 대한 진짜 열정도 있고, 돈을 버는데 그칠 줄 모르는 갈급 함도 있다. 그의 목적은 오직 더 버는 것이고, 숫자를 더 늘리는 것이고, 사업체를 더 강화시키는 것이요, 그리고 그 자신의 사업 영역을 넓혀 가는 것이다. 그는 사업의 분위기 속에서 살고 번창하고 흥청거리며 살아간다. 그는 처음에 몇 푼 안되는 돈으로 사업을 시작했으며, 드디어 자랑 할 수 있는 사업 왕자 자리까지 올랐다. 그렇다고 해서 그는 구두쇠는 아니다. 그는 얻기 위해서는 돈을 쓸 자세도 갖추고 있다. 그는 엄청날 정도로 노임도 나누어준다. 화려한 대접으로 유흥도 베푼다. 아낌없이 대중들에게 여러 배로 되돌리기도 한다. 그래서 사회 각층으로부터 우러러 보이게 되고, 존경도 받는다. 그러나 그는 더 얻기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그는 탐심의 사람 즉 우상 숭배자이다. 실제로 그는 금을 만지며, 돈주머니를 주무르면서 밤을 지새며 즐기는 어리석은 구두쇠를 경멸하는 사람이다. 원래 구두쇠들은 환상적인 먼지(돈을 말함)를 보며, 그것으로 마음과 눈을 기쁘게 하며 즐긴다. 그러면서도 자신과 가족을 위한 생활 일용품에는 인색하다. 그는 저축된 귀한 돈 뭉치의 일부를 쓰기보다는 넝마 조각을 걸치고 남 보기에 불쌍하리만큼 보이면서 거리를 누비는 사람이다. 그도 돈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어떻게 벌어서 어떻게 쓰기 위해서가 아니라 단순히 돈 그 자체를 위해서 사는 사람이다. 그는 쌓는 재미로 산다. 쓰기 위해서가 아니라 쌓아 두기 위해서 산다. 그의 지배적 욕망은 수많은 넝마 조각과 함께 죽는 것만이 가치 있는 것이다. 괴상망칙한 욕망이다. 이 둘은 현저하게 다르다. 그러나 그 둘은 다 한 지점에서 만난다. 그 둘은 동일한 플랜트 홈에 서 있는 것이다. 그들은 둘 다 탐심의 사람이요, 둘 다 우상 숭배자들이다. 이 말이 거칠고 심각하게 들릴는지 모르나, 이 말은 하나님의 진리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한 권위에 복종해야만 한다. 성령이 우상 숭배라고 선포하는 바로 그 탐심의 죄를 사람의 양심에 호소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것은 없다. 이는 엄연한 사실이다. 많은 사람들이 가엾은 저질의 구두쇠에게서 그런 모습을 보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사업 왕자와 비교된다는 것은 쇼킹한 일이다. 타인들 속에서 위와 같은 경우를 보는 것과 우리 자신 속에서 그것을 판단 내리며 볼 수 있다는 것은 별개의 일이다. 사실 말이지 하나님의 말씀으로 판단 내리며 볼 수 있다는 것은 별개의 일이다. 하나님의 말씀의 빛만이 심령을 비추고 영적 존재인 우리의 마음을 꿰뚫을 수 있다. 그리고 탐심의 죄를 끄집어 낼 수 있다. 얻기를 추구한다는 것 즉 더 얻으려는 욕망, 즉 사업 정신, 다시 말하면 돈을 버는 능력 즉 계속 얻으려는 욕망은 인간 세계에서는 매우 존경받은 일이다. 비교적 몇 안되는 사람들만이 하나님의 견지에서 그런 모습을 가증한 것으로 본다. 자연성은 인간의 생각이다. 자연성은 세상에서 찾아지는 모든 것을 사랑하고 찬양하고 숭배한다. 그러므로 개개인의 마음은 나름대로 우상을 갖고 있다. 한 사람은 금을 숭배하고 다는 사람은 쾌락을 숭배하고 또 다른 사람은 권력을 숭배한다. 회심하지 못한 모든 사람들은 우상 숭배자다. 회심한 자라 할지라도 우상의 영향력을 뛰어넘지 못할 수 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자녀들아 너희 자신을 지켜 우상에서 멀리 하라"(요일 5:21)고 경계의 말씀을 했던 것이다. 독자들이여, 우리가 이 문제를 더 진행하기 전에 여러분께 확실하고도 예리한 질문을 해도 되겠는가? 당신은 참으로 회심했는가? 당신은 그렇다고 고백할 수 있는가? 당신은 구원받은 기독교의 기초석을 갖추고 있는가? 그렇다면 참으로 우상에서 돌이켰는가? 당신은 진실로 세상과의 관계가 끊어졌는가? 그리고 구원받기 이전의 자아와의 관계가 끊어졌는가? 당신은 마음속에 지금 하나님의 말씀이 거하고 있으며, 또한 당신의 이전의 전 생애 즉 그것이 환락의 생활이었던지 또는 무분별하고 어리석고 돈벌기에만 급급한 생활이었던지 또는 가증하고 사악하고 비참한 생활이었던지 또는 그리스도가 없고, 믿음 없는 무가치한 단순히 의례적인 종교 생활이었던지 간에 그런 생활을 지금 심판하고 있는가? 대답해 보시라. 당신의 생활이 어떤 것인가? 철저하게 솔직해 보시라. 지금 우리가 이 문제에 대해서 당신의 진지한 열의가 있기를 바라고 있다는 사실을 알기 바란다. 우리 모임 안에 슬프게도 이런 면에서 철저한 결단이 없음을 깨닫고 괴로워하고 통탄하는 바이다. 우리는 분명하고도 강렬하게 "우상으로부터 돌이키지" 못하고 있다. 구습은 성격이나, 외향이나, 정신이나, 태도가 회심을 바라고 있지 않다. 우리는 슬프게도 우리의 옛 자아를 너무나 좋아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 주위에 있는 세상적인 사람들을 공개적으로 터놓고 좋아하고 있다. 이 모든 것이 너무나 엄청난 일들이다. 우리는 이 점이 복음과 영혼 구원의 진행 과정에서 슬프게도 방해 거리가 되고 있음을 염려하는 바이다. 증거의 말씀은 우리가 전하는 사람들의 귀에 무능력하게 들려지고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지금 얘기하고 있는 것조차 진실하게 믿는 것처럼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바울 사도가 데살로니가의 회심자들에게 말하듯이 직접 우리에게는 말할 수 없다. "주의 말씀이 너희에게서부터 마게도냐와 아가야에만 들릴 뿐 아니라…"(살전 1:8) 우리에게는 깊고도 능력 있는 확실한 회심이 부족하다. 소위 역사 하심이 있다는 모임에서도 무기력함과 연약함과 모호함이 부끄럽게도 실망스러울 정도로 만연하고 있는 실정이다. 5. 성도의 기업 자 이제 우리는 회심의 주제에 대한 긍정적 부분이라고 할 수 있는 매우 귀중한 면에 대해서 생각해 보아야 하겠다. 우리는 지금까지 "우상 버림" 즉 우리의 마음을 붙들고 휘어잡았던 모든 사물로부터의 돌이킴에 대해서 알아보았는데, 그것들은 헛된 것이며 어리석은 것이며, 우리의 어둡고 캄캄했던 모든 지난날들의 정욕과 쾌락이었던 것이다. 이것은 사도 행전 26:18에 있는 말씀과 같이 "이 악한 세대"로부터의 돌이킴이다. 그러나 회심은 그 이상의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해서 회심은 단순히 죄된 세상과 사단으로부터 돌이키는 것에 그치는 것이라면 너무나 협소한 것이 되리라. 회심은 우리들의 모든 비참한 과거 생활과 영적 타락으로부터 영원히 그리고 단번에 건짐을 받은 것이라는 면에서 보면 확실한 은혜임에는 틀림없다.
회심은 이 세상 신과 이 세상 임금의 비참한 속박으로부터의 건짐이요, 악한 자의 손아귀 안에 있는 헛되고 공허한 세상으로부터의 건짐이요, 한 때 우리를 휘어잡았던 사악한 세상 애착 즉 죄에 대한 사모와 죄된 행실로부터의 건짐이다.
이런 면에서 볼 때 그 문제점을 다루고 있는 모든 면에 대해서 우리는 아무리 감사해도 지나칠 것이 없다. 그러나 다시 반복해서 말하는데, 회심에는 그 이상의 것이 더 있다. 우리는 마음에서 때로는 "모든 것을 포기한 댓가로 무엇을 얻었는가?"라는 의문을 떠올리곤 한다. "기독교 신앙은 단지 모든 것을 부정만 하는 제도인가? 우리가 만일 이 세상과 나 자신과의 이음줄을 끊는다면, 또는 우리의 과거 쾌락과 오락을 포기한다면, 다시 말해서 이 세상에서의 우리의 생활을 구성하는 모든 것들과 등진다면, 그 대가로 우리가 얻은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데살로니가 전서 1:9은 한 마디로 말해서, 이러한 모든 의문점에 대한 해답을 준다. 충분하고도 확실하고, 분명하고도 납득이 갈 만한 해답을 준다. 그 해답은 바로 "하나님께로 돌아와서"라는 말씀이다. 참으로 귀한 해답이다. 그렇다. 말할 필요도 없이 그 의미를 아는 모든 사람에게 귀한 해답이다. 나의 과거라는 우상 대신 얻는 것이 무엇이겠는가? 바로 하나님이다. 이 세상의 헛되고 죄된 즐거움 대신 무엇을 얻었다는 것인가?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다. 세상의 부와 영예와 세상의 우월감 대신 무엇을 얻을 것인가? 하나님이다. 이 얼마나 복되고 영광스럽고도 완전한 대치인가? 탕자가 먼 나라에서의 넝마 조각 대신 무엇을 얻었단 말인가? 바로 그것은 아버지 집에 있는 최고의 옷이었다. 돼지의 쥐엄 열매 대신 무엇을 얻었던가? 그것은 아버지께서 친히 예비하신 살찐 송아지였다. 먼 나라에서의 비참한 고역 대신 무엇을 얻었단 말인가? 그것은 아버지의 환영이었고, 아버지 자신의 품이었고, 바로 아버지의 식탁이었다! 이것이야말로 복된 대치가 아니겠는가? 우리는 항상 참 회심 속에 있는 두 면(곧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것)의 감동적이고도 인상적인 예를 탕자의 비유에서 쉽게 얻지 않는가? 이 비길데 없는 귀한 이야기를 읽으면서 어찌 감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얼마나 멋진 회심인가! 얼마나 멋진 우상으로부터의 돌이킴이며, 하나님께로의 돌아감인가!" 감히 누가 이런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어느 인간의 언어가 감히 돌아온 탕자가 아버지의 품안에서 아버지의 온화한 사랑의 빛에 쏘임을 받는 그의 감정을 적절하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헌옷, 쥐엄 열매, 돼지, 종살이, 냉냉하게 굳어진 자아, 궁핍, 기근, 비참, 도덕적 타락 등등 이 모든 것들은 사라지고 영원히 없어졌다. 그 대신 이루 말할 수 없는 밝고도 행복한 가정의 기쁨과 게다가 돌아왔다는 사실 때문에 그의 주위에서는 축제의 즐거움이 되살아났고, 또한 그의 돌아옴이 아버지를 기쁘게 하고 있다는 사실이 대신 채워진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것은 하나의 예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그렇다 그러나 무엇에 대한 예인가? 귀하고도 거룩한 사실에 대한 예이다. 하늘의 기준에서 볼 때 어디에서나 있을 수 있는 참 회심에 대한 예인 것이다. 그것은 단순히 헛되고 어리석은 세상 것의 포기가 아니라, 그 이상의 것이다. 곧 그것은 하나님 앞으로의 인도됨이다. 고향으로 돌아옴이다. 아버지 품으로의 되돌아옴이다. 가정으로의 돌아옴이다. 어떤 틀에 박힌 메마른 공식 문구의 이야기가 아니라 성령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말씀의 전능한 역사로 이루어진 하나님의 자녀, 그리스도의 지체, 하늘나라의 상속자에 대한 이야기다. 바로 이것이 참 회심이다. 독자들께서 충분히 납득하기 바란다. 이 위대한 사실에 미치지 못한 상태에서 안일하게 있지 않기를 바란다. 이것이 바로 흑암에서 빛으로의 돌이킴이다. 이것이 바로 사단의 세력과 우상 숭배로부터 하나님께로의 돌이킴이다. 기독교는 한 마디로 말해서 현재 하늘나라에 살고 있는 것처럼 실제로 하나님 앞으로 인도되는 것이다. 이것은 너무나 강렬한 말 같아도, 복스럽게도 엄연한 사실인 것이다. 이점에 대해서 사도 베드로는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는가를 들어보자. "그리스도께서 한번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 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벧전 3:18) 무엇이라고? 우리가 죽은 후에 하늘나라라고? 아니다. 지금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이다. 로마서 5장에도 같은 말씀이 있다. "곧 우리가 원수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 된 자로서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이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을 얻게 하신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즐거워하느니라"(롬 5:10-11) 이것은 아주 중요한 원리이다. "돌이킴"이라든가, "하나님께로 돌아선다" 라는 말속에 함유되어 있는 모든 의미를 설명한다는 것은 인간의 언어로는 힘든 일이다. 우리의 찬양을 받으실 주 예수님은 그의 이름을 믿는 모든 사람들을 그분 자신의 온전하신 영접으로 하나님의 존전으로 인도하신다. 그들 모두는 그리스도의 신임장으로, 그분의 미덕으로, 그분의 피의 대가로, 그분 자신의 가장 고귀한 이름의 향기로 하나님 앞으로 가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그분 자신의 자리로 우리를 인도하신다. 그리스도는 그 자신과 우리를 연결하시고 그가 갖고 계신 모든 것을 우리와 나누시고, 그분의 자격까지도 나누어주신다. 다만 하나님으로써의 그분 자신의 위치는 제외하고 말이다. 그것만은 감히 언급할 수 없는 일이다. 우리는 온전하게 그분과 동일시되는 것이다.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터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았고, 너희도 살겠음이니라"(요 14:19)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 14:27)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케 하려 함이라"(요 15:11)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니라"(요 15:15) 또 요한 복음 17장에서 신비스런 주님의 기도로 다음과 같은 말씀을 본다.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었는데 내게 주셨으며 저희는 아버지의 말씀을 지키었나이다. 지금 저희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것이 다 아버지께로서 온 것인 줄 알았나이다. 나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말씀들을 저희에게 주었사오며, 저희는 이것을 받고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나온 줄을 참으로 아오며,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도 믿었사옵나이다. 내가 저희를 위하여 비옵나니,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로소이다. 내 것은 다 아버지의 것이요, 아버지의 것은 내 것이온데 내가 저희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았나이다"(요 17:6-10) "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저희에게 주었사오매 세상이 저희를 미워하였사오니, 이는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을 인함이니이다."(요 17:14)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 저희를 세상에 보내었고"(요 17:18)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저희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다. 곧 내가 저희 안에,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저희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 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저희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 의로우신 아버지여 세상이 아버지를 알지 못하여도 나는 아버지를 알았삽고, 저희도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 알았삽나이다.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저희에게 알게 하였고 또 알게 하리니 이는 나를 사랑하신 사랑이 저희 안에 있고 나도 저희 안에 있게 하려 함이니이다."(요 17:22-26) 자, 이제, 이보다 더 고상하고 더 축복스러운 말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전혀 있을 수 없으리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아들과 그처럼 일치되고, 그분이 아버지로부터 받는 것과 같은 사랑을 나누듯이 그분과 전적으로 하나가 된다는 것, 그분의 평화, 그분의 기쁨, 그리고 그분의 영광에 동참한다는 이 모든 사실이 한 피조물이 받을 수 있는 최상의 축복이며, 특성인 것이다. 지옥 구덩이의 영원한 공포로부터 건짐을 받는다는 것, 죄 사함 받는다는 것, 씻음을 받는다는 것, 의롭다 칭함을 받는다는 것, 아담이 잃은 모든 것을 다시 회복한다는 것 등,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동일한 기초로, 동일한 특성으로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게 된다는 것은 참으로 신비한 자비이며, 축복이며, 사랑의 배려인 것이다. 그러면서도 사랑하는 하나님의 아들 안에 있는 사랑과 호의 속에서 하나님께로 인도되고, 하나님 앞에서 그 아들의 위치와 동일하게 일치된다는 것은 진실로 하나님의 마음과 그분의 전지 전능만이 성취할 수 있는 최대의 걸작품인 것이다. 자, 이 모든 것들은 우리가 말하는 회심 속에 다 내포되어 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엄청난 큰 은혜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사랑은 그런 것이다. 비록 우리가 허물과 죄로 죽었던 때라 할지라도 말이다. 우리가 사악한 일로 마음에서 하나님과 원수 되었을 때에라도, 여러 가지 정욕과 쾌락에 빠졌을 때에라도, 우상을 섬기고, 영적으로 눈이 멀었고, 죄와 사단의 타락한 종이 되었을 때에라도, 진노의 자녀로 곧바로 지옥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을 때일지라도 말이다. 그리고 그 중 최대의 선물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축복과 사랑과 영광의 자리로 우리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이름과 그분의 마음에 우리가 영광을 돌리며 감사하는 마음 자세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아들의 사랑보다 뒤쳐지는 자리를 선물한다는 것은 하나님 자신의 마음을 만족케 하는 일이 못된다. 영감 받은 사도 바울이 이 엄청난 은혜로 감탄한 것은 당연한 것이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주시되,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바 그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사함을 받았으니"(엡 1:3-7) 여기 얼마나 깊은 사랑과 충만한 은혜가 있는가!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역사 속에서 영원히 하나님 자신을 영광스럽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이다. 하나님은 피조물들의 지혜에 알맞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향한 하나님 자신의 배려로 자신의 은혜의 부요함을 보이신다. 우리의 죄사함, 우리의 칭의, 우리의 온전한 구원, 우리를 영접함, 이 모두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은혜로 베푸신 것인데 이 모두는 이 광대한 온 우주 안에서 영원히 하나님 자신의 거룩한 영광을 나타내기 위함이다. 만일 하나님이 자신의 사랑하는 독생자의 위치말고, 다른 위치에 우리를 둔다면 이것은 영광스런 하나님 자신의 요구에 미치는 것이 못 될 뿐만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마음 속 사랑에 대한 만족한 해답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이 모두가 너무나 신비하다. 너무 훌륭해서 믿을 수 없을 정도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에게는 가치 있는 일이다. 그렇게 인간에게 대하시는 것은 하나님 자신의 즐거움이다. 이것으로 우리는 충분하다. 그것이 우리에게는 너무 고귀해서 확고히 받아들이기 힘들 수는 있을는지 몰라도 하나님 편에서는 그렇지 않다. 하나님 자신의 마음속 사랑에 따라 우리에게 역사 하시고 그리스도의 대가를 기초로 해서 활동하신다. 탕자는 품꾼 중의 하나로 써 달라고 하려 했지만, 아버지는 그럴 수 없었다. 집에서 종으로 취급한다는 것은 하나님 마음에 합당한 것이 아니다. 전적으로 아들로 받아들이든지, 아니면 아무 것도 아니든지, 둘 중 하나다. 만일 행한 공적에 따라 대우한다면 우리는 아들의 위치는커녕 종의 위치도 받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은혜의 하나님이시다. 전혀 우리의 공적에 의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무한한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 자신의 거룩한 영광의 이름에 따른 것이다. 바로 이것이 회심이다. 우리는 그렇게 하나님께로 인도되었다. 이보다 못한 것은 있을 수 없다. 우리는 단순히 우상에서 돌이켜, 그것들이 어떤 것이든 간에, 우리는 실제로 바로 하나님 존전에 인도된 것이다. 그래서 그 안에서 즐거움을 누리고, 기쁨을 만끽하고, 그와 동행하며, 그 안에서 우리 자신의 모든 생수를 찾으며, 소멸되지 않은 근원으로 인도되며, 우리의 모든 필요에 대한 완전한 해답을 그분 안에서 찾으며, 그러므로 우리의 영혼은 만족하게 되고, 또한 그것은 영원한 것이다. 우리가 우상으로 되돌아갈 것인가? 절대로 안된다. 과거의 우리의 대상물을 갈망하고 따라야 할 것인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위치와 우리의 분깃을 깨닫는다면 그럴 수 없을 것이다. 탕자가 아버지의 품에서, 아버지 집에서 좋은 옷을 입고, 아버지의 상에 같이 앉아 있으면서 돼지나 쥐엄 열매를 찾았던가?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었고, 믿기지도 않는 일이었다. 탕자가 복된 사랑의 가정이라는 밝고도 거룩한 곳에 자신이 살고 있음을 발견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먼 나라를 한숨 지며 바란다고 우리는 상상할 수 없다. 지금 우리는 하나님의 기준에 따라 말하고 있다. 슬프게도 많은 사람들이 돌이켰다고 고백하고, 잠시동안은 그것을 지속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금방 그들은 열의가 식어지고 지치고 만족을 잃는다. 그들 내면의 역사는 참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들은 진짜로 하나님 앞으로 인도된 것이 아니다. 우상은 잠시 포기된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과 관련이 없다. 그들은 하나님 안에서 그들 마음에 만족을 찾지 못한다. 하나님과의 참 교제를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심령의 만족감과 심령의 안식을 맛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시간이 흐름을 따라, 그 가련한 심령들은 세상을 한번 더 바라게 되고, 그들이 왔던 곳으로 되돌아가고, 평상시보다 더 많은 탐욕으로 어리석게도 헛된 것에 몰입하게 된다. 이런 경우는 너무나 슬픈 모습이다. 매우 실망스런 모습이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오히려 보다 큰 비난을 퍼붓는다. 그리고는 사단의 옹호자가 되어 회의 자들에게 걸림돌이 되는 것이다. 그들은 거룩한 회심의 문제는 해결하지 못하고 떠나 버린다. 참으로 회심한 심령은 단순히 이 악한 세상에서 헛된 꿈과 기만을 버리고 떠날 뿐만 아니라 성령의 인도함을 따라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에서나 영원한 곳에서나 원하는 모든 진실 된 것을 찾게 되는 것이다. 그러한 사람이야말로 거룩하게 세상과 분리된 사람이다. 영원히 세상과 끊어진 사람이다. 그의 눈은 철저하게 모든 것을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하나님의 존전에서 그 자신이 이미 세상을 심판한 것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기준으로 이미 세상을 측정한 사람이다. 그는 거룩한 하나님의 저울로 세상을 달아보았고 세상에 대하여 영원히 등을 돌린 것이다. 대신, 저주받은 나무에 못 박힌 그리스도의 인격 안에서 진지하고, 당당한 목적을 찾은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힘은 바로 그를 구원키 위함이요, 영원한 불못에서 구원될 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서도 승리케 위함인 것이다. 6. 내 영혼아 하나님만 바라라 데살로니가 전서 1:9을 생각하면 할수록 그 말씀 속에 담겨져 있는 깊고도 충만한 신비의 능력에 감동을 받게 된다. 그것은 마치 광맥을 집어넣은 것과도 같은 것이다. 우리는 잠시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라는 풍요롭고도 암시적인 구절을 생각한다. 얼마나 많은 것들이 그 속에 담겨져 있는 것일까! 우리는 진정 그 말씀 속에 있는 능력과 충만함을 이해하고 있는가? 한 심령이 하나님께로 인도된다는 것은 신비한 일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연약하고, 필요할 때마다 그분을 우리의 방패와 능력으로 안다는 것, 우리의 인도자와 조언자로 안다는 것, 우리의 모든 것을 안다는 것, 그리고 하나님께로 전적으로 다가가서 전적으로 그분만 의뢰한다는 것은 참으로 신비한 일이다. 당신은 심령 속에서 이 모든 깊고도 오묘한 축복을 알고 있는가? 당신이 만일 하나님의 자녀이고, 진정으로 회심한 심령이라면 그 회심을 안다는 것은 당신의 즐거운 특권이요, 따라서 그 회심 없이는 한시라도 기쁠 수가 없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께로 돌아왔다"면 이 세상이나 영원 속에서 우리의 필요를 그분 안에서 찾음은 무엇일까? 그것은 하나님 외에는 어느 누구도 인간의 영혼을 만족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심령의 욕구를 채울 수 있는 것은 세상에는 없다. 우리가 만일 온 우주의 부요를 다 소유하고 그 부로 누릴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취한다 할지라도 해 아래서는 다 채워지지 않고 오직 고통과 공허만이 남게 될 것이다. "나 전도자가 예루살렘에서 이스라엘 왕이 되어 마음을 다하며 지혜를 써서 하늘 아래서 행하는 모든 일을 궁구하며 살핀즉 이는 괴로운 것이니, 하나님이 인생들에게 주사 수고하게 하신 것이라. 내가 해 아래서 행하는 모든 일을 본즉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 구부러진 것을 곧게 할 수 없고, 이지러진 것을 셀 수 없도다. 내가 마음 가운데서 말하여 이르기를 내가 큰 지혜를 많이 얻었으므로 나보다 먼저 예루살렘에 있던 자보다 낫다 하였나니 곧 내 마음이 지혜와 지식을 많이 만나 보았음이로다. 내가 다시 지혜를 알고자 하며 미친 것과 미련한 것을 알고자 하여 마음을 썼으나 이것도 바람을 잡으려는 것인 줄 깨달았도다."(전 1:12-17) "지혜가 많으면 번뇌도 많으니 지식을 더하는 자는 근심을 더하느니라. 나는 내 마음에 이르기를 자 내가 시험적으로 너를 즐겁게 하리니 너는 낙을 누리라 하였으나, 본즉 이것도 헛되도다. 내가 웃음을 논하여 이르기를 저가 무엇을 하는가 하였노라. 내 마음에 궁구하기를 내가 어떻게 하여야 내 마음에 지혜로 다스림을 받으면서 술로 내 육신을 즐겁게 할까, 또 어떻게 하여야 어리석음을 취하여서 천하 인생의 종신토록 생활함에 어떤 것이 쾌락인지 알까 하여 나의 사업을 크게 하였노라. 내가 나를 위하여 집들을 지으며, 포도원을 심으며 여러 동산과 과원을 만들고, 그 가운데 각종 과목을 심었으며, 수목을 기르는 삼림에 물 주기 위하여 못을 팠으며, 노비는 사기도 하였고, 집에서 나게도 하였으며, 나보다 먼저 예루살렘에 있던 모든 자보다도 소와 양떼의 소유를 많게 하였으며, 은 금과 왕들의 보배와 여러 도의 보배를 쌓고, 또 노래하는 남녀와 인생들의 기뻐하는 처와 첩들을 많이 두었노라. 내가 이같이 창성하여 나보다 먼저 예루살렘에 있던 모든 자보다 지나고, 내 지혜도 내게 여전하여 무엇이든지 내 눈이 원하는 것을 내가 금하지 아니하며, 무엇이든지 내 마음이 즐거워하는 것을 내가 막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나의 모든 수고를 내 마음이 기뻐하였음이라. 이것이 나의 모든 수고로 말미암아 얻은 분복이로다. 그 후에 본즉 내 손으로 한 모든 일과 수고한 모든 수고가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며 해 아래서 무익한 것이로다"(전 1:18-2:11) 세상의 모든 것을 소유한 사람에 의해 기록된 모든 것은 그런 시들어 가는 말뿐이다. 그런 사람에게는 모든 술잔과 세상 즐거움은 쓰레기 같이 소모되도록 허락된 것이다. 그 결과는 무엇이었던가?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 되었다. "만물의 피곤함을 사람이 말로 다 할 수 없나니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차지 아니하는 도다."(전 1:8) 가련한 인간의 마음은 세상 것으로 만족을 얻을 수 없다. 영원성을 지닌 인간의 심령의 목마름을 세상 것으로 채워 주지 못한다. 물질은 우리를 진정으로 행복하게 할 수 없다. 왜냐하면 물질은 영원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모든 것은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다. 이러한 진리는 모든 인간의 심령에서 증명된다. 조만간 모든 사람이 철저히 드러날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귀머거리 귀를 지금 그런 진리의 말씀으로 돌이킬 수 있다. 반대로 성령님의 음성을 거절 할 수도 있다. 그들은 이 가련한 세상이 실질적인 위안과 행복을 줄 수 있다는 망상을 하기도 한다. 그들은 세상의 부요와 명예와 공덕과 쾌락과 물질적 위로에 열심히 몰두할 수 있다. 그러나 언젠가는 그것이 잘못된 생각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이러한 진리를 너무 늦게 깨닫는 다는 것은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 누가 복음에 있는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에서,(눅 16:19 이하 참고) 그 부자와 같이 지옥에서 눈이 열린다는 것은 얼마나 무서운 일이겠는가? 하나님의 존전에 영원히 들어가지 못하는 한 심령의 공포를 어떻게 인간의 언어로서 다 설명할 수 있겠는가? 밖에 어두움에 버리워져 이를 간다는 것이 얼마나 소름끼치는 일인가? 그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것이 깨달아지기 위해서는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가? 지옥에서 고통의 불길 속에서 자신을 발견하고, 한 가닥의 소망의 빛조차 없이 영원하고도 깊은 해결할 수 없는 어두운 구렁텅이에서 자신을 발견하기 위해서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을 당할 것인가? 오, 그런 사람은 아마도 조만간에 다음과 같이 생각할 것이다. "닥쳐올 심판에서 도망했을 것을, 복음으로 눈앞에 온 은혜의 소망을 붙잡았을 것을, 일찌감치 하나님께로 돌이켰을 것을" 그러나 슬프게도 이 세상 신은 그들의 마음을 가렸고, 그리스도의 영광의 빛이 그들에게 비치지 못하게 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시다. 사단은 그들을 세상 것에만 몰두하게 했다. 사업이라든가, 돈벌이, 쾌락, 세상 걱정, 정욕 등 세상 모든 일에만 몰두하게 했다. 그러나 단 한 가지 복음에는 신경을 쓰지 못하게 했다. 이 복음과 비교해 보면 세상 모든 것들은 저울 위에 티끌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잠시 본 주제에서 벗어난 것 같다. 다시 돌아가서 생각해 보자. 우리는 특별히 성도들에게 살아 계신 하나님 안에서 모든 자원을 찾아야 함을 강조하는 바이다. 우리는 잠시 주제에서 벗어났는데 실은 회심하지 못하고 무관심한 사람이 혹 이 글을 우연히 읽게 될 때 그의 귀에 경고의 말을 주기 위함이다. 우리는 회심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간청하는 바이다. 그리고 회심한 성도들에게는 은혜로 돌이켜 주신 그분 하나님과 더 깊은 친교를 가지라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회심'이라는 제목 하에서 이 글을 쓰면서 우리 앞에 두 가지 일이 놓여 있음을 안다. 곧 회심하지 못한 심령들은 하나님께 회심하라는 것과 이미 회심한 자들은 하나님 안에서 즐거움을 누리라는 것이다. 우리 기독교인은 하나님 안에서 찾은 심령의 평안한 생활을 매일 살아가면서 그 실제적인 회심의 중요성에 대해서 점점 더 확신하게 된다. 그러한 확신 있는 생활은 오히려 세상 사람들에게는 매우 기이한 모습으로 비치게 된다. 사실 그러한 확신 있는 생활은 이 세상에 담대히 말할 수 있게 될 때 얻어지는 것이다. 이렇게 할 수 있는 유일한 비법은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얻은 것을 지속적으로 감지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생활은 우리로 하여금 사람에게 기대려는 강렬한 유혹에서 완전히 벗어나게 할 것이며, 우리가 다소 탄식하며 얻은 세상 것에 우리를 매달리지 않게 해 줄 것이다. 세상 것들은 우리에게 실망만 주었고, 하나님을 경멸하게 했던 것들이다. 우리는 동정과 도움과 상담을 위해 하나님께 직접 매달리기보다는 사람을 찾는 경향이 얼마나 많았던가? 이것은 정말 심각한 실수다. 이것은 근본적으로 생수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배척하는 것이요, 담을 수 없는 물통마저 우리 스스로 부셔 버리는 격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거기서 무엇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인가? 또 그 결말은 어떻게 될 것인가? 그 결과는 불모와 황폐뿐이다. 신실하신 하나님께서는 사람은 우리에게 실망만 안겨 준다는 것을 알게 하신다. 왜냐하면 사람의 팔에 기댄다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라는 것을 우리로 하여금 터득하게 하기 위함이기 때문이다. 이런 중요한 문제에 대해서 선지자는 무엇이라고 말했는지 살펴보자.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무릇 사람을 믿으며 혈육으로 그 권력을 삼고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난 그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 그는 사막의 떨기나무 같아서 좋은 일의 오는 것을 보지 못하고, 광야 건조한 곳, 건건한 땅, 사람이 거하지 않는 땅에 거하리라"(렘 17:5-6) 그러나 그와 반대되는 다음의 말씀을 보자. "그러나 무릇 여호와를 의지하며 여호와를 의뢰하는 그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라. 그는 물가에 심기운 나무가 그 뿌리를 강변에 뻗치고 더위가 올지라도 두려워 아니하며 그 잎이 청청하며 가무는 해에도 걱정이 없고, 결실이 그치지 아니함 같으니라"(렘 17:7-8) 살아 계신 하나님의 팔에 의지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사실이다. 그분 안에서 우리의 안식을 찾고 어느 때나, 어느 곳에서나, 어떤 환경에서나 우리의 자원을 그분 안에서 찾는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사실이다. 하나님은 믿는 마음에는 결코 실망을 주시지 않는다. 그분은 절대로 우리를 이후에라도 실망을 주시지 않을 것이다. 그분은 우리의 요구에 대한 하나님 자신의 응답을 우리로 하여금 계속 기다리도록 하신다. 그러나 그 기다림 속에서 시간이 흘러 때가 되어 응답이 임하게 되면, 우리 마음은 찬양으로 가득 차게 되고,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게 된다. "주를 두려워하는 자를 위하여 쌓아 두신 은혜 곧 인생 앞에서 주께 피하는 자를 위하여 베푸신 은혜가 어찌 그리 큰지요."(시 31:19) 사람들 앞에서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하고, 위급할 때마다 그분은 우리에게 충족을 주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고백할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대단한 일이다. 그러나 그것은 실제적인 사실이어야 하고 단순히 말로만의 고백이 되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어떤 일이 닥쳤을 때 연약한 인간에게 기대면서 동시에 하나님을 찾고 있다면, 그것은 소용없는 일이다. 이것은 슬픈 기만술이다. 그러나 슬프게도 우리는 얼마나 자주 그런 기만술에 빠지는가!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은 하면서도 실제로는 사람을 찾고 있으며, 또한 그 사람으로 하여금 우리의 부족한 것을 알아주기를 바란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속이고, 또한 하나님을 불 명예롭게 한다. 그 결과는 실망과 혼돈뿐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 좀더 자세히, 좀더 솔직하게 살펴보자. "하나님께로 돌아와서"라는 귀한 말씀의 의미를 우리가 정말 이해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를 좀더 자세히 살펴보자. 그 구절 속에는 참 행복과 참 거룩의 본질이 있다. 심령이 참으로 하나님께로 실질적으로 돌아올 때는 참 진리와 참 평화에 대한 하나님의 비밀과 안식과 온전한 만족을 알게 된다. 그것은 모두 하나님 품속에 있는 것들이다. 거기에는 피조물을 의지하려는 어떤 기회도 있을 수 없다. 나는 혹 혼돈 속에 있지는 않은지? 나는 나의 길 인도를 하나님께 부탁할 수 있다. 그분은 자신의 눈길로 나를 인도하시겠다고 약속하셨다. 이 얼마나 완전한 인도함인가! 어느 인간이 나를 위해 이보다 더 훌륭한 인도를 할 수 있을 것인가? 절대로 있을 수 없다. 하나님은 시작과 끝을 한번에 보신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거동을 알고 계신다. 또한 우리가 갖고 있는 모든 것을 알고 계신다. 모든 문제의 근원과 결과를 알고 계신다. 그분은 실수 없는 인도자시다. 그분의 지혜에는 오류가 없고 게다가 그분은 나를 완벽하게 사랑하신다. 어디에서 이보다 더 훌륭한 인도자를 찾을 수 있겠는가? 그래도 나는 부족하단 말인가? 나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 그분은 하늘과 땅의 소유주시다. 우주의 모든 보물이 그의 섭리 속에 있다. 하나님 보시기에 나에게 유익된 것이라면 주실 것이다. 만일 그 반대라면 안일함보다는 오히려 고통이 나에게 유익될 것이다.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빌 4:19) 이것으로 충분하지 않겠는가? 왜 피조물을 찾아야 하는가? 왜 하나님으로부터 돌아서서 우리의 부족함을 인간에게 가서 찾아야 하겠는가? 만일 그렇다면 그것은 실제로 믿음의 기초를 버리는 것이요, 하나님을 단순히 의뢰하는 생활을 포기하는 것이리라. 그것은 실은 우리 아버지 하나님을 불명예롭게 하는 것이다. 만일 내가 사람에게 도움을 요청한다면, 그것은 마치 하나님은 나를 실망시키고 있다는 것과 같은 것이 된다. 그것은 나의 몸과 혼과 영을 택하시어, 세상에서나 영원한 세계에서도 나를 위하시는 사랑의 하나님을 배신하는 꼴이 된다. 그분은 스스로 나의 부족을 예비하시겠다고 맹세하셨다. 비록 그 예비물이 아무리 많고, 아무리 크고, 아무리 다양하다고 해도 말이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롬 8:32) 그분의 말씀은 이렇다 "환란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시 50:15) 물론 하나님은 피조물을 사용하시어 우리의 필요를 채우시는 분이시다. 그러나 이것은 전적으로 별개의 문제다. 축복 받은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했다. "그러나 비천한 자들을 위로하시는 하나님이 디도의 옴으로 우리를 위로하셨으니"(고후 7:6) 바울은 위로를 위해 하나님을 찾았다. 그래서 하나님은 디도를 보내어 바울을 위로하셨다. 만일 바울이 디도를 바랬다면 실망했을 것이다. 다른 모든 경우에서도 마찬가지다. 우리의 모든 필요에 대한 즉각적이고도 유일한 언급은 하나님을 향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즉 그것은 "우리가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왔다"라는 말씀뿐이다. 여기에서는 어떠한 위급한 때에라도 그분은 우리의 확실한 자원이 되신다. 우리는 동정을 위해서도, 기타 모든 것을 위해서도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대저 나의 소망이 저로 좇아 나는도다. 오직 저만 나의 반석이시오, 나의 구원이시오, 나의 산성이시니 내가 요동치 아니 하리로다"(시 62:5-6) 이렇게 하나님만 찾는 가장 축복된 습관이 그분의 은혜를 우리에게 전달하는 사람을 무가치한 사람으로 볼 수 있겠는가? 그렇지 않다. 오히려 정반대다.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받아서 그분의 분명한 도구로 사용되어 나에게 전달자로 오는 사람을 어떻게 무가치하게 대할 수 있겠는가?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나는 통로로 사용되는 그 사람을 내가 의뢰할 자원으로 보기보다는 하나의 통로로만 가치 있게 보는 것이다. 이것으로 모든 것은 분명해 진다. 회심의 참 의미는 우리가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것이라는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된다. 그리고 우리가 만일 하나님께로 인도된다면 그것은 그분 안에서 우리의 완전한 가리개(covering)를 찾기 위함이요, 우리 마음의 완전한 대상을 찾기 위함이요, 시종 우리의 위급한 때를 맞아 완전한 자원을 찾기 위함이라는 것을 확실히 해 두자. 참으로 회심한 심령은 모든 피조물을 의뢰함으로부터, 또는 인본적 소망으로부터, 그리고 세상 성취로부터 돌아서서, 살아 계시고, 참 진리이신 하나님께로 나아와 자신의 모든 부족함을 찾는 삶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영원하리라.
7.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우리는 지금 "회심"이라는 제목의 실제적인 면을 깊이 상고함에 이르렀다. 데살로니가전서 1:9에는 "사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며"라는 말씀도 있다. 이 말씀은 진실로 회심한 모든 진실한 기독교인들에게는 매우 깊은 흥미를 준다. 우리는 "섬기기 위해서" 부름을 받았다. 우리의 전 생애는 회심의 순간부터 생이 끝날 때까지 진실된 영과 진실된 열심과 진실된 지적 봉사로 특성을 드러내게 된다. 이것은 참으로 귀한 우리의 특권이며, 때문에 신성한 의무가 있다고 말로만 해서는 안되는 일이다. 이것은 우리의 행위의 문제도 아니며, 어떤 생활 수준의 문제도 아니며, 또는 어떻게 우리가 부름을 받았느냐의 문제도 아니다. 우리는 회심되었을 때 꼭 한가지 실천할 일을 부여받았는데 그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다. 만일 우리가 처음 부름을 받았을 때의 계시된 하나님의 뜻과 반대되는 일을 추구하거나, 하나님의 직접 가르침인 말씀에 위배되는 일을 찾는다면 그 즉시 우리는 그것을 포기할 줄 알아야 한다. 어떤 희생을 치루더라도 말이다. 충실한 종의 그 첫 단계는 어떠한 위선에서도 벗어나는 일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부름을 받았다. 그리고 모든 것은 바로 이 기준에서 시험을 거쳐야 한다. 기독도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자신에게 해보아야만 한다. 즉 "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지금의 일을 하고 있는 것인가?" 만일 그렇지 못하다면 그것은 포기되어야만 한다. 만일 우리가 우리 생애에서 우리 자신의 부름을 하나님의 명예와 연결할 수 없다면 비록 우리편에서 하나님과 동행하기를 원한다 할지라도, 또는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우리의 목적으로 한다 할지라도, 또는 하나님 보시기에 기뻐하는 자로 발견되기를 바란다 할지라도 단연코 그 부름은 포기되어야 하고,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기까지 하나님께서 친히 길을 열어 주시기를 바래야 할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하실 일이다. 하나님의 이름을 찬양하자. 하나님은 믿음의 심령을 결코 실망시키지 않으신다. 우리의 할 일은 심령에 목표를 갖고 하나님께 몰두하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은 우리 앞에 평탄한 길을 열어 주신다. 처음에는 어려울지도 모른다. 그 길은 좁고 험난하고 외로울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단순히 하나님을 위해 기다리는 것뿐이다. 단 한시라도 하나님의 계시된 뜻과 반대되는 어떤 것과도 연관되어서는 안된다. 온순한 양심과 성실한 눈과 헌신적 마음은 많은 문제를 안정시킬 것이요, 많은 어려움을 해결하고, 많은 장벽을 무너뜨릴 것이다. 참으로 하나님의 본성이 움직이도록 허락만 된다면 많은 당혹함 속에서도 잘 인도해 주실 것이다. "눈은 마음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마 6:22) 우리 심령의 목표가 진실하게 그리스도께 있고, 진실하게 그분의 이름과 주장에 있고, 진실하게 하나님을 섬긴다면, 성령님은 하나님의 귀한 계시의 보고를 활짝 열어 생명의 빛을 흠뻑 부으면서 납득시키실 것이다. 그러함으로 우리는 우리 앞에 있는 태양 광선처럼 명쾌한 길을 보게 되고, 확고한 걸음을 걷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한 순간이라도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 회심되었다는 귀한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된다.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생명의 열매는 살아 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는 모습으로 드러나야만 한다. 우리가 회심하지 못했을 시절에는 우상을 섬겼고, 여러 가지 정욕과 오락에만 심취했다. 그러나 지금은 정반대로 성령으로 하나님을 섬기며, 속죄된 온전한 능력으로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 부름 받은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께로 돌이켰고, 하나님 안에서 온전한 안식과 만족을 찾은 것이다. 이 세상의 시간 속에서나 또는 영원한 곳에서도 피조물을 바랄 필요는 조금도 없는 것이다. 우리는 스스로의 힘으로 하나님 아버지의 은혜를 얻을 수는 없다. 하나님은 그의 사랑하는 아들 그리스도 안에 우리의 새 생명의 소망을 만족시킬 수 있는 모든 보물을 저장해 두셨다. 믿음으로 우리의 심령에 그리스도가 거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우리의 일이며, 사랑 안에 뿌리박고, 사랑 안에 기초를 두어 성도들과 함께 그 넓이와 길이와 깊이와 높이를 알아 그리스도의 사랑을 더욱 터득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모든 지혜를 전해 주시며, 그분으로 인해 하나님의 모든 충만을 우리 안에 채울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충만하고, 만족하고, 강해졌기 때문에 우리는 그리스도를 섬김에 온 영과 혼과 육을 바칠 수 있도록 부름을 받은 것이다. 그리하여 견고하며, 요동치 않고 항상 주님의 일에 만족하게 쓰임 받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는 다른 할 일이 없다. 그리스도를 섬기는 일로 실천될 수 없는 어떤 일이라도 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이 말이 놀랍게도 모든 문제를 단순하게 한다. 우리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든 것"을 할 수 있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다는 것이 우리의 즐거운 권리이다. 우리는 우리의 거룩한 부름과 정반대 되는 세속적 부름에 대해서 사람들이 말하는 것을 때때로 듣곤 한다. 그것이 참 공덕인지 아닌지 우리는 의문을 갖게 된다. 바울은 천막을 만들면서도 한편 교회를 세웠다. 그는 양편(천막 만드는 일과 교회를 세우는 일) 모두로 주 예수님을 섬겼다. 그리스도인의 모든 일은 거룩해야 한다. 그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기 때문이다. 만일 이 말이 마음에 진실로 간직된다면, 이 말 자체가 우리로 하여금 일상생활의 가장 단순한 일에도 주님 자신과 연관을 맺게 한다. 그럴 때 주님은 그런 방법으로 우리의 일에 가담하시어 거룩한 위엄을 부여하면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관심을 가져 주신다. 이런 방법으로 우리는 하나님과 교제에서 방해 거리를 찾기보다는 오히려 그 일을 바르게 수행하기 위한 실제상의 지혜와 은혜를 찾아 주님을 시중드는 일로 바꾸게 되는 것이다. 그럴 때 주님의 거룩한 이름은 우리의 가장 작은 실생활에서도 영광을 받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사실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단순한 문제다. 그것은 하나님의 정해진 행동반경의 범주를 넘어 어떤 신비한 일을 행하는 것이 아니다. 가정부를 예로 들어보자. 어떻게 그녀가 살아 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길 것인가? 그녀는 심방도 못하고 대화도 나눌 수 없다. 그녀의 행동 범위는 집주인의 그늘에 있어야 하고, 만일 그렇지 못하면 집주인으로부터 떠나야 한다. 만일 그녀가 이 집, 저 집을 심방만 한다면 자신의 임무를 소홀히 하는 것이며, 실제로 하나님의 정해진 일을 거부하는 격이 된다. 다음의 성경 말씀을 들어보자. "종들로 자기 상전들에게 범사에 순종하여 기쁘게 하고, 거스려 말하지 말며, 떼어먹지 말고, 오직 선한 충성을 다하게 하라. 이는 범사에 우리 구주 하나님의 교훈을 빛나게 하려 함이라"(딛 2:9-10) 우리는 여기서 종이 복종과 겸손과 정직함으로 하나님의 교훈을 자신의 믿음 정도에 따라 효과적으로 드러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마치 복음 전도인이 거룩하고 고귀한 자신의 사명에 따라 세계를 두루 다니는 것과 같은 모습이다. 또 다른 성경 구절을 보자. "종들아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하여, 눈가림만 하여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처럼 하지말고, 그리스도의 종처럼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여 단 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 하고, 사람들에게 하듯 하지 말라. 이는 각 사람이 무슨 선을 행하든지 종이나, 자유하는 자나 주에게 그대로 받을 줄을 앎이니라"(엡 6:5-8) 이 얼마나 사랑스런 모습인가! 이 얼마나 멋진 종의 모습인가! "두려워하고 떨며"라는 말이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인가! 오늘날 어디에서 이런 모습을 볼 수 있겠는가? 어디에서 하나님의 권위에 복종하는 거룩한 모습을 볼 수 있겠는가? 성한 눈은 어디에 있단 말인가? 어디에 자원하는 섬김의 마음이 있겠는가? 슬프게도 오늘날 고집과 교만한 마음과 자고와 자기 기쁨과 자기 유익만을 위하는 자만을 보게 된다. 이런 것들이 얼마나 주님의 명예를 떨어뜨리는 일이며, 성령님을 근심케 하는 일인가! 살아 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부름 받은 자 같이 우리를 다듬어 갈 모든 감각에 절실히 눈뜰 필요가 있는 것이다. 위의 말씀은 모든 진실한 기독도들에게는 가장 흔한 가정 일에서도 하나님을 섬기며 영광을 돌려야 함을 깨닫게 해주는 은혜의 신호등이 아니겠는가? 만일 그렇지 못하다면 대부분의 기독도들로부터 무엇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우리 마음에 있는 실제적인 진리의 말씀을 드러내기 위해서 가정부의 경우를 예로 들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이름과 자신의 영광을 낮추시어 우리의 매일의 가정 생활에서의 맡겨진 조그마한 일과도 연결하신다는 사실을 은혜로 알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복된 일이다. 그것은 마치 아침부터 저녁까지의 우리의 모든 작은 일에도 하나님은 위엄과 유익과 원기를 주시는 것과 같은 것이다. "무슨 일을 하든지 단 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엡 6:7) 여기에 모든 문제의 귀중한 비밀이 담겨 있다. 급료를 위해서가 아니다. 반대로 주님을 섬기기 위한 일이다. 이는 하늘의 보상을 유업으로 받기 위하여 주님을 바라보는 자세이다. 오, 이 모든 것이 보다 충실하게 깨달아지고, 우리 가운데서 보다 드러났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렇게만 됐더라면 전 기독도 생활에 영적 고상함이 있었으리라! 그렇게만 됐더라면 믿지 않는 자들에게도 좋은 해답을 주었으리라! 모든 사람에게는 비웃음과 흠잡기가 얼마나 맥없는 비난인가! 기독교인들의 영적 고상함이 수만 명의 지식인들의 논리보다 훨씬 낫다. 열심 있고, 헌신적이며, 거룩하고, 즐거운 자기 희생의 기독교인들의 생활보다 더 강렬한 표현은 없으리라. 그리고 이런 생활은 4면이 벽으로 둘러 쌓여 있는 좁은 부엌에서 생활하는 진실한 기독도 가정부에 의해서도 드러날 수 있는 것이다. 진실한 기독자의 실생활은 회의주의자나 불신자들에게 가장 올바른 가능성 있는 해답을 줄 뿐 아니라 하나님의 사역을 막고 기독교인들을 법 아래로 집어넣으려는 자칭 법통들에게는 가장 만족스런 해답을 준다. 하나님의 사역을 말로 표현하지 않는 우리 기독교인들에게는 세상 사람들이 도전적일 때, 우리는 단순하게 이렇게 말하게 된다. "무엇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사역을 말로 설교해야 하겠는가?" 회심하지 못한 사람은 "악한 일"과 "죽은 행실" 외에 어떤 일도 할 수 없다.(골 1:21, 히 6:1) "육신에 있는 자들(회심하지 못한 자)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롬 8:8) 그들이 어떤 그럴듯한 방법으로 참으로 하나님의 사역을 설교할 수 있겠는가? 그들의 방법은 오직 사람들의 눈에 티끌만 더할 뿐이요, 사람들의 마음 눈을 감기게 할 뿐이요, 사람들의 심령을 속일 뿐이요, 손에 거짓 가르침을 들고 사람들을 지옥에 보낼 뿐이다. 하나님께 향한 참 회심이 있어야 한다. 이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거룩한 사역이다. 무엇이 회심자로 하여금 그렇게 될 수 있게 할까? 그는 생명을 얻기 위해 또 무엇을 해야만 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미 그는 새 생명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생명은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를 통해 얻은 하나님의 값없는 영원한 선물인 것이다. 그는 구원을 얻기 위해 무엇을 행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이미 그는 구원을 얻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그는 부름을 받았단 말인가? "사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이다. 어떻게? 언제? 어디서? 그 해답은 어떤 방법으로도 가능하며, 항상 실천할 수 있는 것이며, 어느 곳에서도 되는 일이다. 회심한 자는 하나님을 섬기는 것 외에 아무 일도 할 수 없다. 만일 그가 다른 어떤 것을 한다면 그는 틀림없이 진짜가 아닐 것이요, 은혜의 주님에 대해서는 불신자일 것이다. 주님은 섬기는 일을 위해 부르시기 이전에 먼저 그에게 새 생명을 주었고, 은혜를 주었고, 능력을 주셨다. 그러므로 섬기는 일만이 허락되는 것이다. 그렇다 기독교인은 섬기기 위해서 부름을 받는다. 이 사실을 잊지 말자. 기독교인에게는 자신의 몸을 산 제물로, 거룩하게 하나님께 받아들여지도록 드릴 권리가 주어졌다. 이것이 합당한 예배다.(롬 12:1) 이런 모습이야말로 모든 의문점을 해소시킨다. 그런 모습이 모든 어려움을 제거한다. 그런 모습이 모든 대적을 잠잠케 한다. 그런 모습이 모든 것을 제자리에 안정시킨다. 그것은 내가 무엇을 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어떻게 하느냐의 문제다. 어느 곳에 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내 자신을 어떻게 다루느냐의 문제다. 신약 성경에 보여진 기독 신앙은 믿는 자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생명의 열매인 것이다. 그것은 기독도의 매일의 생활 속에서 성령의 능력으로 그리스도가 재생되는 것이다. 기독도가 만지는 모든 것, 그가 행하는 모든 행위, 그가 말하는 모든 말, 그가 살아가는 전 생활이 주일 아침부터 다음 토요일 저녁까지 "사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며"라는 말씀을 마음 속 깊이 간직하고 있어야 하며, 그 말씀을 묵상하고, 그 말씀의 영에 감동을 받아야 하는 것이다. 우리의 바램은 성도들의 생활이 보다 훌륭하게 되는 것이다. 모든 주님의 사랑하는 성도들이 어디서든지 성령님의 감동 속에서 보다 열성적이고, 철저하고, 온 마음이 그리스도에게 헌신하는 자세가 되어 주님에 대한 귀한 섬김이 되기를 바라는 바이다. 8. 당신은 진정으로 구원을 받았는가? 데살로니가 전서 1장 마지막 절은 우리의 주의를 끈다. 그 구절은 매우 확실하고 강력한 어조로 데살로니가에서의 뚜렷하고도 충만한 사도 바울의 깊은 이해력있는 증거를 드러내고 있다. 또한 그곳 데살로니가의 새 회심자들 속에 있었던 밝고도 실제적인 믿음 생활을 드러내고 있다.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우상에서 돌이켜 하나님께로 나아갔을 뿐만 아니라 살아 계시고 참 되신 하나님을 섬기게 되었다. 이것은 은혜로 행한 것이었다. 또한 특별한 능력과 원기와 열의로 행했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확실히 믿건데 그보다 더한 것이 또 있었는데 곧 만일 이것이 없었더라면 사랑하는 성도들의 회심과 신앙 속에서 엄청난 결함이 있을 뻔했다. 즉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돌이켜 회심했을 뿐만 아니라 하늘로부터 오는 하나님의 아들을 기다리게 되었다는 점이다. 독자들은 바로 이 사실에 깊은 관심을 두기 바란다. 밝고도 복된 주님의 재림의 소망은 바울 사도의 설교 속에 있는 복음의 진지한 부분이며, 또한 그의 복음 사역으로 말미암아 회심한 사람들의 내적 신앙의 성실한 부분이기도 하다. 축복의 종 바울은 온전한 복음을 전했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 이 세상에 오셔서 대속의 위대한 일을 성취했음을 전파함과 함께 하나님의 거룩한 영광과 그 계획의 영원한 기초를 다졌을 뿐만 아니라 주께서 하늘에 올라 하나님 우편에서 승리의 자리에 앉아 성도들을 드높이고 영광스럽게 하셨다는 사실도 설파했다. 그리고 주님은 다시 오신다고 전했다. 첫째는 자기 백성을 자신에게 이끌어 하나님 아버지의 집 깊숙한 곳에 거하게 하기 위함이요,(그 장소는 성도들을 위한 것이다) 그 후 그들과 함께 지상에 오시어 원수들을 심판하신다. 그리고 자신의 왕국으로부터 불법을 행하는 대적자 모두를 끌어내고 자신의 영광스런 통치를 땅 끝까지 이루기 위함이다. 이 모든 내용이 사도 바울이 전한 귀한 복음 속에 있다. 데살로니가의 회심자들은 바로 그 복음을 받아들였다. 우리는 사도행전 17장에서 간접적이지만 매우 흥미 있는 이 복음의 내용을 발견하게 되는데, 거기에서 영감 받은 기자는 불신의 유대인들이 바울의 설교에 대해서 어떻게 반대하고, 평가한 내용을 기록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시기하여 저자의 어떤 괴악한 사람들을 데리고 떼를 지어 성을 소동케 하여 야손의 집에 달려들어 저희를 백성에게 끌어내려고 찾았으나 발견치 못하매, 야손과 형제를 끌고 읍장들 앞에 가서 소리질러 가로되 천하를 어지럽게 하던 이 사람들이 여기도 이르매 야손이 들였도다. 이 사람들이 다 가이사의 명을 거역하여 말하되 다른 임금 곧 예수라는 이가 있다 하더이다."(행 17:5-7) 이것이 주의 종들의 설교를 들은 불신자들의 불쌍하고 무식하고 편견적인 생각이었다. 우리는 그들의 생각 속에서 위대하고 엄숙한 진리의 요소를 볼 수 있는데 즉 환경에 따른 세상 제도의 완전한 멸망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왕국의 설립이다. "내가 엎드러뜨리고 엎드러뜨리고 엎드러뜨리려니와 이것도 다시 있지 못하리라. 마땅히 얻을 자가 이르면 그에게 주리라"(겔 21:27) 그러나 주님의 재림과 왕국이 사도 바울의 설교 속에서 당시에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을 뿐만 아니라 그의 교훈이 현재에도 찬란하게 빛나고 있다는 점이다. 데살로니가의 성도들이 이러한 축복된 소망으로 돌이켰을 뿐만 아니라 그 소망 안에서 섰고, 안착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매일의 삶을 그러한 밝은 소망 안에서 사는 것을 배웠다. 그것은 무기력하고, 무가치한 한 신조의 부분으로만 받아들이기 위한 건조하고 메마른 어떤 교리가 아니었다. 그것은 살아 있는 실상이요, 심령 속에 있는 강력한 영적 능력이었다. 즉 이 세상에서 완전히 마음을 분리시킨 어떤 귀하고 흠 없는 거룩하고도 지고한 소망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순간 순간 밖을 바라보게 한다. 그렇다. 다시 강조하는데, 그것은 우리를 사랑하고, 우리를 위해서 자신을 주신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는 소망이었다. 데살로니가 전, 후서에는 다른 서신에서 합친 것 보다 훨씬 더 많은 주님의 재림에 대한 계시가 있다는 것은 대단히 흥미 있는 일이다. 뿐만 아니라 데살로니가 전, 후서가 바울 서신 중에서 가장 초기의 글이기 때문에 오히려 더 주목하게 된다. 그 서신서들은 신앙 면에서 어린 모임에서 쓰여진 것들이다. 독자들께서 이 두 서신을 단번에 읽어보면 8개의 각 장마다 주님의 재림에 대한 소망이 기록되어 매 장마다의 주제와 연관됨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예를 들면 제 1장에서는 주의 재림이 기독교인들의 마음에 항상 보존되어 마음의 대상으로 삼기 위해 주어졌음을 알게 된다. 그리하여 세상에서의 긴 여정의 끝에 가서는 찬란하게 빛나는 빛 되기를 소망하는 것이다. "너희가 어떻게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사시고 참 되신 하나님을 섬기며, 또…… 기다린다고 말하니"(살전 1:9-10) 무얼 기다린다는 말인가? 자신들의 죽음을? 아니다. 그러한 내용이 아니다. 믿는 자들에게는 죽음은 없어졌다. 죽음은 신자들의 소망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무얼 기다리라고 가르침을 받았던가?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심을 기다린다고 말하니"(살전 1:10a) 그렇다면 다음에 이어지는 구절에 주목하시라. "이는 장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예수시니라"(살전 1:10b) 이분이 바로 우리가 기다리는 구주시며, 위대한 구속자의 인격이신 것이다. 그분은 우리의 비참함을 담당하신 분이며, 우리를 위해 영원하신 심판자의 손길로부터 진노의 잔을 받아 영원히 비워 버리신 분이시다. 그분은 모든 구름을 제거하셨고, 그리함으로 우리는 그 구름 너머에 있는 천국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으며, 그리고 영원 속을 끝없이 가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 자신의 사랑과 찬란한 영광과 축복만을 바라보게 되었고, 이는 마치 끝없는 행복을 누리는 것과 같은 것이다. 오! 은혜로우신 구원자의 재림을 아침, 점심, 저녁, 할 것 없이 밤까지 바라보며 기다린다는 것이 얼마나 복된 것인가? 우리의 사랑의 대상인 구주의 재림을 기다린다는 것이 얼마나 거룩한 실상인가! 우리가 매일 아침마다 일어나 그 날의 일을 시작하면서, 비록 그 일이 무엇이든 간에, 때로는 마루를 닦는 일일 수도 있고, 복음을 설파하는 일일 수도 있지만, 밝고도 복된 소망을 소중히 여긴다는 것이 얼마나 구별되고 고상한 것인가! 저녁 어두움이 우리를 엄습하기 전에 구름 속으로 끌어올려 주님의 재림을 맞이한다는 것은 너무나 거룩하고 구별된 일이다. 이것이 광신자의 꿈이고, 열광자의 환상이겠는가? 아니다. 이것은 소멸될 수 없는 진리이며,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가장 귀한 기독 신앙의 바로 그 기초 위에서 안식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나사렛 예수의 인성을 타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을 밟으셨다는 것이 사실인가? 그분께서 이 땅에서 가련하고 타락된 인간들의 죄와 고통을 짊어지고 살아가며 일하셨다는 것이 사실인가? 그분이 죄가 들끓는 이 황폐한 세상의 감각으로 한숨짓고, 눈물을 흘리시며 신음하였다는 것이 사실인가? 그분이 십자가를 지고, 흠 없는 자신을 하나님께 드려 하나님의 거룩한 위엄을 옹호하셨고, 하나님의 요구에 응하셨고, 마귀의 역사를 멸하시고, 지옥의 모든 권세를 공개적으로 보이셨고, 자신을 희생 제물로 드려 원죄를 소멸하시고, 역사의 시작부터 은혜로 하나님의 이름을 믿게 되는 모든 사람들의 자범죄를 짊어지셨다는 것이 사실인가? 사흘 밤, 사흘 낮을 땅 속에 누이셨고, 주의 첫날에 무덤에서 일어나 죽음을 이기시어 새로운 피조물의 머리가 되시고, 최소한 오 백 여명의 증인들에게 보이신 후 하늘에 오르셨다는 것이 사실인가? 부활 후 50일 만에 성령을 보내어 사도들의 마음을 충만케 하여 땅 끝까지 그분의 증인으로 삼으셨다는 것이 사실인가? 오순절로부터 지금까지 그분이 자신의 백성들을 위해 하나님 앞에 대언자가 되시어, 곧 거룩한 대제사장이 되시어 우리의 죄와 허물과 부족함을 위해 중보자로서 우리의 모든 연약성과 슬픔을 동정하시며, 지속적으로 우리의 기도와 찬양의 제사를 하나님 앞에 드려 아름다운 향기를 흠향케 하시는 것이 사실인가? 이 모든 것이 사실이며, 진실인가? 그렇다면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그 모두가 틀림없는 사실이며, 이것은 신약 성경 전체에서 놀랍게도 확실함과 충만함과 함께 심도있게 능력의 말씀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모두가 바로 성경의 확고한 기초가 된다. 이 기초는 어떠한 세상의 권세라도, 또는 지옥의 권세라도, 또는 인간과 마귀의 어떤 권세라도 방해할 수 없는 것이다. 자, 이제 주님의 재림의 복된 소망도 정확하게 위와 같은 권위에 있는 것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린아이로 베들레헴 말구유에 나신 것이 사실인 것처럼, 자라서 어른의 신분이 되셨다는 것이 사실인 것처럼, 하나님의 선한 일을 행하셨다는 것이 사실인 것처럼, 십자가에 못 박혀 무덤에 누이셨다는 것이 사실인 것처럼, 하늘의 위엄의 보좌에 앉으셨다는 것이 사실인 것처럼, 주께서 주의 백성을 자신에게 영접하기 위해 다시 오신다는 것도 틀림없는 사실인 것이다. 주님은 오늘밤에 오실 수도 있다. 그가 언제 오실런지 아무도 모른다. 그건 어느 때고 오실 수 있는 것이다. 단지 그분께서 지체하고 있는 것은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오래 참고 기다리고 계시기 때문이다. 1800년의 오랜 기간 동안(필자는 1820년에 태어났다) 주님은 식을 줄 모르는 사랑과 자비와 동정심으로 기다려 오셨다. 그 모든 기간 동안 온전한 구원이 드러나기를 예비하셨고, 동시에 심판도 예비하신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오랜 고통과 인내로 기다려 오셨고, 지금도 기다리고 계신다. 그러나 언젠가는 도적같이 주님은 오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의 오심을 소망하고 항상 살아야 할 것이다. 그래서 사도는 사랑하는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그러한 마음 자세로 살 것을 가르쳤다. 사도 바울도 실은 그렇게 살았다. 복된 재림의 소망은 그의 매일의 생활 습관과 감정에 긴밀히 밀착돼 있었다. 그것은 그의 노고의 매일의 생활 습관과 감정에 긴밀히 밀착돼 있었다. 그것은 그의 노고의 열매였던가? 그의 말을 들어보자.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의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살전 2:19) 바울은 그들 모두를 그때 그곳에서(주님의 재림 때) 만나기를 바랬다. 어느 원수도 그 모임을 방해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 바울은 한번 두 번 너희에게 가고자 하였으나 사단이 우리를 막았도다"(살전 2:18) 매우 기이한 일이고, 괴기한 일이다! 그때도 그랬었다. 사단은 다니엘의 시대에도 자기의 임무대로 하나님의 천사를 방해했다. 사단은 그리스도의 사도인 바울이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간절히 보기 원하는 일에도 방해했다. 그러나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그리스도와 그의 성도가 즐겁게 모이는 그 모임은 방해할 수 없다.(하늘의 모임을 말함-역자 주) 그 모임을 우리는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얼마나 멋진 순간일까! 얼마나 귀한 결합일까! 얼마나 달콤한 만남일까! 얼마나 멋진 오랜 친구들의 인사가 될 것인가! 그러나 그것보다도 더욱 멋진 것은 주님 자신이다. 주님의 미소야말로 최고의 멋짐인 것이다. 바로 주님의 환영이다. 주님의 감동어린 "참 잘 했노라"라는 말일게다. 이 얼마나 귀하고 심령을 감싸주는 소망인가! 복된 사도의 생각과 가르침 속에 있는 그 엄청난 장소에 대해서 우리는 놀랄 필요가 있겠는가? 사도는 지난 모든 경우를 회상하며 모든 주제와 연관시킨다. 그것은 구별된 생활과 실제로 경건으로 이어지는 문제인가? 바울은 이렇게 말했다. "또 주께서 우리가 너희를 사랑함과 같이 너희도 피차간과 모든 사람에 대한 사랑이 더욱 많이 넘치게 하사 너희 마음을 굳게 하시고 우리 주 예수께서 그의 모든 성도와 함께 강림하실 때에 하나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거룩함에 흠이 없게 하시기를 원하노라"(살전 3:12-13) 독자들이여, 특별히 감동적이고 아름다운 마지막 말씀에 주의를 기울이자. "그의 모든 성도와 함께" 이 얼마나 감탄할만한 지혜가 비치고 있는가! 사도는 이미 이 세상을 떠난 친구들(성도들)로 인해서 실족한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오류에 대해서 직접 관여하려 했다.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이미 자는 자들이 주님 재림 때 만남의 기쁨에 동참하지 못할까 두려웠던 것이다. 그들의 오류는 다음의 짤막한 문장으로 완전히 해소되고 있다. 즉 "그의 모든 성도와 함께"이다. 한 사람도 그 기쁨의 만남과 잔치에서 누락되지 않을 것이다. 참으로 복된 확신이다! 이것은 현재 살면서 보이는 것 이외에는 아무도 주님의 재림의 기쁨을 맛볼 수 없다고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는 참으로 승리적 해답인 것이다. "그의 모든 성도와 함께" 비록 그들이 무식하고, 실수 많고, 방황하고, 넘어지고, 연약하고, 부족함이 많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우리의 복된 주님인 우리 심령의 영원한 사랑 공급자는 그 복된 순간에서 우리 중 어느 누구도 내어쫓지 않을 것이다. 이 모든 한량없는 은혜로 인해서 우리는 신앙에 무관심한 사람으로 살게 될 것인가? 아니다. 그 은혜는 항상 내재하는 지각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우리 속의 모든 것을 판단하여 그리스도의 마음에 거슬리는 우리 자신의 모든 방법을 분별할 수 있는 거룩한 능력이 된다. 그뿐 아니라 우리 주님의 재림의 소망 역시 마음 속에 밝고도 생생하게 간직되어 진다면 틀림없이 우리의 성품과 우리의 생활을 깨끗하고, 거룩하고, 고상하게 만들어 줄 것이다. 이 세상의 어떤 것도 그렇게 해주지 못한다. "자기 안에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주께서 깨끗하심과 같이 자신을 깨끗케 하느니라"(요일 3:3) 사람이 어느 때고 주님 맞이할 소망으로 살아가면서 그의 마음이 세상일에 집착하고, 돈버는 일이라든가, 자기 멋대로의 행동이라든가, 오락 등 헛되고 어리석은 일에 마음이 붙잡혀 있을 수 있다는 것은 영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속이지 말자. 우리가 하늘로부터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을 매일 바라보면서 살아간다면 시간 속에서의 피부적 감각 생활에는 좀 느슨해야 할 것이다. 우리의 주의 재림을 지식으로 단순히 교리로만 받아들일 수도 있다. 다시 말하면 우리 마음에나, 성격에나, 실생활 속에 아무런 효과도 미치지 못하면서, 우리 앞에 있는 모든 예언의 진리를 단순히 지식으로만 취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를 사랑하사 자신의 귀한 보혈로 우리 죄를 씻어 주신 주님을 맞이할 밝고도 복된 소망으로 가득찬 모든 영적 실재와 실질적 생활을 한다는 것은 전적으로 별개의 문제다. 우리 속에 이러한 일들이 허다하다. 우리들 중 많은 사람이 참되고 적절한 소망의 능력을 이처럼 잃고 살아가고 있음은 심히 두려운 일이다. 주님 재림의 진리는 우리가 쉽게 거론할 수 있는 단순한 교리로만 받아들이기에 매우 익숙하다. 때문에 우리는 재림에 관련된 여러 가지 사건에 대해서 토론도 하며, 사람들과 논쟁도 하면서 살아간다. 그러면서 우리는 확실하게 잡았다고 고백하는 신앙에다 거짓된 우리 자신의 세상적 태도와 마음과 세상적 기질을 더하게 된다. 이제 우리는 더 이상 이 주제 하에서 슬프고도 비참한 우리의 단면을 더 추구하지 않으련다. 주께서 우리를 살피사 은혜로 치유하시어 우리의 심령을 높여 주시기를 바랄 뿐이다! 주께서 사랑하시는 백성들의 마음에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소망을 적절하게 재생시켜 주시기를 바랄 뿐이다. 이것은 찬란한 새벽 별을 맞이할 소망이리라.(벧후 1:19참조) 우리의 마음과 우리의 생명으로부터 우러나오는 말이 "아멘 주여 어서옵소서" 라는 말이 되기를 바랄 뿐이다. 이제 이 글을 끝맺어야겠다. 우리는 독자들과 함께 두 서신서(데살로니가 전, 후서)를 통해 데살로니가인들이 돌이켜 주님의 재림의 소망을 갖게 됨이 곧 사도 바울의 마음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사실을 여러 가지 면으로 또한 기독자의 생활 양상으로 증명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믿건대 참 회심으로 사도 바울의 가르침을 따르기만 한다면 복된 주의 재림의 소망은 절대로 중단될 수 없다는 사실을 충분히 드러냈다. 참 회심자는 우상에서 돌이켜 즉 세상과의 연관을 끊고, 또한 옛 자아와 관계를 끊고, 하나님께로 돌이켜 이 생에서나 오는 세상에서나 바랄 수 있는 모든 것을 주님 안에서 발견하여, 그만을 섬기며 결국에는 하늘로부터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을 기다리는 자다. "참 회심이란 무엇인가?"(Conversion, What is it?) 라는 질문에 대한 참되고 적절한 해답은 바로 이런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알게 되었다. 당신은 참으로 돌이켜 회심했는가?(즉 당신은 참으로 구원받았는가?) 그렇지 않다면 그땐 어떻게 되는 것인가? 만일 당신이 회심했다면 당신의 생명은 지금 그 회심(구원)을 선포하며 살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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