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덮으며
퇴직을 하고 나니 하 심심하여 대학원에 다녔다. 『주역』으로 논문을 준비하다가 욕심이 생겼다. 논문에 풍미를 더하고 싶어 주변을 넓게 파고들기로 했다. 『주역』에도 이를테면 역사 같은 것이 있는지라 주변이라기보다는 한 지붕이다.
우선 학술분야의 출판물 중에서 20세기의 금자탑이라 불리는 조셉 니담의 sciece and civilisation in china라는 방대한 전집 중에서 Vol. Ⅰ, Vol. Ⅱ, Vol. Ⅶ-1 세 권의 책을 주문했다. 이 전집은 계속 불어나는 책이어서 당시에는 열 몇 권이었지 싶은데 현제는 총 27권이다. 케임브리치 대학의 자존심이기도 하다.
영국 판도 있고 미국 판도 있지만 저자가 캐임브리지대학의 교수였기 때문에 딴에는 더 오리지널하게 보이려고 영국 판을 샀다. 미국 판보다 조금 더 비쌌다. 운송 노정의 비용 문제인 것 같다. 영미 원서는 알카리성 종이라서 거의 변색이 되지 않고 가벼워서 좋기는 하지만 글자가 깨알 같아서 눈이 시리다. 주마간산으로 읽다가 영어가 달려 책을 덮었다.
분야가 다르긴 하지만 니담의 이 책 대신에 차선으로 택한 것이 대만 판 『고사변 칠책』(古史辨 七冊)이었다. 정장본이라 하지만 니담의 책에 대면 촌티가 줄줄 흐른다. 그 촌티에 친근감이 갔다. 내가 촌놈이라서 그런 모양이다.
한문을 좀 한다고는 하지만 한문 또한 영어처럼 밑천이 달리기는 해도 영어보다는 만만했다. 이 책은 여러 학자의 공저이다. 그 중에 몇 사람은 다른 책에서 만나 봤지만 특히 호적(胡適)은 지면으로는 낯이 익은 학자다. 그분이 쓴 『중국고대철학사』는 직장 다닐 때 번역판으로 정독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호적은 다윈의 진화론에 심취하여 適(적)이라고 개명까지 한 사람이다. 이 책에서는 적지(適之)선생으로 호칭되고 있다.
이 책은 분야 별로 담당해서 쓴 책이 아니라 같은 하나의 과제를 두고 각자의 의견을 따로 따로 나란히 실었기 때문에 여러 사람의 견해를 일목요연하게 볼 수 있어 좋다. 방대한 전집을 미련스럽게 고등고시 공부하는 사람처럼 머리말부터 정가표까지 다 읽고 난 뒤 그걸 논문에 반영하고 싶었지만 그러기엔 여러 가지로 무리였다. 그래서 꼭 필요한 부분만 골라 메모를 했다. 그땐 컴퓨터를 몰라서 애를 먹었다.
주로 호적의 설을 따랐다. 정약용 역학으로 논문을 쓰는 내 입장에서는 진화론적이기는 정약용이 호적과 매우 방불하기 때문이다.
이 두 저술은 학위를 마치고 난 뒤 편안한 마음으로 쉬엄쉬엄 읽어 내려갔다. 토인비의 『역사의 연구』를 원서로 읽던 젊은 시절이 생각났다. 창밖에 짙어진 풀을 뽑지 않았다. 그러다가 난관에 봉착했다. 시력이 갑자기 떨어졌다. 눈에 주사를 맞긴 해도 완치가 안 되는 병이라 한다. 지금은 돋보기안경을 쓰고서도 책을 보기가 거의 불가능하다.
위의 두 가지 책을 읽는 일은 반도이폐가 되고 말았다. 풍우란(馮友蘭)은 만년에 시력을 잃고 그 구술을 딸이 받아 쓴 책이 있다. 나는 토해낼 원고가 뱃속에 들어있지 않을뿐더러 그럴 생각도 없다.
햇볕이 쨍한 우케 멍석에 장대비가 쏟아질 줄 누가 상상이나 했겠나. 책을 덮고 나니 만사가 시들해졌다. 가끔 허창(虛窗)에 기대어 반안(半眼)을 뜨고 멍청히 앉아 있을 뿐이다. 진즉에 멍청해질 걸 그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