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T2018-10-17
영원한 사랑의 하나님
시편 103:13~22
(시 103:13) 아버지가 자식을 긍휼히 여김 같이 여호와께서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나니
(시 103:14) 이는 그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단지 먼지뿐임을 기억하심이로다
(시 103:15) 인생은 그 날이 풀과 같으며 그 영화가 들의 꽃과 같도다
(시 103:16) 그것은 바람이 지나가면 없어지나니 그 있던 자리도 다시 알지 못하거니와
(시 103:17) 여호와의 인자하심은 자기를 경외하는 자에게 영원부터 영원까지 이르며 그의 공의는 자손의 자손에게 이르리니
(시 103:18) 곧 그의 언약을 지키고 그의 법도를 기억하여 행하는 자에게로다
(시 103:19) 여호와께서 그의 보좌를 하늘에 세우시고 그의 왕권으로 만유를 다스리시도다
(시 103:20) 능력이 있어 여호와의 말씀을 행하며 그의 말씀의 소리를 듣는 여호와의 천사들이여 여호와를 송축하라
(시 103:21) 그에게 수종들며 그의 뜻을 행하는 모든 천군이여 여호와를 송축하라
(시 103:22) 여호와의 지으심을 받고 그가 다스리시는 모든 곳에 있는 너희여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장로교가 고백하는 신앙의 내용과 그 기준이 되는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에서 제일 먼저 나오는 질문과 답은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이 무엇인가?”라는 것에 “사람의 제일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다.”라고 해설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는 말과 영광을 돌린다는 말은 같은 내용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무엇으로도 가감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는 말은 무엇일까요? 간단하게 말하면 하나님을 하나님답게 하는 것을 말합니다. 무슨 말장난같이 여겨지십니까? 이것의 진의(眞意)는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르게 하므로 하나님의 진정한 모습이 내 안에 형성되는 것을 말합니다. 나에게 하나님은 어떤 존재이며 하나님의 관점에서 내가 어떤 모습을 지니고 있음을 명확하게 밝히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오늘 말씀에서 하나님을 아버지와 자식의 관계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즉 나의 생명의 출발점이 하나님께로부터 나왔기에 하나님을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생명의 출발점이 될 뿐 아니라 나의 생명줄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는 것은 아버지와 나는 하나로 연결되어 있기에 내가 그 분의 영광 안에 들어가게 됨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도 지난 시간에 이어 내 영혼이 잘 되는 비결 중에 하나인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첫째는 하나님을 바르게 인식하고 바른 믿음을 갖는 것이 중요합니다.
13절에 “아버지가 자식을 긍휼히 여김 같이 여호와께서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나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긍휼’이란 단어는 원어로 ‘라함’이라고 하는데 이는 ‘윗사람이 아래 사람에 대해 갖는 사랑’을 의미합니다. 영어로는 ‘compassion’이라고 하는데 이는 접두사 ‘com’과 ‘passion’의 합성어입니다. 즉 ‘같은 마음’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생의 마음을 헤아리고 같은 마음으로 깊은 사랑을 전하시기 위하여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셔서 모든 인생의 경험을 하도록 하셨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은 하나이기 때문에 아들의 모든 체험은 고스란히 아버지 하나님께도 전이(轉移)가 되어 우리의 형편과 처지를 아시고 깊은 동정심을 가지고 계신 분임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아버지 하나님의 긍휼이 흘러 들어오는 것을 깨닫는 사람은 그 분을 경외하는 자라고 말씀합니다. ‘그를 경외하다’라는 표현은 ‘fear Him.’이라고 했습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두려워 하다’라는 것입니다. 무엇을 두려워해야 할까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어린아이는 엄마의 품을 너무 소중하게 여겨 그 품에서 떠난다는 두려움이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떠나서는 살 수 없다는 절박함의 감정표현이 경외함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또 하나는 하나님을 지극히 사랑하여 그 분의 마음을 거슬리거나 아프게 하는 것을 견디지 못하여 조심스런 자세를 갖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과 내가 아버지와 자식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하여 더욱 친근한 모습으로 나가는 것이 바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의 모습니다.
둘째는 하나님의 관점에서 자신을 돌아보라는 것입니다.
인간을 이해하는 여러 학문을 인문학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런 학문으로 인간의 모든 것을 알 수 없습니다. 오직 창조주 하나님께서 규정하여 주셔야 옳은 것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은 다윗 왕의 입을 통하여 14절에 “이는 그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단지 먼지뿐임을 기억하심이로다”고 했습니다. 우리 인간은 흙으로 빚어 만들었다고 하는데, 바로 이것이 ‘아파르’ 먼지, 티끌을 말합니다. 인간의 선택에 따라 우리의 방향은 두 갈래로 나뉠 수밖에 없습니다. 아무런 가치 없는 티끌로 돌아가느냐 가치 있는 영생을 얻느냐에 있습니다. 내 생명에 하나님의 긍휼과 인자하심이 개입하지 않으면 우리는 필시 티끌에서 왔으니 티끌로 돌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티끌은 환난의 바람을 이기지 못합니다. (시 1:4) “악인들은 그렇지 아니함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고 했습니다. 바람에 날리는 티끌은 악인의 모습을 띄고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권세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한 사람들에게는 악을 이길 수 없어 결국 마귀의 손에 이끌려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다 영원한 형벌이 기다리고 있는 지옥으로 빠질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내가 티끌임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도움 없이는 이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인정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사람은 덧없이 지나는 세월에 세상의 것에 마음을 쏟지 않습니다. 내가 소유하고 가졌던 모든 것이 일시에 내 곁을 떠나가는 신기루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직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에게 영원부터 영원까지 그 분의 존귀함을 힘입게 될 것입니다.
셋째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기억하고 이를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에 대하여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말합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먼저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것이 나의 기쁨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만물을 창조하시고 그 만물을 방치하는 것이 아니라 단 한순간도 멈추지 않고 다스려 가십니다. 이 놀라운 하나님의 손길을 인정하고 믿으면 세상이 아무리 어렵고 힘들더라도 믿음의 성도에게는 소망이 있습니다. 또한 그 분의 언약의 말씀은 반드시 성취하고 그것을 잊지 않고 이루실 수 있는 권세가 하나님은 지니고 계십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을 송축하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을 송축하는 것은 나의 믿음의 절정을 의미합니다. 22절에 “여호와의 지으심을 받고 그가 다스리시는 모든 곳 있는 너희여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고 말씀합니다. ‘송축하다’는 ‘바라크’라고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인생에게 복을 선언하실 때에 나타나는 단어입니다. 인생에게 내려주는 복의 의미를 알아야 될 것입니다. 이 복은 하나님의 넘쳐나는 권능으로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복이 그 분의 능력을 떨어트리거나 소진하게 된다면 이는 복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복은 주고 주어도 다함이 없는 신비한 것입니다. 영원부터 영원까지 그 분의 바라크는 약화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나님을 향하여 송축하는 것은 그 하나님으로 하여금 하나님 되게 하는 것임을 말씀드렸습니다. 내 안에서 언약의 말씀이 들어차고 그 분의 능력에 차고 넘치게 하는 것이 송축하라는 의미입니다. 넘치는 생명력은 작은 것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작은 것에 하나님의 이름을 송축하고 즐거워해 보십시오! 점차 내 안에 하나님의 자비하심이 차고 넘치는 것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말씀에 순종할 때 성령께서 내 안에 활발하게 역사하십니다. 그 분의 능력이 충만할 때 우리는 소리 높여 찬송하고 송축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곧 내 영혼이 잘되고 있다는 징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