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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Victor가 될 수밖에 없는 이유
히브리서 10:11~18
11 제사장마다 매일 서서 섬기며 자주 같은 제사를 드리되 이 제사는 언제나 죄를 없게 하지 못하거니와
12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13 그 후에 자기 원수들을 자기 발등상이 되게 하실 때까지 기다리시나니
14 그가 거룩하게 된 자들을 한 번의 제사로 영원히 온전하게 하셨느니라
15 또한 성령이 우리에게 증언하시되
16 주께서 이르시되 그 날 후로는 그들과 맺을 언약이 이것이라 하시고 내 법을 그들의 마음에 두고 그들의 생각에 기록하리라 하신 후에
17 또 그들의 죄와 그들의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하셨으니
18 이것들을 사하셨은즉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 드릴 것이 없느니라
제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는 매년 가을 운동회가 있었습니다. 학부모도 추수를 마치고 여유가 있는 시간을 보내고 있기에 운동회는 마을의 축제처럼 즐겼습니다. 보통 청군과 백군으로 나눠 경기를 치렀습니다. 그때 인상 깊었던 응원 캐치프레이즈(catchphrase)가 있었습니다.
응원단장이 소리 높여 “Victory! Victory!”를 외치면 같은 편에 속한 아이들이 큰소리로 복창을 합니다. 그러다 “V-i-c-t-o-r-y!”라고 외치면 그것이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함께 외쳤습니다. Victory가 ‘승리’를 의미하는 것을 중학교에 입학하고서야 비로소 알았습니다. 뜻도 모르면서 내 편이 이기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목이 쉬도록 응원하고 나중에 이기고 나면 세상을 다 얻은 것처럼 신바람이 났었습니다.
사람의 근본 심리가 편 가르기에 있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영화를 볼 때도 내 편이 있습니다. 그래서 영화를 보면서 내 편이 잘되고 이기는 모습을 보면 나도 덩달아 기뻐했습니다.
이런 모습은 구원을 이뤄가는 과정에서도 마찬가집니다. 이 세상에 사는 사람은 모두 하나님 편과 마귀의 편으로 나뉘어 있습니다. 내가 어느 편에 속했느냐에 따라 영원의 세계가 펼쳐집니다. 하나님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의 소식을 전하고 이에 반응하여 믿음으로 구원을 얻은 모든 백성과 하늘에서 기뻐하는 모습이 요한계시록 19장에서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구절은 마귀와의 전쟁에서 이긴 성도들과 함께 하나님이 기쁨을 나누는 영광스러운 최종 장면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는 자가 가는 곳입니다. 세상의 기준은 언제나 변하게 되어 있습니다. ‘키가 180cm 이하면 루저(Loser)다’라는 발언으로 논란을 일으킨 연예인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여자의 조건은 키 170cm 이상, 남자의 조건은 180cm 이상’이라고 언급하면서, 180cm 이하인 남성을 ‘루저(Loser)’ 실패자라고 하였습니다.
1970년 보건사회부 조사 등 공식 통계에 따르면, 당시 한국인 성인 남성의 평균 신장은 약 163~165cm 정도였습니다. 저도 오늘날의 기준으로 보면 작은 키에 해당하지만 제가 청년기에는 보통에 해당하였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세상에서의 성공과 실패자의 기준은 외모뿐 아니라 가치관에서도 늘 변동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영적 세계에서의 성공과 실패는 영원히 변함이 없습니다.
여기서 성공과 실패를 가름하는 기준은 마귀와의 싸움에서 이기느냐 지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2~3장에서 소아시아 지역의 일곱교회에 주어진 편지에서 이기는 자에 대한 기준과 그에 따르는 상급에 관한 말씀이 있습니다. 이것을 요약하자면 지켜야 할 것, 세상에서 거절해야 할 것 그리고 믿음의 자세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지켜야 할 것은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충성 그리고 믿음입니다. 세상에 대하여 거부하고 지켜야 할 것은 우상숭배와 음행을 멀리할 것을 말하고, 믿음의 태도는 늘 깨어 있어 하나님의 말씀을 소중하게 여기고 읽는 것과 지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에 따른 상급이 주어지는데 이것은 생명의 성장과 다스림의 영역을 말씀하고 있으면 권세와 하나님의 영광을 주실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요한 계시록에 나타난 이기는 자에 대한 묘사를 보면 그리스도인 스스로 이 모든 것을 이룬 것으로 착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흐름을 보면 사람의 의지가 우선이 아니라 하나님의 열심을 먼저인 것으로 밝히고 있습니다. 그 예가 누가복음 15장에 기록된 잃어버린 양과 드라크마 비유 그리고 탕자의 비유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잃어버린 양은 자신이 목자의 손을 떠나 있는 것을 알고 있지만, 주인에게 돌아갈 능력이 없습니다. 잃어버린 드라크마에서는 자신이 잃어버린 자인지 전혀 모르고 어둠에 묻혀 꼼작 없이 갇혀 있는 모습이 나옵니다. 그리고 아버지 품을 떠난 탕자의 비유에서는 자신이 아버지 품을 떠나 비참한 현실에 놓여 있음을 알고 있으며 그런 상황에서 돌이켜 가야 한다는 의지를 갖고 있습니다. 이 비유는 하나님의 품을 떠난 인간의 모습을 보이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잃은 양은 찾고자 하는 목자의 열심과 열 드라크마를 목걸이로 지니고 있었던 여자가 하나를 잃고 이것을 찾기 위하여 온 방 안을 등불로 비취며 찾는 부지런함이 나옵니다. 그리고 집을 떠난 탕자를 탓하지 않고 인내하며 기다리는 아버지가 등장합니다.
이 비유에서 공통점은 잃어버린 것을 찾을 때 기쁨을 이기지 못하고 여러 사람과 함께 잔치를 벌이고 있는 모습입니다. 이 비유에 나타난 것은 구원에 있어서 인간의 무력함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습니다.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열심으로 이루신 것을 말하며 구원을 얻는 성도에게 공로를 돌리시므로 마치 성도 스스로가 이룬 것으로 비치도록 하여 하나님과 함께 기뻐함을 말합니다.
오늘의 말씀에서도 우리의 힘으로 이룰 수 없는 구원의 은혜를 예수님께서 어떻게 이루셨는지를 말씀하고 오직 믿음의 성도는 하나님께서 나를 이끌어가시는 손길에 자신을 맡길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일 5:4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에서 성령으로 거듭난 성도가 세상을 이길 수 있음을 말하고 오직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일 때 승리가 주어짐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히 10:12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라는 표현은 여기서 ‘앉았다’는 원에서는 ‘카디조 καθίζω’라고 하였는데 단순하게 자리에 앉는다는 의미보다는 ‘존귀한 자리’에 비중을 두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자리에 앉아서 편히 쉬고 계심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히 10:13 “그 후에 자기 원수들을 자기 발등상이 되게 하실 때까지 기다리시나니”라고 하였습니다. 고대 전쟁에서는 싸움에서 승리하면 승자가 패자의 목을 밟는 의식을 행했습니다. 이처럼 원수들을 발등상처럼 짓밟고 승리하심을 말씀합니다. 또한, 이 말씀은 창 3:15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라는 말씀을 완벽하게 성취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으신 것은 이 땅에서 마귀와 치열하게 영적 전쟁을 치러야 할 성도를 위하여 일하고 계심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예가 이스라엘 백성과 아말렉족속과의 전쟁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출애굽기 17:8–16절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르비딤이라는 지역에 이르렀을 때 물이 떨어져 심히 갈증을 느낄 때 하나님은 모세에게 한 반석을 지적하셨고, 그 반석을 지팡이로 쳤더니 생수가 흘러나오는 기적을 체험하였습니다.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들이 목마름을 겨우 해결하고 한숨을 돌리려고 할 때 느닷없는 아말렉족 군대의 침입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로서는 이제 막 출애굽을 해서 여러 가지 면에서 전열을 제대로 갖추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전혀 훈련되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여기와 비교하면 아말렉은 유목민으로, 광야 지역에서 게릴라식 전투에 능했습니다. 그 지역을 잘 알고 있었던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이 지나가는 협곡을 택하여 잘 훈련된 중무장한 군사로 공격한 것입니다. 이런 상태를 객관적으로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패배할 수밖에 없는 지경이었습니다. 이 전쟁은 큰 산을 사이에 두고 있는 골짜기입니다. 피하려고 해도 피할 수 없습니다. 전쟁에서 지게 되면 이스라엘 백성은 노예로 끌려가게 될 것입니다. 430년의 애굽에서 노예 생활도 지긋지긋하였는데 또다시 노예의 비참함으로 돌아갈 것만 같은 위기가 맴도는 전쟁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어느 쪽이 승리를 거두게 될 것인가 하는 것은 너무도 뻔한 일이었는데, 뜻밖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승리를 거두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승리의 비결은 모세가 여호수아를 시켜 백성과 함께 전투에 나가서 싸울 것을 명하고 자신은 아론과 훌을 데리고 산꼭대기에 올라가서 손을 들고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 이때 기도하는 모세의 손이 올라가면 이스라엘이 싸움에서 이기고 모세의 손이 내려오면 이스라엘이 후퇴하였습니다. 이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아론과 훌이 큰 돌을 굴려 모세에게 앉게 하고 모세의 팔을 양쪽에서 한쪽 팔씩 붙들고 합심하여 기도함에 놀랍게도 여호수아의 군대가 아말렉 군대를 쳐서 멸망시키는 승리를 얻게 되었다는 것입니니다.
이 역사적 사실에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성도들을 위하여 기도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 성도들을 위하여 마귀와의 전쟁에서 이길 수 있게 하려고 모세에게는 아론과 훌이 있는 것처럼 예수님은 성령과 천군 천사를 동원하여 우리에게 승리할 수 있도록 하심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구원은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되어 하나님으로 완성됩니다.
빌 1:6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속죄의 피로 인하여 성도는 구원을 받았습니다.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권세가 주어졌고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면서 관계가 회복되었습니다. 그러나 택하신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대적인 마귀는 쉬지 않고 도전하고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고 합니다. 이들을 사람의 지혜와 능력으로 이길 수 없습니다. 오직 마귀의 일을 멸하신 예수님의 능력으로만 이길 수 있습니다.
히 10:14 “그가 거룩하게 된 자들을 한 번의 제사로 영원히 온전하게 하셨느니라” 예수님의 십자가 피는 영원한 속죄를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속죄를 받은 성도라 할지라도 마귀와의 전쟁을 피할 수 없는 숙명적인 과제가 되었습니다. 이 마귀와의 전쟁으로 우리는 다듬어지고 온전함을 이룰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귀와 전쟁으로 우리는 이기는 자의 통쾌함과 상급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런 이김을 주어서 우리로 영원한 나라의 Victor, 승리자가 되기 위하여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주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마귀가 어떻게 우리를 공격해 오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벧전 5:8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라고 하였습니다. ‘우는 사자’는 ‘굶주린 사자’를 말합니다. 동물의 왕국에서 먹잇감을 얻기 위하여 사방으로 돌아다니다가 무리 중에 가장 약한 짐승을 발견하면 그를 온 힘을 다하여 추적합니다. 쫓아가다가 옆에 살찐 짐승이 있어도 거기에 마음을 두지 않습니다. 처음에 Target으로 삼은 것을 쫓아갑니다.
이처럼 마귀는 우리의 약한 모습을 발견하면 그것을 집중하여 물어뜯어 죽이고 멸망시키려 합니다. 우리의 약한 모습은 무엇일까요? 우리가 생각하는 약한 것이 아니라 처음 사람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을 때 보인 모습이 약한 것입니다. 즉 하나님으로부터 독립하려는 마음입니다. 나 스스로 내가 옳은 대로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나가고자 하는 마음입니다. 마귀는 창조주와 피조물의 차이를 무너트리고 내가 내 삶의 주인임을 인식하도록 합니다. 그리고 스스로 높아지고자 하는 마음을 부추겨서 결국은 하나님을 떠나도록 합니다.
또 하나는 자기 자랑입니다.
제 형님의 친구분 중에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한 분이 있습니다. 이분은 이야기를 나누다가 “내가 경기고등학교를 다닐 때 말이야”라며 말합니다. 당시에는 우리나라 최상의 성적을 유지한 학생들이 진학하는 학교가 경기고등학교였습니다. 그러기에 이분은 이 학교를 다녔던 것이 자랑이라 늘 이것을 뽐내기를 원했습니다.
사람마다 자랑하고 싶은 것들이 있습니다. 인물이 잘난 사람은 그것을 더욱 돋보이게 하려고 하고 지식이 많은 사람은 이것을 자랑하려고 합니다. 사회적 지위가 높은 사람, 재산이 많은 사람은 이웃과 비교하여 우월한 부분에 대하여 뽐내고 자랑하고 싶은 욕구가 있습니다. 바로 이 부분을 틈타고 악한 마귀는 공격해 들어와 이를 물고 놓치지를 않습니다.
마귀의 속성은 스스로 높아지는 것입니다.
사 14:13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 별 위에 내 자리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앉으리라”고 말씀하면서 타락한 천사인 마귀의 속성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마귀는 하나님을 대적하고 스스로 세상의 왕으로 자처하여 그에게 굴복하는 모든 사람으로 그 발 앞에 꿇게 하고 짓밟고 죽이려고 합니다.
마귀는 이렇게 자신을 높이고자 하고 자랑하고 싶어 안달하는 자에게 접근하여 그것으로 기뻐하고 즐거워하게 합니다. 여기서 벗어나야 합니다. 히 10:15 “또한 성령이 우리에게 증언하시되”라고 하였습니다. 성령께서 내 마음에 기록된 말씀을 가지고 들어오셔서 살아 있고 활력있는 말씀으로 영적 세계를 분별하게 하십니다.
때로는 영적 전쟁에서 쓰러질 때도 있습니다.
히 10:17 “또 그들의 죄와 그들의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하셨으니”라고 하였습니다. 최종의 도착점은 승리입니다. 예수님의 보혈로 우리의 죄를 씻어 주시고 불법을 사하여 주셨습니다. 내 안에 성령이 계시면 천군과 천사들이 나를 호위하면서 악한 자의 공격에서 우리를 보호하여 주십니다. 요일 5:18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는 다 범죄하지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부터 나신 자가 그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그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이런 은혜가 성도에게 주어지기에 영적인 전쟁에서 Victor, 승리자가 될 수 있습니다.
제가 초등학교 5학년 스케이트를 처음으로 타게 되었습니다. 겨울방학에 밥만 먹으면 얼음이 꽁꽁 얼린 강에 나가 종일 스케이트를 지치지도 않고 타곤 하였습니다. 마침 큰 강에 보를 막아 커다란 스케이트장을 만들고 그곳에서 스케이트 대회가 열리게 되었습니다. 저는 자신만만하게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500M 경주에서 250M 트랙을 두 번 도는 것인데, 저는 초장에 너무 조급하게 달리다가 100M 정도에 이르러 넘어지고 말았습니다. 다시 일어나 달리다 결승점을 앞두고 또 쓰러졌습니다. 결국, 낭패를 보고 만 것이었습니다.
상실감에 젖어 스케이트를 벗고 있는데 생각지도 않았던 형님 세 분과 누님 두 분이 제게로 달려오셔서 “참 잘했어!” 하면서 저를 다독이는 것입니다. 저는 그때 형제의 사랑을 느꼈습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연약함이 영적 전쟁에서 실패할 수도 있습니다. 그럴 때 주님은 우리를 꾸짖지 않습니다. 다시 다독이며 믿음의 주요 온전하게 하시는 주님을 바라 보면 우리는 결국 승리자 될 수 있습니다.
영국의 윈스턴 처칠(Winston Churchill)이 옥스퍼드 대학의 졸업식에서 축사할 때 “절대로 포기하지 말라(Never give up, never, never, never…)”고 외친 적이 있습니다. 이 말은 제2차 세계대전 중 영국 국민에게 용기와 희망을 불어넣기 위한 상징적인 메시지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믿음의 행진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기다리면 반드시 승리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영생을 얻었습니다. 이는 이미 영원한 세계에 진입하였음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영원의 세계는 끝이 없습니다. 유한한 인간의 세계는 끝이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실패를 했다. 성공했다’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영원의 세계는 매듭은 있습니다. 끝인데 끝이 아니라 다음 단계로 나가기 위한 시작이 될 수 있습니다. 내 생각으로 실패했다고 결론지었는데 하나님은 승리를 위한 시작이 되었다고 하십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큰 믿음이 아닙니다. 작은 믿음, 겨자씨만 한 믿음이라도 얼마든지 이길 수 있습니다. 작은 믿음이란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그분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며 일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잠 24:16 “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악인은 재앙으로 말미암아 엎드러지느니라”고 했습니다. 믿음의 사람이 의인입니다. 예수님이 승리하셨고, 그 승리의 핵심인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 주시므로 우리는 반드시 Victor, 승리자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