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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삼모사(朝三暮四)
아침에 세 개 저녁에 네 개라는 뜻으로, 눈앞에 보이는 차이만 알고 결과가 같은 것을 모르는 어리석은 상황을 비유하는 말이다.
朝 : 아침 조(月/8)
三 : 석 삼(一/2)
暮 : 저물 모(日/11)
四 : 넉 사(囗/2)
(유의어)
조삼(朝三)
출전 : 열자(列子)의 황제편(黃帝篇)
조삼모사하다고 하면 아주 간교한 사람을 멀리하며 많이 쓰는 말이다.
원숭이에게 도토리를 아침에 세 개(朝三), 저녁에 네 개(暮四)를 주거나 반대로 아침에 네 개, 저녁에 세 개를 줄 테니 어느 쪽을 택하겠는지 묻는다. 어떻게 하든 합은 일곱 개로 같다.
이 당연한 것에서 이랬다저랬다 하며 변덕을 부리거나 교묘한 수단으로 남을 속이는 것을 말하는 성어가 됐다. 거기에 더하여 결과는 똑 같은데 ‘우선 먹기는 곶감’이라며 먼저 차지하려는 욕심을 경계하는 말이기도 하다.
기원전 403년~221년, 중국 전국시대(戰國時代) 도가(道家)의 사상서 열자(列子)에 전하는 이야기다.
송(宋)나라 때 저공(猪公)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원숭이를 사랑하여 이를 길러 여러 마리가 되었다. 그러기 때문에 저공이 능히 원숭이의 뜻을 알고 원숭이도 또한 저공의 마음을 알았다.
저공이 집안 식구들의 먹을 것을 줄여서 원숭이의 배를 채워 주더니 마침 먹을 것이 떨어졌다. 앞으로 그 먹이를 줄이고자 하나 여러 원숭이가 앞으로 말을 잘 듣지 않을 것을 두려워하여, 먼저 이를 속이어 말했다. “너희들에게 먹이를 주되 아침에 세 개를 주고 저녁에 네 개를 주겠으니 좋으냐?” 라고 말했다.
그러자 여러 원숭이가 다 일어나서 화를 냈다. 저공이 다시 말하기를, “너희들에게 먹이를 아침에 네 개를 주고 저녁에 세 개를 주겠으니 좋으냐?” 하니 여러 원숭이가 다 엎드려 절하고 기뻐했다.
장자(莊子)도 제물론(齊物論)에서 남곽자기(南郭子綦)의 입을 빌어 비슷한 얘기를 전한다. 그는 이름도 알맹이도 달라지는 바가 없는데 화를 내고 기뻐하는 것은 받아들이는 사람의 감정의 차이일 뿐이며 자신의 관점에서 옳다는 편견을 갖고 있을 뿐이라고 했다.
그러니 조삼모사하다고 욕하지만 말고 꼭 지금 당장 좀 손해를 보더라도 멀리 내다보면 같은 것일 수도 있다는 교훈도 준다.
오늘날 감언이설(甘言利說)로 사람들을 속여 부당이익을 챙기는 사기꾼들이 많다. 반대로 그런 속임수에 걸려들어 평생 모은 재산을 한순간에 날리고 절망 속에 사는 사람들이 많다.
간단한 예로 불법 다단계나 높은 이자를 준다며 불법으로 돈을 끌어 모으고 사라져 많은 사람들에게 피해를 준 사건들이 이에 해당된다.
사람을 속이는 사람도 나쁘지만 속는 사람도 문제이다. 현명한 판단으로 눈앞의 이익에만 급급해 속임수를 알아차리지 못하는 조삼모사(朝三暮四)의 잘못을 범하지 말아야 한다.
조삼모사(朝三暮四)
직역하면 '아침에 세 개, 저녁에 네 개'인데 함축하고 있는 의미는 '잔 꾀로 상대방을 현혹한다는 것'이다. 고사에서 유래했다. 열자(列子)의 황제편(黃帝篇)에 전한다.
송나라 때 원숭이를 키우는 저공(狙公)이라는 인물이 있었다. 저공은 원숭이와 워낙 친밀해 원숭이와 의사소통이 가능했다고 설화((說話)는 전한다.
원숭이 먹이로 도토리를 주었는데 원숭이 수가 늘어나자 많은 도토리를 구하는 일이 어려워졌다. 저공은 원숭이들을 모아놓고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앞으로는 도토리를 아침에 세 개, 저녁에 네 개를 주겠다.'
그러자 원숭이들이 불만을 터뜨렸다. 저공은 다시 '그럼 아침에 네 개, 저녁에 세 개를 주겠다'고 했다. 그제야 원숭이들이 좋아했다.
저공은 원숭이 먹이를 줄이면 원숭이들이 당연히 싫어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술수를 낸 것이다. 덮어놓고 먹이를 줄이겠다고 하면 원숭이들이 분명히 펄쩍 뛸 거라고 보고 먹이를 줄이면서도 줄이지 않는 것처럼 가장을 하기로 했다.
처음에 아침에 세 개, 저녁에 네 개를 준다고 해서 원숭이들이 불만을 터뜨리게 해놓고 슬쩍 조건을 바꾸어 원숭이들을 혼란에 빠뜨려 문제를 회피하려 한 것이다. 어리석은 원숭이들은 당장 눈앞의 이익만을 보고 두 번째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조삼모사는 저공처럼 간사(奸邪)한 꾀를 내어 남을 속이는 것을 지칭할 때 주로 쓰인다. 당장 눈앞에 나타난 현상만 보고 나중의 결과에 대해서는 무지한 사람이나 상황을 비유할 때도 자주 인용된다.
한정된 재원으로 어떤 경제적 효과를 내려고 할 때 미래의 불투명한 큰 이익보다 현재의 작지만 확실한 이익에 반응하는 시장참여자들의 심리를 이용하는 경우가 있는데, 조삼모사의 원용이라 하겠다.
세상에는 저공처럼 간계로 남을 속이는 사람이 적지 않다. 원숭이처럼 속아 넘어가는 이들이 적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원숭이는 되지 말아야 한다. 겉에 드러난 현상만 보고 잘못 판단했다가 심대한 피해를 입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된다.
조삼모사(朝三暮四)
결과는 같은데 눈앞의 차별만 따짐
아침에 세 개, 저녁에 네 개라는 조삼모사(朝三暮四)는 눈앞의 차별만을 알고 그 결과가 같음을 모름 또는 잔꾀로 남을 속여 희롱함 등의 뜻을 담은 성어다. 열자(列子) 황제(黃帝)편과 장자(莊子) 제물론(齊物論)에 나온다.
전국시대 송(宋) 땅에 저공(狙公)이라는 사람이 원숭이를 기르며 살고 있었다. 狙는 원숭이 저자다. 그러니 저공은 원숭이를 말하거나 원숭이에게 재주를 부리게 해 돈벌이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저공은 원숭이들에게 도토리를 주면서 “앞으로 아침에 세 개, 저녁에 네 개다”라고 했다. 그러자 원숭이들이 모두 화를 냈다. 저공이 “그러면 아침에 네 개, 저녁에 세 개를 주겠다.”고 하자 모두 좋아했다.
狙公賦芧曰 : 朝三而暮四, 衆狙皆怒. 曰 : 然則朝四而暮三, 衆狙皆悅.
그런데 이것은 그리 간단한 이야기가 아니다. 장자는 저공과 원숭이를 언급하기 전에 “헛되이 애를 써서 한쪽에 치우친 편견을 내세우면서도 모든 게 하나임을 알지 못하는 것을 조삼(朝三)이라고 한다”는 말부터 했다.
아침에 네 개든 저녁에 네 개든 전체는 같은데도 기뻐하거나 화를 내는 것은 시비와 구별에 구애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장자는 인간생활에서 구별은 꼭 필요하지만 지나치다 보면 자연의 조화와 균형을 깨뜨리게 된다고 말한다. 성인은 시비를 조화시키고 균형된 도리에서 쉰다. 중요한 것은 대립된 두 쪽이 다 순조롭게 뻗어나가는 양행(兩行)이라는 것이다. 조삼모사는 단순한 우스갯 소리가 아니다.
조삼모사(朝三暮四)
아침에 세 개, 저녁에 네 개라는 뜻으로, 당장의 차이에 신경 쓰지만 결과는 매한가지라는 의미다. 또는 잔꾀로 남을 농락하는 것을 말하기도 한다.
중국 전국시대 송(宋)나라 땅에 저공(狙公)이라는 사람이 살았는데, 이 사람은 원숭이라면 사족을 못 쓸 만큼 좋아하여 집에다 수십 마리를 기르고 있었다.
그처럼 밀착해 있다 보니 사람과 원숭이 사이에는 의사소통이 가능하게 되었고, 눈빛만 봐도 상대방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넉넉한 형편도 아니면서 그처럼 많은 원숭이를 기르다 보니 먹이의 문제가 여간 큰 부담이 아니었다. 가족이 먹는 식량을 조금씩 절약해서 원숭이 먹이를 충당했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었다.
식량은 동이 났고, 사람도 짐승도 먹을 것이라곤 도토리밖에 없었다. 그 도토리마저 충분하지 않은 형편이었다. ‘하는 수 없지. 녀석들 먹이를 줄이는 수밖에.’
마침내 저공은 이렇게 결정하고, 어떤 방법을 쓸 것인가를 생각했다. ‘덮어놓고 먹이를 줄이겠다고 한다면 녀석들은 펄쩍 뛸 거야. 그러니까 줄이면서도 줄이지 않는 것처럼 생각하도록 만들어야 해.’
이런 궁리를 한 저공은 원숭이들을 모두 불러 놓고 말했다. “이제부터 너희들한테 ‘아침에는 도토리 세 개, 저녁에는 네 개’를 주려고 한다. 괜찮겠느냐?”
그러자 원숭이들은 저녁보다 아침에 하나 적으면 배가 고프다며 아우성이었다. 그러자 저공이, “그렇다면 아침에 도토리 네 개, 저녁에는 세 개로 하자꾸나. 그렇게 하면 아침에 저녁보다 한 개를 더 많이 먹게 되는 셈이지. 어떠냐?”
그러자 원숭이들이 이번에는 모두 좋다고 기뻐했다. 아침에 한 개를 더 먹는다는 데만 생각이 미친 것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권력자들이 이런 방법을 써왔다는 것을 우리는 알지 못했다. 인류가 산업혁명 이후 기술과 과학이 발달하고, 인간 본연의 모습을 탐구하는 인본주의로 인해 그나마 민중이 국가와 사회를 이끌어 나가는 주체가 된 것이다.
아주 오래전 인류가 수렵채집민이었던 시절에는 리더의 영향력이나 권력의 힘이 그렇게 크지도 않았고 필요하지도 않았다. 먹을 만큼만 사냥하고 열매를 따서 자기 부족과 공유하며 살았다.
자연이 허락하는 데로 그렇게 욕심 없이 살았다. 그래서 이웃 부족과도 크게 다툴 일도 없었으며, 계급을 나누어 누가 누구를 지배하고 착취하는 경우도 없었을 것이라고 대부분의 역사학자들은 이야기한다.
그런 인류가 농경, 유목민으로 정착을 하게 되면서 점점 커다란 사회구조로 변형되었다. 그러면서 왕과 귀족이란 권력집단이 형성되었고 강한 힘을 지닌 소수가 힘이 약한 다수의 농민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이집트의 '파라오'가 그러했듯이 소수는 다수를 지배하는데 필요한 신(神)을 만들어 내기 시작했다. 수렵채집민들은 때마다 자연이 주는 열매와 사냥감이 되어주는 동물들에게 감사하고 예를 지냈다.
그것이 신앙이었다. 한 무리가 몇 백 명이 넘지 않는 그들은 서로가 맡은 역할은 있었지만 계급으로 서열을 나누지는 않았다.
농경사회는 강한 부족이 약한 부족을 흡수 통일하고, 계급과 지위에 맞는 역할 분담이 이루어지면서 다수의 백성을 통제해야 할 정신적인 무엇인가가 필요했다. 이는 역사적으로도 고대 문명도시에서부터 그 흔적을 찾아 볼 수 있다.
그리고 마침내 예상을 뒤엎고 변방 이스라엘에서 태어난 유일신이 지중해를 삼켜버렸다. 로마 황제는 점점 확장되는 영토와 백성들을 다스리는데 효율적인 신을 간택하는데 골몰했을 것이다.
자신의 왕권을 유지하고, 수많은 전쟁에서 죽음을 무릅쓰고 목숨을 내던질 명분을 만드는데 그리스도교 밖에 없지 않았을까? 로마교황청의 탄생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 뒤로 근대에 이르기까지 많은 그리스도교 국가는 보이지 않는 실체의 신을 믿게 하여 많은 백성들을 전쟁터로 내몰았다. 그리스도교가 예루살렘에서 태어난 지 7세기 후 쌍둥이 유일신교 하나가 더 태어난다.
이후 '십자가'와 '초승달' 두 형제는 피가 튀기는 싸움을 지금까지도 이어져 오고 있는데, 이유는 보이지 않는 실체 신을 위해서이다.
고대로부터 지금까지 권력자와 성직자는 악어와 악어새 같은 것이었다. 성경이나 코란 그리고 불경에 나와 있다. 나쁜 짓 하면 지옥 간다고.
그런데 지금 일부 성직자들 중에는 재물과 권력에 눈이 어두워 조삼모사(朝三暮四) 하는 사람이 있다. 그들은 하느님의 심부름꾼이라서 예외일까? 부처님이 자비심으로 용서해줄까? 아니다.
일요일이면 교회나 성당, 절에 가서 기도하시는 분들이 이 글을 보신다면, 당신의 성직자들은 조삼모사(朝三暮四)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잘 판단해 보시길 바란다.
조삼모사(朝三暮四)
朝三暮四 1
宋有狙公者, 愛狙, 養之成群.
송나라에 저공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원숭이를 사랑하여 그것을 길러 많은 무리를 이루었다.
能解狙之意, 狙亦得公之心.
저공은 원숭이들의 뜻을 이해할 수 있었고, 원숭이 또한 저공의 마음을 알았다.
損其家口, 充狙之欲, 俄以櫃焉.
그의 집안의 먹을 것을 들어 원숭이들의 먹이를 충당하고 있었는데, 얼마 안 되어 그것이 다하였다.
將限其食, 恐衆狙之不馴於己也, 先誑之曰; 與若서, 朝三而暮四, 足乎.
장차 그들의 음식을 제한을 하려고 하는데, 여러 원숭이들이 자기에게 순종하지 않을까 두려워 하여, 먼저 그들을 속이어 말을 하기를, '너희에게 도토리를 주는데 아침에 3개 저녁에 4개면 만족하겠는가?'
衆狙, 皆起而努俄而曰; 與若서, 朝四而暮三, 足乎.
여러 원숭이들이 모두 일어나서 성을 내었다. 조금 있다가 말을 하기를, '너희에게 도토리를 주는데 아침에 4개 저녁에 3개면 만족하겠는가?'
衆狙, 皆伏而喜.
여러 원숭이들이 모두 엎드리며 기뻐하였다.
物之以能鄙相籠, 皆猶此也.
만물은 능력이 있는 것과 그렇지 못한 것(비루)으로 서로 우롱을 함이 모두 이와 같다.
聖人, 以知籠群愚, 亦猶狙公之以智籠衆狙也.
성인이 지혜로써 여러 어리석은 사람들을 우롱함이 또한 저공이 지혜로써 원숭이 무리를 우롱하는 것과 같다.
名實不虧, 使其喜努哉.
이름과 실제가 어그러지지 않은데(다르지 않다), 그들로 하여금 기쁘게도 하고 성나게도 하는구나.
朝三暮四 2
勞神明爲一 而不知其同也.
사람의 마음을 수고롭게 함은 매 한가지인데 그것이 같음은 알지 못한다.
謂之朝三.
그것을 일러 조삼(朝三)이라고 이른다.
何謂朝三?
무엇을 일러 조삼이라고 하는가?
狙公賦저, 日朝三而暮四, 衆狙皆努日然則朝四而暮三, 衆狙皆悅.
저공이 도토리를 줌에 있어, 아침에 3개 주고 저녁에 4개 준다고 하니, 원숭이 무리가 다 성을 내고, (다시) 말하기를 그렇다면 아침에 4개 저녁에 3개라고 하니, 원숭이 무리들이 다 기뻐했다.
名實未虧 以喜努爲用 亦因是也.
이름(한 말과)과 실제(실제 도토리 갯수)가 어긋나지 않는데, 기쁨과 성을 냄을 작용을 시키니, 또한 이로 인한 것이다(어리석은 사람을 농락하여 그런 연유로 이렇게 되었다).
是以聖人和之以是非, 而休乎天鈞, 是之謂兩行.
이로써 성인은 옳고 그름으로써 그들을 화합되게 하나 시비를 한가지로 봄에 머무는데 이것을 일러 양행이라고 한다.
*天鈞 : 옳고 그름을 한가지로 봄. 성인은 옳고 그름은 가리나 정작 본인은 시비를 한가지로 봄.
*兩行 : 두 가지를 함께 하다 즉 시비를 떠나지 않으나 시비가 없게 하기 때문에 이렇게 표현을 했다. 다시 말해 시비를 가려 그들을 서로 화합되게 하여 시비가 없게 한다는 의미이다.
조삼모사(朝三暮四)
옛날 송(宋)나라에 저공(狙公)이란 사람이 있었다. 원숭이를 아주 좋아해서 많은 원숭이를 길렀다. 그는 원숭이들의 의중을 잘 파악했고, 원숭이들도 그를 잘 따랐다.
집안 식솔들 수까지 줄이면서 애써 그들을 먹여 살렸는데, 살림이 점점 가난해져서 장차 원숭이 먹이를 줄여야만 하게 되었다.
저공은 원숭이들이 먹이가 줄어드는 것을 쉽게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는 걱정이 들어 먼저 한 계책을 강구했다. “이제부터 너희들에게 하루에 도토리를 아침에 3개, 저녁에 4개씩 주겠다. 만족하겠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원숭이들이 모두 일어나서 화를 냈다. 이 반응을 보고 저공은, “그러면 아침에 4개를 주고 저녁에 3개씩을 주면 어떻겠느냐?”고 했다. 그랬더니 원숭이들이 모두 그의 앞에 엎드리며 기뻐했다.
열자(列子) 황제(黃帝) 편에 나오는 고사(故事) 한 토막이다.
열자(列子)란 책은 중국의 고대 고전 중에서 아주 특이한 책이다. 맹자(孟子)나 장자(莊子)가 그러하듯이 책명으로 되어 있는 인물 즉 열자(列子)의 행적이나 사상을 중심으로 해서 엮어진 책이 아니다. 여러 사상가나 인물들의 언행들이 얽혀져 나열되어 있다.
열자는 기원전 400년경 정(鄭)나라 사람으로, 노자의 가르침을 이어받은 제자로서 장자의 선배가 되는 도가(道家)의 한 사람이라고 한다.
그러나 전한(前漢)시대의 역사가 사마천의 사기(史記)에도 그 이름이 보이지 않고, 진대(晉代)에 텍스트가 완성된 장자(莊子)의 천하편에도 춘추전국시대에 활약한 제가(諸家)의 명단이 실려 있는데, 그 이름 속에도 열자는 포함되어 있지 않다.
그러한 이유로 열자를 실재했던 인물이 아니라고 규정하고, 아울러 그의 이름이 붙은 열자(列子)라는 책도 빨라야 후한시대 이후나 진대의 사람들이 날조한 위서(僞書)라고 보는 것이 학계의 정설로 되어 있다.
그렇다고 해서 열자(列子)를 무가치한 책이라고 보는 학자는 한 사람도 없다. 열자(列子) 속에는 실로 고대 우화(偶話)의 보고(寶庫)라고 할 정도로 많은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다.
우공(寓公), 산을 옮기다, 기우(杞憂) 그리고 위에서 인용한 조삼모사 같은 이야기가 바로 그러한 것들이다.
그러한 열자(列子)가 2000년이나 민중 사이에 전해져 오며, 사랑을 받고 읽혀져 왔다는 사실은 그 속에 고대 중국인의 사고와 생활의 지혜는 물론 시대를 초월해서 모든 사람들이 현실의 행, 불행을 달관하고, 위안을 받을 수 있는 인생관과 세계관이 담겨 있다는 것을 웅변으로 말해주고 있다.
열자(列子)는 한 가지 사상으로 일관된 책은 아니다. 그러나 그 기조는 도가적 사상이다. 인간사회에 있어서 모든 대립을 해소하여 절대적 가치 기준을 제거하려고 하고 있다.
현실도 비현실이고 비현실도 현실이라고 보며, 생과 사, 행, 불행은 물론 선악 사이에도 본질적인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다. 이러한 도가적 사상은 사람들의 불만을 축적되지 않도록 해소해 준다.
이 책에서는 도가의 무위(無爲)도 이야기 하고 있다. 그러나 노자와 같이 정치하고 관련 지워서 무위를 논하고 있지는 않다. 현실참여를 위한 무위가 아니라, 자기의 이름을 세상에 알리지 않기 위한 순수한 무위다.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사람이야 말로 자기의 자연을 그대로 사는 사람이고, 자기 운명을 자기가 제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장자에서와 같은 세상에 대한 개탄도 비판정신도 열자(列子)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조삼모사 이야기도 그들보다 한 단계 높은 입장에서 보면 정말 가소롭기 짝이 없어 보일 것이다. 조삼모사나 조사모삼이나 실질은 같은 것인데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성을 내기도 하고 기뻐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열자(列子)에는 실재한다고 볼 수 없는 우의적(寓意的) 이름이 많이 나온다. 저공도 어리석은 백성을 농락한 통치자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어리석은 국민을 기만하는 자는 결코 현명한 위정자는 아니다.
저공이야 말로 무분별한 복지정책을 주장하면서도 그 비용이 결국 국민의 증세로 연결되거나 미래 세대가 부담해야 할 빚이 된다는 것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고 있는 우리 정치인들의 원형이다.
조삼모사(朝三暮四)의 한계
조삼모사(朝三暮四)라는 고사성어가 있다. 흔히 얕은 꾀로 사람을 속이는 것을 비난하는 데 많이 쓰이는 말이다.
원문 그대로 해석하면 ‘아침에 세개를 주고 저녁에 네개를 준다’는 뜻인데 송나라 저공(狙公)과 원숭이들 간의 우화에서 나온 이야기다.
저공은 원숭이를 기르던 사람이었는데 처음에는 원숭이들과 가족과도 같은 관계로 지냈다. 원숭이들의 식량이 모자라면 자기 식구들의 양식을 덜어서 원숭이를 먹일 정도로 친밀한 관계였다. 하지만 원숭이의 수가 더 많아지고 형편이 어려워지자 도저히 먹이를 충당하기가 어려운 지경이 됐다.
고민하던 저공은 꾀를 내 원숭이들에게 물었다. “앞으로는 너희 양식으로 주는 도토리를 아침에는 세개, 저녁에는 네개를 주려고 하는데 너희 생각은 어떠냐?”
그러자 원숭이들은 아침에 도토리 세개는 너무 작아서 배가 고프다고 화를 내었다. 저공은 다시 이렇게 물었다. “그러면 아침에는 네개, 저녁에 세개를 주도록 하겠다. 어떠냐?” 원숭이들은 모두 기뻐하며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이 우화는 열자(列子), 장자(莊子) 등 고전에 실려 있는데 그 시사하는 바는 각각 다르다.
장자는 눈앞의 이익에 집착해서 사물의 본질을 볼 줄 모르는 어리석음을 원숭이에 비유했다. 또한 자기만의 관점을 고집하지 않고 어리석은 원숭이의 생각도 유연하게 받아들이는 저공을 현명한 인물이라고 강조한다.
무위자연(無爲自然)의 사상을 강조하는 장자 철학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해석이다.
하지만 열자에서는 지혜로운 자가 어리석은 자를 속이는 것을 비유하며 간사한 꾀로 사람들을 속이는 행태를 말하고 있다. 뻔히 보이는 눈속임으로 원숭이들을 기만하는 저공의 행태는 비난받아서 마땅하다는 것이다.
물론 두 고전의 해석은 모두 깊은 철학적 의미를 담고 있지만, 사람들을 이끄는 리더십의 관점에서도 생각해볼 여지가 있다.
논어(論語) 안연편에 나오는 고사이다.
제자 자공이 ‘정치가 무엇입니까?’라고 묻자 공자가 대답했다. “식량을 풍족히 하고, 군대를 튼튼히 하고, 백성들이 믿음을 갖도록 하는 것이다.”
자공이 또 “그중에 하나를 버려야 한다면 무엇입니까?”하고 묻자, 공자는 “군대를 버려야 한다”고 대답한다.
자공이 “또 한가지를 버린다면 무엇입니까?”라는 계속 되는 물음에 공자는 이렇게 대답한다. “식량을 버려야 한다. 자고로 사람들은 모두 죽게 마련이지만 믿음이 없으면 나라는 존립하지 못한다(民無信不立).”
공자는 식량이 없으면 백성들이 생명의 위협을 받을 수도 있고, 국방이 취약해지면 외적의 침략을 받을 수도 있지만 그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바로 백성들의 믿음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국가든 어떠한 조직이든 언제나 순탄한 길만 걸을 수는 없다. 내부적으로 어려움에 빠질 수도 있고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곤란을 겪기도 한다. 이렇게 어려운 때일수록 지도자가 반드시 붙잡아야 할 것은 그 무엇보다도 조직원들의 신뢰다.
당장 어려움을 벗어나기 위해 조삼모사의 얄팍한 꾀를 생각한다면 결코 사람들의 신뢰를 얻을 수 없을뿐더러 어려움에서 벗어날 수도 없다.
멀리 가려면 함께 가고 빨리 가려면 혼자 가라는 아프리카 속담이 있다. 그 때 필요한 것이 바로 함께 가는 사람들 간의 믿음이다.
조삼모사(朝三暮四) 뒤집어 보기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조삼모사(朝三暮四)의 출전은 장자(莊子)의 제물론(齊物論)이다. 아래가 그 전문(全文)이다.
저공(狙公)이 도토리를 원숭이들에게 나누어 주면서, “아침에 세 개 저녁에 네 개 주겠다”고 하자 원숭이들이 모두 성을 냈다.
그래서 다시 “그렇다면 아침에 네 개 저녁에 세 개 주겠다”고 하자 원숭이들이 모두 기뻐하였다고 한다.
하루에 일곱 개라는 명(名)과 실(實)이 아무런 변화가 없는데도 기뻐하고 노여워하는 마음이 작용하였던 바, 이런 잘못을 저지르지 않으려면 절대의 시(是)를 따라야 할 것이다.
이 때문에 성인은 시비를 조화해서 천균(天均)에서 편안히 쉰다. 이것을 일컬어 양행( 行)이라 한다.
위에서 보는 바와 같이 원래 조삼모사는 4:3으로 나누든 3:4로 나누든 7이라는 실질은 차이가 나지 않는데도 그 외형에 현혹되어 판단력을 흐리면 안 된다는 교훈을 담고 있다.
하지만 이를 조금 비틀어 본다. 아래 이야기는 나의 상상력이 곁들여진 것이다.
저공은 자신이 키우는 원숭이들에게 하루 8개씩의 도토리를 나눠주었다. 하지만 형편이 어려워져 도토리 조달에 어려움을 느낀 저공.
이를 지켜보던 하인이 저공에게 말한다. “주인님. 도토리 양이 부족하니 이번에 원숭이 열 마리 정도 팔아버리죠.”
하지만 저공은 고개를 저었다. “아직은 어린 녀석들이야. 지금 팔아버리면 유랑극단에 팔려가거나 좋지 않은 환경에서 죽고말거야. 우리처럼 이렇게 돌봐주지 못한다구. 차라리 도토리 1개를 줄여서 7개씩 주더라도 같이 데리고 있는 게 좋을 것 같네, 그렇게 해보세.”
하인이 말했다. “그럼 어떻게 도토리를 나눠주죠?”
저공이 말했다. “음… 8개를 줄 때는 아침에 4개, 저녁에 4개씩 줬는데, 7개를 주게 되면 어떻게 해야 할까? ‘3개, 4개’로 해야 하나 아님 ‘4개, 3개’로 해야 하나?”
하인이 말했다. “그냥 주인님이 정해서 주시면 되죠. 안 팔아 버리고 데리고 가는 것 만해도 감지덕지 해야 할 판인데…”
저공이 말했다. “아닐세. 원숭이들을 좀 모아주게.”
하인은 저공이 괜한 일을 한다고 생각하며 원숭이들을 모았다. 원숭이들도 얼마 전부터 이상한 낌새를 눈치 채고 있었다. 몇몇 원숭이들은 “주인 영감이 우리 중 몇 마리를 팔아버리는 거 아냐?”라며 걱정한 것도 사실이다.
저공은 어려워진 형편을 솔직히 얘기했다. 하지만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 가족 같은 원숭이들을 팔고 싶지 않다고도 말했다.
그래서 방법은 배급되는 도토리를 줄이는 것뿐이데, 7개를 배분할 때 아침에 3개주고 저녁에 4개 주는 것이 어떻겠냐고 물었다.
그러자 원숭이 대표가 말했다. “영감님. 솔직히 저희들은 낮에 활동을 많이 하니 아침을 많이 먹는 것이 좋습니다. 아침에 적게 먹으면 하루 종일 배가 고파 힘듭니다. 차라리 저녁에 적게 먹는 게 좋겠습니다.”
저공이 말했다. “아, 그래? 난 너희들이 저녁에 많이 먹고 배부른 채 편안히 잠드는 것을 좋아할 줄 알았지. 내 입장에서만 생각했군. 알겠네. 그럼 아침에 4개, 저녁에 3개로 나눠주지. 괜찮겠나?”
원숭이 대표가 말했다. “네! 저희들은 불만 없습니다.”
다소 변형된 조삼모사 이야기에서의 주인공은 저공(狙公)이다. 상황이 어려워지자 원숭이 몇 마리를 팔아버리는 손쉬운 결정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든 모든 원숭이를 같이 데리고 가려 한 그의 행위는 인(仁)과 의(義)에 가깝고,
자신이 독단적으로 분배방식을 결정할 수 있음에도 사정을 설명하고 원숭이들의 의견까지 진지하게 물어본 그의 행위는 지(智)와 예(禮)라 할 수 있으며,
원숭이들의 사정을 청취하고 이를 적극적으로 반영하여 불만을 최소화하려 노력한 것은 신(信)과 통(通)의 마음이라 할 수 있다.
경영이 어려워지자 당연한 듯 명예퇴직을 강요하는 세태를 살다 보니 어떻게든 원숭이들과 소통하려 했던 저공 영감의 세심한 마음씀씀이가 절대 가벼이 보이지 않는다.
조삼모사(朝三暮四)
조삼모사(朝三暮四)에 담긴 의미를 다시 새겨보며
중국 송나라 때 원숭이를 사랑하며 키우던 저공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저공은 처음에는 원숭이들을 가족처럼 대하며 모든 것을 나눠 먹었다. 양식이 조금 모자라면 식구들의 양식을 조금씩 덜어 원숭이에게 줄 정도였다. 가족들과 원숭이들은 매우 친밀한 사이였고 원숭이들은 저공을 매우 존경했다.
한참의 세월이 흘렀다. 저공의 집안 사정이 나빠졌다. 저공은 식구들의 양식을 원숭이에게 나눠주기가 어려웠다. 특히 원숭이의 먹이를 충당하기가 날이 갈수록 어려워졌다. 원송이들은 그 사정을 모르고 저공에게 불만을 털어놓았다. 한참을 생각하던 저공은 원숭이들에게 제안을 했다. “지금 집안 사정이 좋지 않다. 그래서 앞으로는 너희에게 주는 도토리를 아침에는 세개, 저녁에는 네개를 주려고 하는데 너희 생각은 어떠냐?”
그러자 원숭이들은 아침에 도토리 세 개는 너무 적은 양이라고 항의를 했다. 그러자 저공은 다시 원숭이들에게 물었다. “그러면 좋다. 아침에는 네 개, 저녁엔 세 개를 주도록 하겠다. 어떠냐?”
이 제안에 원숭이들은 일제히 환영했다. 그래서 저공은 타협한 대로 원숭이들에게 도토리를 아침에는 네 개 저녁에는 세 개를 주었다. 이 우화에서 조삼모사(朝三暮四)라는 고사성어가 탄생했다. 그 말을 직역하면 ‘아침에 세개를 주고 저녁에 네개를 준다’는 뜻이다.
실제로 원숭이들이 받는 도토리는 아침에 세 개 저녁에 네 개든 아침에 네 개 저녁에 세 개든 똑 같다. 그러나 원숭이들은 저공의 제안을 환영하고 지지했다. 저공은 그런 원숭이들을 교모하게 속였다.
<열자> <장자> 등 고전에 실려 있으며 자주 회자 되는 이 우화는 상황과 입장에 따라 각각 그 해석이 다르다.
첫째는 <장자>에서는 원숭이의 어리석은 생각도 유연하게 받아들이는 현명한 인물로 저공을 평가했다. 주인인 저공의 입장에서 보면 자기가 제시한 제안이지만 참 어리석은 생각이다. 그러나 원숭이들은 흔쾌히 받아들였다. 그래서 원숭이들이 그 어리석은 생갇도 유연하게 이용하며 받아들이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둘째, <열자>에서는 지혜로운 자가 어리석은 자를 교묘하게 속이는 것에 비유하며 저공을 간사한 말로 사람들을 속여 이익을 취하는 사기꾼처럼 평가한다. 저공은 교묘한 말로 앞뒤를 바꾸어 원숭이를 속이고 도토리를 주었다. 도토리는 당장의 상황에서 저공의 제안에 동의했다. 원숭이들에게 돌아간 이익은 실제로 없지만 심리적인 이득은 있다. 착각이었다.
위의 두 입장의 평가는 각기 의미가 있지만, 오늘날 교묘한 꾀로 믿음을 저버리는 행위로 사용된다. 저공은 원숭이의 믿음을 저버렸고 원숭이들도 저공의 제안이 속아 넘어갔기 때문이다.
셋째, 위와 같은 전통적인 해석에 하나 더 보탠다면, 어떤 말이나 정책도 어떤 시점에 어떤 순서로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신뢰를 얻기도 하고 비난을 당하기도 한다는 것이 된다. 아침에 세 개 저녁에 네 개를 준다고 하니 원숭이들이 반발했으나 바꾸어 아침에 네 개 저녁에 세 개를 준다고 하니 환영했다. 그러나 원숭이들이 실제로 받아 간 도토리는 같다. 똑같은 말, 똑같은 재난 지원금, 똑같은 정책도 어느 시기에 어떤 방식으로 하느냐에 따라 가치가 달라진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바로 시기와 방법의 문제이기도 하다. 그것은 필요에 대한 검토와 해석이며 가장 필요할 때 주어야 효과가 있다는 말이 된다.
이 고사는 현시점에 다름과 같은 세 가지 측면에서 적용해 볼 수 있다.
첫째, 코로나 19가 장기화하면서 사람들의 삶은 어려워져 갔다. 정부의 지침을 가장 잘 지키는 사람들이 가장 어려움을 많이 겪는 것 같기도 하다. 소상공인들 상당수가 그들의 삶터를 접을 수밖에 없다고 했다. 그런 와중에 코로나 19로 인해 대박을 맞는 기업들도 있다. 정부에서는 총액으로 상상도 하지 못할 만큼의 엄청난 돈을 재난 지원금으로 국민에게 나눠주었다. 그런데 그 재난 지원금은 국민 개개인에게는 사실 껌값에 불과했다. 상당수의 국민은 그 재난 지원금에 박수를 쳤다. 그러나 냉정하게 보면 그것은 모두 세금이며 재난지원금에 들어가는 돈 때문에 다른 복지 사업이나 국책 사업이 지연되었다.
둘째, 돈을 너무 많이 풀어 물가는 급격히 상승했다. 인플레이션이라고 할 정도로 물가가 올랐으며 돈의 가치는 하락했다. 특히 서민들의 장바구니는 가벼워질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런 점에서 국민에게 돌아가는 실질적 이익은 제로 수준이다. 특히 전체적으로 보면 정부의 방역 대책으로 영업 중지를 밥 먹듯이 한 자영업자들은 거의 망해가는데 정부와 여당은 전 국민 재난 지원금을 주장해왔고 실천에 옮겼다. 표를 의식한 야당도 나중에는 이에 질세라 함께 북을 쳤다. 정부가 교묘한 정책인가? 국민이 어리석은가? 아니면 진짜 국민을 위한 관용의 처사인가?
셋째, 재난 지원금의 시기와 방법의 문제이다. 특히 대선을 앞둔 3월에 자영업자의 피해 구제용 코로나지원금을 주는 것을 두고 야당은 대선용 선심성 돈이라고 하고 여당은 코로나로 무너지는 자영업자를 구제하기 위한 구휼 정책이니 미룰 수 없다고 했다. 이런 과정에서 야당도 표를 의식해 동의했다. 그 시기는 적절한가? 기왕 주는 돈이었다면 가장 힘들었을 때 주는 것이 더 효과적이었던 것 아닐까?
대선 기간 온갖 표퓰리즘 공약이 난무하는 것을 보고 저공의 고사 조삼모사(朝三暮四)가 떠 올랐다. 하지만 사람들은 앞으로도 그 조삼모사 같은 정책에 속아 넘어갈 것이다. 사람들은 당장 눈앞의 현상에 몰두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리라. 중요한 것은 속더라도 그 시기와 방법은 잘 살펴야 할 것이다. 조삼모사를 하더라도 시기와 방법이 적절하다면 대중은 어느 정도 만족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위정자들이 국민을 원숭이 취급하면 절대로 안 된다는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국민은 분노할 것이다.
▶️ 朝(아침 조, 고을 이름 주)는 ❶회의문자로 晁(조, 주)는 고자(古字)이다. 달 월(月; 초승달)部와 𠦝(조)의 합자(合字)이다. 달(月)이 지며 날이 밝아 온다는 뜻이 합(合)하여 아침을 뜻한다. ❷회의문자로 朝자는 '아침'이나 '왕조'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朝자는 艹(풀 초)자와 日(해 일)자, 月(달 월)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朝자의 갑골문을 보면 초목 사이로 떠오르는 해와 아직 채 가시지 않은 달이 함께 그려져 있었다. 태양과 달이 함께 있다는 것은 이른 아침이라는 뜻이다. 참고로 소전에서는 月자 대신 舟(배 주)자가 잘못 그려지기도 했지만, 지금은 다시 月자로 표기되었다. 그래서 朝(조, 주)는 한 계통(系統)의 왕이나 한 사람의 왕이 그 나라를 다스리는 동안의 뜻으로 ①아침 ②조정(朝廷) ③왕조(王朝) ④임금의 재위(在位) 기간(期間) ⑤정사(政事) ⑥하루 ⑦임금을 뵈다, 배알(拜謁)하다 ⑧문안(問安)하다 ⑨만나보다 ⑩부르다, 소견(召見)하다(윗사람이 아랫사람을 불러서 만나 보다) ⑪모이다, 회동(會同)하다 ⑫조하(朝賀)를 받다 ⑬정사를 펴다, 집행(執行)하다 ⑭흘러들다, 그리고 ⓐ고을의 이름(주)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아침 단(旦),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저녁 석(夕), 저물 모(暮), 들 야(野)이다. 용례로는 아침과 저녁을 조석(朝夕), 나라의 정치를 의논이나 집행하던 곳을 조정(朝廷), 손님을 초대하여 함께 하는 아침 식사를 조찬(朝餐), 백관이 임금을 뵙기 위해 모이던 일 또는 학교나 관청 등에서 일과를 시작하기 전에 모여서 나누는 아침 인사를 조회(朝會), 학교 등에서 직원과 학생이 집합하여 시업전에 행하는 아침의 인사를 조례(朝禮), 아침에 마시는 술을 조주(朝酒), 아침 밥을 조반(朝飯), 아침 밥을 조식(朝食), 아침 때와 저녁 때를 조모(朝暮), 아침 해를 조일(朝日), 이른 아침에 올리는 제사 또는 조정에서 하는 일을 조사(朝事), 조정과 민간을 조야(朝野), 해를 보면 곧 스러지는 아침 이슬 또는 인생의 덧없음을 아침 이슬에 비유하는 말을 조로(朝露), 아침의 햇빛을 조휘(朝暉), 아침에 내리는 비를 조우(朝雨), 오늘 아침을 금조(今朝), 내일 아침을 명조(明朝), 다음날 아침을 익조(翌朝), 다음날 아침을 힐조(詰朝), 매일 아침을 매조(每朝), 이른 아침을 조조(早朝), 어제 아침을 작조(昨朝), 하루 아침이 마칠 동안을 종조(終朝), 자기 나라의 조정을 국조(國朝), 여러 대 임금의 시대를 열조(列朝), 조정을 임시 폐함을 철조(輟朝), 잘 다스려진 시대를 희조(熙朝), 사신이 본국으로 돌아옴을 귀조(歸朝), 벼슬에 오름을 입조(立朝), 전대의 왕조를 선조(先朝), 외국 사람이 우리나라를 찾아 옴을 내조(來朝), 아침에 세 개 저녁에 네 개라는 뜻으로 당장 눈앞에 나타나는 차별만을 알고 그 결과가 같음을 모름의 비유 또는 간사한 꾀를 써서 남을 속임을 이르는 말을 조삼모사(朝三暮四), 아침에 명령을 내리고서 저녁에 다시 바꾼다는 뜻으로 법령의 개정이 너무 빈번하여 믿을 수가 없음을 이르는 말을 조령모개(朝令暮改), 조정에서 명예를 저자에서 이익을 다투다라는 뜻으로 어떤 일이든 알맞은 곳에서 하라는 말을 조명시리(朝名市利), 아침, 저녁으로 뜯어 고친다는 뜻으로 계획이나 결정 따위를 자주 바꾸는 것을 이르는 말을 조변석개(朝變夕改), 아침에 고치고 저녁에 또 바꾼다는 뜻으로 일정한 방침이 없이 항상 변하여 정하여지지 아니함을 이르는 말을 조개모변(朝改暮變), 형세가 절박하여 아침에 저녁 일을 헤아리지 못함 곧 당장을 걱정할 뿐이고 앞일을 돌아볼 겨를이 없음을 이르는 말을 조불모석(朝不謀夕), 아침에는 구름 저녁에는 비라는 뜻으로 남녀의 언약이 굳은 것 또는 남녀의 정교를 이르는 말을 조운모우(朝雲暮雨), 생명이나 지위가 아주 불확실하여 쉽사리 꺼져 버리는 상태에 있음을 이르는 말을 조로지위(朝露之危), 아침에는 파리 저녁에는 모기가 떼를 이룬다는 뜻으로 소인배가 발호함을 이르는 말을 조승모문(朝蠅暮蚊), 매일 아침과 매일 저녁이라는 뜻으로 아침 저녁으로 언제나 변함이 없음을 이르는 말을 조조모모(朝朝暮暮), 목숨이 경각에 달렸다는 뜻으로 숨이 곧 끊어질 지경에 이름이나 거의 죽게 됨을 이르는 말을 명재조석(命在朝夕), 아침 이슬은 해가 뜨면 곧 사라지듯이 위기가 임박해 있음을 이르는 말을 위여조로(危如朝露), 인생은 아침 이슬과 같이 짧고 덧없다는 말을 인생조로(人生朝露) 등에 쓰인다.
▶️ 三(석 삼)은 ❶지사문자로 弎(삼)은 고자(古字)이다. 세 손가락을 옆으로 펴거나 나무 젓가락 셋을 옆으로 뉘어 놓은 모양을 나타내어 셋을 뜻한다. 옛 모양은 같은 길이의 선을 셋 썼지만 나중에 모양을 갖추어서 각각의 길이나 뻗은 모양으로 바꾸었다. ❷상형문자로 三자는 '셋'이나 '세 번', '거듭'이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三자는 나무막대기 3개를 늘어놓은 모습을 그린 것이다. 고대에는 대나무나 나무막대기를 늘어놓은 방식으로 숫자를 표기했다. 이렇게 수를 세는 것을 '산가지(算木)'라 한다. 三자는 막대기 3개를 늘어놓은 모습을 그린 것이기 때문에 숫자 3을 뜻하게 되었다. 누군가의 호의를 덥석 받는 것은 중국식 예법에 맞지 않는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최소한 3번은 거절한 후에 상대의 호의를 받아들이는 문화가 있다. 三자가 '자주'나 '거듭'이라는 뜻으로 쓰이는 것도 이러한 문화적 배경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三(삼)은 셋의 뜻으로 ①석, 셋 ②자주 ③거듭 ④세 번 ⑤재삼, 여러 번, 몇 번이고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석 삼(叁)이다. 용례로는 세 해의 가을 즉 삼년의 세월을 일컫는 삼추(三秋), 세 개의 바퀴를 삼륜(三輪), 세 번 옮김을 삼천(三遷), 아버지와 아들과 손자의 세 대를 삼대(三代), 한 해 가운데 셋째 되는 달을 삼월(三月), 스물한 살을 달리 일컫는 말을 삼칠(三七), 세 째 아들을 삼남(三男), 삼사인이나 오륙인이 떼를 지은 모양 또는 여기저기 몇몇씩 흩어져 있는 모양을 일컫는 말을 삼삼오오(三三五五), 삼순 곧 한 달에 아홉 번 밥을 먹는다는 뜻으로 집안이 가난하여 먹을 것이 없어 굶주린다는 말을 삼순구식(三旬九食), 오직 한가지 일에만 마음을 집중시키는 경지를 일컫는 말을 삼매경(三昧境), 유교 도덕의 바탕이 되는 세 가지 강령과 다섯 가지의 인륜을 일컫는 말을 삼강오륜(三綱五倫), 날마다 세 번씩 내 몸을 살핀다는 뜻으로 하루에 세 번씩 자신의 행동을 반성함을 일컫는 말을 삼성오신(三省吾身), 서른 살이 되어 자립한다는 뜻으로 학문이나 견식이 일가를 이루어 도덕 상으로 흔들리지 아니함을 이르는 말을 삼십이립(三十而立), 사흘 간의 천하라는 뜻으로 권세의 허무를 일컫는 말을 삼일천하(三日天下), 세 사람이면 없던 호랑이도 만든다는 뜻으로 거짓말이라도 여러 사람이 말하면 남이 참말로 믿기 쉽다는 말을 삼인성호(三人成虎), 형편이 불리할 때 달아나는 일을 속되게 이르는 말을 삼십육계(三十六計), 하루가 삼 년 같은 생각이라는 뜻으로 몹시 사모하여 기다리는 마음을 이르는 말을 삼추지사(三秋之思), 이러하든 저러하든 모두 옳다고 함을 이르는 말을 삼가재상(三可宰相), 삼 년 간이나 한 번도 날지 않는다는 뜻으로 뒷날에 웅비할 기회를 기다림을 이르는 말을 삼년불비(三年不蜚), 세 칸짜리 초가라는 뜻으로 아주 보잘것 없는 초가를 이르는 말을 삼간초가(三間草家), 봉건시대에 여자가 따라야 했던 세 가지 도리로 어려서는 어버이를 시집가서는 남편을 남편이 죽은 후에는 아들을 좇아야 한다는 것을 이르는 말을 삼종의탁(三從依托), 키가 석 자밖에 되지 않는 어린아이라는 뜻으로 철모르는 어린아이를 이르는 말을 삼척동자(三尺童子), 세 사람이 마치 솥의 발처럼 마주 늘어선 형상이나 상태를 이르는 말을 삼자정립(三者鼎立), 세 칸에 한 말들이 밖에 안 되는 집이라는 뜻으로 몇 칸 안 되는 오막살이집을 비유해 이르는 말을 삼간두옥(三間斗屋), 가난한 사람은 농사 짓느라고 여가가 없어 다만 삼동에 학문을 닦는다는 뜻으로 자기를 겸손히 이르는 말을 삼동문사(三冬文史), 삼생을 두고 끊어지지 않을 아름다운 언약 곧 약혼을 이르는 말을 삼생가약(三生佳約), 세 마리의 말을 타고 오는 수령이라는 뜻으로 재물에 욕심이 없는 깨끗한 관리 즉 청백리를 이르는 말을 삼마태수(三馬太守), 세 치의 혀라는 뜻으로 뛰어난 말재주를 이르는 말을 삼촌지설(三寸之舌), 얼굴이 셋 팔이 여섯이라는 뜻으로 혼자서 여러 사람 몫의 일을 함을 이르는 말을 삼면육비(三面六臂), 사귀어 이로운 세 부류의 벗으로서 정직한 사람과 성실한 사람과 견문이 넓은 사람을 이르는 말을 삼익지우(三益之友), 세 가지 아래의 예라는 뜻으로 지극한 효성을 비유해 이르는 말을 삼지지례(三枝之禮), 머리가 셋이요 팔이 여섯이라 함이니 괴상할 정도로 힘이 엄청나게 센 사람을 이르는 말을 삼두육비(三頭六臂), 세 번 신중히 생각하고 한 번 조심히 말하는 것을 뜻하는 말을 삼사일언(三思一言) 등에 쓰인다.
▶️ 暮(저물 모)는 ❶회의문자로 莫(모)는 동자(同字)이다. 해가 풀숲에 숨은 모양을 나타내며 해질녘을 뜻하는 莫(막)이 없다의 뜻으로 빌어 쓰이게 되자 나중에 날 일(日; 해)部를 더하여 暮(모)를 해질녘의 전용(專用)글자로 하였다. ❷회의문자로 暮자는 '(날이) 저물다'나 '(시간에) 늦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暮자는 莫(없을 막)자와 日(해 일)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莫자는 풀숲에 해가 잠긴 모습을 그린 것이다. 그래서 본래 '저물다'라는 뜻은 莫자가 먼저 쓰였었다. 그러나 후에 날이 저물어 해가 사라졌다는 의미가 확대되면서 '없다'라는 뜻으로 가차(假借)되었다. 그래서 해서에서는 여기에 日(날 일)자를 더한 暮자가 '저물다'라는 뜻을 대신하게 되었다. 그래서 暮(모)는 ①날이 저물다 ②시간에 늦다 ③늙다, 노쇠하다 ④밤 ⑤저물녘, 해질 무렵 ⑥끝, 마지막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저녁 석(夕),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아침 단(旦), 아침 조(朝)이다. 용례로는 늦봄이나 음력 3월을 모춘(暮春), 늦여름으로 음력 6월을 모하(暮夏), 늦가을으로 음력 9월을 모추(暮秋), 이슥한 밤을 모야(暮夜), 늘그막을 모년(暮年), 날이 저물어 가는 어스레한 빛을 모색(暮色), 저물녘의 구름을 모운(暮雲), 저녁 때의 슬픈 생각을 모사(暮思), 저물게 오는 눈을 모설(暮雪), 늙바탕으로 늙어 버린 판을 모경(暮境), 저물녘에 내리는 비를 모우(暮雨), 절이나 교회 등에서 저녁 때에 치는 종을 모종(暮鐘), 해가 질 무렵의 경치를 모경(暮景), 늦 겨울을 모동(暮冬), 근래의 세상을 모세(暮世), 한 해의 마지막 때를 모세(暮歲), 저녁 무렵의 연기를 모연(暮煙), 저녁 때에 잠깐 하는 참선을 모참(暮參), 저물녘의 하늘을 모천(暮天), 그 해가 저무는 때를 세모(歲暮), 아침 저녁을 단모(旦暮), 한 해의 마지막 때를 연모(年暮), 아침 때와 저녁 때를 조모(朝暮), 저녁이나 늘그막을 만모(晩暮), 차차 나이가 많아지는 것을 지모(遲暮), 하루의 해 질 무렵을 일모(一暮), 해가 진 뒤로 껌껌하기 전까지의 어둑어둑하여 지는 어둠을 박모(薄暮), 길을 가다가 날이 저묾을 행모(行暮), 해가 진 뒤로 껌껌하기 전까지의 어둑어둑 하여지는 어둠을 혼모(昏暮), 깊은 밤중에 하는 일이라서 아무도 보고 듣는 사람이 없음을 이르는 말을 모야무지(暮夜無知), 저녁 빛이 짙어 어둑어둑함을 일컫는 말을 모색창연(暮色蒼然), 아침에 세 개 저녁에 네 개라는 뜻으로 당장 눈앞에 나타나는 차별만을 알고 그 결과가 같음을 모름의 비유를 일컫는 말을 조삼모사(朝三暮四), 아침에 명령을 내리고서 저녁에 다시 바꾼다는 뜻으로 법령의 개정이 너무 빈번하여 믿을 수가 없음을 이르는 말을 조령모개(朝令暮改), 날은 저물었는데 갈 길은 멀다는 뜻으로 이미 늙어 앞으로 목적한 것을 쉽게 달성하기 어렵다는 말을 일모도원(日暮途遠), 아침에는 동쪽에 있다가 저녁에는 서쪽에 머문다는 뜻으로 일정한 거처가 없이 여기저기 옮겨다님을 일컫는 말을 조동모서(朝東暮西), 아침에는 구름, 저녁에는 비라는 뜻으로 남녀의 언약이 굳은 것 또는 남녀의 정교를 이르는 말을 조운모우(朝雲暮雨), 아침에는 파리 저녁에는 모기가 떼를 이룬다는 뜻으로 소인배가 발호함을 이르는 말을 조승모문(朝蠅暮蚊), 매일 아침과 매일 저녁이라는 뜻으로 아침 저녁으로 언제나 변함이 없음을 이르는 말을 조조모모(朝朝暮暮), 아침에는 동쪽에 있다가 저녁에는 서쪽에 머문다는 뜻으로 일정한 거처가 없이 여기저기 옮겨다님을 이르는 말을 조동모서(朝東暮西), 아침에 모여들었다가 저녁에 흩어진다는 뜻으로 이합집산의 무상함을 이르는 말을 조취모산(朝聚暮散), 아침에는 고사리를 먹고 저녁에는 소금을 씹는다는 뜻으로 몹시 곤궁한 생활을 이르는 말을 조제모염(朝薺暮鹽), 아침에 얻어 저녁에 잃는다는 뜻으로 얻은 지 얼마 안 되어서 곧 잃어 버린다는 말을 조득모실(朝得暮失) 등에 쓰인다.
▶️ 四(넉 사)는 ❶지사문자로 亖(사)는 고자(古字), 罒(사)는 동자(同字)이다. 아주 옛날엔 수를 나타낼 때 가로 장대 네 개의 모양으로 썼으나 三(삼)과 혼동되기 쉬우므로 전국시대 무렵부터 四(사)를 빌어 쓰게 되었다. 四(사)는 코에서 숨이 나오는 모양을 본뜬 것이었으나 그 뜻으로는 나중에 呬(희)로 나타내고, 四(사)는 오로지 수의 넷을 표시하는데 쓴다. ❷상형문자로 四자는 숫자 '넷'을 뜻하는 글자이다. 그런데 四자의 갑골문을 보면 긴 막대기 4개를 그린 亖(넉 사)자가 그려져 있었다. 그러니까 갑골문에서는 막대기 4개를 나열해 숫자 4를 뜻했던 것이다. 그러나 亖자가 숫자 三(석 삼)자와 자주 혼동되었기 때문에 금문에서는 '숨 쉬다'라는 뜻으로 쓰였던 四자를 숫자 '사'로 쓰기 시작했다. 四자는 사람의 콧구멍을 그린 것으로 본래는 '숨쉬다'라는 뜻으로 쓰였었지만, 숫자 4로 가차(假借)되면서 후에 여기에 口(입 구)자를 더한 呬(쉴 희)자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그래서 四(사)는 ①넉, 넷 ②네 번 ③사방(四方) 따위의 뜻이 있다. 용례로는 네 사람을 사인(四人), 네 곱절을 사배(四倍), 넷으로 가르거나 갈라짐을 사분(四分), 사방의 경계를 사경(四境), 사방의 둘레를 사위(四圍), 사방을 돌아보아도 친척이 없다는 뜻으로 의지할 만한 사람이 도무지 없다는 말을 사고무친(四顧無親), 사방에서 들리는 초나라의 노래라는 뜻으로 적에게 둘러싸인 상태나 누구의 도움도 받을 수 없는 고립 상태에 빠짐을 이르는 말을 사면초가(四面楚歌), 주위에 사람이 없어 쓸쓸함을 일컫는 말을 사고무인(四顧無人), 길이 사방 팔방으로 통해 있음이나 길이 여러 군데로 막힘 없이 통함을 일컫는 말을 사통팔달(四通八達), 이리저리 여러 곳으로 길이 통한다는 뜻으로 길이나 교통망이나 통신망 등이 사방으로 막힘없이 통함을 일컫는 말을 사통오달(四通五達), 사면이 봄바람이라는 뜻으로 언제 어떠한 경우라도 좋은 낯으로만 남을 대함을 이르는 말을 사면춘풍(四面春風), 사해란 곧 온 천하를 가리키는 말로 천하의 뭇사람들은 모두 동포요 형제라는 뜻을 이르는 말을 사해형제(四海兄弟), 네 갈래 다섯 갈래로 나눠지고 찢어진다는 뜻으로 이리저리 갈기갈기 찢어짐 또는 천하가 심히 어지러움 또는 질서 없이 몇 갈래로 뿔뿔이 헤어지거나 떨어짐을 일컫는 말을 사분오열(四分五裂), 네 가지 괴로움과 여덟 가지 괴로움이라는 뜻으로 인생에 있어 반드시 받지 않으면 안 되는 온갖 괴로움을 이르는 말을 사고팔고(四苦八苦), 사철의 어느 때나 늘 봄과 같음으로 늘 잘 지냄을 비유하여 일컫는 말을 사시장춘(四時長春), 사주의 간지로 되는 여덟 글자 또는 피치 못할 타고난 운수를 이르는 말을 사주팔자(四柱八字), 천하의 풍파가 진정되어 태평함을 이르는 말을 사해정밀(四海靜謐), 갓마흔에 첫 버선이라는 뜻으로 뒤늦게 비로소 일을 해 봄을 이르는 말을 사십초말(四十初襪), 404 가지 병이라는 뜻으로 인간이 걸리는 모든 질병을 이르는 말을 사백사병(四百四病), 네 마리 새의 이별이라는 뜻으로 모자의 이별을 비유해 이르는 말을 사조지별(四鳥之別), 천하를 제 집으로 만든다는 뜻으로 천하를 떠돌아 다녀서 일정한 주거가 없음을 이르는 말을 사해위가(四海爲家), 사궁 중의 첫머리라는 뜻으로 늙어서 아내가 없는 홀아비를 이르는 말을 사궁지수(四窮之首), 사방의 지세가 견고하고 험한 자연의 요새로 되어 있는 땅을 이르는 말을 사색지지(四塞之地), 사방으로 흩어져 서로 따로따로 떨어짐 또는 그렇게 떼어놓음을 일컫는 말을 사산분리(四散分離), 어떤 주창에 응하여 모든 사람이 함께 행동함을 이르는 말을 사방향응(四方響應) 등에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