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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각종 SNS, 핸드폰이 없던 시절에 어떻게 긴급한 상황을 전달했는지 궁금하다. 대표적으로 편지가 있었고, 필자가 어릴 때만 해도 아주 긴급한 일이 닥쳤을 때 ‘전보’라는 게 있었다. 어릴 적 시골이었던 외가에 있을 때 마을 이장님이 아무개씨 긴급 전화 왔으니 받으러 오라는 방송을 들었던 기억도 있다. 필자의 기억 속에 있는 연락 방법도 우리나라에서 100년 전이라면 생각지도 못할 획기적인 방법이었을 것이다.
고대 연락망 중 가장 먼저 머리에 떠오르는 것은 파발마이다. 공무로 급한 사람이 타던 역참에 있는 말인데, 말을 이용해 릴레이식으로 연락을 전달했다. 몽고는 30~50㎞ 거리마다 역참을 설치하고 말과 물자를 준비해 변방의 긴급한 소식을 제국의 수도에 단 며칠 만에 전달했다고 한다. 우리는 기차가 서는 곳을 역(驛)이라고 하는데, 한자에 말(馬)이 들어가는 것이나, 중국에서는 기차역을 역이라고 하지 않고, 짠(zhàn-站)이라고 하는 것도 역참(驛站)의 전통이 반영된 것이지 않을까. 말을 이용한 연락보다 더 신속한 방법이 있었으니 바로 불이나 연기로 연락하는 봉수이다.
봉수는 잘 알고 있듯이 밤에는 횃불, 낮에는 연기를 올려 변방 지역에서 발생하는 병란이나 사변을 중앙에 알리던 통신 제도를 말하는데 이렇게 불이나 연기를 올리는 시설물을 봉수대라 한다. 중국 주나라 유왕(?~기원전 771년) 때 황후 포사가 웃지 않아 거짓으로 봉화를 올려 찾아오는 제후들을 보고 웃게 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볼 때 아주 오래전부터 통신 수단으로 이용되었다. 우리나라는 삼국시대부터 봉화를 이용하였고 고려시대에 정례화 되었다고 한다. 봉수가 전 근대 사회에서 정보 통신체계로서 가장 발전된 형식을 갖춘 것은 조선시대에 이르러서였다. 조선시대 세종대왕 때 크게 정비되어 1895년까지 국가적 규모로 운영되었다.
여러 급한 상황이 많았겠지만, 봉수대에서 봉화를 올릴만한 국가적인 긴급한 상황은 역시 전란, 왜구의 침입이다. 울산이나 부산과 같이 남동해안 일대는 왜구의 침입이 빈번하였고, 결국은 임진왜란이라는 아픈 고통을 겪어야 했다. 울산의 봉수 설치 목적은 이렇게 잦았던 왜구의 침입을 한양까지 빨리 알리는 것이었다.
▲ 동구 화정천내 봉수대 발굴 당시 모습. (사진=이수홍 울산문화재연구원 연구실장) © 울산광역매일 |
봉수대는 해안가를 따라 설치된 연변봉수와 내륙을 관통하는 내지봉수로 나눌 수 있다. 현재 울산에는 모두 8기의 봉수대가 남아있다. 그중 연변봉수는 6기, 내지봉수는 2기이다. 연변봉수는 남쪽의 부산 기장 아이 봉수대로부터 연락받아 서생면 이길 봉수대-온산읍 하산 봉수대-남화동 가리 봉수대-동구 화정천내 봉수대-동구 주전봉수대-북구 우가산 유포봉수대로 연락이 이어진다. 내지봉수는 삼남읍 부로산봉수-두서면 소산 봉수로 연락이 이어진다. 관방(關防)이란 ‘변방의 방비를 위해 설치한 요새’를 말하는데, 그러고 보면 울산은 8곳의 봉수와 함께 언양읍성, 병영성, 울산학성 등 각종 관방유적이 있다. 울산은 역사의 아픔을 많이 간직한 곳이기도 한데, 옛날부터 중심지였기도 하고, 지정학적 위치 때문에 그러하기도 했다.
20세기 들어 경제가 급격히 성장함에 따라 전국토가 개발의 대상이 되었다. 아무리 중요한 유적이 있었던 곳이라도 경제성장이 우선이었기 때문에 발굴조사 후 유적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우리는 그 위에 지금 살고 있다. 그런데 봉수대는 산 정상부에 있기 때문에 개발에 의해 사라진 사례가 거의 없다. 또한 육안으로 드러나는 유적이기 때문에 봉수대가 있는 곳은 개발지역에서 제외된 사례도 많아서 다른 유적에 비해 비교적 그 자리에 보존되고 있는 편이다. 봉수대는 지상으로 돌출된 것이라 복원을 잘해 놓고 각종 성곽유적과 연계하면 역사탐방 답사코스일 뿐만 아니라 관광지로도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다. 봉수대는 연락을 주고 받는 측에서 잘 보이는 곳에 설치되어 지금 올라가도 전망이 탁월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선행되어야 할 점이 두 가지 있다. 첫째는, 우리 머릿속에 있는 봉수대의 모습이 대개 비슷하기 때문에 전국의 봉수대가 비슷한 모양으로 복원되어 있는데, 실제 봉수대마다 세부 형태는 다르다. 따라서 정확한 복원이 우선 이루어져야 한다. 정확한 복원을 위해서는 우선 봉수대에 대한 정밀한 발굴조사가 이루어져야 함은 물론이다. 울산의 8곳 봉수대 중 정밀발굴조사가 제대로 이루어진 곳은 동구의 화정천내 봉수대가 유일하다. 부로산봉수대는 봉수대 확인을 위한 시굴조사만 이루어지고 정밀발굴조사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정비 복원을 위해서 봉수대에 대한 정밀한 학술조사가 선행되어야 한다. 이후 복원은 발굴성과와 봉수대 전문가의 치밀한 고증을 바탕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잘못된 복원사례의 대표적인 케이스가 언양읍성 북동쪽 성벽이다. 언양읍성은 외벽은 돌을 가지런히 쌓고 내벽은 돌 위에 흙을 경사지게 쌓은 형태이다. 내탁부라고 하는데 이렇게 성 내부의 벽을 흙으로 경사지게 쌓아야 성을 지키는 병사들이 빨리 성벽에 오를 수 있다. 그런데 언양읍성 북동쪽 모서리 부분은 내탁부가 없게 복원되어 마치 부잣집 담벼락 같은 모양이다. 다행히 언양읍성 북벽의 서쪽 부분과 남벽 영화루 부분은 발굴성과가 제대로 반영되어 내탁부가 그대로 복원되어 있다. 울산에 있는 봉수대에 대해 천천히 체계적인 계획하에 학술조사가 선행되고 복원이 가능한 곳은 제대로 복원하여 관광지로 개발되기를 기대한다.
둘째는, 봉수대는 무엇보다 조망이 으뜸인데 전망이 확 트이게 주변을 정비할 필요가 있다. 지금 봉수대에 올라가면 나무가 앞을 가려 전망이 가려지는 곳이 대부분이다. 봉수대를 가리는 나무에 대한 벌목을 얘기하면 산림청, 환경청 등 관련기관 허가를 득하여야 할 곳이 많다고 한다. 이런 부분을 해결해서 서로 연락을 주고받는 양쪽 봉수대가 시원하게 보이는 것이 봉수 본래의 목적에 부합하는 것이다.
울산의 봉수대가 역사관광지로서 시민이 편리하게 찾고 전망 좋은 관광지로 조성되기를 기대한다.