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하 시인과 함께 간 해월 최시형이 숨어 지낸 이천시 앵산에 대한 추억,
김지하 시인과 함께 간 해월 최시형이 숨어 지낸 이천시 앵산에 대한 추억,
까마득하게 잊고 있다가 페북에서 김도언작가의 글을 보고 김지하 선생님의 기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잊어버릴 줄 모르는 이 마음이 슬픔이오”라는 말도 있지만 왜 그렇게 잊고 사는 것들이 많은지, 선생님이 돌아가신 뒤 문상을 갔다 와서 나는 다음과 같은 글을 썼었다.
동학농민혁명이 실패로 돌아간 뒤 해월 최시형은 자주 그 거처를 옮기며 세상의 이목을 피해 살았다. 충주에서 음성으로, 상주로 옮겼다가 1896년 2월에는 지금의 이천인 음죽으로 거처를 옮겼다. 거처를 계속 옮기면서도 각처의 두령들에게 포교를 멈추지 않았던 해월은 1897년 4월 5일에 경기도 이천시 설성면 수산리 앵산동 마을로 숨어들었다. 마을 앞에 작은 산 하나가 있는데 밖에서 보면 그 산으로 인해 마을이 안 보이고, 안에서는 밖에서 오는 모든 사람들을 살필 수 있는 전략적 요층지가 앵산이었다.
1997년이던가, 그 앵산을 같이 가기 위해 김지하 선생님과 함께 이천시의 한 허름한 모텔에서 하룻밤을 묵었었다.
술을 마시지 못하는 선생님과 나는 콜라를 마시고, 대여섯 명의 다른 일행들은 맥주를 마셨다.
그날 저녁 무슨 생각이 드셨는지, 숙연해진 김지하 선생님이 나에게 물었다.
“신형! 경원敬遠이라는 말을 아시오”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 왜? 사람들은 멀리서만 나를 바라보는지. 가까이 다가서는 사람은 없고,”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 말씀하시다가 끝내는 한참을 우시던 그 모습이 김지하 선생님의 이름만 들어도 생각이나 눈시울을 적실 때가 많은데, 다시는 그런 모습을 볼 수가 없다니,
이 앵산 마을에서 해월은 향아설위(向我設位)를 가르친다. 향아설위란 제사를 지낼 때 위패와 밥그릇을 벽 쪽에 갖다 놓았던 이제까지의 고금동서의 일관된 제사 양식인 향벽설위(向壁設位)를 바꾸어 제사 지내는 법이다. 그것은 살아 있는 사람 즉 자기 앞에 위패를 갖다 놓고 제사를 지내는 혁명적 제사를 일컫는다.
“물론 부모의 귀신이 자손에게 전하여 왔으며 선생님의 귀신이 제자들에게 내려왔을 것으로 믿는 것은 이치에 합당하다. 그러면 내 부모를 위하거나 선생님을 위하여 제사를 지낼 때, 그 위패를 반드시 그 제사를 지내는 나를 향해서 놓는 것이 가한 일이 아니냐.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또 누가 생각한다 하더라도 죽은 뒤에 귀신이 살아 있다는 것을 믿는다면, 그 귀신은 훗날 사람의 마음과 정신을 버리고 어디에 의지하고 어디에서 배회하겠는가? 그러므로 제사 지내는 나, 즉 상제 앞으로 위패나 메밥그릇을 돌려 갖다 놓는 것은, 바로 직접적으로 한울님과 사람이 하나라는 위치를 표시하는 것이며 천지만물이 내 몸에 갖추어져 있는 그 이치를 밝히는 것이다.”
그 밤을 지내고 해월 최시형은 손병희에게 향아설위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였다.
“내가 어젯밤에 앞으로 오만 년을 바꾸지 못할 법을 새로 만들었다.”
동학은 ‘향벽설위’를 ‘향아설위’로 물이 흔한 앵산에서 해월 최시형 선생이 처음 발표했다. 해월 선생은 형식에 치우친 겉치레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맑은 물 한 그릇으로 모든 의식을 치르기를 권고했다. 해월은 그곳에서 몇 개월을 보낸 뒤 1897년 7월에 원주로 옮겼다가 다시 홍천군 서면으로 거처를 옮겼다.
해월은 가는 곳마다 신도들에게 알기 쉬운 말로 설법을 했다.
“누가 나에게 어른이 아니며, 누가 나에게 스승이 아니라 하리오. 부인과 어린아이의 말이라도 배울 만한 것은 배우고 스승으로 모실 만한 것은 스승으로 모시노라.”
“사람을 대할 때에 언제나 어린아이와 같이 하라. 항상 꽃피는 듯이 얼굴을 가지면 가히 사람들을 융화하고 덕을 이루는데 들어가리라.”
“한 사람이 착해짐에 천하가 착해지고 한 사람이 화해짐에 한 집안이 화해지고 한나라가 화해짐에 천하가 같이 화해지리니 비가 몹시 내리듯 하는 것을 누가 능히 막으리오.”
수운도 가고, 해월도 가고, 그리고 김지하 시인도 가셨다. 살아 있는 우리들 역시 곧 뒤 따라 갈 것이다. 조금 빠르고 조금 늦을 뿐이다. 겸허하게, 살다가 그분들이 가신 곳으로 가서 모두가 환한 웃음 지으며 만날 수 있을까?
내세에서 모두 평안하소서, 상향
2022년 5월 12일
또 하나의 김지하 선생님과의 기억이
전라도 지역의 명산이자 우리나라의 명산인 모악산 개발을 막았던 일화다.
모악산 살리기를 시작하다.
옛 선인들은 산을 신령스런 존재로 여겼다. 옛 사람들은 산을 들어가는 것을 정복한다는 뜻의 등산登山이라고 하지 않고 잠시 들어갔다 나온다는 뜻으로 입산入山이라고 하였다. 산에 들어갈 때에도 산에 살고 있는 미물微物들이 행여 라도 놀랠세라 발걸음도 조심조심 들어갔고 대소변도 받아 가지고 나왔다고 한다.
그런데 현재는 자연에 대한 외경심은커녕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라는 미명아래 산이고 강이고, 인간 마음대로 개발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자행되고 있는 실정이다.
독일의 철학자인 니체는〈즐거운 지식〉에서 인간이 자연에 대해 품고 있는 뻔뻔함을 사실적으로 폭로하고 있다.
“존재 자체를 자기 저울대 위에 올려놓는 세계의 심판자 인간. 이런 태도가 얼마나 비정상적이고 어처구니없는가를 생각해 보라. 우리는 ‘인간과 세계’라는 말에 웃음을 터뜨린다. 마치 인간人間과 세계世界가 ‘과’라고 하는 귀여운 글자에 의해 나란히 서 있을 수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가. 그 작은 글자에는 인간의 뻔뻔함이 들어 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자기들이 뻔뻔하다는 것조차 모르면서 자연을 훼손하고 있는 것이다.
1995년 9월 초였다. 김제와 완주 두 지역에서 모악산 자락에 <관광단지 조성>을 목표로 대대적인 개발을 할 것이라는 보도를 접했다.
김제시에서는 김제개발공사로 하여금, 모악산 자락 2만 여 평의 땅에 162억 원을 들여 <모악랜드>와 각종 위락시설을 97년까지 건립하는 사업이었다. 완주군은 모악산 관광단지 조성사업이라는 명목 하에 32억을 들여 주차장 상가 및 기반시설을 한다는 것이었다.
모악산이 어느 산인가? 진표율사의 미륵사상이 움텄던 곳이고, 정여립의 대동사상이 펼쳐졌던 곳이다. 어디 그 뿐인가? 1894년에 일어났던 동학농민혁명의 진원지 중의 한 곳이며, 동학농민혁명이 실패로 돌아간 뒤에 증산 강일순이 모악산 대원사에서 깨달음을 얻고 김제시 금산면 청도리의 구릿골에서 화엄적 후천개벽사상을 펼쳤던 곳이 아니던가?
나는 곧 바로 전북 환경운동연합의 주용기 사무국장에게 전화를 걸어서 다른 단체들과 함께 연합하여 모악산을 살리는 운동을 전개하기로 했다.
‘지방자치단체들이 지방재정확보를 명분으로 무분별하게 개발할 경우 돌이킬 수 없는 환경재앙이 염려될 것이다.“는데 의견이 모아졌다.
“모악산은 도민의 휴식 처일뿐만 아니라 주민들의 삶에 영향을 끼친 역사성을 지닌 산이므로 자연과 조화를 이룬 최소한의 개발을 하라.”는 요지의 보도 자료를 만들어서 각 언론사에 배포했다. 지방지는 물론이거니와 동아일보와 한겨레신문에 모악산을 살리자는 보도가 나갔다.
그날 나는 타 지역에서 온 답사팀의 안내를 맡아 답사를 진행하고 집으로 돌아왔더니 그날 아침부터 김지하 선생님에게서 여러 차례 전화가 걸려왔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전화를 드렸더니, 모악산을 살리자는 보도가 나오기 전 날 밤 꿈속에서 시를 받았다고 했다. 그 시를 보내겠다는 것이었다.
아래의 시가 김지하 선생님이 새벽에 취한 듯한 몽롱함속에서 영감靈感으로 받은 강시의 전문이다.
“오늘 아침 강시降詩가 있었다.
객망오만리 客望五萬里
모악일초심 母岳一楚心
황토증산식 黃土甑山食
가멸칠산해 可滅七山海
이어 우리말로
“모악을 훼손하면
칠산 바다가 검게 물들 것,
이리裡里는 이것을 막고
계룡鷄龍은 뒤로 서라.“
나는 전주 모악산이
이 땅의 성산聖山 중의
하나임을 안다.
알면서 그 파괴를 묵과할 수 없다.
길은 모악으로 날 수 없다.
모악은 영태靈胎를 모셨다.
어머니 배를 가를 셈인가?
증산甑山 선생을 불망不忘하여
다만 삼가라.
<모악산 개발을 우려한다.>
이 시가 전북일보에 다시 보도 되었고, 그 힘을 받아 모악산을 사랑하는 운동이 전개 되어 결국 전주시장이 사표를 내는 지경에까지 이르면서 김제시와 완주군의 개발바람에 몰려 파괴되어가던 <모악산 살리기 운동>을 전개하여 모악산의 무분별한 개발을 막았다.
니체는〈인간적인 너무나도 인간적인〉에서 그러한 인간들에게 다음과 같이 경고하고 있다..
“인간(Mensch)이라는 말은 측량자(Messende)를 뜻한다.......인간은 자신의 잣대로 자연을 측량하면서 자신이 그 주인이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인간의 잣대가 자연에 대한 올바른 척도(尺度)인지는 누구도 알 수 없다. 어쩌면 자연은 인간이 자연의 이름을 부를 때 느끼는 것과는 달리 완전히 다른 어떤 것인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곧잘 말한다. 섬기는 삶을 살겠다고, 그러나 그런 사람을 찾기란 하늘의 별을 따는 것보다 더 힘들다. 섬긴다는 말은 잘하면서 오히려 섬김을 받으려만 하지 않는가? 특히 일부 인간들의 품성이 그렇다.
서학西學(기독교)에 맞서 동학東學을 창시한 최제우崔濟愚의 뒤를 이어 2대 교주가 된 해월 최시형이 어느 날 청주의 신도 집에 갔을 때 베 짜는 소리가 들렸다.
“지금 누가 베를 짜고 있는가?“ 하고 묻자 ”우리 며느리가 베를 짜고 있습니다.“ 말했다. 그 말을 들은 해월 선생이 말하기를, ”앞으로는 우리 며느리가 베를 짠다고 하지 말고 우리 한울님께서 베를 짠다고 하게“
그가 그렇게 말한 것은 ‘베 짜는 그 어려운 일을 당하고 있는 며느리를 일 속에서 어려움을 당하고 계신 한울님으로 알고 한울님 같이 섬기라’ 는 말이었다.
동학의 13자 주문이 <시천주조화정영세불망만사지侍天主造化定 永世不忘萬事知>이다. 그 열 석자 주문 중 제일 처음 시작되는 글자가 모실 시侍자이다.
섬긴다. 사람을 섬기고, 모든 살아 있는 사물을 섬기고 사랑한다는 것은 얼마나 아름답고 고귀한 일인가? 섬긴다는 말이 <성경>에도 나오지 않는가, “우리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고 섬기러 왔고,”
며느리가 한울님이라면 시어머니도 한울님이고 아들도 한울님이고 모든 사람이 다 한울님이고, 나도 한울님이다.
나무한 그루도 한울님이고 풀한 포기도 한울님이고 돌멩이 하나하나도 한울님이다. 모두가 공경하고 모두가 섬기는 세상에는 전쟁도 미움도 없을 것이다. 자연의 일부인 사람이 사람을 섬기듯 자연에 대해 외경畏敬을 가지고 자연을 섬기면 자연도 역시 사람을 섬기지 않겠는가?
섬겨라. 그리하면 세상에 평화와 자유가 올 것이다. 나는 그것을 모악산 살리기 운동을 펴면서 절실히 깨달았다.
1995년의 일이니 오래전 일이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하는 여러 가지 일, 그중에 공익이 있고, 사익이 있다.
그런 면에서 김지하 선생님은 무학이나 사상으로서의 자취도 많아 남겼지만
우리나라 역사에 지대한 공헌을 남긴 사람이 아닐까?
김지하 선생님, 사모님과 내세에서는 편안하게 잘 노십시오.
2026년 5월 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