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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4월 21일(부활절 네 번째 주일)
열왕기상 8:12~21
주어 바꾸기
하늘사랑교회 주일예배 설교문
본문접맥 적 주제설교
김규태 목사
*설교 주제: 성전을 완공한 솔로몬은 하나님을 높이면서 동시에 자신을 높였다
*설교 목적: 우리는 주어 바꾸기를 통해 오직 하나님만을 높이며 살아야 한다.
where?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열흘만 살다가 버리는 집이 누에고치입니다. 6개월만 살다가 버리는 집이 제비집입니다. 1년을 살다가 버리는 집이 까치집입니다.
그런데 누에는 집을 지을 때 자신의 창자에서 실을 뽑아 집을 짓고, 제비는 자기 침을 뱉어 진흙을 만들어 집을 짓습니다. 그리고 까치는 볏짚을 물어 오느라 입이 헐고 꼬리가 빠져도 지칠 줄 모르고 집을 짓습니다.
날짐승과 곤충들은 이렇게 혼신을 다해 집을 지었어도 시절이 바뀌면 미련 없이 집을 버리고 떠나갑니다. 그런데 사람만이 끝까지 움켜쥐고 있다가 종래는 빈손으로 떠나게 됩니다.
*출처: https://www.facebook.com/share/VvCUaFBpvBvsCjYu/?mibextid=oFDknk
여러분은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무엇을 느끼십니까? 우리의 삶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간혹 우리는 내 삶이 영원할 것이라는 착각 속에서 살아갈 때가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영원하지 않은 삶을 보람 있게 살기 위해서 기억해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저는 중학교 시절, 학교 운동장에 일렬로 서서 교장 선생님의 훈시를 들었던 날을 기억합니다. 그날 교장 선생님이 무엇이라고 말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저를 비롯한 몇 몇 친구들은 따분한 표정을 지으며 몸을 비틀거렸습니다. 심지어 옆에 있던 친구들은 눈치를 보며 발로 운동장에 그림을 그리기도 했지요. 어쩌면 그 덕에 그들 중 몇몇은 훗날 훌륭한 미술가가 되었을지도 모르지요.
이런 학생들의 마음을 헤아리셨는지, 어느 날인가는 교장 선생님이 아주 짧게 훈시를 마쳐 주셨습니다. 그래서 저를 비롯한 친구들을 아주 기뻐했지요. 그 때 우리에게 훈시해 주셨던 교장 선생님이 아직 이 세상에 남아 있으리라고는 기대할 수 없습니다. 꽤 많은 시간이 흘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때의 일은 지금도 제 마음 한곳에 아주 소중한 추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솔로몬이 성전건축을 마친 후에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서 행한 다소 긴 연설입니다. 이 연설을 들어야 했던 백성들의 마음은 어땠을까요? 그들도 우리처럼 몸을 비틀었을까요? 아니면 땅에 무언가를 끼적거리며 무료한 시간을 보냈을까요?
그런데 솔로몬왕의 연설을 들은 백성들은 그리 따분하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7년 동안의 긴 성전 건축 공사를 마치고, 기쁨에 들떠 있었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제사장이 언약궤를 성전 가장 깊은 곳인 내소에 들여다 놓고 나온 후에 경이로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구름이 여호와의 성전에 가득 덮였던 것이죠. 이러한 경험은 누구에게나 일상적이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예수님 당시 변화 산에 구름이 덮였을 때, 베드로도 흥미진진한 반응을 보였던 것을 기억할 것입니다. 성전에 가득 찬 구름 때문에 제사장이 자신의 업무를 제대로 감당하지 못했을 정도였으니까요. 이는 분명 여호와의 영광이 성전에 가득했던 신비로운 경험이었습니다.
만약 여러분도 그 자리에 있었다면 아마 그랬을 것입니다. 적어도 솔로몬의 긴 연설을 듣고 여러분이 따분하다며 몸을 비틀거리지는 못했을 겁니다. 그 순간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아주 특별한 시간이었고, 역사에 길이 남을 특별한 의식(儀式)이었기 때문입니다.
솔로몬왕의 연설이 특별했던 이유는 그의 신학적 이해 때문이기도 합니다. 솔로몬왕은 완공된 성전 앞에서, 백성들에게 성전 건축의 의미를 설명하고자 했습니다.
솔로몬왕은 역사를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 출애굽 사건을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솔로몬왕은 백성에게 다윗 언약을 이야기해 주었고, 그것이 성전 건축의 열매를 맺게 되었다며 힘주어 말하고 있었습니다.
사실 이러한 솔로몬왕의 주장은 틀린 이야기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430년 동안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해 내셨던 목적이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예배하는 자들을 세우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보내시면서 바로에게 다음과 같이 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내 백성을 보내라. 그러면 그들이 광야에서 나를 섬길 것이니라(출 7:16; 8:20).”
모세의 말을 들은 바로는 “너희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 광야에서 제사를 드릴 것이나 너무 멀리는 가지 말라(8:20).”라고 모세에게 대답해야 했지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해 주셨던 목적은 그들로 하나님을 예배하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광야에서 제사장 아론을 세우시고,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는 제사법을 제정하셨어요. 그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백성들이 광야에서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도록 성막이라는 공간을 만들라 명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 생활을 마치고 가나안 땅에 정착하게 되면서 왕이 나라를 다스리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한곳에 정착하면서 이동식 텐트로는 뭔가 부족한 세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신의 이름을 둘 만한 집을 건축하기 위해 다윗을 택하셨지요.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택하셔서 이스라엘을 다스리게 하셨습니다. 다윗은 왕이 되어 궁에서 평안히 살게 되었지요.
어느 날, 다윗왕은 잘 지어진 백향목 궁에서 편안히 살고 있는 자신을 보면서, 하나님의 언약궤를 생각했습니다. 그때까지 하나님의 언약궤는 이동식 텐트 안에 머물러 있었지요. 그래서 다윗왕은 하나님이 거주하실 성전을 짓고자 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어요.
그런데 하나님은 오히려 성전을 짓고자 했던 다윗의 마음만 받으시고, 그의 몸에서 태어날 자녀를 통해 여호와의 성전을 짓게 하실 것이라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다윗 언약의 핵심은 하나님께서 다윗의 나라와 왕위를 영원히 견고하게 해 주시겠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만약 다윗의 뒤를 이어 왕이 될 사람이 죄를 범한다면, 하나님께서 그를 징계하시겠지만 그에게서 은총을 빼앗지는 않으시겠다고 약속해 주신 것이죠.
하나님은 다윗의 집과 그의 나라가 영원히 보전되고, 그의 왕위가 영원히 견고하게 될 것이라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베푸신 언약의 핵심이었습니다(삼하 7:1~17).
자, 이렇게 솔로몬은 다윗 언약에 따라 여호와를 위한 성전을 짓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솔로몬의 성전 건축은 역사적으로 거꾸로 올라가보면, 출애굽 사건의 완성이라고도 볼 수 있는 셈이죠.
솔로몬의 성전 건축이 출애굽 사건과 연관된 구체적인 증거물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 21절에 나오는 ‘여호와의 언약궤’입니다. 이 언약궤 안에는 십계명의 두 돌 판이 들어 있었어요.
십계명의 두 돌 판은 이스라엘 조상들이 시내 산에 머물러 있을 때, 하나님께서 모세의 손을 통해 주셨던 것입니다. 이 두 돌 판이 언약궤 안에 들어 있었고, 많은 시간이 흘러 그 언약궤가 솔로몬의 성전 가장 깊은 장소에 자리 잡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여호와의 언약궤’는 모세의 언약과 다윗의 언약을 잇는 가교(架橋)와 같은 역할을 했지요. 거듭 말하자면, 솔로몬 성전은 출애굽 사건의 완성이고, 다윗 언약의 실현이었습니다. 이 두 가지는 솔로몬 성전의 신학적 의미라고 말씀 드릴 수 있습니다.
성전은 단순한 종교적 건축물 이상의 신학적 의미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성전은 하나님의 시선이 머무는 영적 고향과 같은 곳입니다. 실제로 성전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서 신앙의 중심, 혹은 뼈대와 같은 역할을 해 왔지요.
what's problem?
그런데 이런 솔로몬의 연설을 듣다보면 무언가 불안한 느낌을 받게 됩니다. 성전에 관한 솔로몬의 신학적 견해는 분명합니다. 그런데 평소 우리가 가지고 있던 신앙적 견해와 맞지 않는 면이 있어요. 과연 어떤 면이 우리에게 불안감을 줄까요? 과연 무엇이 문제일까요?
솔로몬의 연설을 듣다보면, 그가 성전건축에 관한 이야기를 통해 자신의 왕권을 정당화시키고, 왕권을 강화시키려는 의도를 엿보게 됩니다. 물론, 이러한 솔로몬의 의도가 한편으로는 이해가 됩니다.
솔로몬이 다윗왕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의 왕이 되는 과정에서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다윗 왕에게는 여러 명의 아들들이 있었고, 그중에 압살롬 같은 아들은 스스로 왕이 되고자 아버지에게 반역을 일으켰다가 죽임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뿐 아니라, 다윗 왕의 넷째 아들이었던 아도니야 같은 경우도, 스스로 왕이 되고자 신하와 군사들을 모았습니다. 그래서 동생이었던 솔로몬과 갈등을 겪어야만 했지요.
여러 명의 형제들 중에 단 한명만이 다윗의 뒤를 이어서 왕이 될 수 있는 정치구조다보니, 솔로몬은 왕이 된 후에도 자신의 정치적 명분, 신학적 명분이 필요했을 겁니다.
우리가 오늘 본문을 자세히 묵상하다보면, 주어가 충돌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먼저, 솔로몬왕은 하나님께서 성전 건축을 계획하시고, 그 일을 이루셨다고 고백합니다. 대표적인 구절이 15절입니다.
“왕이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할지로다. 여호와께서 그의 입으로 내 아버지 다윗에게 말씀하신 것을 이제 그의 손으로 이루셨도다 이르시기를(15절).”
솔로몬은 “하나님께서 입으로 말씀하신 것을 그의 손으로 이루셨다.”라고 고백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성전을 건축하게 하셨다는 말이지요.
이어지는 16절 이하에서도, 솔로몬은 “하나님께서 다윗을 왕으로 택하시고, 성전 건축에 관한 마음을 품은 다윗을 좋게 보시고, 그 아들 솔로몬을 통해 성전을 건축하리라고 말씀하셨다.”라고 주장했습니다.
솔로몬왕은 성전을 건축하신 분은 하나님이라고 고백하고 있어요. 그런데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었습니다. 솔로몬의 고백에서는 주어가 충돌하고 있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주어가 아니라, 솔로몬도 주어 자리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솔로몬왕은 13절에서, “내가 참으로 주를 위하여 계실 성전을 건축하였사오니….”라고 고백하고 있어요. 그뿐만 아니라 솔로몬왕은 20절과 21절에서, 마치 자신이 성전을 건축한 것처럼 고백하고 있습니다.
20절과 21절을 보실까요?
“이제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이루시도다. 내가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내 아버지 다윗을 이어서 일어나 이스라엘의 왕위에 앉고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위하여 성전을 건축하고 내가 또 그곳에 우리 조상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실 때에 그들과 세우신 바 여호와의 언약을 넣은 궤를 위하여 한 처소를 설치하였노라.”
이 구절들을 살펴보면, 주어가 철저히 솔로몬입니다. 하나님이 주어가 아니에요. “과연 누가 성전을 건축했는가?”라는 질문을 놓고 ‘하나님’과 ‘솔로몬’이 충돌하고 있는 겁니다. 물론 하나님이 실제로 충돌하신 것은 아니겠지요. 단지, 솔로몬의 인식과 언어 속에서 이 문제가 충돌할 뿐입니다.
만약 솔로몬이 이렇게 고백했다면 어땠을까요? “오직 하나님께서 하셨습니다. 저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이 얼마나 은혜롭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고백이 되겠습니까?
솔로몬은 하나님을 위해 성전을 건축했고, “하나님께서 이 일을 이루셨습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솔로몬은 성전 건축을 통해 자신의 왕권을 강화시키고, 왕권의 정통성을 강화시키려는 노력을 기울였던 것 같습니다.
우리는 과연 어떨까요? 혹시 우리도 주님의 영광을 위한 일이라고 고백하면서, 은연중에 나의 노력과 수고를 인정받으려는 자세를 갖고 있지는 않나요?
지금까지 우리의 삶과 사역을 통해, 그런 잘못된 동기나 자세가 전혀 없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라는 고백 위에 은근히 나의 공로를 덧붙이고 싶은 욕망이 꿈틀거린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what?
제가 바나바훈련원에서 훈련받을 때, 3월 첫 번째 강의 주제가 ‘주어 바꾸기’였습니다.
여러분은 “내가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루었습니다.”라는 말과 “주님이 나를 사용하여 이루셨습니다.”라는 말 중에서 어떤 말이 옳다고 생각하십니까?
“내가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루었습니다.”라는 말의 주어는 “내가”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나를 사용하여 이루셨습니다.”라는 말의 주어는 “주님이”입니다. ‘주어 바꾸기’는 주어인 ‘내가’를 ‘주님이’로 바꾸는 일입니다.
여러분이 주님의 사역을 감당할 때, 여러분은 어떤 동기로 그 사역을 감당하십니까? 내가 좋아서 하는 일입니까? 아니면 주님이 부르셔서 사명으로 하는 일입니까?
만약 여러분이 좋아서 하는 일이라면, 여러분이 하기 싫을 때는 안하셔도 됩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사명으로 하는 일이라면, 여러분이 비록 그 일을 하기 싫을 때에도 그 일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사명으로 하는 일에는 불가능이 없습니다.
만약 우리가 주님의 일에 충성했을 때, 다른 사람의 칭찬과 격려를 받게 된다면 우리가 우쭐해지기 보다는 다음과 같이 고백해야 합니다.
“다 주님의 은혜입니다.”
“쓰임 받아 영광입니다.”
“또 불러주세요. 언제든지 섬기겠습니다.”
야망의 주어는 “내가”입니다. 그러나 비전의 주어는 “주님”입니다. 복음 사역에 위대한 발자취를 남겼던 사도 바울은 로마로 압송되기 직전에 아그립바 왕 앞에서 이런 고백을 남겼습니다.
“아그립바 왕이여, 그러므로 하늘에서 보이신 것을 내가 거스르지 아니하고(행 26:19).”
사도 바울은 자신의 야망을 따라 산 사람이 아니라, 하늘에서 보이신 것을 따라 산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야망의 사람이 아니라, 비전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하늘에서 보이신 것을 거스르지 않고 그것을 자신의 사명(使命)으로 여겼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바울은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로마로 압송되어 갔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야망의 사람입니까? 아니면 비전의 사람입니까?
우리는 큰일을 이룬 후에 교만해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솔로몬의 경우는 성전과 화려한 왕궁을 건축한 이후 그의 삶과 신앙이 내리막길로 내려가고 말았습니다.
처음 솔로몬이 왕이 되었을 때, 그는 어떠한 자세를 가졌습니까?
솔로몬은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의 아버지 다윗의 법도를 행하였습니다. 그는 기브온 산당에서 일천번제를 드린 후에 한 꿈을 꾸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솔로몬의 꿈에 나타나셔서 그에게 무엇을 줄지를 물어보셨습니다. 그때 솔로몬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습니다.
“종은 작은 아이라 출입할 줄을 알지 못하고 주께서 택하신 백성 가운데 있나이다. 그들은 큰 백성이라 수효가 많아서 셀 수도 없고 기록할 수도 없사오니 누가 주의 이 많은 백성을 재판할 수 있사오리이까 듣는 마음을 종에게 주사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7~9절).”
솔로몬은 겸손히 자신을 종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재판에 필요한 분별력을 얻기 위해 함부로 말하기보다는 ‘듣는 마음’을 자신에게 달라고 하나님께 구했습니다.
이러한 솔로몬의 태도를 하나님께서 기뻐하셨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솔로몬의 겸손한 태도가 조금씩 사라지고, 하나님과 자기 사랑이 충돌하는 모습을 보이게 되었습니다.
자기 사랑의 죄는 하루아침에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미 솔로몬의 신앙은 조금씩 균열 현상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솔로몬이 복을 받아 주변 국가인 애굽과 블레셋으로부터 조공을 받을 정도로 강대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솔로몬은 자신의 왕권을 더욱 강화시키고자 애굽의 왕 바로와 더불어 혼인 관계를 맺었습니다. 솔로몬은 바로의 달을 아내로 맞아 그들을 위한 궁전을 지어주었습니다(3:1; 7:8).
또한, 솔로몬왕은 병마을 많이 두지 말라는 여호와의 말씀을 어기고, 전쟁을 위해 병거의 말과 마병을 많이 두었습니다(신 17:16; 왕상 4:26).
물론 솔로몬은 여호와를 위하여 성전을 짓고,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며, 백성을 평안한 길로 이끌었습니다. 그러나 빛이 비치면 그림자가 생기듯, 솔로몬의 삶과 신앙에는 어두운 그림자도 드리워있었습니다.
결국, 솔로몬 왕이 여호와의 눈앞에서 악을 행하여 그의 아버지 다윗이 여호와를 온전히 따랐던 것과 다른 길을 걸었던 것은 결코 우연히 이루어진 일은 아니었습니다(왕상 11:6).
how?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주님의 뜻을 이루소서.’라는 찬송시를 쓴 폴라드 여사는 당뇨와 신경 계통의 병으로 많은 고통을 겪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그런 중에도 아프리카 선교사로 가고자 서원했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복음을 전한다면 모든 길이 형통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생각과 달리, 그녀의 길은 열리지 않았고, 아프리카 선교를 위한 모금 운동도 중단되고 말았습니다. 그녀는 하나님께서 왜 자신의 기도를 듣지 않으시는지, 과연 기도를 듣기는 하시는지 원망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기도회에 참여했다가 한 할머니의 기도를 듣게 되었습니다. 그 할머니는 다음과 같이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주님, 우리의 삶 가운데 어떤 일이 일어나도 좋으니, 주님의 뜻과 섭리만이 우리에게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폴라드 여사는 이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하면서도 내 뜻과 내 능력, 내 방법을 내세우던 자신의 잘못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기도회를 마치고 돌아온 폴라드 여사는 토기장이가 진흙으로 만든 그릇을 깨트리고, 자기 의견에 좋은 다른 그릇을 만든다는 예레미야서의 말씀을 읽고 큰 은혜를 받게 되었습니다(렘 18:3~4).
그날 밤, 폴라드 여사는 밤을 새워 찬송시를 짓게 되었습니다. 그 시가 찬송가 ‘주님의 뜻을 이루소서.’입니다.
그날 이후로 폴라드 여사는 남은 생애를 오직 하나님의 뜻에 맡기고, 마지막 숨을 거둘 때까지 남아프리카 케이프타운의 선교사로 헌신하였습니다.
-출처: 한기홍, 「하나님 마음에 꼭 드는 사람」 (두란노, 2018); 「생명의 삶 플러스」 (두란노, 2024년 4월호), 141에서 재인용.
사랑하는 여러분, 과연 여러분 인생의 주인은 누구이십니까? 여러분은 야망의 사람입니까? 아니면 비전의 사람입니까?
‘주어 바꾸기’는 내 인생의 주인이 “나”가 아니라 “하나님”이심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내 삶과 신앙이 하루아침에 무너지는 법은 없습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조금씩 집이 균열되어 어느 한 순간에 허무하게 무너져 내릴 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더 늦기 전에, ‘주어 바꾸기’를 해야 합니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만을 높이며 살아야 합니다. 저는 여러분의 삶을 통해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