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째 신변의 안전을 위해서였습니다. 아직도 해능을 해치려는 자들이 있을 수 있었습니다. 둘째 배를 기다리기 위해서였습니다. 버블 펼치기에 적절한 시기를 기다린 것입니다. 셋째 스스로를 완성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예 달았다고 해서 끝이 아닙니다. 그 깨달음을 삶으로 익혀야 합니다. 예능은 그 15년 동안 무엇을 했을까요? 기록은 자세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는 침묵했습니다.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다만 매 순간을 깨어 있게 살았습니다. 나무를 베고 물을 긷고. 밥을 먹고 잠을 자는 일상 속에서 그는 자성을 보았습니다. 화려한 절도 없었고 제자들도 없었고 명성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예능은 행복했습니다. 왜일까요? 그는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자유가 무엇인지 진정한 평화가 무엇인지를 말입니다. 그것은 바깥 세상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지위나 명예 재산이나 권력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마음의 자유입니다. 아무것에도 얽매이지 않고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 자유입니다. 대능은 그것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계절이 바뀌고 해가 바뀌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단 소식이 들렸습니다. 광주 법성사에서 인종 법사가 법회를 연다. 대능은 귀를 기울였습니다. 내가 되었구나. 15년에 침묵이 끝나려 하고 있었습니다. 예능은 산을 내려왔습니다. 광주로 향했습니다. 그는 이제 더 이상 도망치는 청년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6조였습니다. 중국 선불교의 여섯 번째 조사였습니다. 그리고 그가 펼칠 가르침은 불교 역사를 바꾸게 됩니다. 에유령에서의 해명과의 만남은 상징적입니다. 추격자가 보법자가 되었고 저기 형제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해능이 보여준 것입니다. 진정한 가르침은 대립을 넘어섭니다. 선과 악 스승과 제자 나와 너 이 모든 구분을 넘어선 곳의 진리가 있습니다. 전도 생각하지 말고 악도 생각하지 마십시오. 바로 이 순간 어느 것이 그대의 몰래 면목입니까? 이 질문은 1300년 전 대유령에서만 유효한 것이 아닙니다. 지금 이 순간 당신에게도 묻고 있습니다. 모든 분별을 내려놓았을 때 남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이 바로 당신의 본래 면목입니다. 저기 676년 광주 법성사 인종 법사의 법회가 열렸습니다. 수백 명의 승려와 신도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인종 법사는 열반경을 설법하고 있었습니다. 뒤쪽에 한 사람이 조용히 앉아 있었습니다. 상투를 틀고 평민 옷을 입은 중년의 남자였습니다. 개능이었습니다. 절법이 끝나고 사람들이 밖으로 나왔습니다. 바람이 불었습니다. 절 앞들에 걸린 깃발이 펄럭였습니다. 이후 두 승려가 깃발을 보며 논쟁을 시작했습니다. 저것을 보시오. 사람이 움직이는 것이요. 아니요 깃발이 움직이는 것이요. 바람이 불지 않으면 깃발이 어찌 움직이겠소 깃발이 없다면 무엇이 움직인단 말이오. 논쟁은 점점 격해졌습니다. 주변의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누구는 바람이라 했고 누구는 깃발이라 했습니다. 그때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바람이 움직이는 것도 아니고 깃발이 움직이는 것도 아닙니다. 인자들의 마음이 움직이는 것입니다. 모두 돌아보았습니다. 평범한 옷차림의 남자였습니다. 대중은 놀랍습니다. 인종 법사도 놀랐습니다. 훌륭하십니다. 워치 그리 깊은 뜻을 아십니까? 인종 법사는 해능을 자리로 청했습니다. 그리고 물었습니다. 보명을 여쭤도 되겠습니까? 저는 예능이라 합니다. 예능 혹시 황매산에서 법을 이은 그 예능이십니까? 부끄럽지만 그렇습니다. 조문은 이미 퍼져 있었습니다. 15년 전 무학문인 청년이 육조가 되었다는 이야기. 하지만 그가 어디 있는지 아무도 몰랐습니다. 인종 법사는 무릎을 꿇었습니다. 대사님 저희에게 법을 설해해 주십시오. 개능은 사양했습니다. 저는 아직 머리를 깎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무슨 문제가 되겠습니까? 부디 승복을 받으시고 법을 펼치십시오. 그날 개능은 정식으로 출가했습니다. 인종 법사가 지니 머리를 깎아주었습니다. 그리고 개를 받았습니다. 개능의 나이 39이었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젊어서 출가합니다. 하지만 예능은 이미 6조가 된 후에야 정식 승려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해 줍니까? 경식이 본질보다 앞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깨달음이지 외모나 의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출가 후 재능은 법성사에서 법문을 시작했습니다. 첫 설법에서 개능은 말했습니다. 선지식들이여. 우리는 몰래 스스로 성품이 청정합니다. 다만 이 마음을 쓰면 곧바로 부처를 이룹니다. 정중은 숨죽여 들었습니다. 우리는 자주 착각합니다. 옛나름은 멀리 있다고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깨달음은 바로 여기 당신의 마음에 있습니다. 한 사람이 물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깨닫지 못합니까? 번뇌와 망상이 자성을 가리기 때문입니다. 보름이 해를 가린 것 방법과 같습니다. 해는 여전히 빛나고 있지만 우리가 보지 못할 뿐입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 생각을 없애려 하지 마십시오. 생각에 끌려가지만 않으면 됩니다. 마음은 본래 텅 비어 있습니다. 좋다 나쁘다 옳다 그르다 하는 분별을 내려놓으십시오. 그러면 본성이 저절로 드러납니다. 예능의 법문은 단순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