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죽헌은 원래 조선 초기 강릉의 선비 최치운이 지은 것으로 그의 아들 최응헌에서 외손자에게로 상속되어 오다가 1975년 강릉시로 이관되어 경내 율곡 이이의 사당인 문성사와 율곡기념관, 강릉시립박물관과 율곡인성교육관 등을 지어/ㅅ으며 현재의 모습을 갖추었다. 오죽헌은 우리나라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 중 하나로 신사임당과 이이가 이곳에서 태어났다.
신사임당의 아들로 조선 둥기 이황과 더불어 으뜸가는 학자로 추앙받은 학자로 자는 숙헌, 호는 율곡이다. 어려서는 어머니인 사임당 신씨의 가르침을 받았고, 명종 3년 13세의 나이로 진사시에 합격했다. 선조 1년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명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1583년 당쟁을 조장했다는 동인의 탄핵으로 사직되었다가 판돈녕부사와 이조판서에 임명되었으나 49세의 일기로 사망했다.
자경문은 오죽헌의 안팎을 가르는 문으로 율곡은 어머니를 여윈 후 금강산에 들어갔다가 유학의 뜻을 두고 일년 만에 돌아와 강릉 외가로 와 외할머니 앞에서 "스스로를 경계하는 글이라는 의미의 <자경문>을 지었는데 거기에서 따온 이름이다. 이 문은 강릉 임영관 삼문과 같은 모양으로 1976년에 건립되었다.
문성사에는 율곡 이이의 영정을 모신 사당이다. 이 자리는 원래 어제각이었으나 1975년 오죽헌 정화사업 때 서쪽으로 옮이고 대신 문성사를 지었다. 문성은 1624년 인조 임금이 율곡에게 내린 시호로 '도덕과 학문을 널리 들어 막힘이 없이 통했으며 백성의 안정된 삶을 위하여 정사의 근본을 세웠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문성사의 현판은 박정희대통령의 글씨다.
소나무는 선비의 지조를 상징하는 군자(君子) 식물이다. 율곡선생은 <우송당기>에서 "이 소나무의 기이한 형상을 보니 천공의 오묘한 조화를 빼앗았다. 한참을 바라보노라면 청아한 운치를 느낄 것이다. 소나무가 사람을 즐겁게 하는데 어찌 사람이 즐길 줄 모르는가!"라고 하였다.
주목나무다.
조선 초기에 지어진 별당 건물로 당시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는 대표적인 주택이다. 이 건물은 주심포양식에서 익공양식으로 변해 가는 건축 과정을 보여주는 중요한 건물로 평가받아 1963년 보물 제165호로 지정되었다. 왼쪽 마루방은 율곡이 여섯 살 때까지 공부하던 곳이며, 오른쪽 온돌방은 1536년 사임당이 용이 문머리에 서려 있는 꿈을 꾸고 율곡을 낳은 곳이다.몽룡실이라 부르는 이 온돌방에는 신사임당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조선 초기 별당 건물의 마루로 율곡 선생의 <격몽요결>
사임당은이 용꿈을 꾸고 율곡 선생을 낳은 몽룡실에는 사임당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강릉 오죽헌 율곡매
이 나무는 세종 22년경에 이조참판을 지낸 최치운이 오죽헌을 건립하고 별당 후원에 심었다고 하며, 신사임당과 율곡선생이 직접 가꾸었다고 전한다. 사임당은 여러 매화 그림을 그렸고 맏딸의 이름을 매칭이라고 지을 만큼 매화를 사랑하였다. 율곡매는 꽃 색깔이 연분홍인 홍매 종류이며, 열매는 다른 나무에 비하여 훨씬 알이 굵은 것이 특징이다.
안채는 안주인이 생활하던 공간이다.
사랑채는 바깥주인이 거처하던 공간이다. 사랑채 툇마루 기둥에 걸려 있는 주련은 추사 김정희의 글씨를 새긴 것이다.
운한문은 막돌담장으로 둘러싸인 어제각을 드나드는 출입문으로 어제각과 함께 정조 12년 지금의 문성사 앞에 건립되었다가 1987년 이자리로 옮겨와 복원되었다.
정조대왕이 율곡의 <격몽요결>과 벼루를 궁으로 가지고 오게 하여 직접 본 후 잘 보관 하라며 돌려보내자, 당시 강원도관찰사 김재찬 강릉부사 맹지대가 어명을 받들어 어제각을 지었다.
율곡이이 선생이 집접 쓴 책으로 학문을 시작하는 사람들이 어떤 몸가짐과 마음가짐을 가져야 하는지 알려준다.
율곡 선생이 어릴 때 쓰던 벼루로, 뒷면에 정조대왕이 손수 짓고 쓴 어제 어필이 새겨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