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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없는 시선으로 고개 드는 오 진우.
손바닥만 한 창문에 창살이 박혀 있다.
종잡을 수 없는 망연한 표정의 오 진우 얼굴에서 편집 화면 서서히 암전된다.
씬 107. 납골묘 공원.
암전 상태서 자막.
“4년 후”
이윽고 밝아지는 화면.
계절이 바뀐 풍경, 고즈넉한 산자락에 납골공원 전경이 한눈에 펼쳐진다. 주욱 늘어선 가족 납골묘를 하나씩 지나쳐오는 주희. 국
화꽃 한 다발 들고 있다.
어느 묘 앞에 멈추는 주희.
하나의 봉분 아래 나란히 세워진 세 개의 묘비에 각각 이름이 새겨져 있다.
누군가 다녀갔는지 묘석 위에는 반 쯤 남은 소주병이 있고 병 주둥이에는 향 대신 피워놓은 듯 한 담배가 타고 있다.
그 옆에 찌그러진 지포 라이터. 주희, 의아해서 주변을 둘러보지만 인기척은 보이지 않는다.
씬 108. 벤처 단지 일각/건물 옥상.
시원하게 펼쳐지는 시야.
공사가 마무리 중인 벤처단지의 전경이다.
여기저기서 뚝딱거리는 소리, 크레인 움직이는 소리.
흙먼지 피우며 바쁘게 오가는 덤프트럭과 레미콘 차량들.
난간에 서서 공사 현장을 내려다보고 있는 유 강진.
뿌듯하고 벅찬 기분이다.
그의 재킷에 선명한 금배지.
철컹.
철컹.
공사용 엘리베이터가 올라가고 있다.
누군가 타고 있지만 그 모습이 자세히 보이지는 않는다.
반대편 난간으로 다가오는 유 강진, 다른 방향으로 펼쳐진 현장 바라보며 기분 좋게 심호흡한다.
철커덩!
옥상에 도착하는 엘리베이터.
드륵, 문을 열고 내리는 사내.
그의 시선으로 저만치 난간에 서 있는 유 강진이 보인다.
저벅저벅.
유 강진을 향해 다가가는 운동화. 무심코 돌아보는 유 강진, 저만치서 다가오는 사내를 발견하는데 햇빛을 등지고 있어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
갸웃하는 유 강진, 조금씩 가까워지는 사내에게서 시선 떼지 못하는데.
유 강진: (놀라는) …….
우뚝 멈춰서는 사내, 노타이 차림에 까칠한 몰골.
감정 없는 시선으로 유 강진을 응시하고 있는 오 진우.
유 강진, 놀라움이 사라지고 특유의 여유로운 미소가 번진다.
오 진우 향해 한발 다가가려는데 품에서 뭔가 꺼내 치켜드는 오 진우.
리볼버 권총!
유 강진, 미처 반응할 사이도.
탕!
피 뿌리며 나가떨어지는 유 강진.
오 진우, 여전히 무표정한 채 저벅저벅 다가온다.
가슴을 움켜쥔 유의 손가락 사이로 피가 벌컥벌컥 흘러나온다.
어이없고, 화나고, 두려운 유 강진.
노려보듯 치켜뜬 눈빛으로 오 진우를 올려다본다.
처형 자세로 유 강진을 겨누고 있는 오 진우.
호주머니에서 종이 쪼가리를 꺼내 유 강진에게 던져준다.
오 진우: 다들 이것 때문에 죽었어……. 겨우 이깟 종이 쪼가리 때문에…….
덜덜 떨리는 손으로 힘겹게 종이를 보는 유 강진.
스카치테이프를 붙여 너덜너덜해진 바로 그 살인 메모!
유 강진, 적의 번득이는 눈빛으로 오 진우를 바라본다.
유 강진: 결국 네가 이겼다고 생각하는 거지? 응? (입가에 피거품 흘리며) 난……. 해냈구……. 넌……. 다……. 잃었어……. 알아? 내가……. 이긴 거야…….
오 진우: 그렇게 꿈을 이룬 기분이 어때?
유 강진: (피를 쿨럭이며 웃는다) 넌 죽었다 깨나도……. 모를 거야……. 넌……. 아직 멀었어…….
미동도 하지 않는 오 진우, 영혼이 없는 사람처럼 텅 빈 눈빛.
방아쇠에 걸린 손가락이 움직인다. 탕!
탕!
탕!
탕!
탕!
끼.
비어 버리는 탄창.
바닥에 떨어지는 리볼버.
오 진우, 잠시 서성이다가 옥상 한 켠에 천천히 주저앉는다.
멍한 시선으로 선혈이 낭자한 유 강진시체를 바라보다가 주머니 뒤적여 담배를 입에 무는 오 진우.
가까이에 떨어져 있는 메모지 줍더니 라이터로 불붙인다.
비닐테이프와 함께 지글지글 타들어가는 종이.
오 진우, 그 불꽃으로 담뱃불 붙이고 나면 메모지는 까만 재가 되어 바스러진다.
길게 담배 연기 내뿜는 오 진우.
텅 빈 공허함 속에 쓰러진 한 사내와 그 옆을 지키는 또 다른 사내, 둘의 모습이 원경으로 오래도록 보여지며…….
끝.
동감
인트로.
어둠속에서의 화면이 밝아지면, 개기월식의 모습이 보여지고, 지구의 그림자에 가려 보이지 않던 달이 서서히 둥근 원이 되고, 원에서 투영되어지는 시계탑속의 시계.
둥근 원을 따라 카메라 이동하면 신라대학의 전경이 (미니어처)로 보여진다.
서서히 포근하고 따뜻하게 소복소복 쌓여가는 하얀 눈.
내리는 눈을 따라 카메라 이동하면 시계탑 옆으로 수위실이 보이고, 난로위에 놓여져 있는 주전자에서 김이 모락모락 나오고 있고, 지난 시절의 회상에 잠긴 듯.
호~입김을 불어 서린 창가를 옷소매로 조심스럽게 닦으며, 창문 밖 교정을 바라보는 수위.
멀리 시계탑이 보이고 온 세상을 뒤덮듯이 펑펑 내리는 눈.
이러한 그림들과 어울리는 소리위로 오프닝 크레디트 오르고 화면 화이트.
하얀 화면이 서서히 사라지면 푸른 수면위로 서서히 춤을 추듯 떠오르는 메인타이틀 <동감(同感)>
일몰과 함께 사라지는 타이틀.
암전 위에 자막 <1979년 가을>
씬 1. 신라 대학.
경쾌한 음악과 함께, 대학 캠퍼스의 젊고 밝은 모습들이 역동적으로 펼쳐진다.
학교 입구에 걸려있는 여러 개의 현수막.
우거진 나무 숲길 사이로 멀리 시계탑이 보이고, 많은 학생들…….
학생 시위에 관련된 전단을 나눠주는 학생들의 모습도 보이고, 교실…….
복도…….
이곳저곳…….
그 사이로 허둥지둥 이 교실 저 교실을 둘러보며 다니는 소은이가 사람들 틈으로 보인다.
소은 가방에 달랑 달랑 매달려, 반짝거리는 수정 열쇠고리.
씬 2. 과 사무실.
소은, 과 사무실로 들어온다.
사람들이 붐비는 사무실.
그 틈을 비집고 들어와 벽에 걸려 있는 학생들의 사진 명단을 본다.
그 중에 제일 끝에 복학생란에서 동희의 얼굴을 본다.
소은 얼굴에 도는 흥분감과 미소.
조교: 윤소은.
소은: (놀라며) 네?
조교: 선미 병원에 입원했다며?
소은: 네……. 아까 갔다 왔거든요.
조교: 그래? 얼마나 다쳤대?
소은: 다리가 부러졌나 봐요? 깁스를 하고 있거든요. 한……. 일 이주일은 병원에 있어야 한다던데…….
조교: 후……. 자식, 자전거를 타고 아예 곡예를 했구만……. 근데 넌 언제 알고 간 거야……. 조금 전에 다쳤다던데?
소은: 그게……. (귀여운 표정을 지으며) 제가 뒤에 타고 있었거든요.
조교: (할 말이 없다는 듯) 후……. 둘의 우정 부디 오래 가라…….
소은, 멀쑥히 웃고 나가려다
소은: 근데 조교님……. 동희 선배님은 복학하신 건가요?
조교: 그 친구가 뭐, 영문과로 복학했니? 투쟁하러 복귀했지……. 뭐 그리 세상에 불만이 많은지 그러면서도 군대는 어떻게 버텼는지…….지금도 동아리방 어디선가 회의하고 있을 거야.
소은 나간다.
씬 3. 교정/건물/복도/계단.
서정적인 피아노 선율과 함께…….
해맑은 미소의 소은, 뛰는 걸음으로 종종 거리며 돌아다닌다.
가끔씩 반짝거리는 핸드백에 매달린 수정 열쇠고리.
그녀 모습 사이사이로 학교 교정의 모습과 1979년 가을 풍경이 한 폭의 수채화처럼 펼쳐진다.
씬 4. 무선 통신 동아리 방.
방안에는 동아리 학생들이 무엇인가를 보려고 둘러 앉아 있다.
가운데에서는 여학생과 남학생 두 명이 무선기를 조립하고 있다.
시간을 재며 서로 시합을 하고 있고 주위의 학생들…….
편을 갈라 응원하고 있다.
복도 창문으로 소은이가 지나가다가 힐끔 그 안을 쳐다본다.
씬 5. 복도.
소은, 무선 동아리방을 보다간 이내 거기가 아닌 듯 옆방으로 시선을 가져간다.
그리고 그 방 - 학생회 - 안에서 사람들과 얘기를 하는 동희를 발견 하곤 재빨리 고개를 감춘다.
다시, 고개를 살짝 들어 그를 본다.
아, 동희!
소은이 짝사랑하는 선배다.
이번에 복학한다는 얘길 들었다.
그를 훔쳐보는 소은.
흥분된 미소가 감돈다.
씬 6. 무선 동아리 방.
사람들의 응원 속에 둘의 무선기 조립 시합은 계속되고, 여학생이 입가에 미소를 띠며 조립을 거의 완성하고, 남학생은 어디쯤에선가 헤매고 있다.
드디어 여학생이 조립을 완성한다.
시계를 들고 있던 어떤 학생, 스톱워치를 누른다.
학생1: 4분58초!
모두: 우와!
학생1: 마의 5분대를 깨는 감격적인 순간. 여자의 정교한 손끝이 남자의 우월함을 누르는 순간입니다.
학생2: (억울하다는 듯) 잠깐 이거 뭔가 좀 이상해……. 이쪽 트랜지스터 하나가 빠졌어. 이런 걸로 어떻게 조립을 하란 거야. 이거 누가 준거야. 여학생 선배, 패배도 맑고 깨끗한 패배라는 게 있어. 그런 식으로 둘러대는 비굴한 핑계는 자학이다. 응.
학생1: 넌 어떻게 말발로도 지냐? 됐어. 게임은 끝났고, 오늘 막걸리는 15기들이 낸다.
모두: 우와!
학생2, 주머니에서 동전 몇 개를 꺼내어 책상 위에 올려놓으며…….
학생2: 이게 전부니까 알아서 들해! 나 간다.
가방을 챙겨 도망가는 학생2.
학생들, 어이가 없는 듯.
학생2를 쫓아가고, 모두들 나가고 아무도 없는 텅 빈 동아리방에는 무선기만 덩그러니 남아있고, 십 원짜리 동전 한 개가 굴러와 무선기 안으로 들어간다.
영화, 그 무선기를 힘주어 담아낸다.
씬 7. 복도.
소은, 학생회 방을 보다가, 옆방에서 사람들 우르르 나오는 것에 놀라 딴청을 부린다.
무선기 동아리 학생들 소은 앞을 스쳐 지나가고…….
소은, 그들이 다 지나갈 때까지 벽에 달라붙어 움직이지 못한다.
그들이 다 지나가고 몸을 펴려는 순간,
학생회 방에서도 사람들 우르르 나온다.
순간, 황급히 몸을 옆방으로 숨기는 소은.
소은, 바로 앞 테이블에 놓여 있는 덮개가 열려있는 그 무선기.
소은 등 뒤 창가 복도로 학생회 방 사람들 지나간다.
소은, 등 돌린 채 자신 앞의 무선기만 멍하게 보고 있다간…….
모두가 지나간 것을 느끼고 뒤돈다.
그때, 조금은 늦게 나온 동희와 얼굴이 마주친다.
교실 유리창을 사이에 두고 마주친 둘…….
둘의 미묘한 감정 흐르며…….
동희 순간 멈칫 하다가…….
동희: (밖에서 하는 말이라 들리진 않고 입모양만) 혹시……. 소은이?
소은: (복도에서 보이는 모습. 역시 입모양만…….) 혹시…….
소은, 동희를 보고서 너무나 기쁘지만, 애써 겨우 생각해 낸 척 하며…….
둘…….
문으로 간다.
동희: 너 소은이 맞지?
소은: (홍조 띤 모습으로) 네 선배님……. 잠깐 저기 선배님 이름이…….
동희: 녀석, 벌써……. 이름도 까먹었니?
소은: 아, 맞다……. 동희 선배. 아니, 군대 간줄 알았는데. 복학 하셨어요.
동희: 응……. 이번에…….
둘 말없이 어색한 미소…….
잠깐.
동희: 여기는……. 써클?
소은: 네? 아, 네. (엉겁결에 옆의 무선기를 집어 든다.) 그냥……. 취미 삼아…….
동희: "햄" 을 하다니……. 뜻밖인데…….
소은: (둘러대며) 네……. 그냥……. 좋아해서…….
동희: 아하…….
약간 사이.
동희: 그래……. 그럼 나중에 또 보자.
동희, 돌아간다.
소은: 저기…….
동희 멈춘다.
뒤돌아 소은을 본다.
소은: (음……. 할 말이 없는데) 어……. 이름 기억 못한 거 죄송해요. 원체 기억력이 좀…….
동희: 괜찮아. 아 참, (웃으며) 부대로 보내준 편지들 고마웠다. 그렇게 꼬박꼬박 보내준 사람은 너밖에 없거든…….
동희 간다.
어색한 연기가 들통 난 소은…….
하지만 그의 미소에 기분이 좋아지며…….
웃으며 반대편 복도로 가는 소은, 자신도 모르게 무선기를 들고 있다.
복도를 돌아 계단을 내려와 현관 대형 거울 앞에 선다.
자신의 모습을 웃으며 바라본다.
그러다간 시선이 들고 있는 무선기에게로 간다.
표정 확 변한다.
'어머나……. 내 정신 좀 봐'
하며, 다시 뛰어 올라간다.
허나 문이 잠겨 있고, 복도 저 앞으로 수위 아저씨가 열쇠 꾸러미를 들고 가고 있다.
소은: ' 어쩌지 ' 하며……. 한숨.
씬 8. 소은 집 전경/밤.
도심 외곽지역, 가로수 양옆으로 길게 뻗어있는 널찍한 도로.
간간히 시내버스가 지나가고…….
멀리 기찻길이 보인다.
한적한 동네골목.
이파리 넓은 나무들 사이로 드러나는 오래돼 보이는 낡은 이층집.
불 켜진 소은의 방으로 연한 스탠드 불빛이 새어 나온다.
씬 9. 방 안.
소은의 아담한 이 층방.
창밖으로 별이 총총히 떠있는 밤.
창문가에는 아이보리빛 커튼이 앙증맞게 묶여져 있고 방안에는 미니옷장, 촌스러운 나무색 테두리의 거울, 낡은 듯 한 침대지만 테디베어와 함께 예쁘게 꾸며져 있고 벽에는 제임스 딘과 오드리 햅번 포스터가 붙여져 있다.
방 한구석 하다만 듯 한 퀼트 재료와 접다만 종이학 꾸러미도 보인다.
책상 위 어항 속에 청거북이가 눈에 띈다.
소은, 이불을 뒤집어쓰고 동희를 생각한다.
창밖에서 간간히 들려오는 찹쌀떡~ 메밀묵~ 하는 소리.
일기를 쓰듯 메모를 하고…….
펼쳐 놓은 사진첩에서 동희와 찍은 단체 사진도 본다.
그녀 저 뒤편 책상위의 무선기.
창문의 커튼을 젖히며 밤하늘을 바라보는 소은.
총총히 떠있는 별들과 둥글게 떠있는 예쁜 달 !
영화는 다시 그 무선기를 강조하고 그 위로 부드럽게 해가 뜬다.
씬 10. 무선 동아리 방.
남학생과 그 앞의 소은.
소은: 미안합니다. 피치 못하게……. 그냥 구경만 하려던 건데…….
남학생: 후……. 제 입에서 술 냄새 납니까?
소은: (인상이 구겨지다 애써 웃으며) 쬐금요…….
남학생: 그 무선기 때문에 마신 술입니다. 물론 술값도 제가 냈죠. 어차피 고장 나고 옛날거라 부품도 없는 거에요. 가지세요. 그게 옆에 있으면 술 먹을 일이 많아질 거 같아요.
그때, 동희 복도로 지나간다.
소은: 네……. 그럼 고맙습니다.
자리를 떠서 동희 뒤로…….
소은: 선배님…….
동희, 멈춘다.
뒤돌아 소은을 본다.
동희: (들고 있는 무선기를 보고) 열심이네. 그건 소은이 꺼니?
소은: 아……. 네.
소은 옆으로 남학생이 다가서서 동희를 본다.
소은 그 남학생을 힐끔 보다간…….
다시 무선기를 번갈아 어색하게 보며…….
소은: (남학생에게) 이거 제꺼 맞죠?
남학생: 네? 네. 그렇죠.
소은: (어색한 웃음) 제꺼……. 호호……. 재밌어요. 은근히. (꾸벅 인사하곤) 안녕히 계세요.
남학생……. 멍한 얼굴이고…….
동희, 가는 소은을 귀엽게 바라본다.
씬 11. 운동장.
오후의 뜨거운 햇살아래, 캠퍼스 운동장 한켠엔 먼지를 날리며 럭비를 하고 있는 한 무리의 학생들…….
주변에 그들의 웃옷들과 음료수 박스.
멀리서 동희의 럭비 하는 모습을 바라보는 소은.
그녀의 손에 들린 무선기.
동희, 경기 중에 무의식적으로 소은 쪽을 본다.
소은…….
놀란 듯…….
동희 웃으며 손을 흔든다.
소은, 어색하게 미소 지으며 부끄러운 듯 손을 흔들어 준다.
그때, 자기 옆으로 손을 흔들며 지나가는 한 무리의 남자들…….
남자들: (동희에게 손을 흔들어 주며) 너무 힘 빼지마……. 쓰러진다.
소은, 멀쓱 해지며 흔들던 손을 내린다.
씬 12. 소은의 몽타주.
교정에 불어오는 한줄기 바람으로 인해 낙엽들이 떨어지고 떨어지는 낙엽 사이를 거니는 소은.
시계탑 앞에 서서 두 팔을 벌리고 하늘을 바라보는 행복한 소은의 부감.
수업을 받고 있는 강의실.
영문과 수업이 한창이다.
여학생 한명이 영문시 " 애너벨 리 "를 오리지널 발음으로 감정을 넣어 읊고 있고 교수와 학생들은 모두 귀 기울여 듣고 있다.
소은, 강의는 뒤로한 채…….
창밖을 바라보며 혼자 멍하니 웃고 있다.
그 옆 친구 그녀를 묘하게 보고…….
씬 13. 병원.
나른한 오후.
따사로운 햇살이 하얀 커튼 사이로 병실을 비추고 있고, 약간의 바람으로 인해 나풀거리는 하얀 커튼이 눈이 부실정도로 아름답다.
세 명 정도의 환자가 생활할 수 있을 만큼의 공간.
꽃병에 장미꽃이 한 아름 꽂혀 있고 음료수 박스도 보인다.
창가 부근 침대에 선미가 누워서 깁스를 한 다리를 올려놓고 있다.
그 옆에는 소은이도 누워 있다.
침대에 나란히 누워 있는 둘.
웃긴다.
선미: 그래서? 이틀 연속 얘길 나눈 거에 지금 그렇게 감동하고 있는 거야?
소은: 이상해……. 정말 이상 한 거야. (가슴에 손을 갖다 대며) 숨이 턱 막혀 오면서 피가 머리로 다 쏠리는 거 같아. 그 사람이 내 이름 부를 때…….
'소은아……. 소은아…….'
하!
내 이름은 왜 이렇게 이쁘니?
소은아…….
소은아…….
선미: (이상한 목소리로) 소은아……. 침대 하나 비워 둘게 오늘부터 누워 있어라. 너 오늘 보니까 아주 중증이다!
소은: 넌 정말 몰라. 있잖아……. 그 사람 날 볼 때 내 눈동자를 번갈아 본다. 왼쪽 오른쪽, 번갈아 보면서 얘길 해. 코나 입이나 바닥이나……. 다른 곳을 보며 얘길 할 수도 있는데 항상 똑같애. 내 눈……. 왼쪽……. 오른쪽…….
선미: 그럼 넌 어딜 보면서 얘길 하는데?
소은: 나? 아, 기억이 안나. 내가 어딜 보고 얘길 했지? 몰라……. 아무튼 심장이 터질 거 같고……. 몸 어느 한 근육이 움찔거리면서 신경이 다 죽은 거 같은 기분이 들어. 이런 게 사랑이니?
선미: 나 그 기분 알아……. 근데 그거 사랑은 아닌 거 같아.
소은: 너도 그런 기분 느껴본 적 있어?
선미: (고개 끄덕) 응……. 다리 부러질 때 딱 그런 기분이었어. 심장이 터지고 몸 어느 한 근육이 움찔거리는 거…….
소은: 뭐?
선미: 엎어진 나한테 니가 와서 그랬지. '어머 선미야 괜찮아' 그때 너 내 왼쪽 눈과 오른쪽 눈을 번갈아 가며 말했어……. 그럼? 어머 어떡해? 나 너 사랑 하나봐…….
선미 불편한 몸을 돌려 소은을 껴안으며 장난친다.
둘…….
침대에서 엎치락뒤치락 껴안으며 웃는다.
맞은편의 어떤 아줌마 환자…….
세상의 종말이 왔다는 듯 혐오스러운 눈으로 그 두 여자를 바라본다.
씬 14. 집에 가는 버스 안.
버스 안 라디오에선 잔잔한 선율이 흐르고, 소은, 한손에는 책을 들고 있지만 책은 보지 않고, 창밖의 청아한 풍경 혹은 햇살에 넋이 나가 있다.
소은, 앞의 좌석에 앉은 누군가 일어나 내리고 자리가 비었는데도 멍한 소은…….
창밖만 보고 옆의 어떤 아줌마, 소은의 눈치를 보다간 슬쩍 들어와 앉는다.
라디오 멘트: 수 톰슨의 "새드 무비" 들으셨습니다. 오늘밤 개기월식이 있다고 하는데요.
달이 지구의 그림자에 가려 보이지 않는 현상이죠. 월식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달이 지구의 본 그림자와 1도 이내의 적경 및 적위차를 가져야 한다는군요. 날씨가 좋은날엔 어디서든지 볼 수가 있다고 하니까……. 요즘처럼 화창한 날씨면 고개만 들어도 볼 수 있을 것 같군요!
오늘 밤, 그 멋진 광경 놓치지 마시기 바라구요, 이번에 들으실 곡은……. " ONE SUMMER NIGHT "
씬 15. 소은의 집.
거실.
텔레비전으로 나오는 1979 년도의 화면…….
뉴스가 보여지고, 소은의 식구 - 아빠, 엄마 - 텔레비전을 보며 다과를 하는데…….
소은 멍하게 딴 생각에 빠진 얼굴.
소은의 아빠, 그런 소은의 얼굴을 힐끔 보더니 슬쩍 소은에게.
아빠: 오늘, 개기월식이 있다는데……. 옥상 올라가서 우리 그거나 볼까?
소은: …….
아빠: 선미가 병원에 있다고?
소은: …….
멍하니 대답 없이.
엄마, 소은을 보더니 다시 아빠를 보곤 고개를 갸우뚱…….
씬 16. 소은의 방.
무선기가 책상위에 놓여 있고,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감미로운 음악.
소은 침대에 앉아 손거울로 자신의 얼굴을 본다.
그리고 입술을 움직이며 뭔가 흥얼거린다.
그때, 라디오의 잡음이 커지며 99년의 음악인 테크노댄스가 79년의 음악과 간간히 섞여 들려오고, 창문 밖 바람소리가 커지며, 갑자기 들려오는 개 짖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소은.
어느덧 온 동네 개들이 한꺼번에 짖어대기 시작하고 그제서야 생각난 듯 부랴부랴 창가로 가는 소은.
경이로운 표정으로 개기월식(C. G)을 지켜본다.
신비감이 도는 푸르스름한 달!
씬 17. 시계탑.
달이 가리워지면 시계탑의 초침이 멈춘다.
세상 모든 게 멈춰지고, 바람만이 낙엽들을 흩날리는 고요함.
날리던 바람과 낙엽들도 멈추고, 지나던 학생들도 모두 멈춘 상태다.
서서히 달빛이 보이고, 달빛에 닿는 모든 사물들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다시 움직이는 시계초침.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갈 길을 가는 사람들.
씬 18. 소은의 방.
개기월식에 흠뻑 취해있는 소은.
순간, 지지직- 노이즈와 함께.
소은의 무선기에 교신이 온다.
인: (무선음) CALLING CQ CQ CQ 여기는 DS1AVO . 텔타 시에러 원 알파 빅토르 오스카 CALL 응답 바랍니다. CALLING CQ CQ CQ 여기는 DS1AVO. 델타 시에러 원 알파 빅토르 오스카 CALL 응답 바랍니다.
당황한 소은, 소리 나는 쪽을 보면 창가 옆 책상에 놓여있는 무선기에서는 계속해서 인의 무선음이 들려오고…….
소은, 망설이다가 무선기로 다가가 앉는다.
무선 사용법을 몰라 헤매다가 겨우 응답한다.
소은: (무선기에 어정쩡하게) 네, 여, 여보세요?
인: (무선음) (당황한 목소리) 여보세요……. 라뇨?
그때, 울리는 전화벨 소리.
소은 놀라서 무선기를 확 끊어 버린다.
울리는 전화벨, 황급히 받는 소은.
전화.
선미다.
선미와의 통화.
소은: 어, 선미야? 깜짝 놀랬어……. 아니……. 그냥. 뭘 좀 하다가. 근데, 어디니? 아, 그렇지. 병원이지. 뭐? 미쳤어? 나오면 어떻게 해? 얘는 개기월식이 뭐 그리 대단하니? 내일? 그래 들를게……. 여보세요?
전화가 끊겼다.
다시 몸을 돌려 무선기를 본다.
이리저리…….
송신기에 입을 대고 입술만 움직여 본다.
씬 19. 소은의 학교.
맑게 내려 쬐는 햇살.
미루나무 가로수가 곧게 뻗어 있는 교정.
학생들의 모습에서 활기가 넘쳐 보이고…….
스산한 가을바람을 등지고 서서 음료수를 마시거나, 책을 보는 학생들의 모습.
시계탑 앞 벤치에 앉아 떠드는 여학생들의 모습에서 평온한 아름다움이 보인다.
그 와중에 느껴지는 1979년의 대학 캠퍼스.
씬 20. 강의실.
수업을 받고 있는 소은.
교실 뒤쪽으로 동희도 보인다.
소은 신경이 계속 동희 쪽으로 간다.
손에 든 작은 손거울.
그 거울의 반사로 들어온 동희의 얼굴.
소은 계속 거울을 통해 동희를 본다.
허나, 햇빛이 거울에 반사되고 다시 뒤쪽 큰 거울에 반사되어 교수의 얼굴에 하얀 반사가 비춰지는 것을 알지 못한 채…….
교수 강의 중에 눈부셔 하며 살짝 피하자 칠판에 떨어지는 빛.
교수, 어디서 빛이 오는지 둘러보다 소은을 발견한다.
교수 조용히 옆에 놓인 양철 컵 받침대를(아니면 자신의 손목시계를) 들어 그 빛을 다시 소은의 얼굴에 되 반사시킨다.
소은 갑자기 눈부시며 정신 차린다.
학생들 킥킥대며 웃는다.
동희 살짝 소은을 바라본다.
시간 경과.
수업이 끝나고 학생들 각자 정리하며 일어나는데…….
동희 소은에게 다가온다.
동희: 윤소은…….
소은: (놀라…….) 네?
동희: 오늘 바쁘니?
소은: 네? 아뇨……. 그냥.
동희: 지금 어디 가나? 괜찮으면 나랑 연극 볼까?
소은: 연극이요?
동희: 응……. 인문대 극회 공연인데……. 고등학교 동창 놈이 연출했거든……. 하도 성화래서 얼굴 도장이나 찍고 와야 되는데……. 난 그런데 익숙지가 않아. 너 연극 좋아하면 같이 가자구.
소은: (웃으며 단번에) 네……. 저 좋아해요. (그러다간……. 다시……. 선뜻 대답을 했다는 생각에) 근데……. 작품이 어떤 거죠?
동희: 어……. 글쎄……. 제목이 뭐더라……. 꽤 긴데…….가서 보면 알겠지. 아무튼 이따가 7시 공연인데 괜찮겠어.
소은: 그래요……. 그러면…….
아차!
선미랑 약속!
소은 얼굴 굳어지고 난처한 표정으로 변하며,
소은: 어머……. 근데……. 저기……. 선배님……. 제가 깜박 했는데 어쩌죠? 오늘 제가 약속이 있었네요.
동희: 아……. 그래? 그래, 할 수 없지……. 갑자기 얘기한 게 잘못이지……. 후, 아무튼 여자랑 데이트 한번 하는 것도 작전 잘 짜고 해야지……. 갑자기 이러는 건 확률이 없구나. 하긴 순발력은 럭비 할 때나 필요한 거지……. 안 통하네.
소은, 겸연쩍은 미소.
씬 21. 선미의 병원.
선미, 환자복을 벗고 소은이가 가져온 옷을 갈아입고 있다.
소은 이는 동희와의 약속을 거절해서인지……. 속상한 얼굴.
선미: 얼굴이 왜 그래? 뭐 안 좋은 일이라도 있어?
소은: 아니야……. 근데……. 어딜 가겠다고 이래? 나중에 내가 혼나는 거 아냐?
선미: 아마……. 그럴 거야. 우리 부모님한테 들키면 니가 꼬셨다고 그럴 거 거든…….
소은: (피식) 기집애……. 정말로 어딜가려구? 그 다리로?
선미: 나랑 고등학교 동창이라는 미윤이 있잖아. 국문과. 걔네, 극회에서 무슨 연극을 공연하는데 자기가 주연이래. 꼭 가준다고 했는데……. 어쩔 수 없잖아.
소은, 깜짝 놀란다.
혹시…….
소은: 그래? 그 공연 제목이 뭔데?
선미: 제목? 글쎄……. 뭐더라……. 아무튼 무진장 긴 거였는데…….
소은, 얼굴에 살짝 미소.
씬 22. 공연장 입구.
입구에 정말로 긴 제목의 현수막이 걸려 있다.
제목- 우리의 인생은 굴곡이 많으니 언제나 그렇듯 박수칠 때 떠나자.
씬 23. 공연장 안.
소은, 한손에 목발을 들고 다른 한손으로는 선미를 부축하며 들어온다.
뻥튀기 봉지와 사이다를 들고 있는 선미.
소은, 자리를 둘러보며 동희를 찾아본다.
아, 저기…….
동희가 있다.
선미를 부축해 그의 옆으로 가서 앉는다.
동희 놀라서 소은을 보고…….
소은 씨익 웃고 슬쩍 옆의 선미도 손으로 인사시켜 준다.
동희 어색하게 인사를 하고 선미, 동희와 소은에게 뻥튀기를 건네준다.
공연보다도 뻥튀기 먹는 거에 더 열중하는 선미의 모습.
동희, 귀여운 듯 바라보고, 소은, 조금은 민망해 하고, 시간은 흐르고 연극은 공연되어지고 있고 소은 연극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옆자리 동희만 보고……. 동희가 웃으면 따라 웃고…….
동희가 심각해지면 같이 심각해진다.
씬 24. 병원 입구.
병원 입구 쪽으로 환자들의 모습 보이고, 분주히 움직이는 의사와 간호사들의 모습.
선미가 들어가려 하고…….
그 앞에 소은…….
동희도 있다.
소은: 괜찮겠어? 병실까지 가줄게…….
선미: 됐어, 살살 움직이는 것도 괜찮고…….가세요. 오늘 만나서 반가웠어요.
동희: 네. 정말로 괜찮겠어요? 계단도 올라가야 한다며?
선미: 괜찮아요.
뒤뚱 거리며 조금은 우스꽝스럽게 병원 안으로 들어가는 선미.
선미를 바라보는 동희와 소은.
씬 25. 소은의 집/부근 다리.
한옥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고, 마을과 마을 사이로 조그마한 개천이 보이고, 유유히 흐르는 물줄기, 오래된 듯 한 다리.
다리 중간에 있는 가로등 불빛이 블루 톤을 띄우며 빛을 발하고 있고, 딸랑거리며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는 메밀묵 아저씨.
다리 위를 걷고 있는 소은과 동희.
동희: 들어가면 곧장 자?
소은: 아니 곧장은 아니고 뭐 이것저것 씻고 책도 보고.
동희: 무선도 하고?
소은: 네? 아……. 네……. 가끔…….
동희: 언제 시간 되면 나도 가르쳐 주렴.
소은: 네? 아……. 그러죠……. 시간 되면…….
씬 26. 소은 방.
소은 동희를 생각하다가…….
들려오는 무선기의 신호음.
보여지는 그림.
C. G/달 뒤로 보여지는 지구.
서서히 움직이며 포개지고 그 그림자 자연스레 소은의 방 무선기의 불빛과 디졸브 된다.
무선기 앞의 소은.
소은: 여……. 여보세요?
인(무선음): CALL에 응답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당국 소개말씀 드리겠습니다.
QTH는 서울시 강남구 청담 동에 있습니다.
QTA는 DS1AVO입니다.
마이크 잡고 있는 본OP(국장)는 신라 대에 다니고 있습니다.
저의 이름은……. 지우개할 때 지, 인간성할 때 인. 지인입니다.
RST는 59로 깨끗하게 들립니다.
마이크 넘깁니다.
여기는 DS1AVO.
소은, 계속 어쩔 줄 몰라하며…….
소은: 여……. 여보세요?
인(무선음): 컨텍(CANTACT)되었습니다. 혹시 '햄' 초보자이십니까? 아. 아니……. 그러니까 제 말은 교신 처음 하시냐고요?
소은: 네…….
인(무선음): 그렇군요. 처음에는 다 그렇죠 뭐. 근데 자꾸 하다 보면 PC통신보다 더 쉬워요.
소은, 손톱을 물어뜯으며 PC가 뭐지?
하는 표정.
인(무선음): 전 지, 인, 이라고 합니다. 서로 인사부터 하죠.
소은: 전지인씨……. 제 이름은 윤소은이예요.
인(무선음): (웃음소리) 전 지인이 아니고 지인입니다. 인, 외자거든요.
소은: 어머, 미안해요. 근데, 인씨는 이거 하신지 꽤 오래 되셨나 봐요.
인(무선음): (으시대며) 몇 년밖에 안됐어요. 소은씨도 금방 익숙해 질 겁니다. 생각보다 재밌거든요.
소은: 안 그래도 배워야 되는데……. 가르쳐주실 수 있으세요?
인(무선음): (반가워하며) 물론이죠. 처음 햄 시작할 때 보던 ' 아마추어 무선 ' 책이 있는데……. 책을 먼저 드릴게요. 전 신라대 다니는데 그쪽도 학생이세요?
소은 : (놀라며) 어머머……. 저도 신라대 영문과에 다니는데…….
인(무선음): 와하……. 같은 학교 사람을 만나다니 반갑습니다. 그런데 왜 동아리에 안 들어 오셨죠?
소은: 네? 아네……. 그게 사정이 있어서…….
인(무선음): 혼자서 무선을 하시겠다? 그것도 영문과 여학생이? 재미있군요.
소은: …….
인(무선음): 잘 됐네요. 그럼 내일 학교에서 만나서 드리면 되겠네요.
소은 : (무선기에 약간 꺼리는 목소리로) 내일이요?
인(무선음): 너무 급했나요. 제가?
소은: (망설이다가) 아니요……. 그런 게 아니고……. 너무 고마워서……. 그래요……. 그럼…….
인(무선음): 그럼, 어디서 볼까요? 학교 시계탑에서 어때요?
본관 앞에 있는 시계탑.
소은: 아……. 새로 만드는…….
인(무선음): 네?
소은: 좋아요. 그럼 시계탑에서 2시에 만나요.
신기한 듯 무선기를 들었다 놓았다 해보는 소은.
꽂혀있지 않는 플러그는 무선기에 매달려 달랑거린다.
씬 27. 학교 시계탑.
공사 중인 포장이 덮어 씌워진 시계탑.
그 앞에서 소은, 기다린다.
그녀의 시계 두 시를 다가가다간 이내 넘어간다.
시간은 흘러가고 시계탑 앞을 학생회 간부들이 전단을 뿌리며 지나간다.
소은의 기다림.
조금씩 일그러지는 소은의 표정.
갑자기 들려오는 학생들의 구호소리(독재타도/호헌철폐)와 최루탄 소리가 뒤섞여 들린다.
그 소리 점점 가까워 오고…….
점점 초조해지는 소은은 주변을 두리번거린다.
시계탑 주변으로 학생들이 손수건으로 얼굴을 막으며 이리저리 뛰어 다니고…….
카메라 그녀를 담고 공사 중인 시계탑을 천천히 돈다.
최루탄 가스에 소은도 눈물을 흘린다.
얼굴을 타고 내려와 바닥에 떨어지는 소은의 눈물방울.
메마른 바닥에 떨어지는 소은의 눈물방울이 어느덧 두 방울 새방울이 되어지다가.
어느 새인가…….
공사커버가 벗겨져 나가 있고 주위의 소음이 바뀌고 장대비가 내린다.
다시 소은이 있던 자리로 돌아오면 그 자리엔 1999년의 인이 서있다.
우산도 없이 비를 쫄딱 맞으며 그의 머리 위로는 20년 전에 세워진 시계탑이 서있고 그 시계 4시를 가리킨다.
흠뻑 젖어있는 인의 머리위로 하얀 우산 한 개가 씌워진다.
드러나는 얼굴…….
현지의 모습.
우산을 씌워주며.
현지: 수업도 안 들어오고 여기서 뭐하냐?
인: (지칠 대로 지쳐 맥없이) 저 뒤의 건물이 본관 맞냐?
현지: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인: 지금 저 뒤의 건물이 본관 맞냐고?
현지: 당연하지.
인: 그리고 이게 시계탑 맞지?
현지: 너 어디 아프니? 이게 시계탑이 아니면?
인: (체념한 듯) 알았다 가라.
현지: 헛웃음.
자리를 옮기려 할 때…….
인: 하나만 더 묻자……. 우리학교가 신라대학 맞지?
우산을 쓰고 정문 쪽을 향해 걸어가는 뒷모습을 멀리서 바라보고 있는 수위.
씬 28. 이클립스.
빠알간 우체통이 보이는 " 이클립스" 앞.
창밖으로 쓸쓸히 내리는 가을비.
우산 속 다정한 연인들.
카페 안으로 들어서면, 젖은 인과 현지, 뜨거운 차를 마시고 있다.
현지: (한심한 듯 인을 보며) 너 솔직히 말해봐. 나 기다린 거지? 이런 몰골로 나 기다리면서 나한테 뭔가 동정을 얻으며 뭔가 드라마틱하게 되고 싶은 수작이지?
인: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 그래……. 사실 너를 기다린 거야. 널 만나려고 이 학교에 들어 온 거구……. 너랑 어떻게 해볼려고 태어난 거야. 우리 집 가훈이 널 꼬시자고……. 내 등짝에 니 이름을 문신으로 새겨 놨다. 됐냐?
현지: 그렇잖아……. 니가 무슨 본적도 없는 여자를 오는 비 다 맞으며 두 시간을 넘게 기다린다는 게…….
인: 본적이 없잖아……. 그러니까……. 기다린다. 내가 본적이 있는 너라면 난 기다리지 않아. 알았어?
현지: …….
인: …….
현지: 미친놈.
인: 뭐?
현지, 핸드폰이 울린다.
현지: 네……. (현지……. 수화기 소리를 듣더니……. 살짝 자리를 뜬다…….)
인: 춥다.
현지: (다시 돌아와선) 덜덜 떨지 말고 들어가서 약 먹고 주무슈. 먼저 갈게.
인: 집에?
현지: 너무 많은 거 알려고 하지 마.
인: 왜 다쳐?
현지: 후후……. 응, 많이 다쳐!
현지, 휙 나간다.
씬 29. 인의 방.
불 꺼진 인의 오피스텔.
어둠속에서 들리는 문 여는 소리.
불이 켜지고, 거실에 있는 턴테이블의 버튼을 누르는 인의 손.
잔잔한 락음악이 방안을 감싸고 드러나는 인의 원룸은 전체적으로 블루톤 이다.
깔끔하고 심플하게 꾸며진 공간.
한켠에 러닝머신, 무채색의 오디오, 대형 TV, 작은 수족관, 매킨토시, 책상 위 수북이 쌓인 디스켓들.
벽면에 붙여져 있는 광고 포스터들.
응접실 테이블 위에는 크리스털 유리컵과 몇 알의 아스피린.
화이트 버디 컬을 활짝 젖히는 여는 인.
비 내리는 창밖으로 보여지는 그림 -올림픽대로를 질주하는 여러 대의 자동차 불빛과, 도심의 불빛에 흐물거리는 한강이 보인다.
아!
아름답다.
그런데 인, 춥 허나 순간 눈을 지그시 감는다.
아, 너무 춥다.
다시 응접실로 가서 커피메이커에 전원을 키고는 수족관의 물고기에게 핑퐁을 알알이 떨어뜨린다.
씬 30. 소은의 방.
무선기 앞에서 인과 교신하는 소은.
소은, 기분 나쁜걸 애써 참는 듯한 얼굴로…….
소은: (무선기에) 오늘 왜 안 나오셨어요?
씬 31. 인의 방.
인, 다시 이불을 둘러 싸매고 있다.
한손에 핸드퍼펫을 끼고 움직이는 인.
인: (한숨……. 화를 억누르며) 저기 전 이해 할 수 있어요. 혹 대학생이 아니라도 어……. 뭐 우리 학교 정도야 그냥 운 좋으면 들어오니까……. 콤플렉스 같은 거 안가지셔도 되구요……. 아니면 외모에 자신이 없어서 그러셨더라도 이해할 수 있어요. 먼발치에서 저를 지켜보셨겠죠. 물론 저의 외모가 좀 된다는 건 알아요……. 그래서 자신이 없으셨다면 그것도 이해 할 수 있어요……. 그치만…….
소은(무선음): 무슨 말이에요? 먼지 날리는 공사현장 앞에서 두 시간을 넘게 기다렸는데…….
인: (화를 누르며) 후……. 먼지요? 그러니까 비 오는 날 먼지 나게 기다리셨다?
소은(무선음): 비라뇨? 비가 왔단 말예요? 무슨 말씀이세요? 화창하게 맑은데…….
인: (도저히 못 참겠다.) 그래요? 혹시 신라 대학이 아니고 고구려 대학이나 당나라 대학에서 기다린 거 아니에요? (무선기를 가지고 창가로 가서 창문을 열어젖힌다.) 자 들리죠? 이 장마비 소리요……. 아니 일주일이 넘게 비가 오고 있는데 내가 지금 돌았단 말예요?
씬 32. 1979년 소은의 방.
무선기에서 들리는 물소리.
소은…….
멍한 얼굴…….
그러다간…….
소은 : (화를 내며) 이봐요. 장난 그만하고 수도꼭지 잠그세요.
소은 무선기를 끊어버린다.
씬 33. 인의 방.
인, 끊어진 무선기를 멍하니 바라보며 기가 막혀한다.
그러다가 이내 표정 변한다.
플러그가 빠진걸.
확인하고…….
배터리를 확인하는데…….
아!
비어있다.
황당한 표정의 인…….
책상위에 있던 아스피린 한 알을 삼키는 인.
씬 34. 인의 집/전경/작은 불이 켜진 인의 방/ 창문/밤.
시간은 경과되고 인…….
스탠드 불빛에 무선기를 보고 있다.
뚫어져라…….
보고 있다…….
그러다간…….
천천히 플러그를 뺀다.
배터리가 없는 것도 확인하고…….
손을 천천히 움직여 신호를 보낸다.
씬 35. 소은의 방.
무선음 소리에, 자던 소은 눈을 뜬다.
무선기를 본다.
받을까 말까 망설이다,
이불로 무선기를 휙 덮어 버린다.
씬 36. 강의실 복도.
비가 그친…….
장마가 끝난 1999년 인의 강의실 복도.
인과 친구가 걸어간다.
친구: 야. 말도 안 되는 소리하지 마……. 군인도 밥 안주면 전쟁 안 해. 근데 전기도 없는 무선기로 뭘 했다구?
인: 그치? 말 안 되는 얘기지? 그럼 기계가 이상한 걸까?
친구: 아니……. 니가 이상 한 거야. 인마!
현지 나타난다.
현지: 뭐야?
친구: 이 자식 좀 이상해졌어. 머리에 벼락이라도 맞은 거 같아.
현지: 그럼 제정신으로 돌아 왔게? 얘 원래 좀 이상하잖아.
인: 후……. 그래 차라리 벼락이라도 좀 맞고 싶다.
씬 37. 작업실/밤.
벽면에 덕지덕지 붙어있는 광고 카피와 포스터들이 보이고, 촉수가 낮은 형광등 불빛 아래의 인…….
무선기를 이리저리 분해하고 있다.
현지 옆에서 지켜보고 있다.
그때 후레쉬 불빛이 보이고, 열쇠 꾸러미를 들고, 수위가 들어온다.
수위: 뭐해?
인: 그냥 작업 좀…….
수위 그 무선기를 본다.
수위: 이거 하나 고치는데……. 왜 남녀가 같이 야심한 밤에 있어?
인: 얘 좀 데려 가세요. 귀찮게 자꾸 추근덕거려요.
현지: 미친놈……. 아니에요. 아저씨. 그냥 저는 학우가 어려움을 겪고 있길래 함께…….
수위: 여자가 왜 남자한테 추근덕거려. 아가씬 어여 가. 보아하니 여자가 있을 때가 아냐.
현지: 어머 아저씨 여기가 무슨 남자 기숙사에요?
인: 현지 학우……. 가라. 솔직히 정신 산란해서 나사 구멍 하나도 제대로 못 맞추겠다.
현지 수위와 나간다.
수위: (나가며) 그 기계는 그냥 통화만 되면 되는 거 아냐? 소리만 듣고 할 말만 하는 거…….
간다.
인: 그렇지.
씬 38. 소은의 방.
울리는 무선음.
빈방이다.
씬 39. 수위실 앞.
현지…….
핸드폰 통화중이다.
현지: 여보세요……. 어, 언니……. 나 오늘 좀 안 좋아……. 몸이 좀……. 그래, 난 한 달에 두 번 한다.
사이
현지: 아냐, 미안해. 그래.
전화, 끊는다.
수위 현지를 살짝 본다.
수위와 현지.
둘의 대화.
현지: 아저씨……. 잡아야 하는 것이 안 잡히면 그건 없는 것일까요? 아니면 잡는 방법이 따로 있을까요?
수위: 후후후……. 대학에선 왜 그런 걸 안 가르치지?
현지: 아하! 그러게 말예요.
씬 40. 작업실.
인…….
열심히 무선을 시도하고 있다.
그 때, 받는 소리.
소은이다.
인: 한참을 보냈어요…….
소은(무선음): 방금 들어왔어요.
인: 아……. 네. 늦게 들어오셨군요.
소은(무선음): 근데 어쩐 일이죠……. 우린 별로 할 말이 없을 것 같은데…….
인: 아뇨……. 그냥 어제 일도 사과드리고……. 제가 너무……. 무례 했습니다.
소은(무선음): 지금은 비가 안 오나 보죠? 왜 장마가 끝났나요?
인: 네……. 오늘로…….
씬 41. 수위실.
현지와 수위.
소주에 오징어를 놓고 얘기 나눈다.
현지의 시선 작업실 불빛으로 가있다.
현지, 오징어를 입에 물고…….
현지: 질겨요……. 오징어가…….
수위: 오래 씹으니까 좋잖아…….
현지: (수위 한번보고 한숨 한번) 저도 한잔 주실래요.
술 한 잔 받고…….
현지: 근데 근무 시간에 이렇게 술을 마셔도 되는 거예요?
수위: 왜 잘릴 짓이라고?
현지: 하긴……. 안 걸리면 되죠……. 뭐.
수위: 그래……. 아마 안 걸릴 거야. 술 아니라 뭔 짓을 하더라도……. (혼잣말로) 이십년이나 이 짓거릴 하고 그것도 모자라 여기서 죽는 인생이라면……. 그래……. 이놈의 오징어보다 도 더 질겨…….
현지: (무슨 말인지도 모르는 듯) 아니에요……. 이 오징어가 더 질겨요. 후……. (씹던 다리를 보고) 아직도 그대로야. 정말 질겨!
오징어를 씹으면서도 현지의 시선은 인이 있는 작업실 쪽을 향해있다.
씬 42. 작업실.
달빛창가에 보여지는 인의 모습.
인: 그럼 소은 씨는 몇 학년이죠?
소은(무선음): 3학년이에요.
인: 와! 그럼 선배님이시네요. 전 2학년이거든요. 가만……. 그럼 제가 누나라고 불러야 되나요?
소은(무선음): 어머 그럴 필요 있나요? 어차피 같은 과도 아니고 솔직히 댁 같은 동생은 싫어요. 그리고 전 학교를 일찍 들어가서 아마 동갑일 꺼 에요. 학번만 77학번이구요.
인: 아 그래요? (순간) 잠깐 몇 학번요?
소은(무선음): 네……. 왜요?
인: 아니요. 그냥 제가 잘못 들었나. 해서요?
소은(무선음): 77학번요……. 이번엔 제대로 잘 들으셨죠?
인: 아니요. 이번에도 잘못 들었습니다. 잠깐만 그러니까……. 우리가 흔히 77학번이라면 1977년에 입학한걸. 말하나요?
소은(무선음): 우리나라에선 원래 1977년에 입학한 사람들을 77학번이라고 해요?
인: 만약 농담이시라면 매우 독한 농담을 즐겨 하시는군요?
소은(무선음): 무슨 말이죠?
인: 어……. 무슨 말이냐 하면……. 음……. 소은 씨의 목소리가 너무 태연하다는 거죠……. 장난기 하나 없이 그런 말을 하시니까……. 어. 왜냐면 우린 동갑이고 같은 대학을 다니고 있고……. 그런데 전 98학번이거든요. 그러니까 1998년에 입학한……. 98학번이요.
씬 43. 소은의 방.
소은 멍하다.
소은: (기가 막힌 듯) 그러니까……. 1998년에 학교를 입학해서……. 지금 1999년 학교를 다닌다구요?
인(무선음): 아마……. 그럴걸요.
소은 : (할 말을 잃은 듯……. 사이) 누군가의 예언대로라면 멸망한 지구 위에서 무선을 하시는군요.
소은 끊는다.
씬 44. 수위실 앞.
수위와 현지가 앉아 있고…….
인이 멍하게 걸어온다.
한손에는 무선기가 들려있다.
현지 일어난다.
현지: 다 고쳤어?
인: (멍하게) 너 몇 학번이지?
현지: (인을 이상하게 보며) 뭐? 야, 너, 왜 그래?
인: (말을 잃었다는 듯) 난 갈 건데……. 너도 갈거니?
현지: 뭐?
인, 멍하게 걸어간다.
현지 쫓아간다.
둘의 가는 모습을 수위 엷은 미소로 바라본다.
씬 45. 버스정류장.
둘…….
서있다.
막차를 기다리는 듯…….
도시는 어둡고 조용…….
현지: 그러니까……. 77학번 선배하고 무선을 한 거야? 너 좀 변태다. 아니, 그 여자가 좀 이상한 건가?
인: 아니 77학번이라는데 77학번이 아니라니까……. 지금 학교를 다니고 있고 영문과3학년이래. 그런데 미친 여자 같지는 않거든……. 장난치는 거 같지도 않고…….
현지: 그럼 간단하네……. 그 여자는 1977년에 우리 학교에 입학한 77학번 선배고, 지금 3학년에 재학 중인 거야……. 어……. 근데……. 단지, 그래. 휴학을 좀 자주 했네……. 한 스무 번……. 가만 혹시 군대 갔다 온건 아닐까……. 좀 오래……. 아니면……. 결혼하고 애 낳고 키우느라 복학을 좀 늦게…….
인 : (짜증난다.) 야, 너 왜 여깄니? 니 네 집 가는 버스 여기 없다.
현지: 야, 막차 끊겼어. 어차피 너나 나나 택시 타야 돼. 가는 길에 내려 줄게.
순간…….
버스가 휙 오더니 카메라와 둘, 사이를 막는다.
그리곤 다시 출발…….
현지만 혼자 남는다.
현지…….
썰렁…….
씬 46. 버스 안.
버스 창문에 기댄 인…….
아직도 생각이 잘 정리가 되지 않는다.
씬 47. 소은의 방.
소은, 책상에 앉아 일기장을 편다.
[이상한 사람 출현……. 미친 사람……. 불량배? 사기꾼? 아니면…….……. 미래에 사는 사람?]
어항 속에서 청거북이를 꺼내놓고 장난치듯 청거북이를 뒤집는다.
버둥대는 청거북이.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는 소은.
씬 48. 소은의 학교 식당.
소은 친구들 몇 명과 밥을 먹고 있다.
그때, 동희 식판을 들고 그 자리로 온다.
소은 놀라면서도 기분 좋다.
식사 중…….
소은 뭔가 얘길 꺼낼게 없나?
소은: 선배님은 졸업하면 뭐 하실 거예요?
동희: 밥 먹으면서 하는 얘기치고는 참 암담한 얘기구나……. 글쎄……. 그냥 평범한 직장인……. 아니면…….
소은: 정치?
동희: ?
소은: 재야 정치가나……. 청년 국회의원?
동희: 후후……. 학생운동 한다고……. 다 그렇게 되나?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나에 대한 고민 정도지……. 이게 뭐 별건가……. 글쎄 또 모르지? 세기말에 세상이 망하기 전까지 흥청망청 놀지도 모르고…….
소은: 안 망한대요.
동희: 뭐?
소은: 1999년에 세상이 망한다고들 그러잖아요……. 근데 안 망한대요…….
동희: 넌 그걸 어떻게 아니?
소은: 어……. 그게……. 좋잖아요. 망하지 않고 오래오래 행복하게 사는 게…….
동희 : (썰렁하다.) (소은의 반찬을 가리키며) 그거 안 좋아하니? 내가 먹을까?
동희, 소은의 반찬 중 하나를 덜어 먹는다.
씬 49. 인의 학교 도서실.
인, 1979년도 연감을 펴고 무엇인가를 복사하고 있다.
오늘 날짜를 확인하고 그 날짜 주변의 기록들을 복사하는 인.
그러다간…….
이내, 복사 가지고는 안 되겠다고 생각.
책을 열람한다.
그때, 현지…….
들어온다.
현지: 야, 여기 있었냐? 이러니 못 찾지……. 세상에 니가 여기 있으리라고 누군들 생각을 했겠냐?
인: 뭐야? 왜?
현지: 편지야……. 미국에서 온 거다. 부모님한테서…….
인: 내 편지를 왜 네가 가지고 와.
현지: 야……. 내가 안 가지고 오면 네가 언제 생전 사서함 열어 보기나 해? 고맙다는 소린 못하고…….
인: 알았다. 근데, 책 빌리려면 어떻게 해야 되니? 한 번도 빌려본 적이 없어놔서…….
현지: (한숨) 네가 그렇지……. 여기 있어봐.
현지 책을 들고 창구로 간다.
도서실 사서에게.
현지: 저기 말씀 좀 묻겠는데요……. 책을 좀 빌리려고 하는데요……. 어떤 절차를 밟아야 할까요?
사서 : (희한한 듯) 열람표 쓰시구요……. 학생증 주시구요…….
현지: 학생증요? 호호호……. 요즘 촌시럽게 누가 학생증 가지고 다니나……. 저기……. 주민등록증이나 운전면허증은 안될까요?
사서의 얼굴?
씬 50. 인의 학교 캠퍼스.
인, 벤치에 앉아서 연감을 뒤적여 보고 있다.
현지, 옆에서 자판기 커피를 홀짝대며 인을 보고 있다.
인, 현지가 신경 쓰인다.
인: 야, 넌 수업 없냐?
현지: 내 시간표랑 니 시간표랑 똑같애. 니가 없으면 나도 없는 거야. 새삼스레……. 새끼…….
인: 그렇다고 왜 여기서 자꾸 집적대냐?
현지: 미친 자식……. 집적? 내가 무슨 인권 운동가냐? 너 같은 놈한테 집적대 주게? 편지 안 봐……. 엄마한테 온 거?
인: 미치겠네……. 우리 엄마한테 온 편지를 니가 왜 신경 써?
인, 연감을 계속 보려다가 편지를 현지에게 툭 던진다.
인: 봐라……. 네가. 별 내용 있겠냐?
현지: 진짜 내가 먼저 읽어봐?
현지, 편지를 뜯어서 읽어보려 한다.
현지: (보자마자) 어머…….
인: (놀라서) 왜 그래?
현지: 어머님 글씨 죽여주신다……. 왜 이렇게 이쁘게 쓰셔? 요즘 젊은 애들 글씨 같애……. 이쁘고 세련되고…….
인: 그냥 읽어라. 어려운 단어나 한문 나오면 물어보고…….
현지와 인…….
각 놓인 글들을 읽어본다.
둘의 스케치…….
인: (연감을 덮으며) 복잡하군……. 1979년 10월엔 웬 복잡하고 어지러운 일들이 많나…….
현지: (편지를 접어 넣으며) 복잡하다. 집 얘기……. 날씨 얘기 아버님 얘기……. 아무튼 연락 좀 자주 하라셔……. 추신. 엄마 생일 잊진 않았겠지?
인: (놀라며) 뭐? 잠깐……. 오늘 며칠이니?
현지: 오늘……. (핸드폰을 꺼내 화면을 보고) 5일 . 왜?
인: 이런……. 선물 사놓고 못 부쳤네…….
인…….
허둥지둥 뛰어 간다.
현지…….
어이없이 가는 인을 본다.
씬 51. 1979/선미의 병실.
선미, 침대 위에서 선물 상자를 뜯어본다.
옆엔 소은.
상자를 열어보니 예쁜 나팔바지다.
선미: (보고 좋아하다간) 나 놀리는 거지?
소은: 깁스 풀고 입으라고……. 그날 꽈당할 때……. 바지 튿어졌잖아. 그 바지를 보면 안달 나서라도 다리뼈가 빨리 붙을 거야.
선미: 고맙다 친구야…….
소은: 치마를 사줄걸 그랬나……. 짧은 걸로……. 자전거 못타고 다니게…….
둘 웃는다.
소은 가방을 챙긴다.
선미: 진짜 가게?
소은: 미안해……. 선물만 주고 휙 사라져서……. 생일 주는 깁스 풀고 마시자…….
선미: 휴……. 눈에 콩깍지가 씌운 애를 보고 뭐라 할 말도 없고……. 그래 가세요.……. 사랑 찾아 훨훨 떠나세요…….
소은: 훨훨 갈게…….
소은 나간다.
씬 52. 병실 복도.
소은 병실 문을 열고 나온다.
그 앞에는 동희가 서있다.
소은: 미안해요. 오래 기다리셨죠?
동희: 아니……. 괜히 나 때문에 금방 나온 거 아냐?
소은: 아니에요. 가요.
씬 53. 선미 병실.
선미…….
그 불편한 와중에도 선물로 받은 나팔바지를 걸쳐 보려고 노력 중이고, 맞은편의 아줌마…….
요상한 몰골로 바라보고 있다.
씬 54. 1979/어느 극장 앞.
동희가 보이고…….
표를 사기위해 매표소로 가는 소은.
소은: 4회……. 두 장이요.
내밀어지는 소은의 손.
씬 55. 인의 방.
비디오테이프를 밀어 넣는 인의 손.
현지는 한쪽구석에 앉아 그런 인을 보고 있고…….
씬 56. 1979/극장 안.
'로미오와 쥴리옛' 영화를 보고 있다.
소은 영화가 잘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동희 영화를 보다가 슬쩍 자기를 보고 있는 소은에게 시선이 가고.
소은 뭔가 들킨 듯 시선을 스크린으로 재빨리 가져간다.
그런 둘.
스크린 속의 영화-둘의 손바닥 마주치는 장면.
씬 57. 인의 방.
현지의 시선 여전히 인에게 가있고, 어항을 사이에 두고 서로 바라보는 뉴 버전의"로미오와 쥴리옛"이 화면에 보여진다.
비디오를 보던 인.
현지의 시선이 느껴지자 현지한번 보고, 비디오한번 보고를 되풀이 하다가 한숨.
다시 비디오를 본다.
씬 58. 1979/극장 안.
"로미오와 쥴리옛" 키스하는 장면이 나오고, 키스하는 장면에서 깜짝 놀라는 소은.
소은을 바라보는 동희.
얼굴이 붉어지는 소은.
씬 59. 소은의 집 전경.
소은의 방…….
불, 꺼져 있다.
소은은?
소은, 집 대문 앞에 앉아 있고 그 옆에는 동희가 앉아 있다.
동희: 아까 했던 얘기……. 1999년에 우리……. 그때도 이렇게 밤중에 얘기 나누는 사람이 있을까.
소은: 밤이 없어지지 않는다면……. 함께 얘기 나눌 사람도 분명히 있을 꺼에요.
소은 시계를 보고,
소은: 늦었네요. 들어가 봐야 될 것 같아요.
동희: 부모님이 엄하신 모양이지?
소은: 그런 건 아닌데……. 너무 늦게 들어가면 담너머 가야되요.
동희와 소은 서로 본다.
마주보는 두 사람의 눈.
동희: 하찮은 돌담이 어떻게 사랑을 막을 수 있겠소?
소은: (감동……. 일보직전)
동희: 아까……. 영화에서 남자주인공이 사랑하는 여자한테 했던 말이야…….
소은: 아……. 네…….
동희: 가야겠다. 통행금지에 걸리면 또 뛰어야 되거든…….
둘 일어난다.
동희, 소은을 바라보더니 슬쩍 손바닥을 들어 소은의 얼굴에 조금은 예의 없이 갖다 댄다.
소은 무방비로 그의 손에 얼굴을 대었다.
동희: 참……. 작구나……. 얼굴…….
동희 뒤돌아 간다.
소은…….
멍한 얼굴.
그의 손 기운이 남아 있다.
씬 60. 소은 집.
소은 들어온다.
소은 엄마 나온다.
소은…….
여전히 넋 나간 얼굴……. 멍…….
소은모: (작은 소리로 아빠가 깨지 않게) 뭐하다 이렇게 늦게 들어와. 아빠 깨면 너 혼나…….
소은, 아무 말 없이 자신의 손바닥을 들어 엄마의 얼굴에 대곤, 자기 방으로 올라간다.
소은 엄마: 황당하다. 내 딸이 미쳤나?
씬 61. 소은 방.
방문을 열고 들어선 소은…….
동희와 있었던 일들을 생각하며 환상에 빠져있다.
때…….
울리는 무선기 소리.
정신이 번쩍 든다.
씬 62. 달.
달 보름에서 조금은 작아진 달.
씬 63. 1999/인의 방.
인…….
무선기 앞에 진지한 얼굴.
노트북 모니터에 떠있는 연감들…….
그 옆에 몇몇 자료들.
인: 그래요. 소은 씨는 1979년에 있습니다. 저는……. 물론 1999년이죠. 그리고 현재까지 우린 서로 중……. 누구 하나가 너무도 태연하게 장난을 치고 있다고 생각하고……. 아니면 둘 중 누구 하나는 너무도 곱게 미쳤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만 묻겠습니다. 어제 신문에 난 기사 중에 기억나는 게 있나요?
씬 64. 1979/소은 방.
소은, 여전히 의심의 말투로…….
소은: (한숨) 도대체 우리가 무슨 대화를 나누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그래요……. 좋아요. 어제……. 신문……. (생각 중…….) 그래요……. 어제, 오늘 연신 김영삼 총재가 국회에서 제명당한 기사가 머릿기사였고요……. 그밖에 학생들 시위 기사 역시 끊이지 않고 나오고요…….
씬 65. 인의 방.
인…….
표정 굳어 있다.
자신 앞에 있는 노트북 모니터 속의 연감도 정확한 내용이 쓰여 있다.
인: 혹시……. 소은 씨 앞에 79년 연감 같은 게 있나요?
소은: (무선음) 뭐요?
인: 아니요……. 아닙니다. 그 기사엔 제명당한 그 의원이 14년 후에 대통령이 된다는……. 예견 같은 건 안 나왔겠죠?
소은: (무선음) 지금 무슨 소리 하시는 거예요?
인: 이봐요. 소은 씨……. 우리가 사는 세상엔 말이죠. 과학으론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이 아주 많이 일어나죠. 그리고 그런 일들은……. 이상하게 꼭 텔레비전에 나오고……. 뭐랄까, 그래서 더 허풍처럼 느껴질 때가 많아요…….
소은: (무선음) 이봐요……. 계속 그렇게 횡설수설하실 거면 얘기 그만하죠?
인: 잠깐……. 그래요. 소은 씨. 어쩔 수 없이 제가 무슨 말을 하던 지간에 횡설수설이 될 수밖에 없을 거예요. 그래서 지금으로서는 얘길 더 할 수도 없을 거예요. 허나 마지막으로 제가 드리는 말씀 똑바로 들으세요. 소은 씨는 신라 대학 영문과 3학년이고 지금은 1979년입니다. 저는 신라 대학 광고 창작과 2학년 그리고 제방 달력엔 분명히 1999년이라고 씌여 있고요……. 자, 내일 신문 기사는 학생 시위로 부산에 비상계엄이 선포됐다는 기사가 나올 거구요. 학교에선 (학교 신문을 보며) 우리가 약속한 시계탑이 완공 식을 가질 거예요. 허나 완공식은 미뤄질 거예요. 왜냐면 이사장께서 내일 아침 심장마비로 쓰러지시거든요.
소은: (무선음) (놀라서) 뭐라고요?
인: 아~ 이사장님을 존경하시나요? 너무 걱정 안하셔도 되요. 생명엔 지장이 없어서 일주일 후에 완공 식은 하게 됩니다.
소은: (무선음) (어이가 없다 못해 화가 나려 한다.) 그래요……. 혹시, 다른 정보는 없나요? 한강에 인어공주가 나온다던지 서울에 지진이 난다던지 하는 거요……. 아니면 대통령이 죽는다는 뉴스 따위는 왜 없나요?
인: 대통령은 이번 달 26일에 죽을 거고 인어공주나 지진은 없습니다. 그래요 믿어 달라고 강요 하진 않을게요. 내일 밤에 다시 얘기하죠.
소은: (무선음) (밖에서 들리는 사이렌 소리) 그래요……. 그만하죠. 벌써 통행금지에요. 늦었네요.
끊는다.
인…….
허무…….
인: 통행금지? 후……. 미치겠구먼…….
인, 창밖을 내다본다.
통행금지?
1999년의 심야는 너무도 밝고 휘황찬란하다.
씬 66. 1979/둥근 해가 떴다/어느 거리 버스 안.
소은, 어제 일은 잊은 듯 버스를 타고 학교에 가고 있다.
그때, 옆자리에서 신문을 보는 누군가.
소은 무심코 신문을 본다.
아, 어제 그 미친 남자가 횡설수설 대던 기사.
[부산 비상계엄령 선포]
씬 67. 학교 시계탑.
소은, 막…….
뛰어 온다.
시계탑…….
공사커버가 여전히 그대로다.
소은 다가와 본다.
그 앞에는 안내 공고가 붙어 있다.
[이사장님의 갑작스런 건강 악화로 완공식이 연기 되었습니다. -학장 백-]
소은…….
얼굴이 전형적으로 변한다.
씬 68. 소은의 혼란스러운 몽타주.
강의실을 향해 헛발을 내딛으며 달려가는 소은.
캠퍼스.
이곳저곳의 모습들.
오가는 버스…….
씬 69. 인의 동아리실.
인…….
여러 무선기들과 아이들 속에 있고…….
인…….
다른 무선기를 들고…….
소은을 호출해 보지만 신호도 먹질 않고…….
자신의 그 무선기를 또렷이 보고…….
씬 70. 소은의 방.
소은, 무선기 앞에 있다.
기다린다.
신호음을…….
소리는 안 울리고…….
창밖의 무심한 달…….
그러다가…….
신호음…….
울리자마자 받는 소은.
인: (무선음) 신호가 가자마자 받으시는군요. 급하셨나 보죠?
소은: 도대체 누구에요? 어떻게 된거냐구요?
인: (무선음) 간단합니다. 저는 1999년에 살고 있는 사람이고 제가 살고 있는 1999년에선 소은 씨가 살고 있는 1979년에 대한 자료들을 금방이라도 찾아서 꺼내볼 수 있거든요.
둘 사이에 묘한 침묵이 흐른다.
소은: (혼란) 1999년에 사는 당신은 제가 1979년에 살고 있는걸. 믿는단 말인가요?
인: (무선음) 네……. 어쩔 수 없이…….
소은: 그럼 이젠 제가 믿어야 될 차례인가요?
인: (무선음) 아마……. 어쩔 수 없을 거예요.
소은의 얼굴…….
아…….
씬 71. 달.
달에서 바라본 지구속의 소은 얼굴이 고뇌를 느끼게 한다.
아…….
무심한 달…….
씬 72. 소은의 교정.
소은 어느 건물 입구에 서있다.
사람들의 오고 감.
동희를 기다리고 있다.
소은의 머릿속엔 아직도 인과의 만남이 있는지 표정이 들떠 있다.
동희가 온다.
동희의 표정 불안해 보인다.
소은: 선배!
동희: 어, 어쩐 일?
소은: 음……. 선배 기다렸죠. 오후수업 없죠?
동희: 어……. 그런데……. 어쩌지 지금 일이 좀 있어서…….
소은: 아……. 네. 선배, 늦게 끝나겠죠? 그럼?
동희: 왜 무슨 급한 일이니?
소은: 아니요……. 그냥…….
동희: 이거 뜻밖의 데이트 신청을 이렇게 멍청하게 거절을 하네.
소은: 후후……. 아니에요.
동희: 갈 꺼니?
소은: 네……. 그때 그 친구 병실에나 들렀다가…….
동희: 그 괴짜 친구? 재미있는 애더군.
소은: 예쁘고 착해요.
사이.
소은: 그럼…….
소은 간다.
씬 73. 선미의 병실.
병실의 둘…….
선미: 그래서……. 그 1999년의 남자가 너한테 자꾸 추근덕거리는 거야?
소은: 아냐……. 그런 거. 목소리나 억양……. 말투……. 나쁜 사람 같지는 않아.
선미: 거 봐. 넌 벌써 그 사람에게 어느 정도 당하고 있는 거야.
소은: 뭘 당해.
선미: 너……. 윤소은이야. 윤소은이 지금 생전 본적도 없고 통화만 몇 번 한 남자에게 호감을 느끼며 싸고 돈다니까……. 그 사람 사기나 뭐 그런 걸로 고소할 수는 없나……. 자기가 1999년에 산다는 건 거짓말이고 그런 거짓말로 너에게 뭔가를 은근히 요구한다고……. 경찰서에 한번 가볼까…….
소은 한숨.
소은: (진지하게) 선미야……. 그 남자……. 1999년에 사는 거 맞아.
선미: 그래……. 네 심정 안다, 알아. 사랑하는 남자가 있으니까……. 한눈팔기 싫겠지……. 아예 체념하기엔 그것도 나쁘진 않다만……. 글쎄……. 나도 모르겠다. (자기 다릴 보며) 뼈는 왜이리. 늦게 붙니…….
소은 한숨.
씬 74. 소은의 방과 인의 방/교차.
둘의 무선.
인: 규칙을 정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이 무선이 어떻게 이루어질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전 소은씨한테 엄청난 행운과 신기함을 줄 수 있어요. 하지만 도덕적으로 우리 그런 건 피합시다.
소은: 행복과 신기함이요?
인: 그러니까……. 철저히 개인적인 값어치와 연결되는 거……. 예를 들어 어디 땅을 사두면 몇 년 후에 떼돈을 번다든지……. 아니면 내년에 히트할 노래를 미리 가르쳐 드려서 돈을 번다든지 하는 거요…….
소은: 그러네요……. 이런 기회를 이용해 그러면 안 되죠. 하지만 난 과거 사람이고 인이씨는 미래 사람이니까……. 제가 훨씬 더 궁금한 게 많을텐데…….
인: 호기심?
소은: 소박한 호기심.
시간 경과.
소은: 거기는 어때요?
인: 글쎄요. 79년에 비하면 엄청나게 편해진 세상이겠죠. 지하철이 서울 바닥 바닥을 죄다 뚫어 놓고 다녀요.
소은: 통일은요?
인: 김일성은 죽었구요……. 통일은 아직…….
소은: (깜짝 놀라며) 네……. 아……. 김일성도 죽긴 죽는구나…….
인: 배 타고 금강산 여행도 가고 그래요.
소은: 와……. 재밌네요.
시간 경과.
소은: 그 세상은 예뻐요. 살맛나는 세상이냐구요?
인: 늘 그렇듯이……. 세상은 살맛나는 곳이에요. 물론 갑갑해진 부분도 있겠죠. 공기도 오염됐고 사람도 바글바글. 그래서인지 옛날이 좋았어라고 그 시절을 추억하는 사람들도 많아요.
소은: 그래요? 이 시절을 추억하는 사람들은 이 시절의 무엇을 추억할까……. 99년이 보고 싶어요.
인: 정말로 보여 드리고 싶네요. 여기 세상은……. 음……. 소은 씨가 상상만 하던 거……. 혹은 상상하지도 못했던 수많은 일들이 현실로 이루어져요.
소은: 거기 세상에선 누군가를 열심히 사랑하면 이루어지는 방법이 있나요?
인: 후후……. 그런 건 아마 이 세상이 끝날 때까지 발명되지 못할꺼에요.……. 아, 소은씨 누군가를 사랑해요?
소은: (놀라며……. 챙피해진다.) 아……. 아니. 그런 게 아니고…….
인: 괜찮아요……. 전 어차피 다른 세상의 사람인걸요…….
소은: (약간 갈등) 그래요……. 사랑 같은 거 뭐라 정의 내려진 적도 없지만……. 아마 이런 거랑 엇비슷한가 봐요……. 그 남자……. 내 오른쪽 눈과 왼쪽 눈을 항상 번갈아 보면서 말을 하는 그 남자요……. 그 남자를 사랑해요……. 후후후……. 정말 웃긴다. 이런 얘길 이렇게 누군가에게 할 수 있다니……. 내 일기장에다만 써놓은 건데……. 그 일기를 쓰면서도 혼자 무진장 창피해 하면서 쓴 건데…….
인: 저와의 무선이 당분간 소은씨 일기가 되겠군요……. 말로 하는 일기…….
소은: 사랑하는 사람 있어요?
인: 저요? 네. 저도 있어요.
인의 얼굴.
씬 75. 인의 교정.
인…….
현지를 보고 있다.
현지의 눈을 보고 있다.
현지도 인의 눈을 보며 말없이 둘은 서로의 눈만을 보고 있다.
카메라 멀어지면 둘 가까이에서 서로의 눈을 보고 있고 그것을 찍는 어느 남학생.
남학생: 야, 야 조금만 더 붙어봐.
인과 현지.
학생 광고의 사진 모델이 되어주는 중이다.
둘 얼굴 더 가까이 간다.
인: (약간 인상 쓰며) 야……. 술을 얼마나 마셨으면 어제 마신 술이 아직까지 냄새가 나냐?
현지: 어제 마신 거 아냐……. 오늘 아침에 마신 거야. 해장 술.
인: 장하다.
남학생: 자……. 조용히 하고……. 얼굴 표정 짖지 말고 무표정하게…….
현지: 모델을 잘못 골랐어. 난 얘 얼굴 보면 무표정 해질 수가 없거든…….
인: 입 벌리지 마. 술 냄새나.
카메라 앵글 속의 둘.
서로의 코와 눈 하나만이 들어와 있다.
씬 76. 인의 교정/도서관 옆 동산.
인과 현지 걷고 있다.
현지: 그래서 그 79년도 여자하고 매일 밤 무선 해?
인: 신경 쓰지 마. 어차피 믿지도 않으면서.
현지: 아냐……. 믿어 넌 지금 1979년도에 사는 어떤 여인과 매일 밤 무선을 주고받아. 그리고 넌 그 여자한테 관심이 있고 솔직히 집적대고 싶지만 시대가 다르니 어떻게 해보지도 못하고 답답해 한다는 거……. 믿어. 충분히.
인: 야……. 누가 집적대? 그리고 단어 사용 좀 품위 있게 해라……. 기집애가 잘나가다가 질투만 나면 과격해지냐?
현지, 멈춘다.
인을 잡고 휙 돌린다.
현지: 뭐? 너 지금 질투라고 했냐? 그러니까 내가 너의 그 요상한 짓거리에……. 그리고 그 사기꾼 같은 여자와의 드라마에 질투를 느낀다 이거냐?
인: 내가 보기엔…….
현지: (실없는 웃음) 후후……. 너……. 너무 잘살아……. 너, 고민 없이……. 배부르게……. 너무나 잘 살아서 좀 독특한 재미를 찾나본데……. 거기엔 내가 안 끼였으면 좋겠다.
현지 꽤, 심각한 어투로 휙 사라진다.
현지의 반응에 인…….
씬 77. 1979년의 시대 인서트.
어느 공간에서의 소은의 얼굴.
그녀의 표정과 느낌 안에서 그녀의 생각들이 펼쳐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