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얀마 내전 이후, 그들이 어떻게 달라졌는가!
첸나이에 살 때 우리는 신학교 옆집에 살았다. 그 덕분에 시간이 나면 인도기독교사를 청강하였고 그 학교에 유학 중인 미얀마 청년과 네팔 청년을 만났다. 가끔 타국에 와서 공부하는 그들을 격려하는 차원에서 식사와 차담을 나누었는데 그것이 인연이 되어 오늘날까지 그들을 만나고 있다. 인연 치고는 질긴 인연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인연이 인연을 낳고 인연이 인연을 낳아서 나는 그 인연의 덕으로 기쁨과 슬픔, 희망과 절망을 누리고 있다. 특별히 미얀마 내전이 주는 고통을 고스란히 맛보고 있다.
사무엘이 박사학위를 받고 드디어 미얀마로 돌아갔다. 그는 진취적이며 활발하고 정치 쪽으로 관심이 많았다. 그러면서도 자기 부족 출신의 지도자 양육에 관심이 많았다.
어느 날 그가 자기 종족에 속하는 의대생을 추천하며 장학금을 요청하였다.
최소한의 장학금을 그에게 제공하였는데 그 학생이 두 번이나 유급되어 학년 진급에서 탈락하였다. 그는 진로를 교육대학 쪽으로 바꾸며 장학금을 사양하였다. 장학금을 반환하려는 시점에 그가 같은 종족 출신의 교사 지망생을 장학생으로 추천하였다. 우리는 재학 중인 그가 졸업할 때 까지 장학금을 지급하였다. 그 후 그가 같은 종족 출신의 의대 대학원에 다니는 학생을 추천하였고 우리는 미얀마 내전 전까지 그에게 장학금을 지급하였다. 그리고 2021년 2월 1일, 내전 이후 11월 까지 일체 소식이 끊겼다. 내전(內戰) 소식을 들었을 때 제일 먼저 사무엘과 그의 아내 그리고 세 명의 장학생의 안위를 생각하였다. 그러나 알 길이 없었고 연락할 방법도 없었다. 다만 내전이 속히 끝이 나는 것과 그들의 무사 안전을 기도할 따름이었다.
시간이 흘러 사무엘이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을 때 그에게서 연락이 왔다. 그는 인도 미조람으로 피난 나왔고 그 사이에 자신이 거지 신세가 되었다며 다짜고짜 난민 긴급구호를 요청하였다. 많은 고민과 망설임 끝에 난민들의 삶의 자리가 이천여 년 전에 오신 주님의 마구간이었음을 고백하며 성탄절에 단 한 번만 구호하기로 하고 사랑의 쌀을 보냈다. 그 후로 하나님의 특별한 배려에 이끌려 4년째 긴급구호를 계속 이어오고 있다.
나는 간간이 세 명의 장학생 소식을 물었다.
첫 번째 장학금을 수혜 받았던 청년은 교사직을 사임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피난도 떠나지 않고 농사를 짓는다고 하였다.
두 번째 장학금을 수혜 받았던 청년은 교사직을 사임하고 프리덤 파이터(Freedom fighter)가 되고자 떠났다고 하였다.
세 번째 장학금을 수혜 받았던 청년은 양곤에서 잠적하여 연락이 안 된다고 하였다.
세 명의 삶의 자리가 전쟁으로 말미암아 운명적으로 달라진 것이었다.
내전이 4년째로 접어들자 마음속에서 조바심이 일어났다. 긴급구호 모금도 점차로 어려워지고 있고 언제까지 이 일에 매달려야 하는가를 생각하며 내전이 빨리 끝나길 염원하는 마음이 간절해졌다. 답답해질 때마다 사무엘에게 ‘전쟁이 언제 끝날 것 같으냐’고 물으면 그는 10년 정도 되어 어느 한 쪽이 끝장이 나야 끝날 것이라고 대답하곤 하였다.
미얀마 정부군은 국민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버미족이고 대영제국 시절 항일운동을 펼친 군인으로서 정통성을 주장하며 결코 협상이나 정전을 하지 않고 반정부군(시민군)을 철저하게 소탕할 것이고, 반정부군(시민군)과 부족에 속한 프리덤 파이터(Freedom fighter)들은 민주주의 수호와 자기 부족들의 권리 확보를 위해 현 미얀마 독재정권이 무너질 때 까지 치열하게 항전할 것이라는 거였다. 현재 정부군은 세금으로 신무기를 구입하고 청년들을 징병하여 막강한 부대를 만들고 있고 반정부군과 부족 소속의 프리덤 파이터들 또한 국제적인 지원을 받아서 무기를 보강하고 자원자들을 받아서 강력한 부대를 만들고 있으므로 당분간 절대로 전쟁이 끝나지 않을 것이라는 거였다. 양쪽이 다 전의를 다지고 있어서 어느 나라도 어느 누구도 내전의 중재자로 나설 수 있는 상황이 아니고 전 국토가 완전히 불에 타서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져야 그 때서야 양쪽이 정신을 차리게 될 것이라는 설명이었다.
미래의 일은 알 수가 없지만 앞으로 10년 동안이나 민간인들이 내전에 시달린다고 생각하니 슬픔으로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무엇보다도 어린 시절의 꿈과 희망을 전쟁에게 짓밟히고 불안과 고통 속에서 성장할 아이들과 청춘의 낭만과 사랑을 전쟁에게 빼앗길 청년들이 너무 불쌍하고 가련하였다.
내전이 속히 끝나길 비는 마음으로 미얀마 국경에 가까운 인도 측 난민캠프를 방문하였다. 난민들에게 하나님께서 한 가지 소원을 들어준다고 하면 무엇을 말할 것이냐고 물었더니 이구동성으로 ‘전쟁이 끝나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대답하였다. 난민들은 여름이 오기 전에 고향으로 돌아가길 간절히 소망하였다. 그러나 공무원이나 교사이었던 사람들은 정부군이 이길 경우에는 고향으로 돌아가도 처벌이 기다린다고 하였고 사무엘 또한 정부군이 이길 경우에는 고향으로 돌아갈 수가 없다고 하였다.
소수의 권력자들이 권력을 잃지 않으려고 세상에 전쟁이라는 불을 질러 지옥을 만드는 슬픈 역사의 질곡과 폭력의 악순환이 속히 끝나길 날마다 빌고 또 빌며 우리 장학생들의 안부를 진지하게 다시 물었다.
첫 번째 장학생 소식이 왔다.
그는 의대생으로 공부하다가 중도 하차하고 교육학과를 졸업하고 교사로서 일하였었다.
선생님!
최근에 그가 미조람 씨아하타운으로 와서 저를 방문하였습니다. 우리는 가슴에 쌓인 이야기를 나누며 서로 위로하였습니다. 장차 우리가 어디서 어떻게 될지 모르기에 마음이 더욱 애틋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선히 인도해주시길 바랄 뿐입니다.
선생님!
그는 초기에 군사정권에 저항하고자 교사직을 사임하였습니다. 이후 그는 달링마을에서 부모님을 도와 농사를 지으며 조용히 지냈습니다. 그는 그런 자신을 정부군과 시민군의 눈에 띄지 않으려고 비겁하게 숨어 지냈다고 표현합니다. 숨죽이고 사는 이웃에도 무관심하고 피난을 떠나는 사람들에게 인사도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귀찮은 일이 생기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려고 못 본 척했지만 그것 때문에 마음이 많이 영 불편 하였다고 합니다.
선생님!
그가 머물고 있는 저의 고향이기도 한 달링마을은 평화롭지 않습니다. 전쟁지역입니다. 그러나 최근 그 일대에 있는 라이렌피마을의 정부군부대가 친(CHN) 프리덤 파이터에 의해 점령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다소 자유로워진 달링주민들(피난을 떠나지 않은 사람들)이 용기를 내어 농사를 시작하였습니다. 이 농사는 산에 불을 질러 화전(火田)을 일구는 것입니다. 실제로 화전 경작은 전쟁과 기후 변화로 인하여 생계에 충분한 양식을 거두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나마도 전쟁 때문에 중단했었습니다.
선생님!
그는 자신의 삶에 대하여 많은 고민을 하고 있습니다. 독재 정부에 저항하기 위해서 정부학교 교사직을 용감히 사임하였지만 그렇다고 ‘프리덤 파이터’는 자기 길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신앙으로 정의와 민주주의 이름으로 피 흘리는 전쟁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신념을 가지고 피난을 가지 않고 농사를 짓고 있지만 계속되는 내전으로 불안과 분노, 절망과 무력감에 짓눌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 인생을 망가뜨린 전쟁, 운명에 결코 승복하지 않겠다고 합니다. 그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 시간을 낭비할 수 없다며 전쟁을 이기기 위하여 신학 공부를 하겠다고 합니다. 그러다가도 전쟁 중에 차마 부모님과 고향을 버리고 떠날 수 없어 통신대학교에 등록해서 공부하겠다고 합니다. 아직까지 확정 지은 것은 아니지만 그는 신학을 할 것 같습니다.
선생님!
전쟁이 그의 운명을 바꾸고 있습니다.
기도 부탁드립니다.
두 번째 장학생 소식이 왔다.
그는 교육학과를 졸업하고 교사로 일하였었다.
선생님!
그와는 연락이 되지 않아서 그 주변의 친구들에게 들은 이야기입니다.
처음 내전이 일어났을 때 양곤에서 우리는 치열하게 토론을 벌였습니다. 그는 독재 타도와 정의를 위해, 우리 부족의 정치적 위상을 위해서 시민군이나 우리 부족에 속하는 프리덤 파이터가 되고 싶어 하였습니다. 저는 신앙을 가진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최상은 피난을 떠나거나 조용히 농사를 지으며 내전 이후를 위해 준비하는 것이라고 설득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나의 생각이 너무 나약하고 비겁하다고 하였습니다. 저의 생각을 이해하기에 그의 젊음의 피가 너무 뜨거웠습니다. 우리는 달링마을 출신의 선후배로 한 피 받아 한 몸 이룬 사람으로 살기로 다짐하였으나 전쟁으로 서로 다투게 되었습니다. 저는 칼을 든 자는 칼로 망하게 된다고 하였지만 그는 칼을 든 자가 망하기 까지 기다릴 시간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양곤에서 도망쳐서 기어이 우리 부족의 프리덤 파이터 그룹에 들어갔습니다. 그 뒤로 연락이 완전히 끊겼습니다.
선생님!
그는 무기를 들고 정부군에 맞서 용감하게 싸우는 프리덤 파이터가 되었습니다. 그는 때때로 숲속에 있는 반정부군의 비밀 아지트에 들어가서 군사훈련을 받습니다. 그는 점령지역과 탈환지역을 패트롤하며 정부군에 대한 정보를 수집합니다. 그리고 다음 전투를 준비합니다.
그는 우리를 위한다며 우리 곁을 떠났습니다. 돌아오기 너무 어려운 길로 가버렸습니다.
저는 그 동안 그의 소식을 그의 친구들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들었을 뿐입니다. 지난 3년 동안 그는 단 한 번도 저를 만나러 씨아하타운에 오지 않았습니다. 그의 눈에 제가 너무 비겁하고 이기적이며 무능한 평화주의자로 보였을 것입니다.
선생님!
전쟁이 꿈 많고 감정이 풍부하고 열정적인 청년을 야수로 만들었습니다. 가슴이 너무 아픕니다.
세 번째 장학생 소식이 왔다.
그는 의대 대학원을 졸업하고 정부 병원의 의사로서 근무하였다고 하였다.
선생님!
선생님의 요청을 듣고 여러 SNS를 통해서 그를 추적하였습니다. 저는 저의 정체를 드러내지 않으려고 인도에서 신청한 새 폰으로 그와 접촉하였습니다.
선생님!
그는 대학원을 졸업하자마자 결혼하여 딸을 하나 낳았다고 합니다.
그의 남편은 공무원으로 서기 직에 있습니다. 그러나 내전이 일어난 후부터 남편과 아기는 내피도에 있는 시부모님 댁에서 지내고 자신은 양곤 친정 부모님 집에서 지낸다고 합니다. 이유는 남편의 월급으로 대가족이 살기가 어려워서 그가 양곤에서 취업하기를 희망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는 독재정권과 전쟁이 주는 부자유와 공포, 좌절과 무력감이 지긋지긋하다고 하였습니다.
선생님!
그는 내전이 일어나던 해에 독재 정부, 군사 정권에 저항하기 위해 근무하고 있던 정부병원에 사직서를 제출하였습니다. 그 때문에 지금 그는 정부병원은 물론이고 민간병원에서도 취업 거부를 당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끊임없이 양곤에서 비밀리에 일할 수 있는 자리를 찾고 있지만 아직도 찾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그의 말에 의하면 그 뿐만 아니라 많은 의사, 교사, 공무원들이 군사정권에 저항하기 위해 시민불복종운동(CDM)에 가담하여 공직을 사임하였다고 합니다.
선생님!
그는 취업이 힘들어서 순간적으로 사임을 한 것이 잘못된 판단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다고 합니다. 그는 앞으로도 자신이 프리덤 파이터가 될 용기도 없고 보따리를 싸들고 피난을 갈 수도 없어서 계속 도시에서 일자리를 찾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도 때때로 전쟁의 와중에서 자기가 너무 편하게 살고 있어서 프리덤 파이터들과 피난을 떠나 난민이 된 사람들에게 미안감에 사로잡힌다고 합니다. 그러나 저는 공직 사임 이후, 가족과의 갈등과 이견대립으로 두 살배기 아기를 집에 두고 나올 수 밖에 없었던 그가 너무 불쌍합니다.
선생님!
우리 모두가 다 같은 부족에 달링마을 출신으로 한 교회에 다녔습니다.
그러나 지금 다 마음이 흩어졌습니다.
기도를 부탁드립니다.
부기
우연하게도 우리의 세 명의 장학생은 같은 부족 같은 마을 같은 교회 출신이었다.
그들이 어디에 있는지 늘 궁금했는데 오늘에야 비로소 모두의 소식을 온전히 다 들었다.
전쟁으로 달라진 그들의 인생이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지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2024년 5월 2일 목요일 자시
사무엘이 보낸 메시지를
우담초라하니 정리해서 올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